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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3/21 04:16:00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검푸른 해협 - 완. 원 간섭기
1. 정벌 이후
2차 정벌 이후의 충격과 공포에 대해서는 그다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고려의 피해는 생각보다는 적었고, 주로 피해를 입은 것도 강남군이었으니까요. 대장급은 다 살아 돌아왔고, 충렬왕은 그들을 위로한 후에 북으로 돌려 보냅니다.

+) 이 때 충렬왕이 원에 갔다가 베트남까지 갔다는 기록이 보이네요. 흠좀무

다음 해에 "또" 일본 정벌 준비가 재개됩니다. 흥미로운 건 고려에서는 원의 명령이라고 했는데, 원사에서는 고려왕이 스스로 자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에는 더 큰 원정을 준비했을 겁니다. 그 해 9월 원에서는 크고 작은 배 3천 척을 만들라 하였고, 다음 해에는 군량을 20만석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고려에서는 일본이 바닷가를 노략질한다고 했는데, 고려사에 적히지 않은 걸 보면 이게 진짜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충렬왕은 이를 핑계로 원나라 병력을 요구하죠. 고려의 피해도 크긴 컸던 모양입니다. 반면 원에서는 자기네 무기를 고려에 나눠주며 고려가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이 때부터 충렬왕이 사냥에 미친 기록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아버지 원종과 같은 패턴이었습니다. 뭐... 이 정도만 해도 할 만큼 하긴 했을 겁니다. 어떤 때에는 공주를 데리고 충청도까지 갔다가 "겨우 사냥하려고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냐?"면서 타박 당하기도 했죠.

그리고, 다음 해에 쿠빌라이 칸이 일본 정벌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고려의 고생도 마침내 끝납니다. 이게 계속됐으면 어찌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원에서 요구한 것도 1, 2차보다 훨씬 많았고, 충렬왕도 계속 자기가 맡겠다고 해 왔으니까요. 김방경이 은퇴했을 떄도 이 때였습니다. 참 많은 일을 했던 그... 하지만 원 간섭기 내였기에 그의 능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삼별초에 가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일들을 보면 그는 이 시기를 지탱한 몇 안 되는 위인이었죠.

동정, 일본 정벌이 완전히 중지된 것은 1286년, 다음 해에는 합포에 주둔한 원군도 돌아갔죠. 이제 원과 고려의 역사는 조금 다르게 흘러갑니다. 다만 1282년도 그렇고 이 해도 그렇고 계속 "할까 말까" 하던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죠. 원 내부에서 반란이 계속 일어났거든요.

고려로서는 편했습니다. 바다를 건너는 것보단 육지로 병력 얼마 보내는 게 훨씬 나았고, 명분은 명분대로 세울 수 있었으니까요. 5월에 만주에서 내안대왕(나얀)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은 충렬왕은 요동 선위사의 요청이 오기도 전에 병력을 보냅니다. 5천 정도라는군요. 쿠빌라이 칸이 직접 이 반란을 진압했지만 다음 해까지도 계속 이어졌고, 고려의 토벌군도 진격과 쌍성으로 후퇴를 계속 하며 이를 도왔습니다. 이 즈음에 원에서는 쌍성총관부에 있는 고려 유민들을 고려로 보냅니다. 쌍성총관부를 돌려주지는 못 하겠지만 슬슬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봐야겠죠.


원 내부에서의 반란은 계속됐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원의 베트남 원정도 완전히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1257년에 대리국을 통해 남송의 후방을 끊기 위해 시작됐던 전쟁은 남송 멸망 후 베트남 완전 정복을 위해 계속됐지만, 명장 쩐흔다오의 활약과 25만의 병력의 게릴라전으로 1288년 끝을 맺게 되죠. 이 쩐흥다오는 베트남에서 이순신 급의 대접을 받습니다.

중동 지방에 있던 일 칸국 외에 나머지 서방 3칸국은 원나라와 확실히 틀어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태평양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해상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했던 일본, 베트남, 자바 등의 원정이 모두 실패했으며, 나얀을 필두로 한 동방 3왕가의 반란의 시작, 쿠빌라이 칸은 이제 뻗어가는 것은 커녕 원의 안위를 걱정해야 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계속 원나라 편을 듭니다. 1289년에는 이 전쟁통에 원에 식량이 부족해지자 6만 4천 석을 4백 82척의 배에 싣고 지원해 주기도 했죠. 이 중 50여 척이 풍랑을 만나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_-; 이후 고려도 전쟁에 휘말리자 서로 10~20만석씩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됐죠.

