28. 어느덧 다음 단계를 바라봐야 할 때
더웠던 날들이 지나고 두꺼운 옷을 꺼내 입을 때가 됐다. 돌을 갓 지났던 아이의 두 해째 삶도 반을 훌쩍 넘기고 두 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내는 매트 하나 펼 공간에서 자고 일어나 아이와 재미있게 놀고, 심지어 다른 병상의 아이까지 초대할 정도로 소형 면적에 적응했다. 나도 아빠와 엄마 역할 동시에 해내기에 익숙해져 코피를 흘리지 않게 됐다. 가족 전체의 1주일 루틴도 점점 확고해졌고, 잡음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모든 전쟁사가 그렇듯, 모처럼 평화가 찾아온다는 건, 커다란 변수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에겐 ‘퇴원’이 그것이었다.
숱하게 말했지만, 장애 아동에 비해 의료 시설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한 환자가 병원에 입원할 수 있는 기간에는 한계가 있다. 예외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그 예외에 포함되지 않았다. 입원하고서 3개월 후 한 차례 연장을 거쳐 6개월을 채웠기 때문에 그 부족한 의료 시설을 충분히 누리기도 했고, 이제 슬슬 다른 병원을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아내는 미리부터 여러 병원에 예약을 걸어두고서 각 병원의 장단점을 조사하고 있었다.
아내가 미리부터 움직였던 건 병원 내 치료사 선생님들로부터 ‘옮기셔야 할 것 같다’는 뉘앙스의 피드백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막내를 너무나 귀여워했던 선생님들, 나중에 아이가 퇴원할 때 개인적으로 선물까지 사다 주셨을 정도로 애착을 강하게 형성하셨던 분들이 왜 떠나라는 제안을 하셨을까? 아이가 선생님들과 치료실 환경에 적응해 버렸기 때문이다.
적응했다는 건, 긴장감이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아이는 슬슬 불량한 수업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시키는 거 하지 않기, 대놓고 하품하다 잠들기, 수행 과제 거부 및 하고 싶은 것만 하기 등 ‘꾀를 부린다’는 증언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선생님들 개인적으로는 이 귀여운 아이가 커가는 걸 직접 보고 싶지만, 아이를 위해서 다른 환경을 제공하는 게 좋겠다는 진심 어린 충고들이었다. 물론 그런 꾀부리기조차 사랑스러워하셨지만.
우리가 있던 병원은 전국 재활 어린이 병원 중 가장 무난한 평판을 가지고 있던 곳이었다. 근처에 조금 더 오래된, 비슷한 계열의 병원이 있었는데, 오래되다 보니 시설이 매우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는 대신 베테랑 선생님들이 많아 수업 효과가 확실하다는 곳이었다. 아내는 여기를 가장 가고 싶어 했고, 나는 내키지 않았다. 지금 있는 곳보다 환자와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 곳이 더 좁았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 아이들과 부모가 놀 만한 놀이 공간조차 없었다. 심지어 세탁 시설도 없어 보호자들은 수업 시간에 빨래를 챙겨 외부 세탁방에 다녀와야 했다. 주차 공간도 당연히 없었다. 선생님이 좋으면 뭐 하나, 아내가 죽어 나올 것만 같은데,라는 거부감이 확 들었다.
아내와 다음 행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는 반대 의사를 적극 표현했다. 병원에 거기밖에 없냐고 물었다. 아내는 자기가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을 때 열악하지만 최고라고 소문난(장애아 커뮤니티에서 이 병원 선생님들을 어벤저스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병원에 입원해 아이를 치료하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 아내 몸은 이미 많이 상한 상태였다. 입술이 늘 부르트거나 터져 있었다. 누구 한 사람 주춤하기만 해도 전체가 무너질 것만 같았던 우리의 팽팽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모두가 건강해야 했다. 지금처럼 서로의 건강이 필요한 때가 우리 가족에 없었다.
