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아주 쪼~~~끔 야할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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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앙, 흐----!"
채널 버튼을 황급히 꾹 누른다. 들었을까? 아 소리 엄청 컸는데, 물소리에 못 들었겠지? 못 들었을거야. 근데 들었으면 어떡하지? 뭐라고 변명하지? 머리가 아주 복잡해진다. 긴장한만큼 남자는 어려진다고 했던가, 고등학생때만큼도 평정심이 유지가 안되는 자기 자신이 한심하다. 물 소리가 끊기고 그녀가 나온다. 애써 태연히 뭔가 재밌는 것을 찾는 척 하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본다.
"보던거 마저 틀지? 일부러 티나게 채널 돌리지 말구"
역시 들렸구나. 하긴 방 사이에 방음이나 좀 신경 쓰지 화장실하고 TV 사이 방음에 신경 쓰는 모텔이 세상에 어딨겠어.
"보던거? 나 TV 방금 틀었는데? 뭐 재밌는거 하나 찾아볼라고 글쎄 요새 냉부에 오세득이 나오는데..."
"난 아까 니가 처음에 보던게 재밌을거 같은데, 그거 싫어?"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면 그건 거짓말일것이다. 중학생들도 이러려고 한게 아니라는 변명은 양심에 찔려서 못할만큼 명백히 이렇게 전개될법한 상황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속인다. 이러려고 한건 아니었다고.
일이 왜 이렇게 된걸까? 애초에 나는 뭘 위해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걸까? 기억을 되짚어본다.
3.
"아! 똑바로 걸어라 좀! 2년간 뭘 하고 다녔길래 한잔 마시기도 버거워 하던 애가 이렇게 술고래가 됐냐? 3D 직종 맞나보네."
"똑빠로! 껄으라꼬! 쫌!! 킥킥킥킥킥 너 말하는거 지금 겁나 웃기는거 알아?"
기집애가 지 몸 하나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입은 술먹기 전이랑 똑같이 아주 청산유수다. 내 기억의 상자에는 없는 신선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 오래된 기억의 그림자 때문인지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떠올리지 말아야지, 잊어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 속 한 구석 깊은곳에 꽁꽁 싸매 쳐박아둔 그것, 이렇게 금방 다시 들여다 볼 일이 생길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최소 5년은 지난후에야 조심스럽게 꺼내볼 수 있을줄 알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욱 더 놀랍다.
"헛소리 말고 빨리 정신 좀 챙겨라 그래 가지고 택시타는데까지 어떻게 갈래? 아니 그러게 콜 택시 부르자니까 됐어~ 됐어~ 되긴 뭐가 되니"
"택~~시? 택시타고 어디로 갈건데?"
"어디로 가긴 뭘 어디로 가 숙소로 가야지 그럼 집에 갈래? 너 교육 마저 안 받을거야? 나야 선배 곁가지로 온거지만 넌 들어가야지"
"응~ 그럼 지금 이 시간에~ 너하구 나하구 아까 밥먹고 잠깐 얘기 좀 하러 온다고 나가서는 잔~~뜩 취해서~ 같이 택시타구 숙소로 가잔거네? 자신있나 자네?"
듣고보니 옳은 얘기다. 택시타고, 내려서 나 혼자 얘를 데려다 줄 수도 없으니 선배나 최주임님을 불러야 할텐데, 이 시간에 이렇게 만취해서 들어가는것도 민폐도 민폐고, 백프로 이상한 눈초리를 받게될것이 확실했다.
"야 그럼 각각 따로따로 택시 타고 들어가. 그럼 되지. 너 바로 전화해서 주임님 부르고. 그럼 되지"
"나 이러케 취햇는데 혼자 택시타구 들어가라구? 그랬다가 나 어떻게 되면?"