2. 전시에서 평시로
1290년, 쿠빌라이 칸의 토벌 속에 동방 3왕가 카치운 가의 카디안은 동북면으로 도주해 고려를 노립니다. 고려는 급히 동계의 병력을 지원했고, 다시 강화도로 천도하려 했지만 허공과 최유엄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원에서도 이를 문제 삼았고 사람들은 허공과 최유엄을 칭찬하죠.

바로 이 때 동녕부가 고려에 귀속됩니다. 그 동안 고려가 원에 충성한 보상이었고, 인질을 더 이상 잡아둘 수 없을 정도로 원이 고려를 필요로 한 것이기도 했죠. 22년 만이었습니다. -_- 고려로 돌아온 총관 한신은 원의 요구도 있고 해서 처벌하지 못 하고 대장군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유씨는 이를 이렇게 비판합니다.

"나쁜 짓을 한 자는 기가 나고 좋은 일을 한 자는 맥이 빠지게 되었다. 나라에 형벌과 법이 없어졌으니 이래서야 나라가 될 수 있겠는가?"

이 해 5월에 카디안, 합단은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합니다. 동북면의 길주였죠. 어떻게 막아보려 했지만 번번이 패배했고, 결국 원의 허락을 받아 강화도로 다시 들어가게 되죠. 다음 해 1월에 합단은 동북면을 뚫고 교주도(경기도 동부, 강원도 서부)에 들어오는데 성공하고, 치악성(원주)에서 원충갑이 한 차례 막아내지만 결국 성이 함락되는데, 원충갑은 휘하 장수들과 근처 산으로 도주한 후 다시 반격하여 성을 탈환합니다. 이렇게 합단의 진격은 겨우 막혔죠. 원은 이 소식을 듣고 1만명의 지원군을 보냅니다. 구원 소식을 들은 쿠빌라이 칸의 반응은 이랬죠.

"너희 나라는 당 태종이 직접 토벌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우리 나라에서도 처음에 토벌하였으나 쉽사리 이기지 못했는데, 이제 이 조그마한 도적을 어째서 그렇게 무서워하느냐?"

에휴 -_-; 사신으로 간 오인용 아니 오인영은 옛날과 지금은 국력의 강약이 다르다고 변명했습니다. 5월에 원의 지원병력과 고려의 연합공격으로 합단군은 궤멸됐고 겨우 위태로움이 풀어지죠. 이후에는 추격전이었습니다. 이제 막 복구하고 있던 평양 쪽을 향한 합단을 낭장 이무 등이 격파한 것이었죠. 이후 합단의 세력은 완전히 소멸됩니다. 겨우 동방 3왕가의 반란을 진압한 쿠빌라이 칸, 다시 일본 정벌을 할까 말까 하다가 그만두게 됐죠. 이제 그의 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충렬왕 20년 4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은 죽습니다. 마르코 폴로의 표현대로 "아담에서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나타난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지역과 재물, 영토를 소유한 사람"이었고 수많은 원정을 계속했지만 정작 그가 성공한 것은 망해가던 남송을 완전히 점령한 것 뿐이었습니다. 이 때 고려에서는 새로 즉위한 성종에게 탐라총관부를 돌려주기를 요구했고, 마침내 제주는 고려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에도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다 일일이 적을 필요 없겠죠. 일단 각종 전쟁들이 끝나고 평시로 돌아온 이후의 상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3. 그 이후
충렬왕은 재위 중에도 사냥 매니아로 욕 먹었습니다. 오죽하면 제국대장공주에게도 욕 먹었죠 -_-; 어쩌면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주도까지 반환되고 1297년에 공주가 죽자 그는 아들 왕장에게 선위하려고 합니다. 헌데 이렇게 왕이 된 충선왕이 또 보통 인간이 아니었죠. 슬슬 고려의 지배층으로 떠오른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는 등 개혁 정치를 폈고,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죽은 이유를 후궁의 탓이라 여겨 그들을 숙청했거든요. 후자는 부자 사이의 문제고, 전자로 인해 권문세족들이 원나라를 이용 충선왕을 폐위, 단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돌아옵니다.

