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0/06/08 18:46:03
Name 라쇼
Subject [일반] [검호이야기] 배가본드(2) 일본제일검 요시오카를 멸하다 (수정됨)
무사시는 갈림길에서 멈춰섰다. 왼쪽으로 가면 이치쵸지 노송나무. 당주를 잃어 복수심에 불타는 요시오카 일문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은 하치만 신사. 무사시는 잠시 상념에 잠기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렇다. 잠시 신사에라도 들릴까."

하치만 신사에 도착한 무사시가 신들께 기도를 올리기 위해 신단 위에 걸린 줄을 당기려고 손을 갖다대려 할 때였다.

'어리석은!'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수치심에 무사시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자기를 죽이려는 일념 하나로 모인 수십 명의 적을 앞두고 살기를 바라는 건 가? 숱한 시합을 벌여오며 사선을 넘었다고 생각했거늘 그동안 뼈를 깍아가며 노력해온 수련과 실전들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13세 때부터 검술에 뜻을 두고 21세가 된 지금까지 검술의 극의를 깨달아 천하무쌍이 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리라 맹세해 놓고선 요시오카와의 결전을 앞두고 도망치려 하다니.

수치스러운 마음과 다르게 마음 한 켠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상대는 수 십이고 나는 고작 한 명이다. 신들께 기도하는게 무슨 잘못인가?'

'아니다, 일생일대의 불찰!'

무사시는 마음 속에 들려오는 나약한 자신의 목소리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가족에 의지하지 않는다. 동료에게 의지 하지 않는다. 신불에게도 의지 하지 않는다! 독행도. 무사시가 요시오카의 당주 세이쥬로를 쓰러뜨리면서 다짐했던 검술의 길이 아니었던가.

무사시는 참을 수 없이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어리석은 자신을 책망했다.

"바보녀석! 멍청한 무사시 녀석! 뭐가 천하무쌍이란 말이냐!"

자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나니 뜨겁던 머리가 차가워졌다.

미숙함을 깨달았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고치면 된다.

'다시는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으리라! 믿을 건 오로지 이 육체와 검만이 있을 뿐.'

아닌 척, 강해진 척, 애써 숨기고 있었지만 내면에 자그마하게 도사리던 나약함과 정면으로 마주하고나니 오히려 머리가 개운해졌다.

요시오카와 싸운다! 설령 오늘 결투에서 죽더라도 갈고 닦아온 검술의 모든 것을 발휘하고 죽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질 생각은 없었다. 요시오카에게 이기는 건 천하무쌍으로 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요시오카와의 승부에서 이기고 그들을 양분으로 삼아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흐뭇해져서 웃음이 나왔다. 갈림길로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곧장 지름길로 요시오카에게 간다. 무사시는 수풀이 우거진 거친 비탈길을 들짐승처럼 내달렸다.

"저건!?"

무사시의 시야에 사람의 형체가 들어왔다. 요시오카의 제자가 들고 있는 무기는 철포. 비겁한 놈들 고작 한 명을 상대하면서 철포까지 동원할 셈인가. 분노에 찬 무사시는 그대로 돌진하여 단숨에 베어버렸다.

처절한 단말마가 울려퍼지고 동료의 비명소리에 사태를 알아챈 요시오카의 제자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무사시? 무사시다!"

"기습인가? 비겁하다 무사시!"

"당황하지마라, 자리들을 지켜! 상대는 고작 한 명이다."

비겁? 한 명을 상대로 수십 명이 모여서 철포까지 사용하는 자들이 꺼낼 단어인가? 분노가 힘을 북돋워주어 무사시는 요시오카 제자들을 노도처럼 밀어붙였다.

단 한 사람의 기세가 수 십명을 압도하여 요시오카 제자들이 당황하여 주저하고 있자, 누군가가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이쥬로 당주와 덴시치로 사범님의 원통한 죽음을 잊은겐가! 상대는 가증스러운 무사시, 죽여라. 죽더라도 한 칼을 먹이고 죽는 게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요시오카 십검의 필두 우에다 료헤이. 요시오카 일문 당주 대리로써 무사시에게 결투를 신청한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우선 대장의 목부터 취한다. 그렇게 생각한 무사시가 달려들자 우에다는 능숙하게도 인파 사이로 몸을 숨겼다.

"한꺼번에 덤벼라. 제 아무리 무사시라도 포위하면 이긴다."

우에다의 지휘 하에 요시오카 제자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자, 무사시는 곤란에 빠졌다. 에워싸이는 것만큼은 금물. 모서리를 취해서 한 번에 하나씩만 상대한다. 포위하려는 자들과 빠져나가려는 자의 싸움. 무사시가 모든 힘과 기예를 발휘하여 칼을 휘두를 때마다 요시오카 검사들이 하나씩 죽어나갔다.

하지만 수엔 장사없는 법. 요시오카의 제자 수십 명 중 절반이 쓰러졌으나 무사시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우에다의 착실하게 진행되는 갉아먹기 전법에 무사시 몸 곳곳에 상처가 늘어났다. 무사시의 숨이 거칠어지고 안색이 파리해지며 상처에서 피가 흐르자 적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절체절명! 무사시는 이 곳이 바로 자기 무덤이 되리라 생각했다. 허나 아직 포기는 금물, 하나라도 더 숫자를 줄인다. 무사시가 십검 중 하나 코바시 구란도에게 일참을 먹였지만 코바시는 노련한 검객답게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무사시의 검을 붙잡고 손을 놓지 않았다.

"잘했다, 구란도!"

고개를 돌리자 우에다 료헤이의 검이 무사시의 목숨을 노리고 빛을 번뜩였다.

"잡았다. 무사시. 각오!"

고도로 집중된 각성 상태에서 무사시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감을 느끼며 이 검은 못피한다고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무사시의 검은 봉쇄된 상태. 막을 방법이 없다. 검 하나론... 검 하나 만으론 도저히...

검이 은빛의 선을 그리며 베고 지나가자 피가 솟구쳤다.

"...무념."