대화의 흐름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명백해진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연락안하고 둘이 나가서 안 들어오는것부터가 이미 아무 일 없었던걸로 수습하기 불가능한거 아닌가? 애초에 비박도 아니고 1박 합동 워크샵이라니 대체 이런 머저리같은 행사는 누가 기획한걸까. 이런거 공무원들이나 하는거 아니였나?
정말로 이렇게 말같지도 않은 일이 존재한단 말인가?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걸까? 기억을 더 되짚어본다.
2.
"둘이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였나?, 그런거 치고 니들 진짜 어색해 보이는데~ 무슨 단순한 동창이 만나서 그렇게 어색하게 얼어있냐?"
"OO씨가 잘생기고 젊은 교수님들이랑 있을때도 태도가 아주 칼같아서 별명이 얼음공주인데, 그렇게 당황한 모습 거의 처음봤어~"
아저씨 아줌마 둘이 내버려두니까 대화가 어디까지 흘러갈지 도통 모르겠다. 주임님이야 사실 진짜 연배가 좀 있으시니 몰라도, 선배는 아직 결혼도 못 한 사람이 말하는건 아주 아저씨가 다 됐다. '저러니까 결혼을 못하지' 하는 저주에 가까운 생각을 속으로 씹어 삼키며, 억지로 수습을 시도해본다.
"그러니까 연락이 끊긴지 한참인데 우연히 여기서 만나서 놀라서 그랬다니까요. 사회 생활 하다보면 그렇게 연락 끊기는거 한두번이에요?"
"나는 그러면 놀라는것보다 그냥 반가울거 같은데? 산 사람 다시 만나는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이라고. 한국땅이 얼마나 좁은데. 니 반응은 거의 죽은줄 알았던 사람 다시 봤을때 딱 그런 반응이었다."
"OO씨, 말 좀 해봐~ 안 좋은 일 있었어도 뭐 이제와 다시 만난거 다 풀면 되지~ 진짜 심각한 일이면 이렇게 밥 먹으러 같이 나오지도 않았을거 아냐, 응?"
나보다 더 난처해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언제나 잠깐의 도취와 말초적 쾌락을 제공하는 대신 장기적으로는 안 좋은 결과만을 불러오는 남자의 핵존심이 작동한다. 핵존심은 나에게 얘기한다. '니 남자가 되서 지금 뭐하나! 니가 희생해서라도 멋있게 수습해야지. 이 분위기 이렇게 계속 냅둘거야? 좋은 머리 뒀다 뭐할래? 어떻게 대답해야 너 빼고 모두에게 좋은 방향인지 알잖아. 딱 말해라. 남자답게.'
에휴 너 그거 성차별적 발언이야. 내심이라고 매장 안 당하니까 함부로 말하네. 근데 왜 저 제안이 이렇게 끌리는지 모르겠다. 평소 잘난척 이성적인 척 해봐야 결국 나도 한마리 짐승에 불과한것을,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것도 반성과 성찰의 한 단계라고 했던가, 에라 모르겠다. 이상하게 말해도 괜찮을거 같은 용기와 자신감이 생긴다.
"제가 귀찮게 굴다가 차이고 서먹서먹해졌어요. 그러다 연락 끊어졌구요. 하 사람 진짜 비참하게들 만드시네. 됐죠. 이제 추어탕 좀 드시죠. 예?"
그렇게 나 하나 웃음거리가 되며 분위기가 좋아진다. 선배는 있지도 않았던 나의 사내 고백 실패담을 막 만들어내서 웃고 떠들기 시작한다. 기분이 아주 나쁜것은 아닌데 이 상황이 잘 이해가 안간다. 아니 교육 연수 받으러 워크샵온거잖아. 이렇게 따로 나와서 밥먹고 막 나가도 되나 이 사람들?
무슨놈의 워크샵이 이렇게 사람들 마음대로 풀어놓지, 나는 어떻게 여기서 이러고 있는걸까? 기억을 조금 더 되짚어본다.
1.
