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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차 - 지식
2회차 - 키배
1회차 - 자유주제
전체
일반
정치
Date
2011/12/19 19:11:37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한편 고구려는 - 여수전쟁. 고구려는 하루 아침에 세워지지 않았다.
https://pgr21.net/freedom/33978
삭게로!
원래 삼국시대 초기에 한 번 했어야 됐는데 -_-; 깜빡 한 건지 그냥 말자고 한 건지 모르겠네요. 뭐 그래도 이부분만은 가볍게라도 다뤄야 될 것 같네요. 하는 김에 고구려 초기 얘기 아주 잠깐 정리해 보죠.
뭐... 김정일의 죽음이 어떤 여파를 미치는지 지금은 혼란이네요. 일단 지켜보렵니다. 근데 딴 건 몰라도 김정일 명복 비는 것들은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네요. -_- 김일성처럼 전쟁은 일으키진 않았지만, 김정일의 손짓 하나에 아깝게 돌아가신 한국인이 한 두 분이 아닌데요. 증말이지... 네 어차피 얼마 안 남으신 분 한 분 있네요. 그 분 가실 때도 "삼가 명복"이라 한다면 조금은 인정해주죠. 물론 욕 쳐 먹어서 잘 살고 있는 대머리가 죽을 때도 그 사람들이 "삼가 명복"한다면 인정해 주죠 뭐. 근데 과연 그럴지?
하아... 진정, 진정... 역사 얘기는 계속돼야 합니다. 설령 전쟁이 일어나서 예비군으로 가더라도 그 전까지는 역사 이야기 올릴 겁니다.
라고 -_-; 뭔가 진정 안 된 각오를 해 봅니다. 잡설이 너무 길군요. 시작하겠습니다.
... 후배랑 밥 약속 있어서 가는 길에 졸업 논문 출력하면서 이제 대학도 끝인가 하던 참에 참 멍하니 뉴스를 봤었다죠. 에휴... 끝인 건 다른 쪽이었군요. 너무 편하게 간 것이 열 받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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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는 하루 아침에 세워지지 않았다.
고구려가 세워진 것은 기원전 1세기로 추측됩니다. 졸본부여라 하지만 부여랑은 좀 다른 것 같긴 해요. 진짜 부여에서 세력이 내려와서 기존 세력 위에 세웠다고 하지만, 그냥 부여가 근처에서 강했기에 그 이름을 썼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아예 부여가 지배한 지역에서 들고 일어난 것일 수도 있죠. 원래 고구려 땅 근처에 있던 현도군은 갈수록 서쪽으로 가는데, 고구려현이라는 지명이 발견됩니다. 고구려가 생기면서 고구려현이 된 건지, 그냥 현도군 밑에 있던 예맥족이 반기를 든 건지 -_-a 어느 쪽이든 헷갈리는 건 마찬가지죠. 어쨌든 고구려의 시작을 보면... 참 사람 살기 힘든 곳입니다. 압록-두만을 향해 북진했던 고려나 조선이 딱히 그 곳을 먹을 생각도 안 하는 지역이었죠. 세종 정도나 4군을 만들었을 뿐, -_-; 뭐 그래도 여진족은 여기에 살긴 했던 모양입니다만.
고구려의 초기는 이 한군현들과의 싸움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당장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고구려의 군사와 물자를 징발하려 하니 싫다고 했고, 이 때문에 "하구려후 추"라고 낮춰 불렀다고 하죠. 이 시기 분명 한나라에 맞서려 할 정도의, 건국이라 할 만한 일이 이루어진 것이죠. 어쩌면 주몽보다는 실질적인 건국자가 유리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황조가에서 한(漢)인 출신 치희가 쫓겨나는 걸로 보아 꽤나 반한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주몽이 변신 대결(동명왕편)이나 활쏘기로(삼국사기)로 비류국을 점령하고 유리왕의 아들 해명은 황룡국 왕이 준 화살을 부러뜨린 후 유리왕의 명령으로 자살하고, 호동도 왕후가 자기를 모함하자 변명 않고 자살하는 등 -_-; 꽤나 거칠고 막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해명태자 대신에 15세로 왕이 된 대무신왕은 주몽을 죽이려 했던 대소왕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데, 이 때 괴유와 마로라는 기인들을 만나 그들이 큰 공을 세웁니다. 하지만 병력에 밀려 전쟁에선 졌죠. 이 부여는 그냥 부여의 일개 대가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죠. 그 때까지는 체급 차이가 너무 컸고, 솔까 금와-대소라는 짧은 왕조일 리가 없으니까요.
