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의 시작은 1861년 4월 12일, 남부 내에 있는 연방군의 기지를 공격하면서부터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섬터 요새였죠. 링컨은 이런 요새들의 사수와 남부 [반란]의 진압을 위해 공격을 명령합니다. 이 과정에서 버지니아주 등 4개 주가 남부에 가담했고, 수도도 버지니아주의 리치몬드로 바뀌었죠. 한편 노예폐지 여론이 강했던 서쪽은 아예 분리돼 almost heaven 웨스트 버지니아주가 돼 연방에 남습니다.
북부가 유리한 것은 많은 인구와 생산력이었습니다. 군수물자뿐만 아니라 군량에서도 남부가 불리했죠. 남부가 농업 중심이라 한들 그건 상품작물 중심이었거든요. 하지만 전쟁 초기엔 이게 크게 드러나지 않았죠.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전시에 돌입했으니까요. 그 가공할 생산력을 보여주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반면 남부에는 우수한 장교진이 있었습니다. 남부 상류층은 마치 영국 귀족처럼 행동했고, 군 문제에서도 그랬죠. 장교로 입대했던 많은 남부 출신들이 전쟁이 벌어지자 남부로 돌아가서 지휘합니다. 당시 미국의 정규군은 16000에 불과했습니다. 애초에 민병대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외부와의 전쟁이 다 끝난 상황이었으니 군대가 많을 수 없었죠. 이렇게 병사들의 질이 같이 낮은 상황에서 남북 모두 대군을 긁어모으고 있었습니다. 이러면 장교진의 능력차이가 클수밖에 없죠.
+) 뭐 그렇다고 상류층들이 다 열심히 군대 가거나 한 건 아닙니다. 부자들이 군대 빼려고 한 건 남북 다 마찬가지였죠
북부의 목표는 남부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 구체적으로는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남부는 이제 막 대통령을 뽑고 의회를 준비하는 상황이었으니 빨리 끝낼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한편으로는 미시시피강을 점령해 남부를 반으로 가르는 아나콘다 작전을 도입했고, 북부에 그대로 흡수된 해군을 이용해 해상봉쇄를 시도합니다.
미 해군의 철갑선 아이언사이즈
이 해상봉쇄는 성공해서 갈수록 남부의 항구가 다 봉쇄되게 되었죠. 특히 철갑을 덮어씌워 위에는 송곳을 박... 진 않았고 방어력을 극대화시킨 철갑선도 큰 활약을 했습니다. 해상봉쇄에는 속도가 느린 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남부에서도 철갑선을 동원했고, 최초의 철갑선끼리의 해전도 벌어집니다.
남부에서 썼던 철갑선 마사나스호. 특이하게 생겼죠?
남부에서는 자기들의 수출품인 면화를 수입하지 못할테니 영국과 프랑스 등이 자기 편을 들 거라 생각했지만, 영국에서는 그냥 이집트에서 생산량을 늘려서 면화 부족을 이겨냅니다. (...) 여기에 링컨은 열강이 남부 편을 들지 못할 명분을 꺼내들었으니... 그 얘기는 아래에 하죠.