평소 아내 의견에 잘 반대하지 않는 내가 계속 우려를 표하니 아내는 또 다른 후보지를 추렸다. 우리 집 기준 서울과 정 반대 방향에 있는 도시의 병원이었다. 거기도 나름 입소문이 나긴 했는데, 최고로 손꼽히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비교적 신설에 가까운 곳이라, 시설도 깨끗하니 쾌적할 것으로 예상됐고, 보호자들 사이에서도 다른 무엇보다 그게 최고의 장점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여러 병원들이 물망에 올랐다. 대부분 서울에 있는 곳들이었고, 언제 입원이 가능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여러 병원들이 있었지만 아내는 그 ‘어벤저스’ 병원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퇴원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고, 우리가 어느 병원 가고 싶다고 정한다 한들 우리 마음대로 일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먼저 불러주는 곳에 가야 하는 게 우리 상황이었다. 여러 곳에 예약을 해두고, 우리는 되는 곳부터 가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나는 나의 골방으로 들어가 제발 그 열악한 곳은 피하게 해달라고 아내 몰래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무조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는 조금씩 걸음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손만 잡아주면 꽤 긴 거리도 걸을 수 있게 됐고, 벽을 잡고서 혼자서 주춤거리며 일어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번 벌러덩 넘어지곤 했었는데, 아이는 일어서서 걷는 게 재미있었는지 개의치 않고 일어나고 또 일어났다. 맷집만큼은 어디서도 뒤지지 않았다. 아마 아이가 가진 희귀병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통각이 둔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는 자극에 반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소아과에서도 주사 잘 맞는 아이로 통했다. 우리는 아이가 입원하기 전에, ‘도대체 언제 울음을 터트릴 것인가’ 보려고 아이 팔뚝을 꼬집고 깨물기도 해 봤는데, 결국 우리가 먼저 포기했었다. 어른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도록 아이는 무덤덤했다. 아이의 감각을 활성화시키는 게 우리의 커다란 숙제였지만, 걸음을 배우는 단계에서는 그 약점이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게 역설적이었다.
맷집 좋았던 막내는 일단 걸음이라는 것을 맛보자 거침이 없었다. 어디든 가려했고, 성미 급하게 움직이려 했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녀석이, 오른발과 왼발을 리드미컬하게 섞어 내딛는 감각도 모르는 녀석이, 자기 손을 붙들고 있는 사람(대부분 아내였다)을 호령했다. 본인 스스로도 넘어지는 걸 아무렇지 않아 하니, 그 누구도 그 아이를 막을 수 없었다. 아내는 구부정하게 아이 손을 붙잡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병동을 뱅뱅 돌고, 심지어 병원 밖 보도블록도 걸어 다녔다. 그러다 허리와 골반에 무리가 가고 절뚝이기 시작했다. 외박 주간에 집에 와서는 주말 내내 누워만 있었다.
“몸이 이런데 무슨 그 열악한 병원이냐?” 내가 힐난했다. “거긴 절대 안 돼. 아무리 선생님이 좋아도 안 돼.” 아내는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여러 생각이 드는 듯했다. 조금씩 설득이 되는 것도 같았다. 첫 번째 병원에서의 일정이 다 끝나갈 무렵, 아내 몸이 이렇게 고장 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종종 보호자 교대를 해 병원에서 막내와 단 둘이 주말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내는 첫째와 둘째에게 보냈다. 교대하러 집을 나오기 전 첫째와 둘째에게도 주입식 교육을 해두었다. 주말 동안 엄마한테서 다음 병원 이야기가 나오면 절대로 엄마가 원하는 병원은 안 된다고 하라고. 아이들까지 나서면 아내 마음도 움직일까 싶었다.
29. 아이가 우리를 치료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어떤 치료를 해야 하나, 늘 그렇지만 쉬운 고민은 없었다. 부모인 우리가 하는 선택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의 미래를 크게 좌지우지할 것만 같은 압박 때문에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인생이 태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들(b와 d 사이의 c)이라고 하지만, 장애 등록까지 완료된 아이를 두고 하는 선택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혹시 다른 병원에서 이런저런 치료사를 아이가 만났다면 더 멀쩡해지지 않았을까. 혹시 다른 치료 과정을 선택했다면, 지금보다 아이가 더 나아질 수 있던 것 아닐까. 미래의 우리가 아이를 두고 할 후회들이 벌써부터 넘쳐났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한다 한들 우리의 앎과 지혜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무엇보다, 맞는 결정을 하건 틀린 결정을 하건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의사와 치료 전문가들조차 하나 같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고만 답을 해주는데,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뭘 안다고 딱 부러지게 결정할까. 고민하면 할수록 부모로서 우리는 작고 초라했다. 아내는 이런 선택의 난관들 앞에서 기도라는 장대를 짚고 날아올랐고, 나는 그런 아내의 발목을 붙들고 공짜로 허들을 넘었다.