우에다 료헤이는 증오와 경이로움과 허탈감이 뒤섞인 눈 빛으로 무사시를 바라보다가 쓰러졌다.

무의식적으로 무사시는 소도를 뽑아 우에다의 검이 몸에 닿기 전에 베어버렸다. 무사시의 양 손엔 검이 들려있었다. 팔은 두 개, 검도 두 자루, 대도와 소도, 즉 이도. 무사시는 그제야 전력을 발휘했었다는 생각이 착각이었음 깨달았다. 이도류야 말로 숨어있던 무사시의 진면목, 진정한 검술이었다. 하늘 까지 닿는 검의 극치는 하나가 아니다. 하늘을 향한 검의 길은 하나도 둘도, 얼마든지 있다. 이도이천. 검술의 극의로 향하는 실마리를 얻은 무사시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반면 대장을 잃은 요시오카 일문의 눈동자엔 전의가 사라져갔다. 무사시는 확신했다. 길었던 요시오카와의 싸움도 종지부를 찍을거라고. 오늘 이치죠지 노송나무에서 요시오카는 멸문을 당하리라.


-----------------------------------------------------------------------------


image.jpg
<무사시와 요시오카 일문이 싸운 이치죠지 사가리마츠(一乗寺下り松)>



먼저 주의를 드리자면 윗 글은 무사시와 요시오카 사이에 벌어졌던 결투를 이해하기 쉽게 제가 역사 기록과 픽션을 섞어서 직접 쓴 소설이라 사실이 아닙니다. 실제 역사 기록은 아래 본문을 읽어주세요.


무사시와 요시오카 일문의 대결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깜빡하고 전편에 누락시킨 내용이 있어서 설명하고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ㅜㅜ


image.jpg
<무사시보쿠덴시합도(武蔵塚原試合図)>


츠카하라 보쿠덴이 식사를 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미야모토 무사시가 들이 닥쳐 시합을 청하고는 공격해왔다. 보쿠덴은 급히 냄비 뚜껑을 들어 무사시의 검을 막아내었다.



image.jpg
<태합입지전5에 등장하는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



밥먹는 중엔 개도 안건드리는데 더구나 연로한 노인의 식사 시간을 방해하다니, 무사시 그렇게 안봤는데 몹쓸 사람입니다...는 아니고 사실 이 기록은 허구입니다. 츠카하라 보쿠덴은 무사시가 태어나기 13년 전에 이미 고인이 되서 두 검호가 결투를 벌일 일 따윈 없었지요.

국내에선 봐라 무사시가 이렇게 거짓 기록이 많지 않냐라고 폄하하는 용도로 자주 쓰이지만, 후대 창작자들에겐 이 일화가 좀 다르게 비춰졌나 봅니다. 노인 고수와 젊은 도전자라는 소재가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 요시카와 에이지는 저 기록을 비틀어서 보쿠덴이 아닌 야규 세키슈사이 무네요시와 무사시가 대결하는 내용으로 창작해냈습니다. 마찬가지로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원작으로 삼은 만화 배가본드에서도 야규 세키슈사이에게 도전하는 무사시의 모습이 나오죠. 작중 야규 세키슈사이는 아직 정신적으로 덜 성숙된 무사시에게 진정한 최강이란 무엇인지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로 등장합니다. 이 일화를 소개한 이유는 마냥 거짓이라고 비난하기엔 현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준 기록이라 본문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럼 이제 무사시의 60여회에 달하는 승부 중 간류지마의 결투와 함께 유명한 결투인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결 이야기를 설명해보도록 하죠.

요시오카 세이쥬로, 덴시치로 형제와의 시합과 요시오카 일문 제자 수 십명과 싸운 이치죠지 노송나무 결투. 무사시가 이들 요시오카 일문과 싸운 이야기는 역사 기록에서는 '통설'과 '이설' 두가지로 나뉩니다.

통설은 무사시가 요시오카 일문과 수 차례 결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고 끝내 멸문시켰다는 주장으로 고쿠라비문, 병법대조무주전래기, 무공전, 니텐기 같은 무사시측의 사료 기록들이 그것입니다. 이설은 무사시와 요시오카가 비겼거나 이겼다는 주장이며 요시오카 가문의 전기인 요시오카전과 검호와 검술 기록을 수집하여 정리한 본조무예소전 같은 타 사료들의 기록입니다. 대중들에겐 통설을 채택한 창작물로 요시오카 일문과의 결투 이야기를 접했기에 무사시가 요시오카에게 이겼다는 통설이 더 익숙한 편이죠. 우선 널리 알려진 통설부터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요시오카 류는 초대 요시오카 나오모토가 아시카가 막부로부터 검술사범역 벼슬을 얻고 쿄토에 병법소를 차린 후로부터 5대까지 이어진 검술 유파입니다. 쇼군으로부터 일본제일검술(扶桑第一兵術)이란 칭호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요시오카 가문의 당주들은 대대로 '겐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즉 창작물에서 요시오카 세이쥬로의 아버지 이름으로 알려진 겐보는 사실 세습명인 셈이죠.

초대 나오모토와 3대 나오카타 시기까진 아직 아시카가 막부가 실권은 상실했을지언정 쇼군가로서 위신은 남아있었기에 검술사범역을 맡고 있는 요시오카 류는 꽤나 융성했을거라 여겨집니다. 이후 4대 나오츠나(세이쥬로) 시기로 가면 아시카가 막부는 멸망하고 아시카가로부터 받은 검술사범역과 일본제일검술이란 칭호도 유명무실해졌지요. 무사시가 요시오카 일문에게 싸움을 걸었을 시기는 야규 신카게류와 오노 타다아키의 일도류가 10년이 넘도록 도쿠가와 쇼군가의 검술로 위세를 떨치던 중이라 요시오카 류는 옛 영화를 잃고 서서히 몰락해가고 있엇습니다. 만화 배가본드에서도 작중 세이쥬로가 자조적으로 말하는 대사로 요시오카 류의 씁쓸한 현실을 전하고 있죠.