버지니아주, 남부의 수도 리치몬드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는 북쪽에 있었구요. 거리가 가까웠으니 금방 점령해서 종전을 노렸습니다. 반면 남부에서도 쉽게 워싱턴을 노릴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지만요. 시작할 때까지야 북부에서는 금방 이길 수 있을거라 생각했고, 남부에서는 방어에 집중해서 워싱턴을 노리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 곳에서 많은 전투가 벌어지고 이목이 집중됐으며, 결정적인 전투들도 이 곳을 중심으로 벌어집니다. 북부에서 버지니아를 공격했던 군을 강의 이름을 따서 포토맥군이라 불렀고, 남부에서 이를 막는 군을 북버지니아군이라 불렀습니다. 양측의 주력이었죠.<br /><br /> 북부의 주 목표는 리치몬드로의 직공, 이 해 7월에 벌어진 첫 공격에서 3만 5천여명의 북군은 2만 8천여명의 남군에게 패합니다. 1차 불런 전투라 불리죠. 이 때 여러 사람들이 당연히 이길거라 생각하고 전쟁을 [구경]하러 왔는데, 패잔병들이 후퇴하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빠져서 다함께 도망쳐 왔다고 합니다. 이 전쟁이 간단히 반란군들을 토벌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준 전투였죠. 북부에서는 다시 노예제를 없애려는 게 아니라 연방의 분열을 막는 거라면서 타협책을 제안할 정도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토머스 잭슨은 다른 남군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버텼고, 결국 반격하여 승리하는 데 큰 공을 세웁니다. 그래서 스톤월(돌벽-.-;)이라는 별명이 붙었죠. 기동전으로 이름 높아서 그가 이끄는 병력은 걸어다니는 기병대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봄이 되면서 북부는 새로운 공세를 준비합니다. 수륙협공이었죠. 포토맥군을 이끌던 조지 매클렐런은 (워싱턴이 위험해질수 있기에) 반대하는 링컨을 설득해서 주력군을 리치몬드의 남동쪽에 상륙하는 작전을 폅니다. 십여만을 동원한 대규모 상륙작전이었죠. 버지니아 반도에서 벌어졌기에 이 지역에서의 전투를 한데 묶어 [반도 전역]이라 부릅니다.
+) 문명 5 남북전쟁 시나리오를 해 보시면 리치몬드 남동쪽 해안에 북부 땅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 '-')
한편 육상으로도 두 군데에서 육만여명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톤월 잭슨은 만칠천여명의 병력으로 북군에게 승리하면서 워싱턴 D.C가 공격받을 위험에 병력이 묶이게 됩니다. 3월부터 6월까지 벌어진 전투들을 묶어서 [셰넨도어 계곡 전역]이라 부릅니다. 링컨으로서는 당연한 조치였지만, 매클렐런으로서는 안타까운 소식이었죠.
그런 가운데서 매클렐런은 리치몬드로 꾸준히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바다에서는 (위에서 썼듯 철갑선끼리 싸우기도 하면서) 북군이 승리하면서 포함들이 강을 거슬로 올라갔고, 육군도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진격해 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군의 사령관이던 조지프 존스턴이 중상을 입습니다. 그렇게 진격해갔지만 6월 초에 리치몬드를 앞에 두고 멈추게 되었죠. 그로부터 약 1개월간 북군은 멈춥니다. 그 동안 남군은 리치몬드의 방어를 더 강화해 가면서 반격을 준비합니다.
좌측은 매클렐런입니다.
이 때 새로 남군을 맡은 것이 바로 로버트 리입니다. 그는 6월 말부터 북군의 기병대로 북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등 과감한 작전을 폈고, 불과 일주일만에 북군을 몰아냅니다. 이른바 [7일 전투]입니다. 이렇게 북군은 반도에서 물러났고 리치몬드를 노린다는 전략 목표도 실패합니다. 그래도 남군에게 마지막까지 몰렸을 때 방어를 잘 해내 큰 피해를 주어 남군이 더 피해가 큰 전투가 됩니다.
한편 링컨은 계곡 전역의 패배가 지휘권의 문제라고 생각해 각 병력들을 모아서 버지니아군을 창설합니다. 한편 매클렐런이 너무 소극적으로 공격한다고 생각해 (포토맥군은 그대로 맡기고) 총사령관을 바꾸죠. 그런 가운데 남군은 진군합니다. 포토맥군과 버지니아군이 합류하기 전에 공격한 것이었죠. 버지니아군(6만)만으로도 남군의 북버지니아군(5만)보다 많았고 리는 병력을 반으로 쪼개 스톤월에게 우회기동을 하게 합니다. 8월 말에 벌어진 이 2차 불런 전투도 남부의 승리로 끝이 났고, 존 포프가 이끌던 버지니아군은 큰 피해를 입고 워싱턴으로 병력을 돌립니다. 이렇게 버지니아에서 북군을 다 쫓아냈죠. 남부는 이제 북진을 시도합니다.
