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지방법원 제3별관 205호 법정에서 오후 2시 20분 재판을 마치고, 소화초등학교 앞 정류장으로 가 5422번 버스를 기다린다. 귀에 꽂은 한 쪽 패킹이 빠진 낡은 이어폰에선 아재감성이 짙게 묻어나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보통 날이네요 어느새.. 뭐 이런 노래들 말이다. - 사무실에서 재판 시작 1시간 30분 전에 나와 강남역으로 가서 5422번 버스를 타고 소화초등학교에서 내린다. 재판을 한다. 다시 5422번 버스를 타고 강남역으로 와서 지하철을 혹은 740번 버스를 타고 사무실로 간다. - 신분당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나의 수원 재판루틴은 항상 일정했다. 한 달에 적으면 한 번, 많으면 예닐곱번씩. 그렇게 5422번 버스는 내 수원재판의 영원한 동반자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신분당선 광교연장노선이 개통되면서 내 루틴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분당선 연장선이 개통되었는데 한 번은 타봐야지.’ 라는 야매 철덕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자그마한 일탈에 불과했다. 그런데 은근 신분당선을 이용해 보니 적잖이 편하더라는 것이다. 5422번 버스는 수원에 갈 때야 좋지만 올 때는 교보타워사거리를 거쳐 다시 강남역까지 오느라 시간이 한참 걸린다. 그 뿐이 아니다. 강남역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740번 버스정류장이나 강남역까지 걸어가는 것도 여름에는 엄청난 고역이다. 강남역의 그 인파를 생각해보라!
그에 비해 신분당선을 이용하면 광교중앙역에서 강남역까지 30분도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강남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는데 드는 노력은 5422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다시 지하철이나 740번을 타기 위해 들이는 노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편하고, 시원하고. 그렇게 언젠가부터 – 아마도 날이 점점 더워지던 올 5월쯤부터 – 나는 수원을 갈 때는 5422번을 타고, 수원에서 돌아올 때는 신분당선을 타는 이중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럴 생각이었다. 5422번 버스를 타고 광교중앙 환승센터에 내려서 다시 신분당선을 탈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버스에 타자마자 의뢰인에게 급한 전화가 왔고, 통화에 집중하다 보니 광교중앙역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간만에 느긋하게 드라이브나 즐겨볼까. 어제는 잠도 충분히 잤다. 평소 같으면 버스 안에서 늘 부족한 수면시간을 보충하지만 오늘은 창밖을 감상하면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겠지.
버스는 열심히 달린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신갈인터체인지를 놀이기구 타듯 삥 한 바퀴 돌아준다. ‘아주 스릴 만점이야.’ 생각하는 순간, 창밖으로 나지막한 아파트가 몇 동인가 눈에 들어온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아파트. 그래, 난 저 아파트를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잘.
10년도 전에 나는 너를 매일같이 저 나지막한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고는 했다. 사실 데려다 준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늘 너의 차를 타고 저 나지막한 아파트까지 갔던 거니까. 그래도 난 내가 널 데려다줬다고 생각한다. 매일 새벽까지 힘든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네가 혹시나 졸지는 않을까, 집 근처에서 위험한 일이라도 있지는 않을까 하고 너의 옆자리에 앉아 여기까지 왔던 거니까. 너의 아파트에 도착하는 시간은 늘 새벽 3시 아니면 4시. 너를 집에 들여보내고 나서 나는 첫 차가 올 때 까지 하염없이 서울방향으로 걸어가곤 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냥 걸었다. 너와 함께여서 설레었던 시간들을 곱씹어 마음으로 소화시키며.
어느 날인가는 조금 일찍 널 데려다주기도 했다. 밤 12시쯤 널 데려다주고 서울 가는 버스를 탄다. 양재에서 내려보면 지하철은 이미 끊겨있었다. 그 때도 난 터벅터벅 마냥 걸었다. 양재에서 신림까지,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너는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널 데려다주고 마냥 정처없이 거닐던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걸.
그래, 그 때 나는 너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런데 널 사랑한다는 걸 깨닫기에는 내 마음에 빈자리가 너무 없었다. 너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너는 눈부신 햇살이 보드랍게 천변의 버드나무들을 어루만지는 늦가을 풍경을 보고 말했다. ‘언젠가 이 풍경도 우리에게 잊혀지는 걸까.’ 아마도 아닐 거야. 너의 나지막한 아파트를 바라보며 혼자 되뇐다.
맞다. 내가 5422번 버스를 타는 건 너를 데려다 주던 그 아파트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 않겠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한 달에 적으면 한 번, 많으면 예닐곱 번의 추억팔이가 지친 내 삶을 위로해준다면 - 내가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소한 진실 따위는 잠시 잊어도 되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도 그 때의 나는 너를 훨씬 더 사랑했었다는 것도.
아마 한 동안은 다시 5422번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오게 될 것 같다. 아마도 한 동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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