하지만 일본제일검술이란 칭호는 허명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요시오카류는 저력을 간직햇고 여전히 쿄토에서 전 쇼군가의 검술사범역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도장은 성업중이었지요. 무사시는 이런 요시오카라면 해볼만 하다 여기고 도장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허나 요시오카 일문엔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강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죠. 바로 요시오카 세이쥬로와 덴시치로 형제입니다.

4대 겐보 요시오카 세이쥬로는 무사시측 사료에서 기록된 이름으로 다른 사료에선 요시오카 겐자에몬 나오츠나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동일 인물이라 확정 난 건 아니고 사료들에 적힌 기록 상 무사시와 대결을 벌인 시기가 비슷하기에 같은 인물이지 않을까 추정하는 것이지요. 일설에는 요시오카류가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의 유파 가시마 신토류의 영향을 받아 보쿠덴의 오의 '히토츠노타치(一之太刀)'를 세이쥬로가 익혔다고도 하지만 보쿠덴이 활동하던 시기 이전부터 요시오카류는 존재했었기에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배가본드에선 이 설을 채택하여 세이쥬로가 히토츠노타치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고류 검술 오의가 민간에 모두 공개된 현대에 와서도 히토츠노타치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아서 어떤 기술인지 서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반적으로 히토츠노타치는 일격에 상대를 죽이겠다는 각오로 검을 휘두르고, 그래도 상대가 쓰러지지 않는다면 다시 일격필살의 각오를 하여 통할 때까지 계속 사용하는 검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검술 연구가들은 일도류의 '키리오토시' 같은 공격형 반격기라고 추측합니다. 위 그림에서 세이쥬로의 대사는 히토츠노타치를 아무리 써도 통하지 않는 무사시의 강력함에 대한 놀라움과 자칫하면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담긴 말이죠.

요시오카 가문의 차남 요시오카 덴시치로는 다른 사료에서 요시오카 마타이치 나오시게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당주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5척짜리 커다란 목검을 사용하여 무사시와 대결했다고 전해지는 걸 보아 형 세이쥬로 못지않은 실력자로 여겨집니다.

요시오카 세이쥬로가 무사시의 시합 요청을 받아들인 건 당시 무예가들의 통념상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에도시대 초기는 무예가들끼리 시합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시절이었으나, 한 유파의 당주가 시합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로, 명성을 얻으려고 도전해오는 무사수행자들은 문하생 선에서 해결하지 직접 당주가 시합을 받아주진 않았지요. 당주의 패배는 유파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으며 더 나아가선 당주가 죽어 대가 끊겨 유파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다이묘 같은 높은 분들이 시합을 명령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가능하면 유파 당주들은 시합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지요. 요시오카 세이쥬로, 덴시치로 형제와 사사키 코지로, 걸어오는 도전은 직접 나서 깨부셔버린 오노 타다아키가 같은 경우가 특이한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그런 연유로 요시오카 세이쥬로가 무사시의 시합 요청을 받아 줄 이유는 없지만 세간의 예상을 깨고 두 검호간에 시합은 성사됩니다.

차후에 벌어질 간류지마 결투에서 무사시는 일부러 시합 장소에 늦게 도착하여, 코지로에게 그대는 졌다하고 도발해서 집중력을 산만해지게 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트래쉬토크와 심리전에강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어떻게든 요시오카와 시합을 하려고 계책을 짜내어 도발을 가하는 무사시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한편 미야모토 이오리가 세운 고쿠라비문엔 요시오카 세이쥬로가 무사시의 도전을 받아 줄 만한 이유가 나옵니다. 무사시의 부친 신멘 무니와 요시오카의 3대 당주 나오카타가 시합을 했었다는 내용이죠.

요시오카 일문과 세 번에 걸친 시합이 어떻게 벌어졌는 지 과정을 알아 볼 겸 고쿠라비문의 기록을 보도록 합시다.



무사시는 쿄토에서 요시오카 일문과 싸웠다. 요시오카 가문은 대대로 아시카가 장군가의 사범으로, '후소제일병술사'의 칭호를 받았다. 아시카가 요시아키 때 신멘 무니를 불러 요시오카와 시합을 시켰다. 세 번의 시합으로 요시오카가 한 번, 신멘이 두 번 승리했다. 이에 따라 신멘 무니에게 '일하무쌍병법술사'라는 칭호를 내려주셨다. 이 때문에 무사시는 쿄토에서 요시오카와 싸웠던 것이다.


처음에 요시오카가의 당주인 요시오카 세이쥬로와 렌다이지 벌판에서 싸웠다. 무사시는 목검으로 일격에 세이쥬로를 물리쳤다. 미리 일격에 승부를 낼 약속이었기에 목숨을 빼앗지 않았다. 세이쥬로의 제자들은 그를 판자에 싣고 돌아왔고 치료 후 세이쥬로는 회복되었으나 검술을 그만두고 출가하였다.


그 후, 쿄토 외곽에서 요시오카 덴시치로와 싸웠다. 무사시는 덴시치로의 5척 목검을 빼앗아 그대로 쓰러뜨렸다. 덴시치로는 사망했다.
하여 요시오카의 제자들은 검술로는 무사시를 이길 수 없기에, 음모를 꾸며 요시오카 마타시치로와 시모마츠에서 승부를 하기로 하고, 문하생 수백 명에게 활과 화살 등을 들게 하여 무사시를 살해하려 하였다. 무사시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제자에게 지켜보라고 명한 후, 혼자서 무찔렀다. 이 일련의 싸움으로 인해 요시오카 가문은 멸문했다. -고쿠라 비문-



고쿠라비문에선 무사시와 요시오카가 싸워야 했던 이유를 선대 신멘 무니와 3대 겐보간에 숙원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허나 신멘 무니와 3대 겐보의 대결은 다른 사료에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무사시를 쓰러뜨리기 위해 제자 수 백명이 동원되고 활과 화살로 무장하였는데, 무사시 혼자 몰살시켜 멸문시켰다는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기에 미야모토 이오리의 창작으로 여기는 시각이 많습니다.