이후 그는 이런 저런 나라들을 점령한 후 무려 "낙랑"을 공격하는데 -_-; 이게 낙랑군인지 최씨낙랑"국"인지 이 둘이 같은지 다른지 차암 많은 말이 있습니다. 저는 둘이 별개이고 최씨 낙랑국은 함경도에 위치해 있으며, 광무제가 후한을 세우며 한군현을 다시 세운 것 (반란이 일어났었습니다. 하지만 왕으로 칭하진 않았고 최씨도 아니었죠) 이랑 혼동한 것으로 봅니다.
뭔가 소설로 쓰기 참 좋은, 그래서 바람의 나라 등 여러 창작품이 나온 대무신왕이 끝나고 동생 혹은 친척이라는 민중왕이 왕이 됩니다. 이후 모본왕에 이르러 태조왕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는 동북아의 이단아로 거듭납니다. 특히 태조왕은 소노부 등 계루부 고씨랑 대등하게 놀았던 귀족들을 숙청하며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늘립니다. 북으로는 만주, 동으로는 옥저를 먹으며 함경도로 갔고, 한군현에 심심하면 쳐들어가서 약탈하고 돌아왔죠. 그는 재위기간만 93년, 165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 아마 어마어마한 혼란이 있었고, 그걸 모두 해결하고 왕에 오른 자가 그 이전의 재위기간을 다 먹은 거겠죠. 이름은 태조왕, 기원후 1세기 말에서 2세기, 고구려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것이죠.
그 태조왕의 "동.생"이라는 (말도 안 되죠? -_-;) 차대왕이 왕위에 오르고, 20년간의 재위 끝에 명링답부의 쿠테타로 신대왕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 명림답부도 100살 넘게 살았다 하죠. 그 뒤를 이은 고국천왕까지 요동군과의 전투가 계속되는데 이를 좌원 전투라 합니다. 고국천왕 때까지 꽤나 정치 혼란이 있었던 모양으로 그는 태조왕을 이어 왕권을 굳히고 고구려를 평안하게 합니다. 마침 중국에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많은 유민이 있었고, 이들을 받아가면서 고구려는 더 크게 성장하죠. 이 시기 패해 도주한 귀족들이 백제를 세웠을 거라는 가정은 전에 얘기했죠? 아무튼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명재상 을파소입니다.
이 양반은 아니구요 -_-a
고국천왕이 죽자 동생 산상왕이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은 동천왕 때에는 관구검에 수도가 털리기도 합니다. 중국의 혼란이 위에 의해 어느 정도 수습되자 고구려에 쓴 맛을 보여주려 한 거죠. 역시 이 때 옥저로 도주했다가 그대로 남하한 유민이 신라의 김씨가 된 게 아니었을까 하는 가설도 전에 썼죠. 폐허가 된 국내성, 다음 왕 중천왕은 이를 복구했고, 위에서 쳐들어오자 싸워 크게 이깁니다. 이렇게 고구려는 다시 살아나죠. 이후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에 이르러 고구려는 크게 성장, 낙랑, 대방을 비롯한 한군현들을 모조리 정복하는데 성공하고, 백제와 국경을 맞닿게 되었죠.
그 다음부터는 광개토편과 현재 연재 중인 이야기들을 보시구요.
이렇게 고구려는 하루 아침에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수 없이 싸우고, 내부의 혼란을 무수히 겪었으며, 끝내 이기고 성장해서 동북아의 초강대국이 됐습니다. 운도 좋았습니다. 백제와는 달리 수도가 여러 차례 털렸음에도 이겨내고 성장했고, 막 성장하려니 중국이 약해졌으니까요. 하지만 한반도 남부를 정복할까말까 하는 상황에서 정치 혼란으로 다시 밀렸습니다. 북부에서는 돌궐이 고구려를 압박했죠. 그런 가운데서... 거대한 슈퍼파워가 고구려를 노리고 있었죠. 전성기가 지난 고구려는 무력했고, 수는 그 힘을 중국은 물론 돌궐, 베트남까지 뻗으며 그 위세를 자랑했습니다.