62년 9월 초, 리는 북부를 침공합니다. 경계주였던 메릴랜드주로 들어선 것이었죠. 군악대에게 "메릴랜드, 마이 메릴랜드"라는 곡을 연주하게 하면서요. 노예주지만 연방에 남은 경계주인만큼 남부편을 들 거란 기대를 한 거였습니다. 하지만 남부의 지도자들이나 리가 바랐던 것과 달리 메릴랜드인들은 동조하지 않았죠. 어쨌든 메릴랜드주의 요충지를 점령해 나갑니다. 북군에겐 그동안 큰 피해를 줬고 매클렐런이 그동안 소극적으로 나왔으니 맞설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헌데 의외의 일이 일어납니다. 남군의 계획이 담긴 사본이 북군의 손에 들어가 버린 것이죠. 남군은 4만 5천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리는 급히 병력들을 모아서 북군에 맞섰습니다.
한편 매클렐런의 포토맥군은 버지니아군을 흡수해 예상보다 빠르게 재건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클렐런은 정보를 접하고도 18시간이나 아무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남군이 모일 시간을 줍니다. 그랬음에도 전투가 벌어졌을 때 리가 이끌던 병력은 2만여, 북군은 그 세배였고 최종적으로 8만 7천의 대군이 모입니다. 9월 17일, 리는 아군이 오길 기다리며 포토맥강에 배수진을 치고 버텼고, 북군은 그런 남군을 공격합니다.
이것이 앤티텀 전투입니다. 이 날 북군의 피해는 만이천사백여명, 남군의 피해는 만삼백여명입니다. 합쳐 이만삼천여명으로 남북전쟁은 물론 미국 역사에서 하루에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전투라고 합니다.
양쪽 다 차례차례 증원군이 도착했고, 남군은 마지막 남은 예비대까지 쏟아부어 겨우 막아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전투를 치를 여력은 없었습니다. 전투를 끝내고 양측은 부상자를 교환했고 임시휴전을 맺었고, 리는 포토맥강을 넘어 군을 퇴각시킵니다. 이렇게 앤티텀 전투는 북군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각 전역에서 지엽적인 승리는 있었지만 실질적인 승리는 이번이 처음이었죠.
겨우 얻은 첫번째 승리, 링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애초에 북군의 승리 다음에 하려고 계획했던 것이죠. 9월 22일, 링컨은 노예해방을 선언합니다. 이 선언 때문에 이 전투가 과대평가되었다는 평도 듣게 되었죠. 그래도 남부의 북부 공격을 저지한 것이기에 남북전쟁의 분수령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만약 여기서 남군이 이겼다면? 혹은 위의 계획이 북군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IF도 나오죠.
하지만 승장인 매클렐런은 잘립니다. 애초에 적극적인 공격을 명령했던 링컨에 비해 매클렐런은 너무 신중했습니다. 반도 전역에서도 리치몬드 공격을 거부하고 1개월이나 시간을 끌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도 5만여명이나 되는 예비대를 전혀 쓰지 않았고, 전투가 끝난 후 증원군이 더 도착했음에도 휴전을 맺고 남군을 보내줬거든요. 병사들에게 인기도 많았고 작은 나폴레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능력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리도 그가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다고 회고했고, 각 전투에서 그에 대한 옹호론 (리의 능력을 생각하면 섣불리 진격했으면 당했을 것이다, 문서 하나 얻었다고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순 없다 등) 도 있습니다. 하지만 링컨이 바랐던 저돌적인 지휘관이 전쟁을 끝내버렸으니 그의 평가가 높아지진 않을 것 같네요.