원으로서는 이제 정치에 기력을 잃은 충렬왕이 다루기 더 편했습니다. 충렬왕은 그렇게 오래오래 왕을 한 후 1308년 죽습니다. 어쨌든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고 원과의 관계를 정상화 시켰기에 그는 아버지 원종과 함께 조선시대에도 제사를 받게 됩니다. 다시 돌아온 충선왕,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혈기 넘치는 젊은이가 아니었습니다. 원에 끌려가 무서움을 충분히 보았고, 1307년 원의 성종이 죽은 후 일어난 권력 싸움에서 후의 원의 무종과 인종을 지지하며 원에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이죠. 능력이야 원종부터 외교력이 피를 타고 이어지는가 봅니다. 개혁 정책을 어느 정도 하긴 했지만 곧 정치에 손을 놓고 제안대군 왕숙에게 대행시킨 후 자신은 원나라로 갑니다.

당시 원에서는 요동 지방에 끌고 온 고려인들을 다스리기 위해 왕준 등 왕족들을 총관으로 앉힙니다. 후에 이게 커졌고, 충선왕이 인정을 받으면서 그를 심양왕으로 앉히게 됩니다. 일단 요동은 고려가 영토를 주장할 명분이 있었고, 명목상 그걸 인정하게 된 거죠. 이렇게 충선왕은 만주와 한반도 양쪽의 통치자가 됩니다. 동방 3왕가에 대한 견제이자, 고려를 두 개로 나누어 서로 견제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죠. 고려왕이 이를 겸직하면 안 된다는 여론으로 인해 그는 왕위를 왕위는 충숙왕에게, 심양왕 자리는 연안군 왕고에게 물려줍니다. 이 때 심양왕은 심왕이라 불렸는데, 2글자보다 1글자가 더 지위가 높습니다. 심왕이라는 건 곧 황금 씨족인 동방 3왕가와 대등하다는 걸 뜻 했죠. 뭐 그래봐야 명예직이었습니다. -_-; 문제는 이후 심양왕들은 마지막 공민왕 때까지 고려왕 자리를 노립니다. 원의 정책이 성공한 거죠.

충선왕은 그 후 원으로 가서 학술 교류에나 힘 썼고, 그러다 죽습니다. 충씨 돌림 왕들 중에서는 그가 제일 높은 평가를 받죠.

왕위에 오른 충숙왕의 삶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심왕 왕고는 충숙왕을 계속 모함했고, 그는 원을 여러 차례 갔다 와야 했습니다. 짜증난 충숙왕은 1330년에 아들 왕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나라로 가니 바로 연산군을 능가하는 막장 왕 충혜왕의 집권입니다.

젊을 때부터 막장이었던 충혜왕은 왕위에 오른 후에는 더 심해졌습니다. 궁궐을 신축할 때 주춧돌 밑에 아이를 묻는다는 소문도 일어날 정도로 민심도 흉흉해졌죠. 마음에 들면 남편이 있든 없든 무조건 강간했는데, 그 중에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 장모와 새어머니까지 강간합니다. 문제는 이 중 한 명이 원 황실 출신 경화공주였다는 것이죠. 이 때의 모습입니다.

"(경화공주가 충렬왕을 위해 연회를 연 후) 주연을 파함에 미쳐 충혜왕이 거짓으로 취하여 나가지 않고 있다가 저물어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니 공주가 놀라 일어나므로 충혜왕이 송명리 무리를 시켜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또 그 입을 막아 드디어 증음(蒸淫)하였다."

-_-; 이후 경화공주가 억울해 원으로 돌아가려 하자 말 시장을 열지 못 하게 했죠. 에휴... -_-; 결국 2년만에 원에 끌려가고 충숙왕이 다시 왕이 됩니다. 충숙왕이 죽은 후 복위됐다가 또 개막장짓으로 끌려가는데, 이 때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가 한 말입니다.

