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때, 물건을 살때 카드로 긁으면 공짜인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께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를때도, 카드로 긁으시면 돈을 안내니 카드로 사면 당연히 공짜인줄 알았다. 카드는 마치 원하는 물건을 바로바로 얻어낼수 있는 만능 프리패스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카드빚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건,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오해를 했던 어릴적 내 자신은, 철이 안들어도 한참 안들었던지라 이제와서 생각할때 남는건 부끄러움 뿐이다. 다만 부끄러움은 둘째치고 신용카드를 긁어서라도 자녀들이 원하던 것들을 가져다 주시길 원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더 깊이 나에게 느껴지고 있다. 인생의 무게와 그 씁쓸한 맛을 보면 볼수록, 그때 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카드 한장의 무게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이건 내가 공짜라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살면서 몸소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새부턴가, 난 평범하게 대학을 가서, 평범하게 졸업하고, 평범하게 일을 찾아서, 평범하게 살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평범한 대학을 가고자 했고, 일단 학비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아버지는 늘 "대학교 학비까지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넌 공부만 열심히 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자녀들이 돈걱정 하며 재능을 썩히는 모습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으셨고 내가 열심히 재능을 발휘하여 만개하기를 바랬던 아버님이셨지만, 죄송스럽게도 난 열심히 사는 것에 별 흥미가 없었다. 그저 물결 흐르듯이, 저항 없이 보내는 삶이 더 달콤해 보였다. 뭘 해도 중간만 하는것 쯤에 만족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다가온 고3때의 4월 어느날, 반에서 그 다음 달쯤에 주변에서 유명한 대학교 견학을 함께 갈것이라는 공지를 받았다. 물론 자연스럽게 수업을 하루 쉬게 된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반 아이들도 대부분 좋아했다. 나도 사실 딱히 견학이 가보고 싶은건 아니였지만, 그렇게 유명하다면 한번쯤 보고 오는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 정도였다.
그렇게 한달이 지났지만, 난 그 견학을 가지 못했고,
견학 당일 내가 선 곳은 대학교가 아닌, 아버지의 장례식장이였다.
아버지의 죽음은 생각보다 갑작스러워서, 난 슬퍼할 겨를도 없이 대다수 유족들이 밟는 절차들을 하나씩 헤쳐나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남은 병원비와 장례식 비용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아버지의 친구들이 그동안 빚진 정이 있다며 갚아주고 가셨다. 이분들에 대한 감사함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건 아버지가 남겨둔 잔고로는 우리 가족이 갚을 여력이 없었다는 뜻이였다. 정확히 한달 전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병원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우리 가족의 재정을 파탄시켰고, 하루하루는 뭔가 끝날듯 하면서도 끝나지 않는 재정적 부담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난 모든게 끝났으면 좋겠지만 차마 끝나기를 바라지는 못하는, 그런 상황이였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게 끝나자, 난 모든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나 혼자서 할수 없을것 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동안 난 여유롭고 평범한 생활을 늘 너무 당연하게 여겼고, 그때서야 그 대가를 치룬 것 뿐이였다.
많은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나름 소박한 소원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그 단순한 목표 하나가 가장 어렵다는걸 깨닫기 시작한 것은,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면서였다. 감정이 진정되고 현실을 바라보니, 자신이 먹고 살 걱정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평범한 대학도, 평범한 졸업도, 평범한 직장도, 어느새 난이도가 대폭 상승한 밸런스 붕괴된 게임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되고나니 새삼 그날 대학 견학을 가보지 못한것이 못내 아쉬워졌다. 좋은 대학따위 이제는 가기도 힘들텐데 구경이라도 하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엄마, 지금와서 이런말 하기는 그렇지만 그날 견학 못가본거 좀 아쉽네."
"하루 못가본거 가지고 뭘 그러니, 잘 해서 4년동안 그곳에서 지내면 될거 아냐..."
"에이... 그게 쉬운줄 아나."
어머니와 짧지만 많은 것을 일깨워줬던 이 대화를 나눈지도 이제는 8년전의 이야기다. 물론 그동안 해외에서 지내고있던 우리 가족들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로 반 강제적으로 한국에 정착했다. 나는 홀로 외국에 남아, 힘들었지만 꿈만 같았던 대학생활을 그곳에서 머무르며 4년동안 보내게 되었다. 받은 돈한푼 없이 어떻게 그 4년을 지내왔는지는 사실 나도 잘은 모르겠다. 다만, 이게 내 혼자만의 힘으로 지나온건 아닌게 분명하다. 필요할때마다 도와주는 손길이 있었고, 포기하고 싶을때마다 지켜보며 한번씩 격려해주던 이들이 있었다. 지금은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할게 나름 삶의 컴플렉스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직장을 구해 꽤나 평범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 평범함은, 아버지가 계셨다면 더 쉽게 이루었을지도 모르지만, 난 이렇게 크게 돌아온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바퀴 돌아 다시 평범함으로 돌아와 보게된 이 풍경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건, 이 풍경을 보기까지 주변에서 나를 도와줬던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건 결코 당연하지 않고, 너무나 감사한 일들이다.
얼마전, 오랜만에 아버지가 쉬고 계신 곳을 찾았다. 그동안 해외에서 지내느라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꼭 다시 가보고 싶어서 그곳을 찾게 되었다. 지난 날, 눈물지으며 그곳을 오르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하지만 이날은 웃으며 아버지가 계신 그 산을 어머니와 함께 올랐다. 나는 오래동안 찾지 않았던 곳이였지만, 놀랍게도 그 주변은 외롭지 않게 수많은 꽃들과 사람들의 발길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처음 왔을때의 뭔가 쓸쓸하고 슬픈 느낌을 주는 그곳은, 어느새 화기애애해 보이는 풍경이 되어있었다.
분명 이곳을 찾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을 전하러 오지 않았을까?
나 평범하게, 기쁘게 잘 살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