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008 : 아! 개한민국 / 서울역 / 힘을 내! / 증오의 제국 / 개판 5분전 만취 공중해적단
비트겐슈타인 이후 신해철의 행보는 과거와는 꽤 달랐다. 신해철은 1989년에 데뷔한 이후, 2000년까지 12년간 정규 앨범만 10장을 냈으며 싱글과 비정규 앨범과 OST 등을 합치면 매년 1장 이상의 앨범을 찍어낼 정도로 정력적인 음악가였다. 신해철이 본질적으로 싱어송라이터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건 무척이나 대단한 성과였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이후, 그는 2004년에 N.EX.T 5집을 내기까지 처음으로 긴 휴식기를 가졌다.
그 기간은 신해철이라는 인물에게 있어 여러 모로 의미가 깊은 시기였다. 일단 연령적으로는 삼십대 중반에 접어들었고, 미래의 반려자를 만나 열애를 거친 끝에 암 투병마저 극복하고 결혼한 것이 2002년의 일이었다. 아울러 2002년은 신해철이 평생 지지하였던 정치인 노무현이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해이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의 신해철은 음악가라기보다는 적극적인 사회참여가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당시에는 대다수 연예인들이 정치와 공개적으로 엮이기를 기피했는데, 그는 드러내 놓고 특정인을 지지하였고 심지어 찬조 연설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TV의 토론 프로그램에도 여러 차례 출연해 전투적인 자세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다. 그 과정에서 팬과 안티가 여럿 양산되었지만 그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하다.
그러면서도 신해철은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비록 정규 앨범은 나오지 않았지만 대전격투게임 <길티기어 이그젝스 샤프리로드>의 OST를 제작했고, 베스트 앨범의 좋은 사례로 손꼽히는 <스트러글링-孤軍奮鬪>를 내놓았다. 그리고 그는 새로이 결성된 N.EX.T와 함께 다음 앨범의 발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4년 당시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건이 터지면서 신해철은 전환점을 겪는다. 자신이 아낌없는 애정을 보였던 노무현이 겪은 정치적 위기와 그 전후에 벌어진 사건에 그는 분노했고, 그 결과 N.EX.T 5집은 이전까지 그의 노랫말에서 보기 힘들었던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사회비판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정수라의 희망찬 노래를 모조리 거꾸로 뒤집어버린, 그래서 정태춘을 떠올리게 하는 [아! 개한민국]을 관통하는 감정은 분노와 체념이 분명하다.
남편은 애 엄마를 패고 선생은 학생들을 패고
의원님은 지들끼리 패고
패라 패라 뒤질 때까지
아아 개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아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신해철, [아! 개한민국]
특히 [Dear America]에 참여한 래퍼들의 욕설 뒤섞인 랩은, 물론 신해철 자신이 직접 쓴 것이 아닌 까닭이겠지만 그의 기존 노랫말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거친 분노를 드러낸다. 그리고 [서울역]의 음울하기 그지없는 읊조림은 그가 지금의 세상에 얼마나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를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미 시들어 버린 희망의 꽃잎들
빈약한 뿌리는 살아 있는 것인가 혹은 죽은 것인가
마지막 삶의 끈을 놓아버렸다면
저 근육과 뼈는 살아 있는 것인가 혹은 죽은 것인가
-신해철, [서울역]
물론 이 앨범 전체가 그런 어두운 기운으로만 뒤덮여 있지는 않다. [힘을 내!]나 [남태평양] 같은 노래는 그런 와중에서도 스스로의 기운을 북돋우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눈앞이 또 아득하게 흐려져 오고
떨려오는 두 무릎은 꺼질 듯한데
힘을 내
비바람이 걷히고 나면
우리 가는 산봉우리가 눈앞에 있어
-신해철, [힘을 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N.EX.T가 내놓은 다섯 번째 앨범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좌절과 체념, 그리고 음울과 우울이다. 더군다나 또다시 삐걱대기 시작한 N.EX.T는 신해철의 그런 좌절감을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다.
겉보기에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던 이 밴드는 실상 구성된 기간 내내 지독한 내부 불화에 휩싸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앨범 한 장을 낼 때마다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갈아치워지기 일쑤였다. 그런 난장판 속에서도 밴드가 결과물을 낼 수 있었던 건 신해철의 존재 덕분이었고,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N.EX.T가 내놓은 노래는 필연적으로 신해철의 노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상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그는 점점 더 지쳐갔다. 꿈과 희망을 노래하던 소년은, 언젠가부터 더 이상 꿈을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신해철은 분투를 거듭하면서 연달아 음악적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러나 신해철만의 재기와 빛나던 감성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N.EX.T 5집이 출시되고 이태 후에 나온 5.5집은 한 곡을 제외한 모든 노래가 리메이크로 채워진 당황스러운 앨범이었고, 이듬해 솔로5집이라는 명목으로 나온 재즈 앨범도 흡사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08년에 드디어 출시된 N.EX.T 6집은, 실질적으로 신해철이 4년 만에 내놓은 ‘새로운’ 앨범은, 노래의 완성도 자체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고, 트릴로지의 첫 번째 편이라는 명목 하에 고작 다섯 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끔찍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등장한 얼마 안 되는 신곡들의 노랫말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달아 위악적인 성향마저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미워해 증오해 싫어해 이쪽저쪽 닥치는 대로 다
미안해 증오해 혼란해 비틀비틀 뒤틀려버린 걸
세상이 온통 날 모두 날 무시해
나도 그 세상을 게다가 나를 미워해
-신해철, [증오의 제국]
부어라 넘칠 때 까지 마셔라 토할 때 까지
취해라 끊길 때 까지 이판사판 달려라
달려라 동틀 때 까지 달려라 죽을 때 까지
날아라 지옥 끝 까지 인생은 단 한방
-신해철, [개판 5분전 만취 공중해적단 Part 2]
사람들은 깨달았다.
신해철의 노랫말은 이미 과거의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음악인으로서 신해철은 이제 끝난 게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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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의 찬란했던 20대 초중반을 지나서 '고군분투'했던 30대로 이야기가 넘어가니 그의 팬으로서 읽기가 조금 힘들어지네요.
2001년부터 시작된 고스트스테이션 얘기가 빠져서 조금 아쉽습니다. 제가 신해철이란 사람을, 그의 음악을 알게된 것은 고스 덕분이었죠. 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신해철이 고스를 시작한 것은 스스로 번아웃을 극복하고, 에너지를 받아가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다음화에서 이어지겠지만, 길었던 뮤지션으로서의 휴식기를 지나서 드디어 음악 활동을 자신있게 재기한 순간, 그가 말도 안되는 사고를 당해서 너무 슬프고 아쉽습니다. 확실히 하고 싶은 얘기가 재충전된 모습이었는데...
다음편(이자 마지막편)에서 언급하겠지만, 저도 신해철이 2014년에 재충전되었다는 표현에 동감합니다. 내놓은 결과물이 훌륭했거든요. Reboot Myself 시디를 처음 샀을 때 트랙수를 보면서 '또 이런 꼬라지냐...'싶었지만, 막상 들었을 때는 꽤나 놀랐었죠. 그때는 저도 희망에 들떴는데....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