"그대의 죄는 너무 커 그대의 피를 천하의 개들에게 줘도 부족할 지경이나, 짐은 사람 죽이기를 즐기지 않으므로 귀양을 보낸다"

피는 영혼이 들어 있다 믿어 원에서는 피를 보이지 않게 처형합니다. 정말 대역죄를 저질렀을 때에야 피를 보이게 하죠. 이러고도 죽진 않았다는 게 참 -_-; 귀양길 중에 죽었답니다. 독살이니 뭐니 하는데, 어쨌든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다 하네요.

이후 그의 아들인 충목왕과 충정왕이 왕위에 올랐고, 슬슬 원이 망해 가자 원에서는 고려에 강력한 왕이 필요하다 여겨 충혜왕의 동생 강릉대군을 선택합니다. 충정왕은 폐위됐고, 강릉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공민왕입니다. 원에서는 그의 능력과 원에 대한 충성을 믿었지만, 능력은 있었는데 원에 대한 충성은 없었죠.

4. 원 간섭기 평
이 시대는 일제시대와 함께 우리 역사의 흑역사로 남습니다. 일제 시대가 일제의 수탈과 정의로운 독립운동가로 양분되듯, 이 시대도 민중과 삼별초의 항쟁과 몽고의 수탈로 양분됩니다.

하지만 그 면면을 살펴보면 참 어지럽습니다. 아무 말도 못 했던 고려가 조금이라도 발언권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간섭을 줄이게 된 계기는 몽고에 확실히 충성한다는 원종부터 이어져 온 외교전과 일본 정벌, 동방 3왕가 반란 시 철저히 원의 편을 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간섭은 여전했던 시절, 결국 충렬왕부터 이어져 온 왕들은 무기력증에 빠집니다. 충렬왕은 사냥에, 충선왕은 학술 교류에나 매진했죠. 고려가 분명 부마국으로서 대우를 받았지만 그건 고려라는 독립된 나라의 왕으로서의 지위가 아니라 원 제국의 부마로서의 지위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려땅보다는 원나라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원은 여기서 교묘한 수를 쓰니, 심왕이라는 직위였습니다. 분명 고려왕보다는 한 단계 높았고 원 제국 바로 밑, 황금씨족 동방 3왕가와도 대등한 지위였지만 명예직이었을 뿐이었고, 당연히 고려왕이라는 실직을 원하게 됩니다. 이런 견제에 고려왕과 심왕들은 스스로 말려들게 됩니다. 공민왕 때까지도요.

왕실만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천민 등 차별받던 이들은 동녕부나 쌍성총관부로 갔고, 통역 등 원에 직접 선을 대면서 권문세족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안사를 비롯해 그들에게 원은 희망의 땅이었습니다. 참... 얘기하기가 애매한 시대입니다. 그리고 정말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원종부터 공민왕까지 이 시대의 고려왕들은 잘 하는 듯 하다가 멘붕의 길을 걸었죠. 이쯤 되면 저번 편에서 이런 얘기가 위험하다는 걸 직감하실 겁니다.

대몽항쟁부터 원 간섭기까지 이르는 기간은 조선 말부터 해방 후까지와 정말 닮았습니다. 특히 단지 선악으로 얘기할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도 닮았죠. 그렇기에 이 두 시기는 수탈과 항쟁이라는 쉬운 설명으로 끝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충렬왕의 방식, "원에 협조함으로써 간섭을 줄였다"는 부분입니다. 이를 일제시대로 치환하면 "대동아 전쟁에 협조하는 대신 조선민족의 자치권을 얻자"는 중기 친일파(이에 대한 분류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쓰겠습니다)와 정말 닮았습니다. 이 시기를 이렇게 서술한다면, 곧 이들 친일파에 대한 옹호로 쓰일 수 있는 거죠. 이렇게 보면 "친원 청산"이라는 면에서 고려와 조선은 실격입니다. 친원으로 왕정복고를 한 고려 왕조는 당연히 out, 하지만 그 왕조를 뒤엎은 이성계 역시 친원파 출신이었죠. 이게 이 얘기를 완결하기 전에 갑자기 근현대사 얘기를 하고 싶었던 이유였습니다. 어쨌든, 윤치호 등 "약자가 사는 길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는 말이 이해는 되거든요.