입원 6개월 차를 바라보는 시기에 되돌아보니 순전히 기도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게 확실했다. 가장 큰 증거는, 우리를 번뇌케 했던 그 수많은 고민들이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굵직한 결정 사항들이 기억나긴 했지만, 결론(무엇을 선택했는가)만 떠오르지 우리가 어떤 근거와 이유를 가지고 그 선택에 도달했는지는 새까맣게 잊힌 지 오래였다. 상황에 떠밀려 한 결정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슨 의미인가? 아이를 양육한다는 우리의 의도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적잖은 시간들이 지나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아이는 우리가 소원했던 대로 직립보행의 코앞에 와 있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 우리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가 이 아이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보너스도 있었다. 아이와의 소통이 점점 원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가 다르다는 걸 처음 발견했을 당시 자폐가 좋은가, 지능 문제가 좋은가를 두고 아내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올 수도 있었지만, 아내와 나는 자는 아이를 두고 침대에 누워 가끔씩 둘 중 하나만 오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나는 자폐 쪽이었고 아내는 저능 쪽이었다. 나는 지능만 똑바로 살아 있다면, 자폐가 언젠가 고쳐질 때를 희망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고, 아내는 아이가 자기를 엄마라고 부르고, 눈을 맞춰 이야기를 나누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기도를 들으시던 그분은, 아내의 이런 소원을 그냥 두지 않으셨다.
물론 아이의 말문이 갑자기 트인 건 아니다. 아이의 언어란, 매우 원시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됐다. 바로 손가락질과 고개 젓기였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밥을 먹다가 식탁 저쪽에 놓여 있는 물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어, 아’하는 외마디 감탄사만 나왔지만, 누구라도 그 아이가 물을 먹고 싶다는 걸 알아챌 수 있기에 충분한 몸짓이었다. 그걸 모르고 물병 근처에 있던 다른 그릇이나 수저 등 엉뚱한 것을 가져다주면 고개를 젓기도 했다. 정상 아이들이라면 진작에 자연스럽게 익힐 것들이었지만, 우리로서는 바라기 힘든 것이었다.
바라기 힘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의 그런 놀라운 변화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됐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기고, 물건을 건드려 상호작용하고, 걷는 건 우리가 항상 바라고 기대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아이가 그와 비슷한 움직임을 살짝이라도 보이면 금세 알아채고 아낌없이 기뻐했지만, 아이가 자기의 의사를 표현한다는 건 너무나 먼 훗날의 일이라고만 여겼기에 큰 기대가 없었고, 따라서 그 순간을 포착하지 못했다. 어느 날 보니 아이가 손가락을 허공에 찌르고 있었던 것뿐이다. 얼마나 놀랍던지. 얼마나 예쁘고 대견하던지.
기대란 그런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믿게 한다. 그리고 온전히 모양을 갖추지 않은, 작은 씨앗 단계의 시초만 보더라도 아름드리나무를 본 것처럼 만족하게 한다. 기쁨을 힘껏 누릴 수 있게 한다. 아이가 살짝 몸을 일으킨 것만으로 우리에겐 이미 걸음마를 뗀 것이나 다름없었던 건, 우리의 기대가 거기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첫 손가락질 요구를 놓친 건 거기에 대한 기대가 뒤로 미뤄졌기 때문이다. 뼈아픈 실책이었지만, 대신 우리는 아이를 기대해야 한다는 ‘부모 수업’을 수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의 모든 성장을 기대하는 건, 아이의 모든 발전상을 놓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니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이 선택이 혹여 아이의 성장을 막을까.
저 선택이 혹여 아이의 성공을 방해할까.
그러고 보니 이 고민들은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든 아니든 모든 부모가 마음속 깊이 품고, 365일 내내 부화시키는 것들이었다. 그 끙끙 거림들이 무엇을 낳는가? 달콤한 기대 충족과 보람? 대부분은 후회다. 아이가 잘 크든 못 크든, 입맛 쓴 후회는 어느 구석에나 존재를 드러낸다. 당연하다. ‘이 선택이 혹여 아이의 성장을 막을까. 저 선택이 혹여 아이의 성공을 방해할까.’ 문구 자체가 후회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니 말이다. 고민의 탈을 썼지만 사실은 후회인 것으로 아이를 키우니, 후회라는 열매가 맺힐 수밖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만 한 만고의 진리가 없다.