고구려 사상 최악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2. 서전
581년 건국한 수는 598년 중국 통일에 성공합니다. 그 전까지 수는 다른 중국의 국가들에 맞서면서 고구려에 경쟁적으로 높은 지위를 주었습니다. 늘 고구려가 맡던 동이교위(동이족을 총괄하는 직위, 뭐 일단 명예직입니다만 고구려를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던 거죠)나 대장군을 줬죠. 하지만 문제가 벌어집니다. 백제, 신라가 수에 고구려를 쳐 달라고 열심히 요구했고, 수 문제 역시 돌궐과 고구려를 깨뜨려야 될 적으로 인식했거든요.
평원왕을 이은 영양왕, 그는 이 소식과 수가 고구려를 정탐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습은 단행합니다. 말갈병 1만과 함께 요서를 공격했지만 일단 막히죠.
"우리 고구려는 지난 칠백년간 하루도 무릎 끓은 적이 읎어!"
에 뭐 무릎을 맨날 끓긴 했구요 -_-; 어쨌든 요서를 점령한다는 것보단 고구려를 만만히 보지 말라는 것이었겠죠. 이에 열 받은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동원합니다만...
수륙합공으로 진군하던 수나라 병력은 장마와 전염병에 의해 제대로 싸우지도 못 하고 물러났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때 수나라 군 중 10에 8, 9가 죽었다는 표현이 있다는 것이죠. 고구려군이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은폐된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거기다 수 문제는 돌아온 장수들을 처벌했다고 하죠. 다만 후에 수 양제의 말도 안 되는 패배도 기록돼 있는데, 이것을 굳이 은폐했을까 하는 반론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영양왕의 선공이 딱 장마가 올 때 수 문제의 어그로를 끌었던 게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수나라는 여기에 걸려든 것이죠. 어느 쪽이든 물러난 수 문제는 고구려에서 화친을 청하자 고구려왕의 직위를 돌려줬고, 백제에서 다시 요청하자 "죄를 뉘우쳤으니 봐 줬다"고 정신승리를 시전합니다. (...)
이후 영양왕은 백제랑 신라를 응징하고 역사서 신집을 편찬하는 등 고구려의 대내외적으로 승리를 크게 알립니다. 참 축제분위기였겠죠. 하지만 수 문제의 좀 맛이 간 아들 양제가 등장하자 상황은 또 바뀌었습니다.
3. 사상 초유의 대군
문제의 아들 양제는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합니다. 이어 대운하 -_-; 를 파고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며 낙양을 제 2의 수도로 재개발하며 온갖 일들을 벌입니다. 뭐.......... -_-; 그가 벌인 일이 너무나도 많으니 일일이 말 하기도 그렇죠. 특히 그 힘을 사방으로 뻗으려 했는데, 토번부터 베트남이 여기에 당합니다.
607년, 수 양제가 돌궐의 계민이라는 칸을 찾았는데, 마침 고구려의 사신이 와 있었습니다. 이 때 수 양제는 고구려가 자기를 따르면서 돌궐과도 손을 잡으려 하는 것을 보고 강력한 요구를 하죠.
'Earth and Water"
... 아니 이거 말고 "입조" 왕이 직접 와서 자기에게 무릎 끓으라는 거였죠. 아마 고구려에선 이렇게 답 했겠죠.
This is Korea!!!!!!!!!!!!!!!!!!!
뭐 -_-; 양제는 그냥 침략할 구실을 찾은 것 같아요. 때는 611년, 그 수는...
1백 13만 3천 8백 명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중국 백만대군의 뻥이라고 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진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통 그런 경우는 "호왈"이라 하며 한 오륙만이면 십만으로, 한 십십오만이면 이십만으로, 한 이삽심만이면 오십만에서 백만으로 뻥튀기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저렇게 백의 자리까지 숫자를 말 하며 "호왈 이백만"이라고 했죠. 정말, 말도 안 되는, 진짜 미친듯이 많은 병력이 동원된 겁니다.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어영 안에는 12위·3대·5성·9시를 합하고, 내외 전후 좌우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 다음에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근래에는 군대 출정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
출발에만 40일이라 하아 -_-;; 무시무시하네요.
612년 초, 수군은 요하에 도착합니다.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가 모든 힘을 다 해 만들어 놓은 방어선, 절대 뚫리면 안 됐고, 마지막까지도 뚫리지 않은 이 요동 방어선이 처음으로 시험을 받게 됩니다. 적은 113만!