매클렐런의 뒤를 이어 포토맥군을 맡은 것은 앰브로즈 번사이드였습니다. 소극적으로 나온 지휘관이 잘렸으니 신임이 해야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공격이죠. 11월, 그는 남군에 페이크를 친 후 빠르게 남진해 래퍼하노크강을 건너 프레더릭스버그를 점령, 리치몬드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목표인 버지니아주의 프레데릭스버그는 워싱턴과 리치몬드의 가운데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맞춰 주교(다리)가 도착하지 못 했고, 강이 불어서 건널수도 없었습니다. 남군에선 이를 알아채고 맞은편 고지에 방어선을 만들었고, 다리를 놓으려는 북군을 저격수를 동원해 막았습니다. 결국 11월 중반에 작전을 시작했는데 12월 12일이 돼서야 전투를 벌일 수 있었죠.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11만여명 중 1만 4천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남군의 피해는 5천여명 정도... 지도를 보면 당연한 결과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잘 준비된 방어선에 병력을 박아넣은 거니까요.
이 전투는 남북 모두에 큰 충격을 줍니다. 남부는 환희에 휩싸였고, 북부는 충격을 먹고 대통령과 군을 공격했습니다. 링컨 자신도 "지옥보다 더 나쁜 곳"이라면서 큰 절망에 빠졌구요. 번사이드는 이걸 만회하려고 1월에 다시 공세를 하다가 겨울에 진흙에서 행군하는 것으로 부하들의 반대에 부닥쳤고 물러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은 건 조지프 후커, [파이팅 조]라는 별명을 듣는 장군이었습니다. 포토맥군 아래서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죠.
봄 동안 그는 군을 재건하고 훈련했으며, 편제를 정비합니다. 5월이 되면서 새로운 작전을 짰죠.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남군을 묶어두고 기병을 우회기동해서 격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안개의 힘도 빌려 강을 무사히 건넜지만, 남군과 조우하자 아군을 후퇴시켜버립니다. 적을 보고 자신이 없어졌다는 평을 받습니다. 리는 그런 북군을 포위공격했고, 북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납니다. 북군의 피해 만칠천여명, 남군의 피해 만삼천여명이었습니다. 북부의 충격이야 말할 필요 없을 것이고, 다음 전투 전에 후커도 스스로 물러납니다.
그리고 이 때 남군에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니, 스톤월이 전사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아군의 오발로 말이죠. 이 다음 전투에서 남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그가 살아있었다면?" 하는 의문이 들게 하죠.
아무튼 이 전투로 남군은 다시 북진을 시도합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긁어모아서 말이죠. 지금까지 동부전선만 얘기하고 있지만, 서부전선에서 남군의 상황은 전혀 좋지 않았습니다. 미시시피강을 공략해 남부를 동서로 가른다는 아나콘다 작전, 그 곳의 요충지인 빅스버그가 포위돼 있었거든요. 이 곳에 구원군을 보내야 하는 상황, 리는 이 병력까지 다 긁어모아 워싱턴 D.C를 노리기로 합니다. 삼십육계 중 하나인 위위구조였습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남부의 한계는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이기고 이겨도 북부는 그 피해를 복구하고 언제나 남부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죠. 이런 상황에서 최선은 단 하나, 워싱턴을 공략해 종전협상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지난 전투들로 북부에선 반전 여론이 강해지고 있었으니까요. 20세기 중반의 어떤 섬나라가 원한 거랑 비슷하지만, 뭐 그때보다 상황은 훨씬 좋았습니다. 어쨌든 조금만 가면 워싱턴이었으니까요. 칠만오천, 북버지니아군을 최대로 강화한 병력이었습니다.