저 개인적으론 뭔가 2대에 걸쳐 숙명적으로 대결을 벌이는 무협지 같은 스멜이 느껴지기에 진위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좋아하는 일화입니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에선 나오진 않지만 배가본드에선 에피소드로 등장하지요.

탄지호킨필기를 저술한 5대 니텐이치류 당주 타치바나 미네히라가 쓴 병법대조무주전래기에도 요시오카 일문과 대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고쿠라비문을 좀 더 다듬은 형식이죠. 비슷한 내용이기에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합 당일 무사시가 병에 걸려 일정을 미루자고 요청했는데 세이쥬로가 받아들이 지 않아 시합을 강행, 아픈 몸으로 세이쥬로에게 승리했다. 덴시치로는 고쿠라 비문과 동일하여 생략, 요시오카 제자 수 백명들과 싸움엔 무사시도 제자 10명과 동행하여 싸우다가 힘에부쳐 제자들을 먼저 퇴각시키고 혼자 맞서 싸우다 무사시도 후퇴했다. 이를 계기로 요시오카는 멸문했다.

여전히 수백 명과 싸웠다는 건 과장이 심하지만 제자들이 함께 참전했고 승리가 아니라 분투하다 퇴각했다는 점이 다르네요. 니텐이치류 문하 제자들도 고쿠라비문에 적힌 내용이 좀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무공전의 기록을 봅시다.

무사시는 따르겠다는 제자들에게 집단끼리의 전투는 도의에 맞지 않다하며 거절했다. 세이쥬로, 덴시치로 때는 시합에 늦게 참여해서 승리했기에, 이번엔 반대로 했다. 시모마츠에 가는 도중 하치만 신사 앞을 지날 때, 평상시에는 하지 않는 승리 기원을 하려고 했지만 그만두었다. 아직 날이 밝아오기 전에 시모마츠에 도착하여 소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세이쥬로의 아들인 마타시치로가 제자 수십 명을 데리고 왔다. 무사시가 기다렸노라! 라고 외치며 나타나 마타시치로를 베어 죽였다. 격노한 요시오카의 제자들이 칼로 내리쳤고, 또 화살이 날라와 무사시의 소매에 박혔으나, 앞서 적의 진형을 무너뜨려서 요시오카의 제자들은 당황하였고 무사시는 종횡무진으로 움직여서 승리를 거두었다. -무공전-



image.jpg
<미야모토 요시오카 결투 기념비>



앞서 두 기록과 다른 점은 무사시가 상대한 요시오카의 제자가 수백 명에서 수십 명으로 줄었으며, 승리했다라고만 명기하고 멸문시켰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사시는 생전에 호소카와 번의 니텐이치류 제자들에게 요시오카와의 싸움을 자주 얘기했었는데요. 호소카와 번의 신하 토요타 마사오카는 니텐이치류 제자들의 증언을 받아 적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마사오카의 아들 토요타 마사나가가 그 기록을 바탕으로 오륜서, 독행도 같은 무사시의 저서나, 구마모토에 남아있는 무사시가 제작한 예술품들을 조사하여 무공전을 편찬해냅니다. 즉 무사시 측 기록 중에선 사료의 가치가 가장 높은 책이죠.

무공전에선 무사시 측 사료에서 주장하는 요시오카 일문과의 승리설과 약간 다른 일화도 같이 적어 놓았는데요. 무사시가 호소카와 가문의 무사들과 대담을 나누다가 그 중 한 명이 요시오카 세이쥬로에게 베였던 상처가 남아있다던데 맞느냐? 라고 물어보았고, 무사시는 부정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록 때문에 무사시 생전에도 요시오카가 승리했다는 설이 같이 돈게 아니냐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무공전에 나오는 요시오카 제자 수십 명과 싸워서 이겼다는 기록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사시의 무용담을 좋아하는 팬으로써 사심이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기록이 마냥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근거는 무사시가 남긴 검술 이론에 있습니다.


image.jpg
<엔메이류(円明流) 오의전서에 나오는 일도중적(一刀衆敵)의 이치>


무사시는 오륜서에  한 사람이 10명을 상대하는 방법을 일인십적(一人十敵), 일도중적(一刀衆敵)이라 하였는데요. 각 유파의 검술이 담긴 전서를 모아놓은 스즈카가문서에 포함된 무사시의 젊은 시절 유파 엔메이류 전서엔 일도중적의 이치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갑옷을 입으면 일인백적(一人百敵)까지 가능하다 하였고, 무사시 본인은 갑옷 없이 칼 하나만 들엇다면 30명까지 상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무사시는 다수와 싸우는 검술을 장기로 삼았고 이도류를 연마하는데 많은 실전경험이 필요햇으리라 봅니다. 60회의 시합 중에 다수의 상대와 싸운게 몇 번 인진 알 수 없지만, 기록 상 유일하게 남은 다수와 싸웠던 전투가 이치죠지 노송나무 결투였던 만큼 실제했을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50세가 넘어 검술의 경지가 완숙해져서 이도류의 이치를 깨달아, 니텐이치류를 창시한 무사시는 오륜서에서 이도는 다수를 상대할 때 이롭다고 설명했는데요. 칼 하나라도 능히 30명까지 상대할 수 있다 얘기했던 만큼 이도라면 더 많은 수와 대적할 수 있지 않을 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사시의 허풍이라고 받아들일 수 도 있겠지만 2천년 전 인물인 항우가 역발산기개세의 용력을 떨치며 대군을 상대로 학살을 벌인 초인적인 기록은 가볍게 납득하면서 무사시가 수 십명과 싸운 건 허구라고 조롱하는 글들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들게 하더군요. 유사 이래 항우, 관우, 리처드 1세, 척준경처럼 인외의 용맹을 떨친 인자강은 늘 있어 왔고, 인자강이 아니더라도 각고의 수련 끝에 달인의 경지에 오른 무예가들도 존재했습니다. 무사시 또한 목숨을 걸고 수라장을 해쳐오며 검술을 연마해온 인물이니 만큼 그의 언행과 기록에 과장은 있을지언정 모두 거짓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무사시가 요시오카에게 승리했다는 통설이었습니다. 그럼 통설과 반대되는 이설에 대해 알아봅시다.