우리는 아이의 다음 단계를 놓고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기대의 폭을 넓히기로 결정했다. 이 병원이 좋고, 저 병원이 용하대? 지금은 이런저런 재활 코스에 더 집중해야 한대? 미로 안에서 단 하나의 탈출로를 찾아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이런 소문과 조언들 앞에서 걸음 하나하나가 덜덜 떨렸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의 폭을 넓히기로 한 우리는, 언젠가 차례가 오면 우리 아이가 다 해야 할 것들, 우리 아이를 더 풍성하게 키워줄 것들로 기대하고 있다.
이 선택은 지금 아이의 성장에 꼭 필요한 거래, 야호!
저 선택은 나중에라도 아이의 성장에 꼭 필요한 거래, 야호!
아직 할 게 많으니 얼마나 좋아. 성장할 방향이 많으니 얼마나 기대돼!
아이가 손가락질할 때마다 우리는 부지런히 몸을 일으켜 물이고 장난감이고 과자를 가져다주며 다음을 기대할 수 있었다. 또 손가락질해봐, 라며 일부러 물컵을 더 멀리 숨기고, 또 고개를 저어봐, 라며 일부러 엉뚱한 물건을 가져다주었다. 아이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싱글벙글이었다. 후회 대신 자리 잡은 기대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아이가 콕 찔러 준 건 허공이 아니라, 부모의 고질병인 ‘후회’였는지도 모르겠다.
30. 난 기억할 것이다
퇴원일이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집을 나섰다. 짐을 실어야 해서 첫째와 둘째는 집에 남겼다. BGM은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군대 있을 때 휴가일도 이것보다 더 기다리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난 6개월 수없이 오갔던 길인데, 그날따라 유독 멀었다. 그 거리를 종이접기 하듯 말끔히 접어버리는 상상을 물리학적으로 하면서 달렸다. 화물차들이 고속도로서 통곡의 벽을 세우면 갓길로 내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빈 차 안에서 나 혼자 벌렁벌렁 흥분해 있었다. 큰 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아내는 6개월 동안 사용해 왔던 세간살이들을 박스에 포장하고 있었다. 입원하기 전엔 몰랐는데, 아내는 맥시멀리스트였다. 그 좁은 병실 공간에, 어쩌면 그렇게 많은 짐들을 욱여넣고 살았는지 병원에 갈 때마다 신기했는데, 그걸 다 꺼내놓고 보니 더 신기했다. 좁은 곳에 착착 맞게 들어갈 수납용 도구들이 시중에 이미 있다는 것도, 그것을 꼭 당근에서 찾아내 무료 나눔으로 받아오는 아내도, 나로서는 문화 충격이었다. 죽었다 깨어난다 한들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지난 6개월의 자취들을 상자에 넣고 봉하면서, 다시 오고 싶지 않은 병원 공간을 둘러봤다. 다시 보고 싶은 꼬마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난 열심히 테이프를 뜯어 상자들을 여몄다.
나와 아내가 짐을 싸는 동안 막내는 병원 내 놀이터에서 마지막 이쁨을 받고 있었다. 틈이 나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자기 아이를 수업에 보내고 시간이 남는 엄마들이 돌아가면서 막내와 놀고 있었다. 가족이 왕고라는 건 참 편리한 거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아직 걷지 못하지만 활달해질 대로 활달해진 막내는 놀이터를 빠져나와 병원 복도를 네 발로 기면서 소리를 꺅꺅 지르고 있었고, 그 뒤를 사람들이 엉거주춤 줄을 지어 따르고 있었다. 가족이 슈퍼스타라는 건 참 편안한 거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처음 해보는 장기 재활 입원, 우리는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 최초의 목표였던 걷기를 이뤄낸 것이 가장 컸다. 물론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다. 손을 잡고 일으켜주면 겨우 서너 걸음 앞으로 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처음 입원했을 때 배밀이만 조금 할 줄 알던 녀석이 6개월 만에 이 정도 발전한 거면, 날개가 돋아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맨 땅에서 혼자서 일어나기와 스스로 걷는 거리 늘리기만 달성하면 된다. 정말 많이 왔다. 정말 많이 컸다.