다만 이 둘을 완전히 대등하게 생각할 수는 없죠. 어쨌든 그 떄는 고려라는 나라가 살아 있었고, 식민지 조선은 나라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였으니까요. 그 외에 중화라는 전근대 질서와 식민지라는 근대 질서를 동일시할 수도 없구요. 이래저래 많은 말이 필요합니다만, 이걸 확실히 얘기할 순 없겠네요.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 이걸 보면 반복되기는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비슷해 보일 뿐 그 속모양을 살펴보면 꽤나 다른 이걸 단지 "반복된다"고 하기도 그렇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게 정말 맞는 말인지는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듭니다. 이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내린다면 따로 글을 쓰겠습니다. 이런 거대한 관념에 대한 결론이라는 것이 제 나이대에 내릴 수 있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간단히 줄일 수 있는 역사라는 건 그만큼 얘기하기 어렵다는 걸 뜻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차라리 일제시대는 복잡해도 얘기하기 쉬운 것 같아요. 일제시대 말기에 일제가 그만큼 썩은 모습을 보여줘서 다행이었지, 진짜 식민지 조선도 꽤 발전하고 일제가 스스로 식민지를 포기한 후 친일파들 중심으로 대한민국이 세워졌다면, 이 나라 역사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진행됐을까요? 아무리 복잡해도 선악 구분이 그나마 쉬워진 케이스인 것 같습니다. 헌데 이 원 간섭기 시기는 그보다 더 어려운 것 같네요.

이런 암울하고 사람들 멘붕만 일으키는 것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다는 것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역사가 어디 자랑스러운 것만 있겠습니까. 간단화 시키려면 박정희, 전두환의 위대한 지도자가 한국을 발전시켜 줬고 북한은 그냥 개새끼라고만 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건 싫잖아요. 아무리 암울해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되는 역사라 생각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얘기를 맺습니다.

대몽항쟁 후 원 간섭기, 조선이 건국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대체 누가 옳은 건지 판단하기도 어려운 시기입니다. 하지만, 부끄럽다 해도 우리 역사입니다. 이분법으로 가르고 그랬구나 하는 시기가 아니라, 아무리 머리 아파도 알고 생각은 해 봐야 할 시기인 것이죠.

마지막으로 두 가지. 예전에 고려의 마지막 명장 편을 쓸 때는 생각 못 했던 것이지만, 이인임이나 최영이라고 마냥 친원을 외치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라고 마냥 친명을 외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고려가 동아시아의 강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중원과 만주로 세력이 서로 대립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고려는 그걸 이용해 많은 것을 누렸죠. 하지만 원이라는 절대 강자의 등장 이후 고려는 (예전 방식을 가장 최악의 형식으로 쓰다가 -_-) 그 어느 떄보다 비굴한 시대를 보내게 됩니다.

친원파는 아마 원이 그냥 망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자기가 좋던 시대니까 원을 추종한 이도 있긴 하겠지만요. 명이 들어섰다 하나 북원이 남아 있었고, 북원이 그래도 잘 살아 있었다면 북원과 명 사이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누릴 수 있었을 겁니다. 반면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역시 명을 무조건 추종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명이 원을 대신한 슈퍼파워가 될 거라고 계산한 것도 있었을 겁니다. 결국 명이 슈퍼파워가 됐고 후자가 승리했죠. 여기서 이어진 조선의 사대는 그런 현실적인 면에서 봐야 될 것입니다. 어쨌든 조선은 명과 청이라는 슈퍼파워 아래서 독립을 유지했으니까요. 최명길이 청과 남명 아래서 마찬가지 효과를 노렸습니다만, 결국 청이 슈퍼파워가 돼 버렸구요. 슈퍼파워 옆에서 생존과 독립을 유지하는 한국의 역사, 중국이 혼란할 때는 그걸 이용하고, 중국이 통일됐을 때는 기더라도 자기의 입지만은 지켜냈던 역사, 이를 단지 사대주의라고 부르는 건 비하일 뿐이죠. 일제시대와의 비교가 된다는 점이 위험하다고 했지만, 현재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비유가 될 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현재의 몽골이 한국에 좋은 감정 (동족 의식이라든가) 을 가지고 있다고 하거나 당시 원이 고려를 우대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은근히 이 시대를 포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가장 지양해야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들이 고려를 우대한 이유는 동방 3왕가라는 같은 민족을 떠나 같은 황금씨족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으며, 고려가 원에 기댄 이유는 어쨌든 왕정복고를 시켜주고 자기들을 지켜줄 대상은 원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항쟁이나 수탈 이런 걸로 포장하면 모를까, 원 제국과 고려의 관계를 같은 민족이라 우대해줬다 이런 식으로 포장하는 것은, 일제시대에 비유하면 "일제가 같은 민족인 조선을 위해 발전시켜줬다"와 같은 말일 뿐이니까요.