요시오카측의 기록인 요시오카전과 제 3자의 기록인 본조무예소전, 고로다화에서는 요시오카가 무사시에게 승리했거나 무승부를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무사시측 사료 기록과는 정반대되는 주장이죠. 국내 인터넷에 올라온 무사시 대 요시오카 항목은 이 사료들을 가지고 무사시가 요시오카와 싸워 이겼다는 기록은 허구거나 과장되었다고 무사시를 깎아내리는 논거로 사용하지만, 사실 이설을 소개하는 사료들도 허위기록과, 서술 충돌,오류와 모순 등이 발생하여 신뢰성 있는 책이라고 보긴 힘듭니다.

앞서 제가 설명한 통설에선 요시오카 세이쥬로와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인물을 요시오카전에 등장하는 요시오카 겐자에몬 나오츠나라고 적어놨는데요. 이는 통설을 읽을 때  혼동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설을 다루는 사료들에선 4대째 겐보라고 생각되는 인물이 3명이나 거론되는데, 즉 이름이 다른 요시오카 세이쥬로가 셋이나 되는 셈이죠. 요시오카 승리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신멘 무니를 두고 기록마다 일치가 되지 않는다고 무사시측 사료들을 비판하면서, 정작 요시오카 세이쥬로라는 인물은 사료들끼리 기록이 달라서 정체가 불분명한 건 못 본 척 합니다. 거기에 관해선 후술하기로 하고 우선 이설에서 나오는 무사시와 요시오카의 대결과, 요시오카가 멸문당하지 않았다는 반박 근거를 알아봅시다.

17세기 의사이자, 전기작가인 후쿠즈미 도유가 저술한 요시오카전에선 무사시와 요시오카의 시합을 벌인 내용이 나오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시오카 겐자에몬 나오츠나는 전국 제일의 텐류 실력자 야마오카 산도쿠와 황법사 가시마 린사이를 차례대로 쓰러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마츠다이라 타다나오의 가신이며 무적류로 명성이 자자한 이도류 달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도전해왔다. 쿄토쇼시다이에서 주관한 시합을 벌인 결과 무사시가 이마에서 크게 출혈을 일으켜 나오츠나의 승리란 쪽과 무승부란 쪽으로 의견이 갈렸다.나오츠나는 불복하여 다시 시합하기를 원했지만 무사시는 이를 거부하고 마타이치 나오시게와의 시합을 희망했다. 무사시의 요청은 받아들여졌으나 무사시가 시합장소에 나오지 않아서 나오시게의 부전승이 되었다. -요시오카 전-

이상이 요시오카 측 사료에서 나오는 시합 내용인데, 이 기록 어딘가 내용이 이상합니다. 요시오카 측 주장에선 무사시가 출혈이 심해서 나오츠나의 완벽한 승리인데 쿄토쇼시다이가 무사시에게 유리한 편파 판정을 내려서 승리와 무승부로 의견이 나뉘었다고 나옵니다. 한 술 더떠서 나오츠나가 판정에 불복하여 재시합을 요청하는데 묵살되고, 오히려 무사시가 요구한 나오시게와의 시합이 승인되죠. 근데 무사시는 요시오카가 무서워서 도망쳤고, 나오시게가 부전승으로 이겼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쿄토쇼시다이는 쿄토의 치안을 담당하는 관청인데 일개 무예가들끼리 벌이는 결투에 시합 장소를 제공하고 심판까지 봐주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굳이 이해하려고 애쓴다면 요시오카 일문이 쿄토에서 4대째를 이어오며 검술도장을 운영해 왔기에 친분을 통해 쿄토쇼시다이에 의뢰했거나, 무사시의 주군인 마츠다이라 타다나오가 주선하여 쿄툐쇼시다이에 시합을 의뢰했을 수 도 있습니다. 또한 당시엔 다이묘가 무예가들을 초청해 시합하도록 명령한 일도 있어서 불가능한 일은 아닐겁니다. 하지만 요즘 격투기로 비유하면 타이틀 챔피언은 요시오카이고 무사시가 도전자인 상황에서 주최측인 쿄토쇼시다이는 세력도 명성도 훨씬 큰 요시오카에게 불리한 편파판정을 내리고 무사시가 억지부리는 요구는 다 들어주었다는 거죠. 즉 편파판정이 있었음에도 요시오카의 완승이었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무사시에 대한 정보도 하나 같이 맞는 게 없어서, 무사시는 마츠다이라 타다나오의 가신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평생 관직을 얻지 못했다고 까이죠. 거기다 무사시의 젊었을 적 유파는 엔메이류였지 무적류란 보도 듣도 못한 유파가 아닙니다. 또한 무사시가 이도류의 달인으로 명성을 떨친 건 20대 시절이 아니라 좀 더 나중의 일이어서, 무사시측 기록에선 요시오카를 쓰러뜨려서 겨우 명성을 얻엇는데, 요시오카전에선 이미 달인으로 유명한 무예가라고 이야기하는 겄이죠. 일치하는 정보라고는 고작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름이 전부입니다.

또 이상한 점은 무사시와 동렬로 취급해 놓은 야마오카 산도쿠와, 가시마 린사이란 무예가는 모든 일본 검호들의 사료를 뒤져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 듣보잡이란 사실입니다. 심지어 아리마 기헤에 조차 탄지호킨필기에 시합 과정이 나오고, 19세기 기록에 그런사람이 이러이러한 행적을 했다라고 나오는데 요시오카전에서 무사시와 동격으로 고평가한 무예가들은 가공으로 지어낸 인물이다란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거죠.