6월 초부터 7월이 오기까지, 양군은 지루한 탐색전을 계속합니다. 어느 쪽이든 쉽게 덤빌 수 없었죠. 이런 상황에서 남군에 여러가지 실책이 따릅니다. 북군의 기병대가 남군의 기병대를 공격했는데, 남군의 기병대를 이끌던 스튜어트는 북군의 공격에 분노해 정찰을 제대로 못합니다. 총은 이미 제법 발달한 상황, 기병의 임무는 기동력을 이용한 정찰이었습니다. 탐색전 동안 북군에 대한 정찰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 사이에 팔만삼천 정도의 북군이 게티즈버그 주변의 구릉지대에 자리잡습니다. 남군은 북군의 규모를 파악하지 못했죠. 이 한달간의 탐색전과 본 전투를 합쳐서 [게티즈버그 전역]이라 부릅니다.
이 게티즈버그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링컨은 후커를 자르고 새로 포토맥군 사령관을 임명합니다. 조지 미드였죠.
남군은 북군을 알아차리고 7월 1, 2일 이틀간 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패합니다. 북군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악착같이 고지를 지켜냈죠. 그리고 7월 3일이 됐습니다.
미드는 전날에 남군이 좌우익을 공격했으니 오늘은 중앙을 공격할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죠. 남군은 포병의 포격이 끝난 후 만이천오백명을 동원해 북군에게 돌격합니다. 이를 지휘한 조지 피켓의 이름을 따 [피켓의 돌격]이라고 명합니다.
위의 프레더릭스버그 전투가 그랬듯 북군은 고지에 방어준비를 완료하고 있었고, 남군은 평야에서 돌격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혹했죠. 돌격한 병력 중 절반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포로로 잡힙니다. 그래도 참 무서운 돌격을 벌여서 방어진지를 뚫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죠. 북군의 사상자는 천오백여명 정도였습니다.
피켓의 돌격이라 하지만 이걸 명령한 건 리였습니다. 이걸 지휘한 피켓, 그 상관인 롱스트리트도 리를 비난했다 합니다. 그리고 리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하죠.
"제군들, 나의 책임이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리 자신의 충격도 컸습니다. 총사령관을 물러나려 했죠. 제퍼슨 데이비스는 이걸 수리하지 않았구요. 어쨌든 남군에 그만한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마지막 날의 전투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렇지 게티즈버그 전역 자체에서 피해는 여전히 북군이 컸습니다. 미드는 승리하긴 했지만 칠월내내 이어진 전투에서 남군을 제대로 잡지 못했고, 북군은 삼만여명의 사상자를 냈죠. 하지만 남군의 사상자도 이만칠천여나 됐고, 남군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피해였습니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11월 19일, 링컨은 이 게티즈버그에서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지고 길이 남을 연설이었죠. 게티즈버그가 끝난 후 이 곳에 세워진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한 연설이었습니다.
+) 자 이걸로 넘어갈테니 추가설명글 올려주세요 ^_^)
승리한 건 미드였지만 역시 제대로 된 추격은 못 했습니다. 이후 남하해 리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두 번 다 패했죠. 링컨에겐 이 전쟁을 확실히 끝낼 사령관이 필요했습니다. 64년엔 그 자신의 재선을 건 선거도 있었고 말이죠.
북군이 계속 지고 있던 동부에 비해 서부에서는 전황이 유리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서부는 태평양 쪽이 아니라 미시시피강 쪽입니다) 장교진이 좋다 해도 동쪽에서의 얘기지 서쪽은 달랐거든요. 미주리주와 캔터기주에서도 격전이 계속됐고, 얼마 안 가 북군은 남부의 영역으로 침공합니다. 애초에 북군은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미시시피강 주변을 장악, 남부를 좌우로 갈라놓는 아나콘다 작전을 쓰려 했습니다. 링컨이 이를 승인하면서 (군부에서는 반대한)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동부에서 리치몬드를 빨리 점령하라고 명령했을 뿐이었죠. 미시시피강은 해군에 의해 이미 장악됐고, 남쪽의 도시 뉴올리언스도 점령했죠. 육군도 차츰 남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현 미시시피주의 빅스버그였죠. 남부의 요충지로 동부에 비해서 주목을 못 받았을 뿐 전쟁을 이기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략하기엔 너무나도 힘든 지형이었으니... 이 때문에 미시시피의 지브롤터로 불렸습니다.