심지어 인지도 많이 좋아졌다. 장난감을 봐도, 사람이 아무리 옆에서 이름을 불러도 천장만 보던 녀석이었다. 이제는 장난감만 보면 쏜살같이 기어간다. 밥을 먹다가도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만 보면 손가락질을 하며 아는 척을 한다. 아직 자기 이름을 부를 때 명확히 이해하고 쳐다보는 느낌은 없지만, 입원 전보다는 높은 확률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심지어 짜증도 낼 줄 알게 됐으며, 엘리베이터 버튼도 손가락 하나로 꾹 누른다. 기적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다음 도착지가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이 6개월 간의 기적을 등에 업고 있어 우리는 막막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이 전류처럼 우리 사이를 흘렀다. 그 많은 수업들을 버텨준 아이가 새삼 뭉클했다. 난 열심히 테이프를 뜯어 상자들을 여몄다.
맥시멀리스트의 짐답게 바닥 공간이 부족해졌다. 일단 짐 싸던 것을 멈추고, 다 포장된 것부터 차에 싣기로 했다. 간호사실에서 대형 카트를 빌려주어 아래층으로 오르내리는 횟수를 줄일 수 있었다. 몇 번 상자들을 내리고 올라오니, 아내는 본격적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병실의 어느 엄마가 언제 수업을 마치고 올라오는지 다 외우고 있는 듯,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맞잡고, 연락처를 확인했다. 그렇게 흐지부지, 짐 싸는 건 나만의 몫이 되어 있었다. 왕고의 품격이 몸에 밴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것만은 여기서 버리고 가고 싶었다.
이 병원에서는 작별 인사를 “다신 보지 말자”라고 한다. 이제 이런 병원 시설을 이용하지 않을 정도로 쾌유하라는 의미다. 노부부가 서로에게 ‘먼저 죽으세요’라고 덕담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평생 함께했던 이가 떠난 빈자리를 내가 남아서 감당하겠다는 뜻이 숨어 있는 말이다. 짐들이 슬슬 없어지고 바닥 공간이 드러나면서, 같은 층의 보호자 엄마들도, 막내를 귀여워했던 간호사 선생님들과 치료사분들도, 심지어 청소를 담당하시던 분들까지도, 아내와 막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러 들리셨다. “다신 (여기서) 보지 말자”는 악담 같은 축복이 작은 병실 안에서 수없이 이어졌다. 아내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난 열심히 테이프를 뜯어 상자들을 여몄다.
여기 이 꼬맹이들과 부모들도,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한국의 여러 병원들을 각자의 속도와 순서대로 돌아다닐 것이다. 서로의 경로가 겹칠 수도 있고, 영원히 엇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절뚝이고 어눌해도, 나중에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말 못 해도 어느 날 어디선가 우연히 마주친다면 날 보고 ‘삼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날 기억 못 한다면, 내 옆에 있을 막내의 이름을 부르고, 막내도 화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반듯이 서서 서로를 보고 웃다가, 서로의 발전에 놀라 말문이 막히는 미래의 장면들을 상자와 함께 차곡차곡 쌓았다. 그 상상들을 카트에 싣고 오르내리는 길에 지난 6개월 간 오며 가며 보던 꼬마들을 스쳐 지나갔다.
난 너희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름과 얼굴을 똑똑히 연결해 외우지 못하더라도, 너희의 아픔과 불편함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난 너희들을 기억할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근육을 움직일 때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던 너희의 작은 표정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 얼굴을 쓰다듬던 네 땀들도 기억할 것이다. 육체의 한계에 부딪혀 울기 시작하던 그 울음을, 그러다가 엄마 아빠 껴안고 세상 걱정 없는 얼굴로 웃던 그 웃음을, 난 기억할 것이다. 어린이가 와글와글한 여느 공간들과 조금 다른 듯 비슷했던 이 공간을, 너희가 채웠기에 존재할 수 있던 이 공간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우리의 일상을 난 기억할 것이다.
그래, 꼬맹이들아. 다신 여기서 보지 말자. 다신 어느 병원에서도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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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일단락했습니다.
뭐 좋은 얘기라고 혼자 주절거린 걸, 그 동안 댓글과 추천으로 응원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음 풀어둘 곳이 없어 여기 적기 시작한 건데.. 생각보다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태까지 쓴 게 '걷기'로 가는 여정이었다면... 지금 저희는 '말문'으로 가는 여정 중에 있고...
어쩌면 훗날 밝힐 수도 있겠지만 그 여정이 적잖이 정신 없어서 원고가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잠깐 한숨 돌릴 때가 된다면 기록을 이어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PGR 떠나는 것도 아닌데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