하지만 스타만 해도 알잖아요. -_-; 이 모든 병력을 한 번에 투입할 순 없죠. 당장 요하에 다리를 만드는 것조차 고구려군에 막혀서 계속 패배를 당했고, 안 되겠다 싶어 온 힘을 다 해 만드니 이틀만에 다리가 완성됐습니다. 이에 고구려군은 맞서보려 했지만 패하고 물러났죠. 이후 수군은 요동성을 포위하지만, 5월까지도 요동성은 꿋꿋하게 버팁니다. 그 자신의 방어력도 있었지만 수나라에게도 자기만의 제한이 있었죠. 양제가 이렇게 말 했거든요.
"일체 전쟁은 진격하고 정지함을 모두 반드시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마땅히 위무하여 받아들이고 군사를 풀어놓지 말라"
이걸 알게 된 고구려군은 성이 위험하면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했고, 수군은 이런 말을 들으면 공격을 멈추고 양제에게 보고해야 했습니다. -_-; 그 시간동안 전열을 재정비했던 거죠. 양제는 그게 문제인 것을 마지막까지 몰랐던 모양입니다. (...) 뭐 요새는 그냥 "이제 막 통일한 상황에서 중화라는 허세를 포기할 수 없어서 고구려군의 장난질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는 쪽으로 해석하나 봐요.
황제는 당연히 관대해야 되거든요.
아무튼... 어떻게 된 게 2월에 시작해서 6월까지 요동 방어선의 성들은 단 하나도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특단의 별동대가 만들어지니 우중문이 이끄는 30만 대군이었습니다. -_-; 어떻게 별동대가 30만인지... 이들은 고구려의 성들을 무시하고 압록강으로 돌진합니다. 한편, 이들과 호응할 수군이 산동에서 평양성으로 진군하고 있었죠.
4. 평양성 전투
이후 당에서도 했던 것이지만, 요동 방어선을 뚫는 최선의 방책은 우회죠. -_-; 문제는 그 병력에 보급을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수군을 통해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수 양제는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에게 육군을 보좌함과 동시에 합류해 평양성을 공격할 것을 명 합니다.
문제는......... 얘가 또 개인 행동 했어요. -_-;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했거든요. 자신은 있었을 겁니다. 주력군은 요동에서 분산돼 있었고, 다가오는 별동대를 막기 위해 을지문덕이 나가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평양 60리 밖 대동강 부근에서 그들을 막던 고구려군은 패배합니다. 이 상태로 적의 수도를 찌르는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겠습니다만...
고건무, 영류왕은 여기서 참 대담한 작전으로 맞섭니다. 성을 비우는 거였죠. (...) 공성지계였습니다. 주법상 등의 부하들의 만류를 무시한 내호아는 고건무가 맞서는 척 하다 후퇴한 틈을 타 평양성을 점령했고, 약탈을 시작합니다. 이에 숨어 있던 고구려군이 역습을 가하니 참패... 을지문덕이 더 알려져서 그렇지 이 전투가 사실상 2차 전쟁의 명운을 갈랐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5. 피로 물든 살수
한편 우중문은 압록강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그 한계는 곧 드러나죠. 수군은 자기들이 먹을 식량을 등에 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무게만 1인당 2섬 -_-; 그 외에 무기부터 이런저런 것들을 들고 움직였으니 말도 안 되는 강행군이었던 것이죠. 위에서는 식량을 버리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땅에 파묻고 가는 자들도 참 많았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고구려는 청야 작전으로 적이 쌀 한 톨, 물 한 모금 마시지 못 하게 밀어붙였구요.
이런 상황에서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을 찾아 거짓으로 항복합니다. 을지문덕, 대체 그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김부식이 그에 대해 열심히 써 놓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중국 기록에서 복사 붙여넣기 한 것이었죠. 이 여수전쟁에 혜성처럼 등장해 전쟁이 끝나자 갑자기 사라진 그, 덕분에 선비족 출신이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어쨌든 고구려군 총지휘관인 것으로 보아 최상급 귀족이 아니었을까 합니다만...
수 양제는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아라"는 밀지를 받았습니다. 그 정도의 중요 인물이 스스로 찾아 온 것이죠. 하지만 명분이 항복이라서 붙잡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_-; 그노무 허세, 을지문덕은 이 틈을 잘 찌른 거죠. 수군의 허실을 자세히 본 을지문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넙니다. 열 받은 우중문은 주변에서 말렸지만 "아니 나 이대로 돌아가면 내 목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라는 식으로 징징대면서 무리한 강행군을 시도했습니다.