원래 서부전선을 맡던 헨리 할렉은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 했고, 율리시스 그랜트에게 뒤를 맡기고 북군 총사령관이 됩니다. 그랜트는 62년 가을부터 윌리엄 테쿰세 셔먼에게 병력을 나눠주고 공격에 들어갔지만, 실패합니다. 63년이 되면서 다시 공략을 시도하죠. 이 때 남군의 서부전선을 이끌던 사령관은 조지프 존스턴, 리 이전에 동부를 맡던 이였죠. 그는 빅스버그 구원을 거부합니다. 동부와 달리 서부는 북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으니까요. 하지만 빅스버그를 지키던 존 펨버튼은 이를 거부하고 농성을 택합니다.
그랜트는 기병대로 남군의 시선을 끄는 사이 주력군을 강을 통해서 수송했고, 빅스버그를 포위합니다. 빨리 끝내기 위해 공격을 시도했지만 막혔죠. 결국 그랜트가 선택한 것은 말려죽이기였습니다. 봄부터 시작된 이 전역은 7월까지 이어집니다. 동부에서 이를 구원하기 위해 증원하려 했지만, 리는 증원군까지 북버지니아군에 합류시켜 북진했고 패배한 것이 게티즈버그 전투였죠. 이런 희망까지 사라지면서 게티즈버그 전투 다음날인 7월 4일, 펨버튼은 항복합니다. 전투 결과가 알려진 건 아니고 그 날이 독립기념일이라서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 것이죠. 이 때 항복한 것이 무려 3만여명, 그랜트는 이들을 먹여살리는 걸 포기하고 풀어줍니다. 남군에 다시 합류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다수가 다시 합류했고, 이후 북군은 웬만하면 포로를 풀어주지 않았다 합니다. 북부의 피해는 포위한 동안은 사천팔백여명, 봄부터 이어진 전역 자체에서는 일만여명이었습니다. 남군은 빅스버그를 제외하고 구천여명이었죠.
이렇게 아나콘다 작전은 성공했고, 미시시피강은 온전히 북부의 것이 됩니다. 율리시스 그랜트는 이 공으로 할렉을 대신해 총사령관이 되었고, 동부전선으로 가게 되었죠.
그는 동부로 가면서 서부를 윌리엄 테쿰세 셔먼에게 맡깁니다. 링컨이 원하던 공격적인 지휘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동에서 서에서 남쪽으로 달립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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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으로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DC에서 리치몬드까지는 정남방향으로 차로는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냥 쉽게 서울-대전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프레데릭스버그는 딱 그 가운데 있기 때문에 프레데릭스버그를 얻으면 여기부터 리치몬드까지는 차로 1시간 거리가 됩니다. 천안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네요. 또한 리치몬드부터 동부해안까지의 거리 또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차로 1시간이 약간 넘게 걸리는 정도입니다. 여기까지는 다 버지니아 주에 속하는 곳이고요.
게티스버그 경우에는 일단 펜실베니아 주에 있습니다. 워싱턴DC의 북쪽입니다. 위치상으로는 DC에서 제일 가까운 대도시인 볼티모어(한국 야구팬들에게는 익숙한 그 도시) 보다 더 위죠. 차로는 1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서울에서 개성보다는 멀고 평양보다는 가깝죠. 대략 가운데쯤 될 것 같네요.
남북전쟁 중 가장 중요했던 동부지역의 전투는 미국 땅이 넒고 넓음에도 불구하고 다 이렇게 한반도로 치환이 가능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서 벌어졌습니다.
어째 흐름이 태평양전쟁이랑 비슷한것 같네요.
초반에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전쟁에 들어가고
진주만 털리고 나서 겨우겨우 연명하던 태평양 함대가 몸빵하면서 물량 모으고
그 물량을 풀어버리면서 전역을 휩쓸어버리는......
비유하자면 게티스버그는 미드웨이에 비유할 수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