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의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습니다. 단순히 상대 민병대들간 전투가 벌어진것만이 아닌 마론파 팔랑헤 당원 4명이 사망하자 팔랑헤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신분증을 확인하며 팔레스타인 인이나 무슬림들을 강제로 끌고가 학살한 검은 토요일 사건, 해를 넘겨 76년 1월 18일 마론파에 의해 무슬림 천여명 이상이 학살당한 카란티나 학살, 이틀 후에 PLO와 알 사이카가 카란티나 학살을 보복하겠다며 다무르 마을로 진입해 민병대원 외에도 여성, 노인, 어린이 끌어낸 뒤에 여성들은 무참히 윤간하고 전부 죽이고 묘지의 시체와 같이 길거리에 늘어놓고 아기들의 시신도 전시하는 다무르 학살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PLO는 다무르 마을에 팔레스타인 인들을 이주시키죠.
마론파와 이슬람계간 분쟁은 극렬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아니 오히려 상대 무장세력에 대한 전투보다는 민간인 학살에 골몰하게 됩니다. 이를 말려야할 레바논의 치안조직과 군대는 도리어 종교로 갈려 각 민병대에 가세하면서 레바논 자력으로는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76년 3월, 술레이만 프랑지 레바논 대통령이 시리아의 공식적인 개입을 요청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리아는 이미 76년 1월 22일, 마론파-이슬람 간 휴전을 중개한다고 천명하는 동시에 은근히 PLO를 장악하기 위해 시리아 군을 PLO 민병대로 가장해 레바논에 이동시켜 개입하게 됩니다.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 아사드는 레바논의 정치에도 간섭하기로 결정하고 5월 8일 벌어진 레바논 대선에서 엘리아스 사르키스를 대통령으로 뽑히게끔 손을 씁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스라엘에 협상단을 몰래 파견해 협상을 하는데 베이루트 이남에 여단규모 이상의 시리아 부대를 주둔시키지 않으며 레바논 내에는 이스라엘을 사정권에 넣는 장거리 포, 미사일, 로켓탄을 배치하지 않고 군용기는 레바논 내에 배치하지 않는다는 레드라인 협정을 체결합니다. 추가로 미국에도 사절을 파견해 레바논에 군대를 파견하는것에 대해 미국이 간섭하지 말라는 요청합니다. 그리고 6월 1일 1만2천명의 시리아 정규군이 레바논에 진입 레바논 내 군사작전을 시작하는데 여기서 군사작전의 대상, 즉 레바논 내에서의 시리아군의 목표는 마론파가 아닌 PLO를 비롯한 반 마론파 무장세력들이었습니다. 이는 하페즈 알 아사드를 반대하는 수니파 이슬람인들과 반바트당,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의 주 은신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역시 마론파에게 무기와 장비 지원 및 군사 고문단 파견을 통해 PLO를 족치는데 도움을 줍니다. 실제로 8월 12일 시리아군과 마론파 군은 동베이루트의 델 알지타르 난민캠프를 방어하던 팔레스타인 민병대를 제압했고 여기에 마론파 군대가 진입해 15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합니다. 이에 피해를 입은 PLO는 야이시야 전투를 벌여 이스라엘 군을 공격하지만 이스라엘 군의 포병에게 포탄 24발을 얻어맞고 도망갔고 결국 야간 기습, 그것도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방법만을 쓰게 되죠.
델 알지타르 전투로 인해 시리아는 아랍 연맹에게 온갖 비난을 두들겨 맞습니다. 결국 10월 리야드에서 열린 아랍연맹 정상회담에서 레바논에 주둔하는 병력을 4만명으로 제한당하고 다른 아랍 국가들 역시 아랍연맹군을 레바논으로 보내 평화유지군 임무를 수행하게하는 리야드 협정을 맺습니다. 하지만 리야드 협정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아랍연맹군에 참여한 다른 국가들은 빠르게 의욕을 상실해 철수했고 결국 이 아랍연맹군은 시리아군으로만 구성되었으며 시리아의 군사행동에 대한 방패막이로만 이용되었으며 시리아와 이스라엘, 마론파 군에 의해 중부 레바논에서 쫓겨났던 PLO가 이 지역으로 돌아오며 평화는 그냥 갖다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뭐 이후로 레바논 땅에선 협력하던 이스라엘, 시리아, 마론파가 또 분열해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전투를 벌이고, 마론파와 시리아가 전투를 벌이는 등 레바논은 땅에 흘린 피가 마르기도, 땅에 흡수되기도 전에 피가 흐르는 땅이 됩니다.
통설로 레바논 내전은 1990년에 끝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2005년 2월 14일 라픽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가 자폭트럭 테러로 암살되는 라픽 하리리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삼나무 혁명을 통해 시리아 군이 철수하는 삼나무 혁명으로 레바논 내전이 끝났다는쪽이 더 맞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혼란스럽고 유혈이 난무하는 와중 엄청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1982년 6월 이스라엘군은 갈릴리 평화라는 작전명으로 PLO와 시리아군에 대한 대대적 공격작전을 폅니다. 당시 PLO만 하더라도 정규훈련 병력 4500명을 포함한 6천여명의 병력과 T-34/85 전차 60대, T-54/55 여대, 야포 90문 카츄사 다연장 로켓 80문, 중박격포 200문, 대공 화기와 대전차 미사일로 무장해 있었습니다. 시리아 역시 병력 3만과 전차 712대를 베카 게곡과 베이루트에 주둔시킨 상황이었습니다.
