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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5 20:24
일단 저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당사자에 대한 말은 하기 어렵고, 개인적으로는 본인의 영달을 위한 적극적 친일이 아니라면 행적에 따라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05/15 21:32
일제의 정책이 악랄해지고,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변절했었는데 그중엔 극과 극은 통한다고 노선 바꾼김에 철저하게 바꾼 사람들도 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망가지고 포기한 인물들도 좀 있는것 같더군요.
19/05/15 21:37
예 그래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도 급을 나누는게 맞지않나 싶어요 예전에 30년대에 태어난 노교수도, 저 강원용 목사랑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지금 기준으로 친일파로 분류된 사람들 중 해방후 독립운동가들이랑 여전히 잘 지냈던 사람들도 다수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인식속에서 그사람은 친일파가 아니었다. 뭐 이런 논조.
19/05/15 20:30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1081
1898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출생했다. 경흥의 북일학교를 졸업, 1910년 간도로 건너가 명동중학교와 광성중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동휘의 권유로 1916년 피어선신학교에 입학, 1919년 졸업했다. 이후 3·1운동에 관련되어 함태영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그의 후임으로 남대문교회의 조사가 되었다. 이때 독립운동 관련 창가를 유통시킨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후 1922년 일본 도요(東洋)대학 문화학과에 입학, 1923년 아오야마(靑山)대학 신학부에 편입, 1926년 졸업했다. 같은해 9월 미국에 유학,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7년 프린스턴신학교로 편입, 1928년에는 웨스턴신학교로 편입, 졸업하고, 1930년 같은 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31년 아일리프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흥사단에 가입했으나, 이듬해인 1932년 귀국해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36년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성빈학사를 설립, 운영했다. 1937년 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38년 가석방된 후 같은해 11월 사상전향을 했다. 조선신궁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하며, 일본 천황에게 충의를 바치고, 일본 제국의 이상 실현을 위하는 등의 합의서에 날인했다. 1939년 3월 조선신학원설립위원회를 조직하다 김천으로 내려가 황금정교회를 담임했다. 12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지맹의 이사가 되었고, 1941년 말에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이사장이 되었다. 1944년 12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부교구 부교구장이 되었고, 1945년 2월에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경상북도지부의 이사가 되었고, 7월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총무국장이 되었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 교장이 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가, 1951년 7월경 대동군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글쎄요... 교회 조직이 당시와 지금이 완전히 같지는 않았겠습니다만, 부르면 가서 만담이나 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몇년만에 예수교장로회 지부 이사에서 이사장, 교단 총무국장까지 맡게 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해당인물을 친일파로 규정한 김승태 목사의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192069 친일인명사전 편찬에서 개신교계 인사들을 담당했던 김승태 목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는 “개신교계 인물 중에서는 잘못보다 공이 많은 분들이 많다”면서도 “그러나 잘못도 감추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올바른 종교인의 도리이며, 사전에는 공·과를 함께 정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편찬위원장인 윤경로 한성대 총장도 “이 작업은 결코 정치적 목적이나 특정인물을 매도하려는 것이 아닌, 역사화 작업이라는 점을 국민 앞에 천명한다”며 “오욕의 역사를 용기있게 대면하고 사실대로 기록해 후손들의 반면교사로 삼도록 하는 것이 역사학자로서의 사명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개신교 지도자들이 친일행위를 한 원인에 대해 △일제의 정책과 강압 △자신의 기득권 유지 욕망 △개인적 위기의식과 나약성 △역사의식과 민족의식 결핍 등 네 가지를 제시했다. 그는 “적어도 개신교 지도자들이 양심적으로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그렇게 한 경우는 없다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협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렇게 하다보니 점점 더 빠져들어갔던 것”으로 분석했다. 김 목사는 또 “일제에 협력한 것이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결국 그러한 행위가 세속 권력에 영합·추종해 교회의 교회다움을 상실하게 하고, 사회 공신력을 떨어뜨리게 했으며 성도들은 물론 다른 일반인들까지 잘못된 길로 내몰았다”며 “더욱이 그런 행위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한 일제의 침략전쟁 협력행위였다는 점에서 하나님 앞과 우리 민족 앞에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편찬작업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했다.
19/05/15 21:29
예 이부분도 민족문화대백과도 읽어보았고, 위키라던지 기사등도 읽어봤습니다.
저는 저정도의 고통을 받아본적이없긴하지만, 역사적으로 평가하면 어쩔수없었다고 말하는것도 핑계겠지요. 다만, 정도의 차이는 줘야하지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강원용 목사가 3가지 경우로 나눴더군요. 이분은 일제시대를 살아보지 않은사람이 그시대를 너무 쉽게 평가하는것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친일파의 기준을 좀 더 좁혀야 하지않는가 하는.. 1번은 일제에 강하게 저항하며 순국한 사람 2번은 적극적인 친일파 3번은 협조해서 목숨을 이어가며 고통을 이겨나간 사람 관변단체에 이름을 올려놓은 정도라고 보는것 같습니다. 평가는 또 다르고 (인촌 김성수랑 비교할만 하겠네요) 저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 이후 교장도 했었는데 조선신학교가 한신대죠. 한신대의 뿌리가 김재준, 송창근 이분들인데 송창근 목사가 친일파로 선정되었을때 기독교계가 엄청 놀라면서도 김재준목사가 빠진건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는 기사를 본적 있습니다.
19/05/15 21:43
평가할때, 뭐라해야하나.. 저울을 한쪽으로 치우치는게 대부분인것 같습니다.
예를들면 독립운동과 친일, 독립운동과 친북. 따로 보기보다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한쪽으로 결론내리는.. 송창근 목사는, 독립운동 + 친일 거기에 자유주의신학 까지.
19/05/16 09:15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사할때 생애는 검증받았을테고, 해방 전후 한신대 다닌 학생들은 다 저분 제자니..
명과 암이 있는 인물인듯 다만 한국전쟁때 사망해서 양쪽 다 평가가 끊어진것 같습니다. 일제말기나 해방후에 지인들에겐 이런저런 이야기 했던것 같은데 공식적으로는 나선적이 없는것 같네요. 이부분이 좀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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