을지문덕은 이에 맞서 일곱 번 싸워 일곱 번을 져 주는, 칠종칠금이 나이라 칠패칠인? -_-; 뭐 암튼 그런 작전을 썼습니다. 어느새 우중문은 돌아오지 못 할 강을 건넜습니다. 살수, 청천강으로 비정되죠. 평양성 30리 앞, 을지문덕은 여기서 그 유명한 시를 우중문에게 "바칩니다". 수서에도 기록돼 있는, 참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여 수장 우중문 시]
죠.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그대의 신묘한 계략은 천문을 꿰뚫었고 -> 님 여기 날씨는 아세염?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그대의 묘책은 지리를 통달했다. -> 여기가 니 죽을 땅인 건 알구여?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싸움에 이겨 그 공이 이미 높으니 -> 적당히 놀아 줬잖여 ㅡㅡ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이만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하뇨 -> 디지기 싫음 끄지라
천문과 지리, 인화를 아는 것은 병법의 기본 법칙,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닥돌했죠. 마치 도박을 한 판 더 하는 것과 같고 문명에서 한 턴 더 하는 것과 같이 우중문은 을지문덕의 거짓 퇴각에 말려들었습니다. 의지도, 군량도 없는 상황에서 수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데 평양 코 앞까지 와 버렸으니까요. 결국 이 편지와 "돌아가면 왕이 입조할 거예요~"라는, 입조를 명분으로 했던 수나라의 비위까지 맞춰주면서 우중문은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를 그냥 놓아줄 을지문덕이 아니었죠. 쇼타임 시작이었습니다.
곳곳에서 고구려군의 게릴라가 계속됐고, 수군이 청천강을 건너며 둘로 나뉘어 있는 그 순간, 고구려군의 총공격이 시작됩니다. 30만 5천의 수군 중 돌아간 병력은 단 2천 7백이었죠. 흔히 수나라를 수공으로 (대체 이번 글에 수 자가 몇 개 등장하는 건지) 공격했다고 하지만 근거는 없습니다. 딱 강을 건너면서 수군이 취약해질 틈을 노린 고구려군의 총공격이었던 것이죠.
이를 살수대첩이라 합니다. 오죽했으면 양제는 그를 쇠사슬로 묶어 끌고 갔다고 합니다. 이 2차 침공에서 수나라가 점령한 성은 단 하나, 그것도 요하 서쪽에 있던 성이었죠.
6. 그 후
이렇게 처참한 피해를 입었지만, 양제는 결국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구려라는 작은 오랑캐가 상국을 업신여긴다. 지금 바다를 공략하고 산을 옮길 일이라도 능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하물며 이 오랑캐쯤이야"
신하들의 반대에도 그는 강행했고, 이번에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죠. 613년 4월이었습니다. 고구려군은 이번에도 요동을 경계로 치고 빠지고 하다가 적이 강을 건너자 방어를 굳힙니다. 재밌는 건 이 때 양제가 "장수의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허락하였다"는 점이죠. 이 쯤 되니 황제의 허세고 뭐고 없었던 모양입니다. (...)
이번에는 수에서도 머리를 좀 써서 가마니에 흙을 담아 토산을 쌓아서 공격합니다. 후에 당 태종도 안시성에서 마찬가지 일을 했죠. 또한 이전과 마찬가지로 별동대를 조직했죠. 2차 침공 때와는 꽤나 다른 효율적인 공격에 고구려군도 제법 위험을 느낀 모양입니다만...
종말은 고구려보다 수 양제에게 더 가까웠습니다. 양현감이 수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병부시랑 곡사정은 고구려에 투항해 버립니다. 양제는 이 때문에 물자를 산처럼 쌓고 병력은 거기에 숨어 밤을 타 퇴각합니다. 그리고 투입하려 했던 별동대도 이에 따라 후퇴했는데, 고구려군은 오랜 전통대로 등짝을 쳐서 (...) 크게 승전하죠.
-_-;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후인 614년, 양제는 또...... 네 또요 -_-; 고구려 정벌을 논합니다. 아니 이 쯤 되면 진짜;;; 이 때는 고구려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진짜 "고마해라 마이 뭇따 아이가" 수준이죠.