6월6일 이스라엘은 주영 이스라엘 대사 테러를 명목으로 이스라엘 군 7만여명을 3 방향으로 나눠 레바논 내로 진격합니다. 이미 오합지졸 아랍연합군을 몇번에 걸쳐 격파해낸 이스라엘 군 상대로 아무리 중장비를 갖췄다고는 하나 민병대에 불과하고 병력 숫자도, 장비 성능도 뒤떨어진 PLO는 순식간에 격파 수준이 아니라 파괴됩니다. 시리아 군 역시 대전차 미사일 발사차량과 항공기들을 동원해 이스라엘 군을 막아내려 하지만 6월 9일에 벌어진 베카 계곡 항공전에서 시리아가 대패하고 11일 술탄 야쿠브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과 시리아군간 기갑전에서도 시리아가 패배하며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휴전에 합의하고 PLO는 베이루트에서 시가전을 준비합니다. 이스라엘 군은 이미 시돈 시가전에서 많은 피해를 냈고 국제사회의 비난도 있었기 때문에 베이루트를 포위한뒤에 PLO에게 항복을 권고합니다.
PLO는 이스라엘 항공폭격에 맞서 민간인들을 지붕에 내모는 방법으로 항공폭격에 맞대응 했고, 12살 소년병들에게 RPG를 쥐어주고 이스라엘군 전차 앞으로 내모는 수단까지 쓰며 저항합니다. PLO와 아라파트가 "아랍 형제들"이 도와줄거라 믿고 결사항전을 주장했지만 "아랍 형제들"은 이제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것은 승산도 없고 힘들기만 해서 PLO의 도움 호소를 뉘집 개가 짖나 식으로 대응하기로 합니다. 레바논 시아파는 이스라엘의 공격만을 불러오는 PLO를 버리기로 결정하고 그들이 죽던 말던 내버려뒀고, 아랍 국가들은 군사적 압력대신 예전부터 했던 말뿐인 비난 성명만 발표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몰린 PLO는 레바논 이슬람 세력에게까지 배신당합니다. "명예롭게" 후퇴해달라면서요. 7월3일 PLO와 아라파트는 미국 정부의 레바논 특사 필립 하비브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아라파트와 PLO 수뇌부들은 레바논을 떠나겠으니 자신들에게 도움을 달라고요. 결국 8월 둘째주 부터 PLO와 그 게릴라들은 평화유지군의 도움을 받으며 철군하고 튀니지로 이동합니다.
이제 레바논 대부분을 장악한 이스라엘은 마론파 팔랑헤당을 앞세워 친 이스라엘 정부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8월 28일 팔랑헤당의 창립자인 피에르 제마엘의 아들인 바시르 제마엘이 단독후보로 출마, 당선되어 새로운 레바논 대통령이 됐으나 한달도 못된 9월 14일 당 회합에서 시리아 비밀요원 하비브 사르투니에게 암살당합니다. 죽은 바시르의 자리는 바시르의 형으로서 사업가로 활동하던 아민 제마엘이 잇게 됩니다.
( 암살범 하비브 사르투니는 마론파 기독교인인데다가 당시 바시르가 방문한 회합이 열린 건물에는 사르투니의 누나와 조부모가 같이 살던 곳이었고, 폭탄을 이용해 바시르를 암살해서 당시 이 가족들의 생사 역시 불명이었습니다. 얼마나 폭발력이 컸던지 베이루트 전체에 폭음이 들렸다고 하죠. 레바논 군에 체포된 사르투니는 재판 없이 투옥되었다가 90년 10월 13일 시리아군의 레바논 정부 전복 공세때 탈출해 94년부터 10년간 시리아에서 살다가 숨어버립니다.)
지도자를 잃은 팔랑헤 민병대와 정치적 목표 완수 직전에 모든 것을 잃은 이스라엘군은 눈이 뒤집어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베이루트 인근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9월 16일 오후 6시 팔랑헤 민병대와 이스라엘 군이 이 지역으로 들이닥치게 됩니다. 이들은 이 지역에 은신한 PLO 게릴라 제거 임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남녀노소가 가려보이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쏘아진 조명탄 한발을 신호로 참변이 시작됩니다. 바로 사브라-샤틸라 학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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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한국에서 출간된 중동전쟁사 책 보면 전체적으로 이스라엘군에 찬사에 가까운 내용들이 많은데, 사브라 학살 부분에선 적극적으로 비판을 하더군요. 지금보다 친이스라엘 기조가 강헸던 80년대 한국에서도 강한 비판 나온 거 보면 그만큼 사브라 학살이 충격이었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