이상 위에 열거한 이유들을 근거로 요시오카 전의 기록은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학자들도 다수 존재합니다. 그리고 요시오카전은 검술유파 요시오카류를 다루는 책이 아니라, 염색장인으로 성공한 요시오카 가문의 유래를 적은 책입니다. 요시오카전은 후술할 사루카쿠 흥행 사건으로 폐문당한 뒤 염색장인으로 전업하여 부를 쌓은 후 전기작가를 고용해서 쓴 전기물이란 얘기지요. 적어도 위 기록이 요시오카류가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나왔다면 역사적 가치가 올라가겟지만, 요시오카류가 망하고 몇십 년 뒤에 쓰여진 터라 아무래도 타 유파의 기록들보단 신뢰성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각각 1720년과 1740년에 지어진 본조무예소전과 고로다화에도 요시오카와 무사시의 대결이 나오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무사시는 붉은 머리띠를, 요시오카는 하얀 머리띠를 하고 시합장에 나왔다. 동시에 쌍방의 칼이 서로의 이마를 베었는데, 흰색 머리띠를 한 요시오카 쪽이 먼저 피를 흘렸다. 또 다른 설에선 요시오카가 무사시의 머리띠를 베려는 찰나, 무사시는 요시오카의 바짓자락을 베었다고 한다.  -본조무예소전-

쿄토 북쪽 시치혼마츠에서 미야모토 무사시와 요시오카 마타사부로 카네후사가 시합을 하였다. 무사시는 시합 시간에 맞춰 나온 마타사부로 보다 고의로 늦게 도착하였다. 마타사부로가 목검, 무사시는 죽도를 들고 나왔다. 무사시의 공격은 마타사부로의 머리띠를 스치고,마타사부로는 무사시의 왼쪽 어깨를 가격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고로다화-


둘 다 무승부라고 기록하지만, 본조무예소전에선 무사시가 약간 유리하고, 고로다화에선 세이쥬로가 유리하게 서술됩니다. 두 사료에선 요시오카 전의 요시오카 나오츠나라는 이름 대신 그냥 요시오카라고 성만나오거나, 마타사부로 카네후사란 인물이 나오는데요. 이 마타사부로는 에시대 강담소재인 칸에이 어전시합에 등장하며, 무자수행이란 책에선 요시오카류의 소태도 명수라고 알려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요시오카전에 나오는 나오츠나보다 마타사부로를 무사시와 싸운 세이쥬로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요시오카전의 기록과는 다르게 복수의 세이쥬로가 사료에 등장하는 거죠.

본조무예소전과 고로다화는 요시오카전 보다 중립적으로 서술되어있고, 특히 본조무예소전은 한 쪽 의견만 싣지 않고 다양하게 일화들을 수집하여 같이 올려 놓는 등 검술역사 사료로는 가치가 높은편입니다. 하지만 무사시의 이름이 마사나였다고 틀린 정보를 적기도했고, 무사시와 요시오카가 무승부였다는 이설의 1차사료는 1680년에 나온 요시오카전이라서 본조무예소전의 기록들을 모두 틀림없는 사실이다라고 믿는 건 섣부른 판단이죠.

이설을 다룬 기록들에서 세이쥬로로 추정되는 인물은 제각각이고 대결 과정도 조금씩 다르지만 일관되게 요시오카와 무사시가 무승부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린 이유로 무사시측이 주장하는 요시오카 일문 멸문설은 거짓이 되며, 아래 서술 할 사루가쿠 흥행 사건 시기까지 요시오카류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기록들을 근거로 내세우죠.

사루카쿠 흥행 요시오카 폐문사건은 스루가고사록에서 자세한 정황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여기선 요시오카전에서 등장하는 나오츠나 대신 요시오카 세이지로 시게카타란 인물을 요시오카류의 겐보(당주)라고 설명합니다. 요시오카전은 나오츠나, 나오시게 형제를 이어 세이지로를 3남이라고 서술하지요. 또는 이복형제라고도 적습니다.

이 세이지로는 인격적으로 결함이 많은 문제아인데요. 쿄토 방언으로 히츠코이라는 말이 있는데, 집요하다란 뜻인 시츠코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거기에 정도가 지나치면 도빗코이라고 표현했는데 교토 주민들은 세이지로를 도빗코이라고 부르며 몹시 혐오하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만큼 세이지로가 쿄토 주민들에게 끼친 해악이 컷기에 한 유파의 당주라기엔 자질이 부족한 자였죠. 창작물에서 세이쥬로의 주색잡기한량과 덴시치로의 난폭한 무법자 같은 성격은 세이지로의 성격을 참고한 듯 합니다.

치안을 담당하는 쿄토쇼시다이에선 골칫덩어리인 세이지로를 벼르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침내 일이 터졌습니다. 1614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히가시야마 산 대불전을 건립한 기념으로 사루카쿠 흥행이란 축제를 개최합니다. 아울러 통행이 금지되던 구역도 민간에게 개방하였는데 세이지로가 사루카쿠 공연을 관람하던 도중 축제 경호를 담당하는 자와 시비가 붙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칼을 뽑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소식을 듣고 격노한 쿄토쇼시다이 소장 이타쿠라 카츠시게는 부하 오타 츄베를 보내서 세이지로를 죽이도록 명령했고, 세이지로는 오타츄베와 결투 끝에 참살당했습니다. 검술도장은 폐쇄당했고 당주도 잃게되어 4대째 이어져온 요시오카 일문은 끝내 멸문하고 맙니다.

이상이 스루가고사록에 기록된 요시오카류의 멸문과정인데요. 본조무예소전과 요시오카전에선 다른 내용을 전합니다.

본조무예소전에선 사루카쿠 흥행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세이지로가 아닌 마타사부로라고 되어 있고, 같은 장소에 있던 요시오카 일족들이 가세하지 않은 걸 감안하여 사건을 불문에 부쳐 유파의 명맥이 계속 이이졌다고 합니다.