참 어려운 시대를 마쳤습니다. 지금까지 봐 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__)

일본 쪽 얘기를 하면서, 다음 편 예고도 곁들여 하면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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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후 역사는 이전에 쓴 대로 흘러갑니다. 전쟁 중에도 자기네 영지가 걸리지 않은 무사들은 그다지 협조하지 않았고, 호죠 가문에서는 협박했지만 별 수 없었습니다. 전쟁을 준비하면서 든 경비와 어쨌든 승리한 후 무사들에게 내려줄 포상 등의 문제, 처음 겪어 본 국제전의 여파는 컸고 호죠 씨는 그걸 다 감당할 수 없었죠.

이후 남북조로 갈라지기도 하는 등 자기네만의 역사를 살다가 무로마치 막부가 생겼고, 그런 혼란을 틈타 왜구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이 고려 말이었죠. 어쩌면 그들은 자기네의 대의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원구(寇), 왜구의 왜 도적놈이듯 원나라 도적놈이라는 뜻으로 그들은 이 원정에 대해 이런 표현을 씁니다. 고려 역시 원과 다를 바 없는 침략자니 자기들이 공격해도 된다는 그런 명분을 가지고 있었을지도요. 이후 무로마치 막부가 그나마 안정되고, 고려 역시 조선으로 바뀌어 안정되었으며, 두 차례의 대마도 정벌을 통해 왜구는 없어지게 됩니다. 무로마치 막부가 다시 혼란해지면서 왜구가 또 생겼고 문제가 됐지만 솔직히 이전에 비할 바는 아니었죠 (...) 대신 일본 통일 후 더 큰 놈이 왔습니다만.

지금은 사어가 됐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무쿠리 고쿠리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원구에서 따온 걸로 우는 아이에게 "무쿠리 고쿠리 온다"는 식으로 쓰였죠. 이를 합쳐 무고이라고 쓰기도 했다고 하네요. 지들 입장에서 피해 및 두려움이 크긴 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일본은 신이 지켜준다는 정신은 계속 됐고, 오랜 시간이 흘러 메이지 유신, 청일, 러일전쟁, 중일전쟁을 지나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이 때의 신풍, 가미카제는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일본인들도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로 광기로 가득 찬 이름이었죠.


이제 배경을 그 때로 옮기겠습니다. 태평양 전쟁, 일제의 패망, 미국의 태평양 패권 확보, 한국의 광복에 이르기까지... 어찌 보면 지금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일 겁니다. 곧, 시작하겠습니다.

시간을 앞당겨 청일, 러일 전쟁을 다루면서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조선이 어찌 됐는지를 써 볼까도 했는데, 그렇게 되면 너무 암울하잖아요. -_-; 청일, 러일도 언젠가는 다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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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2/03/21 04:49
수정 아이콘
아직 다 올리시진 않으셨지만 아무튼 마지막 편이니 수고하셨습니다~ 의외로 쿠빌라이 칸은 별 능력이 없는(?) 녀석이었군요.
12/03/21 07:37
수정 아이콘
아이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에 지쳐 피곤할 때 피지알 와서 눈시님 글 보는 게 요즘 제 삶에서 몇 안되는 낙입니다.
happyend
12/03/21 08:11
수정 아이콘
화이팅입니다.^^
Siriuslee
12/03/21 12:23
수정 아이콘
충선왕이 심양왕이 된것은 참 흥미롭습니다.
뭐 충선왕은 쿠빌라이(세조)의 외손자, 그리고 테무르(성종)와의 4촌관계이죠.
그는 태어나서 얼마 안되어 세자로 책봉되고(3살) 바로 원 황실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약 20년간 원 황실에서 자라게 되죠..(원 황실입장에서도 종속국의 다음 후계자이기 때문에 제왕수업을 했을겁니다)

