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02/05/06 07:43:15 |
Name |
Apatheia |
Subject |
[잡담] 상처받은 이에게. |
님.
원을 하나 그리려고 했었습니다.
적당한 크기에 모양도 동그라니 예쁘고...
컴파스를 대고 그린 것처럼 반듯한 모양이야 아니겠지만
척 보기에 얼핏 찌그러진 데 없는
바르고 둥근 원을 하나 그리고 싶었댔습니다.
하지만 글쎄요,
도구 없이 손과 눈짐작만으로 그리는 원이라는 것은
쉬이 비뚤어지고
쉬이 크기가 어긋나고
더러는 시작과 끝점조차 제대로 맞지 않아
폐곡선도 아닌, 그냥 어설프게 제 꼬리를 맞물은 뱀과도 같은 형상으로 끝나고 말더군요.
그 그림을 보고 씁쓸해 할 님을 생각하며
잠시 없는 손재주를 탓했었음을 고백합니다.
님.
로마라는 곳은 우주에 한 곳 뿐이지만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수천 갈래가 있을 겝니다.
걸어서 가는 방법도 있겠고
배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겠으며
항공편을 예약해 날아갈 수도 있겠고
이도 저도 안된다면, 집에서 여행 전문 잡지나 뒤적이는 수도 있겠지요.
그 어느 방법도 사실 오로지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며칠이 걸리는지,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그리고 그 비용과 노력이란 것에 비해, 얼마나 만족할 결과가 얻어지는지...
기껏해야 그 정도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가끔 우매한 우리는
다른 방법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왜 내 식을 따르지 않느냐고 울분을 토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나와 똑같이 우매한 상대를 만나면
더러더러 멱살잡이도 하고, 가끔은 싸움질도 하는 모양입니다.
올곧게 맞는 사람도 올곧게 틀린 사람도 없는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말이지요...
님.
이따금 저는
당신과 내가 훨씬 더 친했으면 합니다.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고, 집도 직업도 알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하는 것들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알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이라면 서로 조심할 테지요.
우리가 그런 사이라면 서로 용서할 테지요...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글 한줄에 다투는 지금과 같은 번잡함은
적어도 겪지 않아도 되겠지요.
당신과 내가 너무도 멀리 있기에
이따금 터럭만한 씨앗 하나가 참나무만큼이나 커다란 다툼이 되어 자라는 것을
나는 아프디 아픈 마음으로 지켜봅니다.
님.
오늘은 날씨가 흐립니다.
우울해지기 쉬운 날에 컨디션 조심하시고
남에게 상처주지도 상처받지도 않는
강하고 예의바른 님과 제가 되기를
어설픈 기도문을 붙여 기원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Apatheia, the Stable Spirit.
PS. 원을 그리기 시작한 분과
그 원 그리는 방식에 찬성 혹은 반대하신 분들과
그려진 원이 과녁이 되어 날아간 화살에 가슴이 궤뚫린 모든 분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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