요시오카전안 앞서 말했다시피 세이지로와 겐자에몬 나오츠나가 다른 인물로 나오는데요. 사루카쿠에서 살인을 세이지로가 저질렀고 도장은 폐쇄되었으나, 나오츠나, 마타이치 형제는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이후 두 형제는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도요토미 측에서 종군하다가, 오사카 성이 함락당하자 쿄토로 돌아와서 염색공방을 차렸다고 하네요. 항간에 떠도는 야사로는 명나라에서 건너온 이삼관이란 사람에게 염색 기술을 배워서 겐보이로라는 새로운 염색 방법을 창안했다고 합니다. 검술말고도 상업에 재능이 있었는 지 양심적인 가격으로 품질 좋은 염색직물을 판매해서, 많은 부를 축적했다고도 하죠.

위 기록들을 보면 요시오카 일문이 무사시와 시합을 한 뒤에도 멸문당하지 않고 1614년까진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근거삼아 무사시측의 기록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그 주장을 믿기엔 기록간에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일단 이해하기 쉽게 표로 정리하였으니 보도록 하시죠.

image.png

이설을 다루는 사료들의 문제점은 첫째, 세이쥬로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여러명이며 정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둘째, 스루가고사록에선 당주 세이지로가 죽어서 멸문당하지만 요시오카전에선 세이지로는 당주가 아니라 3남 이었으며, 당주 겐자에몬 나오츠나는 살아남아서 염색집으로 전업했다고 합니다. 서술에서 모순이 발생하고 있죠. 셋째, 본조무예소전에선 당주가 마타사부로이며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도 용서 받아서 유파는 존속되었다고 나오지만, 요시오카전에선 도장이 폐쇄되고 직업을 바꿨다는 겁니다.


더욱이 본조무예소전과 고로다화의 원사료인 요시오카전이 무사시에 관한 정보가 전부 다르고, 요시요카에게 편향적인 서술을 하며, 책이 만들어진 이유 또한 요시오카 유파의 기록을 남기려는 게 아니라 염색상인 요시오카 가문의 유래를 밝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사료로써 가치가 떨어진다는 거죠.


현실이 이런데 국내에선 무사시측 기록은 과장되었다며 평가절하고, 요시오카측 기록은 기정 사실인 것처럼 인용합니다. 무사시측 기록을 비판하는 기준이라면 얼마든지 요시오카 측 기록도 말이 안된다고 깎아내릴 수 있습니다. 이는 검호들의 기록체계를 몰라서 생기는 오해로 각 검호들의 가문과 문파의 기록에만 의지해야하기에 사료간에 정보가 차이 날 수밖에 없으며, 교차검증 할 수단 또한 극히 적을 수밖에 없지요. 개인적으론 다른 왕조 국가 사서처럼 에도 막부가 검호와 검술 정보를 수집해서 정사로 편찬해줬으면 이런 논란이 생기는 일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료들을 읽다보면 중구난방한 기록 때문에 복잡해서 머리 아파요. 자치통감처럼 권위있고 신뢰도 높은 역사서가 있으면 참 좋을텐데 말이에요. 아쉽습니다.


통설과 이설을 종합해서 미야모토 무사시와 요시오카 일문 간에 있었던 시합 결과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무사시측 기록대로 요시오카가 멸문 당한 건 과장이지만 승부에서 이겼다고 주장할만한 성과는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무승부는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죠. 결론은 저의 주관이 포함되어 있으니 승부의 결과는 본문에 열거한 기록들을 보면서 각자 판단을 내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연재는 통설을 따라 무사시가 요시오카에게 승리한 역사로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4대째 이어져온 아시카가 쇼군가 검술사범역 일본제일검술 요시오카 일문은 공명심에 불타는 무사수행자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패배하여 멸문되고 말았습니다. 무사시는 아버지 신멘 무니로부터 이어져온 숙원에 종지부를 찍고 그렇게도 갈망하던 명성을 손에 쥐게 되었지만, 피비린내 나는 죽고 죽이는 나선에 허탈감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멈춰서기엔 무사시의 허기진 공명심은 채워지지 않았고, 요시오카보다 더욱 강하고 널리 명성을 떨치는 강적들을 쓰러뜨리길 원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은 야규 신카게류와 오노파 일도류. 두 강적들과 비교하면 요시오카 따윈 시대에 쓸려간 허깨비에 불과했습니다. 불타오르는 야망과는 다르게 무사시는 본인의 미숙함을 여실히 깨달았고 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한다고 굳게 결심합니다. 요시오카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판에 고작한 것. 무사시의 천하무쌍을 향한 여정은 계속됩니다.


무사시가 요시오카와 혈전을 벌이며 승리를 거머쥘 때, 부젠 고쿠라 지역에는 숨은 용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쥬죠류의 적통을 이어 받은 도미다류의 모든 검술을 깨우치고, 카네마키 지사이, 이토 잇토사이, 두 달인에게서 오의를 사사 받은 불세출의 기린아가 무사시의 여정 길 끝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간류 사사키 코지로. 무사시의 일생일대의 숙적이며 수 백년간 결투의 대명사로 이름을 남긴 간류지마 결투의 주인공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놀고먹고자고
20/06/08 19:59
수정 아이콘
옛날 검술이 어땠을지 정말로 효과가 있었을지
일본 사무라이들이 실제로 그렇게 잘 싸웠는지 궁금하네요

