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은 몰라도 애니메이션은 잘 안 보는 편인데 왠지 모르게 끌려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오? 초반부의 몰입감이 장난이 아닙니다. 후반부 부터는 조금 딸리긴 하는데 그래도 재미있게 봤네요.
요즘이라면 꽤나 비판받을 가능성이 농후한 오리엔탈리즘+자포네스크를 정면돌파한 작품입니다. 킬빌을 애니메이션으로 바꾸고 거기에 쌈마이한 B급 정서를 빼고 애니메이션에서만 표현이 가능한 판타지적이면서도 미려한 연출로 채웠습니다. 스토리 면에서는 ‘요짐보’같은 걸작 사무라이 영화들에 왕좌의 게임 같은 권력쟁탈물을 적절히 버무려 놓은 것 같아요. 뭔가 ‘아후 또 짜장면이야? 지겨워 그래도 먹긴 먹어야지. 근데 또 맛있네. 이 집 잘하네.‘ 이런 기분이에요. 새롭거나 특별하진 않지만 맛있습니다. 꽤 잔인하고 선정적인 장면도 있는데, 아무래도 극화적인 연출이고 색 자체가 쨍한 채도를 사용하다 보니 거부감은 좀 덜합니다.
다만 스토리 상의 개연성이 좀 약합니다. 주인공들이 분명 동기는 있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주인공들의 과거나 내면심리 묘사에 좀 더 공을 들여야 시청자들이 납득이 좀 더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가야 할 지도 숙제입니다. 분명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지만, 그저 잘 만들었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요즘 ott 시장은 녹록치 않습니다. 이 작품만의 뭔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어디서 하나씩 다 따온 것 같은 설정과 스토리는 이 작품이 고유한 주제의식이나 뚜렷한 스토리가 없이, 참고한 작품, 레퍼런스에 의해 계속 휘둘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가장 큰 약점입니다. 보면서 계속 원전이 된 다른 작품들이 생각나요. 좀 더 냉정히 이야기하자면, 자기 맛이 하나도 없습니다. 재미있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히 좋은 평가를 내릴 수가 없는 이유에요.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은 사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스틸컷을 보고 관심을 가져서 읽게 된 소설이에요. 이 감독 영화는 재밌게 본 적이 없는데(개인적으로는 은유의 사용이 지나치다고 봐요) 스틸컷 미술들이 밝고 화사한데 비해 시놉시스는 음울하고 변태적인게 제 스타일이더군요.
원작은 영화의 판타지틱하고 현대적인 연출과는 동떨어진, 빅토리아 시대 특유의 음울하고 딱딱한 분위기가 짙습니다. 프랑켄슈타인 같은 그 시대 괴기소설을 오마주한 부분도 있구요. 이 잿빛 캔버스를 역동적인 극채색으로 물들이는 것은 주인공이자 이 작품의 주체라고 볼 수 있는 벨라 백스터입니다. 그야말로 아이같은 천진함과 에너지로 이 인물은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을 흔듭니다. 벨라의 모험(?)이 작품의 중반부를 차지하고 상당히 몰입감 있게 읽히는 부분입니다. 어린아이의 감각으로 세상을 훑어가는 묘사는 매혹적입니다. 후반부로 가면 서서히 그녀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선의 외에 다른 것도 학습하기 시작합니다. 결말은, 어떤 것이 진짜일까요? 벨라, 아니면 빅토리아? 읽으신 분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은데 좀 큰 스포라서 여기에 쓰기가 꺼려지네요.
작품 외적으로는 제가 영국과 스코틀랜드 역사에 대해 좀 알았더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겁니다. 일단 배경이 글래스고인데다가 주제의식과도 뭔가 연관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걸 읽을 수 있는 눈이 제게 없다는 것이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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