의지의 양제는 병력을 회원진에 집결하고, 내호아는 비사성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죠. 이 비사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평양으로 가려 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도 수군으로 간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고구려는 망명해 온 곡사정을 돌려주며 화친을 다시 청했죠. 육군이 가기도 전에 내호아만 움직인 것에서 볼 수 있듯, 이 때 수나라 병력은 제대로 집결도 되지 않았고, 고구려도 이에 맞서기에는 너무 많은 힘을 쏟아부은 상태였죠.
"이때 천하가 이미 소란스러워 징발된 병사들이 정한 날짜를 어기고 도착하지 않은 자가 많았고, 우리 나라 또한 어렵고 궁핍하여 있었다."
결국 양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갔고, 수나라는 120차례나 되는 반란에 휩싸입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이연, 그의 아들이 바로 당 태종 이세민이었습니다. 양제와는 이종사촌간이라고 합니다만 :)
이연 부자는 장안에 입성, 양제를 폐위시켰고, 양제는 618년 우문화급, 지급 형제에게 목이 졸려 개처럼 질질 끌려다니다 죽었습니다. 이 두 형제의 아버지가 우중문과 함께 살수에서 패전했던 우문술이었죠.
그의 업적이라 할 만한 것들이 다 그렇지만, 그가 고구려에 대해 보였던 증오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_-; 어마어마한 패배를 입었음에도 매년 대군을 이끌고 재침공했고, 사실상 그의 몰락 자체가 고구려와의 전쟁 때문이었거든요.
한편 고구려는 이들을 모두 막아내긴 했지만, 역시 쉬운 싸움은 아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전력이었고, 막고 또 막아내도 좀 현실적인 병력으로 바뀌기만 할 뿐 대군이었던 것은 여전했죠. 반면 고구려는 이에 맞서 요서의 영토를 모두 포기했고, 요동부터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청야 작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거기에 작전이라고 하지만 평양성에 적을 끌어들였죠.
고구려가 정말 분열 없이 이 거대한 적에 맞서 단결해 싸운 것은 확실합니다. 청야작전과 평양성 내부로의 유인은 백성 및 귀족들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고구려는 그 평양성 전투의 영웅 고건무는 영류왕이 되어 당과의 화친을 꾀하죠. 슈퍼파워에 영원히 그대로 맞선다는 건, 유목민족이 아닌 이상 불가능했으니까요.
이후 연개소문의 강경파가 쿠테타를 일으키고 당과 싸우고 신라를 압박했지만, 이 시기 고구려는 그 힘을 다 쓴 상황이었습니다. 즉, 수 양제는 고구려와 동귀어진한 셈이죠. -_-; 삼국유사에서는 아예 연개소문이 수나라 장수의 환생으로 불교 대신 도교를 믿었기에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수나라의 공격은 미친 듯이 강했습니다. 어쩌면, 수 양제가 이 정도의 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당나라와의 전쟁이 좀 더 쉽게 이루어졌을 수도 있겠네요.
당나라와의 전쟁은, 이 모든 역사 이야기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아래 글을 참조해 주시구요 ~_~
https://pgr21.net/?b=8&n=27216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죠.
우리가 아는 고구려는 하루 아침에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1세기로 쳐도 2세기 동안의 부족 국가나 다름 없던 시대를 보냈고, 2세기 동안 한군현들과 수도가 함락되기도 하는 긴 전쟁을 치뤘죠. 겨우 한군현을 물리치자 북쪽의 연, 남쪽의 백제가 고구려를 압박해 왔고, 그 시련을 겪고 나서야 동북아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598년부터 668년까지, 70년간 고구려는 이 슈퍼파워, 초강대국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결국 패하긴 했지만, 고구려는 그렇게 쉽게 죽어주지 않았죠.
---------------------------------------------------
다 써놓고 보니 왠지 초기 고구려 좀 제대로 다뤄보고 싶군요. 재밌기는 참 재밌어요.
여기서도 고구려에서 몇 차례 항복하고 이 시리즈 다 끝나고 다룰 얘기에서도 심심하면 항복 항복 얘기가 나오는데, 이건 말 그대로의 항복이라기보다는 화친 정도로 인식해야 합니다. 확실한 "항복'이라 할 수 있는 건 "입조", 다른 제후국들처럼 중국에 편입되는 것이죠. 삼국부터 고려, 조선까지 중국의 제후국으로 있었지만 자치를 누렸습니다. 반면 중국 황제에게 직접 "입조"한 이후의 백제와 고구려, 흔히 소백제와 소고구려라 불리는 나라들은 영토도 비교적 그대로였고 보장왕과 백제 왕족이 다스렸지만 우리 역사로 치지 않죠.