글 잘 봤습니다.
20/06/08 20:15
수정 아이콘
조선왕조실록에 왜인의 검술이 뛰어나니 받아들여서 활용하자란 기록을 보면 잘 싸우긴 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일뽕 물들어서 일본도랑 사무라이가 최강이다라는건 우스운 일이고요. 그냥 저는 검호들 생애는 옛날 무용담이고 검술은 전통 무술같은거라 생각합니다. 택견처럼요.
닉네임을바꾸다
20/06/08 22:34
수정 아이콘
(수정됨) 나름 그걸로 밥벌이 했다는 사람들이니 그 당시의 상황에는 맞겠죠...아니면 칼맞고 죽었거나 굶어 죽었거나겠죠...
최소한 전국시대에는 말이죠...에도시대부터는 몰라도 말이죠...
20/06/09 15:16
수정 아이콘
전국시대 말, 에도시대 초기는 검술이 융성하던 시기라 진검승부가 자주 벌어졌습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실전시합은 줄어들었고 도장 검술로 변화해갔으나 고류 검술들이 막부말 신선조, 시현류, 북진일도류등의 유명한 검객들까지 이어졌고 끝내 현대 검도로 완성되었으니, 에도시대 검술가들이 전국시대에 비해 저평가 받을 이유는 적다고 생각합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0/06/09 17:14
수정 아이콘
사무라이 계층이 칼만 찬 문인화 되었던 시기니...
사무라이들의 평균은 모르겠다는거죠...에도시대 검술가를 저평가한다기보다는...
강미나
20/06/09 00:01
수정 아이콘
좀 오버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게 에도막부가 들어오기 전까지 몇백년간 목숨을 걸고들 싸웠으니....
kindLight
20/06/08 20:53
수정 아이콘
직접쓰신 소설이라니.....진짜 엄청나게 몰입해서 읽었네요..
소설책이였다면 바로 샀습니다. 멋진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20/06/09 13:55
수정 아이콘
글 분량이 많아져서 올릴까말까 고민했는데 칭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요시카와 에이지 소설판에서 더 자세하게 나오니 옛날 소설이라도 괜찮으시면 일독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뒷산신령
20/06/09 13:12
수정 아이콘
이때 이야기 참 좋아하는데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20/06/09 13:57
수정 아이콘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장문의 글이 되었는데 귀중한 시간을 들여서 읽어주니 감사하네요. 검객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을 만나니 무척 반갑습니다.
기록가
20/06/09 14:58
수정 아이콘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처음에 작성하신 글 보고 오랜만에 베가본드 보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요시오카 일가 70여 명이랑 싸움이 끝난 부분까지 봤는데 이번 글까지 읽으니 재미가 더해지네요.

미야모토 무사시가 끝나면 막부 말기 때 사무라이 이야기들도 다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학창시절, 바람의 검심 보고 난 후에 신선조랑 가와카미 겐사이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필력이랑 글 구성 보니 정말 재밌게 볼 수 있을 거 같아 기대됩니다!
20/06/09 15:09
수정 아이콘
무사시 다음엔 야규 신카게류와 일도류 검객들 이야기를 다룰 예정인데 에도시대 검호 이야기가 끝나면 막부말 신선조 검객 관련 글도 적어보겠습니다. 긴 글을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06/09 16:02
수정 아이콘
글로만 전해지니 진위여부가 불분명하여 오히려 더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생겨서 좋네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20/06/09 16:32
수정 아이콘
무사시 요시오카 양측 사료에서 주장하는 기록들을 맹신하지 않고 비교해보면서 읽어보면 상상력이 자극되서 곱씹는 맛이 있죠. 그래도 무사시와 무사시가 대결을 벌였던 상대들은 일본 역사에서 등장하는 다른 검객들보다 기록이 풍부한 편입니다. 목숨 걸고 싸워서 이긴 쪽은 승자로써 기록을 남기고 패배하여 유파가 사라진 쪽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잊혀져갔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6652 [일반] 프로야구 로봇심판의 등장과 야구의 미래 [66] BTK10188 20/06/10 10188 7
86651 [일반] 연기(Acting)를 배우다 [3] 개롱7213 20/06/10 7213 19
86650 [일반] 어제 있었던 일. [11] 공기청정기7156 20/06/10 7156 5
86649 [일반] 이재용 구속영장 기각, 법원 "구속 필요성 소명 부족" [189] KNIC14749 20/06/09 14749 11
86648 [정치] "취중범죄 감형 막겠다".. 서영교 '음주감경폐지법' 발의 [52] 감별사11503 20/06/09 11503 0
86647 [일반] [검술] 끼요오오오오오옷!!!!! 예능인가 실전인가? 시현류 [30] 라쇼14758 20/06/09 14758 5
86646 [일반] 아버지의 조언 [11] 부대찌개10322 20/06/09 10322 1
86645 [일반] 해외선옵 마진콜 걱정없이 산 모투 종목들만 올랐네요. [112] 소오강호15221 20/06/09 15221 2
86644 [정치] 임차인의 주거안정성도 중요합니다. [209] KBNF18973 20/06/09 18973 0
86642 [일반] 보이스 피싱이란게 무섭네요. [39] aMiCuS10651 20/06/09 10651 3
86641 [정치] 이번 정권은 전세를 없애려고 하는 것일까요? [185] 時雨18806 20/06/09 18806 0
86640 [일반] 역사적 전고점을 돌파한 나스닥과 광기의 미국장 [48] 맥스훼인11192 20/06/09 11192 2
86639 [정치] 북한 "오늘 12시부터 모든 남북통신연락선 차단·폐기" [129] 及時雨16374 20/06/09 16374 0
86638 [일반] [개미사육기] 신사육장 언박싱 (사진있어요, 개미없어요) [30] ArthurMorgan8097 20/06/09 8097 23
86637 [일반] 내 몸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19] 푸끆이11015 20/06/09 11015 2
86636 [일반] MBTI와 성격검사,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는 법.. [51] Restar9224 20/06/09 9224 16
86635 [일반] 사람들은 왜 재료를 여러 종류 때려넣는가 [17] 미원7635 20/06/08 7635 2
86634 [정치] 예전에 게임 사러 시내에 가는 길이었는데 말이죠. [30] 공기청정기8698 20/06/08 8698 0
86632 [일반] [자작] 뻥튀기를 만드는 마이스터를 위한 안내서 1# ~만화보다 소설에 조금 더 가까운 이야기~ [6] 태양연어5053 20/06/08 5053 5
86631 [정치] 잡설]]그래도 민주당 찍을꺼야? [119] 움하하13316 20/06/08 13316 0
86630 [일반] [잡담] 최고의 글쟁이...계속 글 써주시면 안될까요. [9] 언뜻 유재석7966 20/06/08 7966 5
86629 [일반] [검호이야기] 배가본드(2) 일본제일검 요시오카를 멸하다 [14] 라쇼10080 20/06/08 10080 14
86628 [정치] 조선일보의 '바로 잡습니다' 근황. [72] 감별사12678 20/06/08 12678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