이렇게 고려가 아닌 원 황실에서 자란 세자가 귀국한 이유는
바로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가 돌아가셨기 때문이고,
이런 세자가 돌아오자 충렬왕은 바로 왕위를 넘겨주고 놀기(..) 시작합니다.
즉 이 시점에 이미 파란이 예고된것이죠.
고려의 정세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왕의 개혁정치에 반발한 권문세족,
그리고 아버지와도 관계가 좋지 못했고(충렬왕의 후궁쪽 인물들을 숙청..)
권문세족의 모략과 이런저런 이유(왕비였던 계국 공주와의 불화로.. 원황실의 호출;;)로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버리죠.

이렇게 원 황실로 돌아가있는 사이에 원 2대 황제 성종이 죽고,
원황실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데,
(잘못 했으면 목숨이 날아갈....)권력투쟁에 개입.. 한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원 황제에 오른 원 무종, 4대황제 원 인종은 충선왕과는 5촌.. 이죠.(황숙??)

이러저러해서 원 무종에게 심양왕에 봉해지죠.
충선왕 생전에는 심양왕이 명예직은 아니었습니다.
만.. 곧바로 충렬왕이 죽어서;; 고려의 왕을 겸직하게 되면서 유명무실해진면이 있지요.

물론 본인은 고려로 돌아갈 마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충선왕은 고려의 왕이었지만 고려에 있던 시기보다 국외에 머문 시절이 더 많습니다.

1313년 1316년 각각 고려왕과 심양왕 자리를 모두 물려주고 은퇴를 하지만,(1275년 생이니까 대략 40대에 정계 은퇴!!)
(심양왕/심왕 자리를 왕고에게 물려준 이후에는 실권은 없고 명예직이면서, 고려왕이 바뀔때마다 딴지를 거는 역활만 남게 됩니다...)

원 인종 사후에 또... 권력다툼에 말려들게 되어서 (이건 자의가 아니었지만) 티베트까지 유배를 가게 됩니다.
말년은 원 수도인 대도에 머물다가 생을 마감 하지요.
12/03/2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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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조상이 고려를 배신해서 그렇지 이성계자체는 친원파가 아니죠.
조선왕조가 성립후 200년이상 평화를 누릴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친원파 숙청의 결과입니다.
친원파들이 가지고 있는 대토지들을 환수 하여 국가에 귀속 시키거나 백성들에게 돌려 주었죠
그 결과 백성들은 별다른 저항하지 않고 조선왕조들을 받아들였고 환수한 대토지에서 나오는 세수들은 조선왕조가 발전할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한편 조선과 비슷한시기에 세워진 무로마치 막부는 그렇지않죠
호죠씨가 멸하고 천황 친정체제에서 천황은 일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즉 대토지를 소유한 장원제를 개혁할려고 했으나 장원을 소유한 무사들이 반발하여 들고 일어나서 아시카가씨에 의해 무로막치막부가 세워집니다.
무로막치 막부는 태생적으로 장원제를 개혁 할수 없었습니다. 대신 남북조내란으로 많은 장원지주들이 몰락하고 살아남은 지주들이 장원보다 더 많은 땅을가진 슈고 다이묘가 되죠. 막부가 손쓸수 없는 지방권력이 되고 자연스레 막부의 힘은 약해질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전시대부터 계속 전국적으로 소유가 끊임없이 발생되기도 하고요
무로마치막에 의한 평화는 50년정도 지속되고 전국시대로 들어 갑니다.
예전에 제가 말씀 들였는데 역사상 한국이 일본을 국력으로 압도한시기는 고구려하고 조선초 밖에 없었다고 한적이 있습니다.
이 조선초가 무로마치막부 전국시대초기인데 무로막치 막부시대가 일본역사 통털어서 가장 국력이 약했던 시기이기도 하고요
구시대의 유물을 청산하지 못한 결과이죠
Siriuslee
12/03/22 20:59
수정 아이콘
아그리고 다음 주제가 태평양전쟁이면..

주인공은 CV6 엔터프라이즈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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