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L 관전일기 - SKY 프로리그 2005 1Round 1주차 (2005년 5월 11일)
한빛본색
‘생명체’에는 지절이 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중추부’, 즉 머리이다. 돌이 날아오면 각 부위는 제 몸을 날려서라도 머리를 보호해야 한다. 팔다리는 날아가도 되지만, 머리가 날아가면 ‘생명체’는 죽고 마니까. 전력의 핵이었던 ‘공공의 적’ 박경락 선수가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양 팔이 마비된 한빛 스타즈는 ‘미스터 벙커링’ 나도현 선수를 이적시킴으로서 재빠른 다리마저 잃고 말았다. 게다가 거선의 기관처럼 힘차게 뛰었던 심장, ‘대마왕’ 강도경 선수조차 출전하지 못하는 위기까지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하지만, e스포츠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된 최초의 공식 통합리그, <SKY 프로리그 2005>의 개막전은 전통의 강호 ‘한빛 스타즈’의 압승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불가사의한 힘은 재치만점의 머리, 이재균 감독의 용병술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완벽한 세대교체를 마친 지난해 우승팀 한빛 스타즈는 테란의 김선기 선수, 저그의 김준영 선수, 프로토스의 박대만 선수를 전면에 내세워 ‘P&C 큐리어스’를 상대로 팀플전 한 경기만을 내주고 개막전 승리를 거머쥐는 쾌거를 이룬것이다.
1경기 <알포인트> : 김준영(Z) vs 안석열(Z)
두 번째 해처리를 앞마당 멀티에 편 안석열 선수에게 필요한 것은 ‘배짱’이었다. 김준영 선수의 본진은 트윈 해처리 빌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지만, 이에 부담을 느낀 안석열 선수는 초반의 기세 겨룸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다수의 저글링을 생산하였고, 김준영 선수는 기습 공격을 포기하는 대신 드론 생산과 빠른 테크트리 확보에 전력하여 장기적인 자원 수급률의 차이를 유도하였다.
뮤탈리스크와 스컬지의 양방향 공격을 통해 병력의 우위를 확보하기 전까지, 김준영 선수는 2개의 가스를 채취하는 안석열 선수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처럼 보였다. 산발적으로 펼쳐지는 교전들에서 안석열 선수의 병력에 조금씩 흠을 내는데 성공한 김준영 선수는 저글링과 뮤탈리스크를 분산시켜 상대의 멀티와 본진을 함께 공략하는 전술적인 플레이로 GG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비교적 협소한 센터 지역과 함께 다양한 동선, 넉넉한 자원을 가진 <알포인트>는 분명 분쟁의 씨앗을 품고 있다. 스타팅 포인트가 북쪽이냐 혹은 남쪽이냐에 따라 선수들의 희비가 교차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2경기 <루나> : 김선기(T)/조형근(Z) vs 이윤열(T)/심소명(Z)
경기 초반부터 시작된 P&C 큐리어스의 압박 플레이는 김선기 선수와 조형근 선수를 본진에 묶어두기에 충분했고, 상대가 위축된 틈을 놓치지 않은 이윤열 선수가 김선기 선수의 진출로에 마인을 흩뿌리면서 승리의 기운은 P&C 큐리어스로 흐르게 되었다.
심소명 선수의 뮤탈리스크가 김선기 선수의 본진 상공을 휘젓는 동안 한빛 스타즈의 합심이 이윤열 선수의 병력을 궤멸시키고 앞마당 멀티를 저지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심소명 선수의 앞마당 멀티로 섣불리 진격한 모든 병력을 잃음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규모의 차이’를 만들고 말았다. 앞마당 멀티에 커맨드 센터를 안착시킨 이윤열 선수는 물량의 진수를 보여주며 경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빛 스타즈 팀플의 트레이드마크인 ‘선택과 집중’은 늘 빛을 발휘했지만, 이번 경기에서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집중’의 역효과를 맛봐야했다.
3경기 <포르테> : 박대만(P) vs 안기효(P)
매너 파일런과 가스러시를 주고받으며 경기 초반부터 치열한 신경전을 펼친 두 선수는, <포르테>의 탁 트인 센터지역이 프로토스 플레이어의 ‘물량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기에, 나란히 앞마당 멀티에 넥서스를 건설하며 물량전을 대비하였다.
하지만 <포르테>는 안기효 선수의 기대만큼 솔직한 맵은 아니었다. 박대만 선수는 좋은 진영으로 방어 태세를 갖추고, 리버와 하이템플러를 십분 활용하여 안기효 선수의 자원 수급에 막대한 차질을 주었다. 박지호 선수와의 물량 대전에서 승리했을 만큼 병력 생산에 자신 있는 안기효 선수였지만, 자본의 근본적인 차이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 결국 수차례에 걸친 훌륭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자원 고갈로 인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기효 선수의 우직하고 화끈한 플레이 스타일은 그의 미래를 밝게 비춰주기에 충분하지만, 셔틀 한 기를 확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정도는 가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4경기 <우산국> : 김선기(T)/조형근(Z) vs 나도현(T)/심소명(Z)
어제의 동료 한빛 스타즈를 향해 겨눈 나도현 선수의 센터 배럭이라는 총부리는, 방향을 바꿔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말았다. 애초에 나도현 선수가 노린 것은 <우산국>의 센터 진출로가 역언덕 형태라는 점을 활용하여 벙커를 이용, 김선기 선수의 센터 입성을 봉쇄한 후 심소명 선수와 합세하여 조형근 선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저글링과 마린이 시종일관 압박한다면, 적어도 저그 플레이어라면 쉽게 본진을 비울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형근 선수는 과감히 우회로를 선택하여 나도현 선수의 본진을 급습하였고, P&C 큐리어스의 시선이 온통 나도현 선수의 본진에 집중된 사이 가볍게 벙커를 제거하며 병력을 집중하는데 성공하였다. ‘선택과 집중’의 미학은 심소명 선수를 엘리미네이션으로 안내했고, 곧이어 나도현 선수의 처절한 저항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맵의 특징과 상대방의 기세를 고려하지 않은 도박이 파산으로 가는 길과 얼마나 가까운지는 누구보다 나도현 선수 자신이 잘 알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만을 고집할 때 신으로부터 오는 영감을 잡을 안테나는 세워지지 않는다.
by sylent, e-sports 저널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