... 다 써놓고 보니 왠지 백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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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
해시 아이콘
11/
12/19 19:20
수정 아이콘
어느 책에서 봤던 것 보다
마음에 와 닿고 이해가 되는
을지문덕 장군의 시 해석이네요 크크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김연우
해시 아이콘
11/
12/19 19:26
수정 아이콘
가끔 부여나 한, 낙랑 같은 명칭들은 국가의 명칭이라기보다 지역을 뜻하는거 아닌건가, 싶어요. 다들 중구난방이라..
pioren
해시 아이콘
11/
12/19 20:17
수정 아이콘
막다막다 겨우 막았는데 미네랄이 다 떨어져 가네요....쩝
안타깝긴 한데, 그래도 한국 사람으로서는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인 것 같아요.
양제는 워낙 과시욕이 강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 그에게 뻣뻣이 고개를 세운 고구려는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던 듯. '감히 천자에게...'
선데이그후
해시 아이콘
11/
12/19 20:30
수정 아이콘
눈시BBver.2님 글이 오늘따라 더 박진감넘치네요. 음악도요. 오늘은 특별히 제유머도 이해해주셨으니 ANAK 추천합니다.(글만 맨날 읽고 추천은 한번도 ㅡㅡ' 오늘 처음으로 추천때립니다.)지송요
1234
해시 아이콘
11/
12/19 20:38
수정 아이콘
언제나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번외로 눈시BBver.2 님께 질문 드립니다.
눈시님은 간도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세종이후 조선의 영토는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는데
http://blog.naver.com/kulasama?Redirect=Log&logNo=110112437081
이 사이트에서 간도는 조선땅이었던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적혀있더군요.
물론 우리 역사서에서도 그렇구요. 그렇다면 간도협약은 무었이었으며 참 궁금한게 많아요. 간도에 대해서 좀 알려주세요~!!!
L
해시 아이콘
11/
12/19 20:45
수정 아이콘
크크.. 점점 유머가 늘고 있습니다. 디스 이스 코리아!!!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고 있습니다. 근데 제일 위에 있는 짤은 미싱 플러그인이라고 나오네요..ㅠㅠ;
parallelline
해시 아이콘
11/
12/19 21:49
수정 아이콘
제가알기론 우중문과 우문화급,지급 아버지인 우문술과는 다른사람으로 알고있는데 아니었나요.?? 관심있는글 항상 잘 읽고 갑니다 ^^
눈시BBver.2
해시 아이콘
11/
12/19 22:50
수정 아이콘
........ 악 우문술이랑 헷갈렸어요 ㅠㅠ;;;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바궈야겠네요 ㅠㅠ
아니 그 전에 저 우중문을 다 우문중으로 했네요 = =;; 모조리 교체;
Je ne sais quoi
해시 아이콘
11/
12/19 23:01
수정 아이콘
동천왕 부분은 같은 왕이 관구검에게 수도가 공략당하고 다시 국내성으로 수복했단 말씀인가요? 다음 왕 동천왕이라고 써 있어서 조금 헷갈리네요.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 시 해석은 아주 딱입니다! ^^
La Vie En Rose
해시 아이콘
11/
12/19 23:42
수정 아이콘
완전 재밌게 읽고 갑니다.
눈시bb님의 글은 어릴때 18권짜리 역사학습만화와는 완전히 다른 재미를 주네요.
그 시대에 30만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감이 잘 안왔을 어린시절에도...
무슨 별동대로 30만씩이나 했던 기억이 나기도 하구요.
이순신장군의 한산도대첩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도 쓰셨으니 이제 강감찬장군의 귀주대첩이 남았군요!
카서스
해시 아이콘
11/
12/19 23:58
수정 아이콘
낙랑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죠.
광무제가 낙랑으로 원정온 다음달 바로 대무신왕이 급사합니다.
과연 대무신왕이 점령한 낙랑은 어디였을까요?
불량품
해시 아이콘
11/
12/20 01:07
수정 아이콘
고구려: 드...등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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