세상에 공짜는 없다. 평소에 막역하게 지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경제 관념은 있는 사람인 선배가 뜬금없이 '여름날, 남자 둘이, 평일에 시원하게 피서를 다녀오자, 돈은 다 내가 낸다!' 라는 제안이 함정이라는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다. 그러나 더위는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당시 나는 너무나 더웠다. 최소한 평일에 가자는것만이라도 이상하게 생각했다면,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다.
"선배, 여기 정말 좋네요. 정신병 걸릴거 같이 새하얗고 각진 콘크리트 건물, 딱딱하게 정장차려 입고 온 모르는 사람들 천지에 여름이 아니라 천국이네요 천국"
"마 밖에서 딱딱하게 선배가 뭐야. 편하게 불러라, 그리고 에어컨 빵빵하고 시원하잖아. 돈 한푼 안내고 일 안하고 휴가 안쓰고 이렇게 시원하면 좋은거 아니겠나"
"예 그럼 편하게 부를게요 종민씨. 시원하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건물에 구경할것도 단 하나도 없는데 빨리 강당 들어가시죠."
커피 한잔만 뽑아 온다는 종민씨이자 선배의 이야기를 나의 커다란 분노를 보여주기 위해 들은체만체 무시하고 강당에 들어간다. 이미 참 많은 사람들이 와 있다.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지나가다 회사에서 본 것 같은 익숙한 얼굴도 몇 보인다. 자리가 특별히 정해져 있는것 같지는 않았고, 의자가 생각보다 크고 넓은것 하나는 만족스러웠다.
'참 말 같지도 않다. 월요일 아침부터 이게 뭐하는 짓이야'
사무실도 에어컨 나오고 내 자리에는 디퓨저도 있고 컴퓨터도 있는데... 커피사러 간 사람이 야속하지만 대충 자리잡고 앉는다.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저기 혹시... MM대 나온 OOO씨 아니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먼저,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 2년전 아픈 기억속으로 묻은 그대로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렇게 석상처럼 멍하니 굳어버렸다.
0.
'전원이 꺼져있어, 삐 소리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같은 멘트를 3일 사이에 대체 몇번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마음은 이미 현실을 직시한지 오래인데, 손이 자꾸 멋대로 덧없이 통화 버튼을 누른다. 거의 모든 정황 증거가 그녀가 나와의 연을 끊고 싶어함을 나타내고 있다.
대체 왜 지금? 대체 왜 이렇게? 한없이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아무리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때 그녀와 나의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던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행복한 저녁을 보내고, 밤을 함께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좋아해줘서 고맙다고, 너하고 같이 있으면 특별한 사람이 된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나를 떠났다. 그것이 그녀가 내게 보여주고 싶은 마지막 모습이었나보다.
그래, 그냥 걔가 이상한거야. 더 이상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자. 잊자. 그렇게 그녀와 함께한 몇달간을 기억의 한 켠에 묻기로한다. 내 인생에 2013년 가을은 없었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어처구니 없는 실연앞에서도, 나는 나 자신을 버릴 수 없었다.
5.
2년전 우리는 맨정신이고 어색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TV를 보던 눈빛이 서로를 향하고, 서로를 향하게 되는것이 눈빛만이 아니게 되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술 기운 탓에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가 펼쳐졌지만, 기분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행복했다. 그래, 행복했다는 표현이 가장 알맞을거 같다. 이 장면을 기억을 찍는 사진기로 찍고 싶을만큼. 나 혼자 보는게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행복했다.
아직 아침이 되지 않았는데 그녀가 본인의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한다. 뭔가 찾는게 있는것 같기도 하다.
뭔가 찾는게 있는것 같다고? 그럴리가 없잖아. 불안하니까 외면하고 있는것뿐이잖아. 내면에서 또 아픈 목소리가 들려온다. 설마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진행된 내 불길한 예감이 단 한번이라도 틀린적이 있던가?
"앞으로도, 계속 나 좋아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