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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7/03 17:48:46
Name 눈시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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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남한산성 - 7. 형제의 맹






1. 정묘호란
당시 후금은 그 유명한 팔기군을 기반으로 한 6만의 정규군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중 3만 6천명을 조선에 투입했습니다. 아민을 총대장으로  6000명씩 6개 군을 구성, 세부계획을 수립합니다. 목적은 모문룡을 정벌하고 조선을 꺾는다는 것이었죠.

이 때 후금군의 목표에는 한성도 들어있었습니다만, 조선의 완전 점령은 부차적인 목표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논하기로 하죠. 1월 8일, 후금군은 심양에서 출동합니다.

12일 압록강에 도착한 아민은 2군을 북쪽 창성진을 공격하게 해서 지원을 끊고 다음날 강을 건넜습니다.

2) 의주성 전투
그 때 의주성에는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삼천명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 건너편의 적을 알게 된 후 평안 병사 남이흥에게 보고하죠. 요격은 꿈 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방어를 굳히며 증원군을 기다려야 되었습니다.

아민은 "성중의 모든 장병은 무장을 풀어 항복하고 남쪽에서 온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겠다"는 내용의 항복권고를 합니다. 이완은 "이웃 나라의 도리가 이웃을 침공하는 것이냐"면서 꾸짖어 내쫓습니다.

13일, 아민은 3, 4, 5군을 보내 의주성 주변의 지원을 차단하고 1군과 6군으로 의주성을 포위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완은 하루를 버팁니다. 이 때 후금군도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의주성 내에도 화약과 화살이 바닥나기 시작했죠. 후금군은 밤에도 공격을 계속해서 조선군은 횃불을 밝혀 가며 막아야 했습니다. 이 때 탈출한 병사들이 생겼는데 후금군은 이들을 포로로 잡고 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로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민은 한윤에게 백 명의 병력을 주어 성 내로 진입하게 하죠.

다음 날 새벽, 성 내로 들어간 후금군이 성 내에 불을 지르고 성 밖의 적도 진격해오면서 성이 함락됩니다. 이완은 전사합니다. 충무공의 조카다운 마지막이었습니다만... 그 후의 대접은 너무나도 박했죠. 나중에 다시 다루겠습니다. 판관 최몽량은 포로가 되었지만 항복을 거부하고 처형당합니다. 항복한 조선군은 머리가 깎이고 후금군에 편입되었죠.

한편 2군은 동시에 창성진을 포위했는데 이 때 부사 김시약이 600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적의 항복권고에 놀란 병사들은 도망치거나 아예 성을 탈취해서 항복하려고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김시약은 부하들에게 마음대로 하라면서 자신은 지킬 것을 천명했고, 병사들도 그를 따릅니다. 병력은 십분의 일, 창성진 역시 너무나도 쉽게 함락되고 김시약 역시 항복을 거부하고 최후를 맞습니다.

3) 후금군의 기동
이괄이 있던 곳을 기억하실 겁니다. 영변이죠. 당시 평안도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각기 남로, 북로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편하게 해안길, 내륙길이라 부르는데 이 길은 고려 때부터 (혹은 그 이전에도) 적이 침략해 올 때 진군로로 이용되었습니다. 정묘호란 끝나고 이 길에 대해서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거두절미하고, 영변은 북로, 내륙길의 거점이라 할 만하고 안주는 남로, 해안길의 거점이라 할 만 합니다. 이괄이 주둔한 곳이 영변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조정에서는 북로를 주시했고, 이후 남이흥이 병력을 안주에 집결시키자 "다 남이흥 생각에 따른 거다. 쟤가 전쟁 피하려고 수작하는 거다"면서 신나게 깝니다.

그런데 후금군은 해안길로 왔죠 -_-a

후금군은 병력을 나눠 1군은 용천 -> 안주로, 2군은 철산 -> 가도로, 3, 4, 5군은 선천, 곽산, 정주 공략 후 안주로, 6군은 곽산 공략 후 신미도로 향하게 했습니다.

4) 용골산성 전투
15일 용천으로 진격한 1군은 용천부에 무혈 입성합니다. 이 때 용천 부사 이희권은 휘하 병력 500명과 용천부 내의 백성들을 용천 동쪽 4km 지점에 위치한 용골산성으로 옮깁니다. 이에 아민은 주력을 남하시킨 후 2000명으로 용골산성을 공격하게 하죠. 이희건은 항복하자는 이들을 참수한 후 휘하의 이충걸, 장사준에게 성의 방어를 맡기고 병력 100명을 이끌고 성을 나갑니다. 이후 유격전을 수행하다 적에게 돌격해서 전사합니다. 중군 이충걸은 도주하고 협수장 장사준도 항복했습니다. 지휘체계가 완전히 결딴 난 상황에서 나선 이가 정봉수였습니다. 전 영산 현감이었던 그는 관군 잔여 병력과 의병을 규합해 성을 다시 지킵니다.

+) 이 때 병력이 수천명이라는 것도 있는데 애매하네요. 수천명이나 되면 이천명으로 공격하지 않았을텐데요. 아예 공격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이희건도 성을 나가자마자 전사했다고 하는데, 시간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후금군은 정봉수가 성을 굳게 지키자 장사준을 시켜 항복을 권유하였는데 이 때 정봉수가 병력을 매복시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분노한 적이 돌격해오자 의병들도 "성 밖으로!" 나가서 싸웁니다. 그런데 이기구요. 0_0 특히 기병이 많이 상하고 말도 많이 빼앗겨서 화의가 성립될 때까지 후금군은 더 이상 용골산성을 공격하지 못 합니다. 어찌나 열 받았는지 화의를 맺고 돌아갈 때도 용골산성을 계속 공격하는데도 막아냈죠.

정묘호란 시기 유일하게 박수 치며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5) 능한산성 전투
용골산성에서 온 1군의 주력과 3~6군은 각기 선천, 곽산, 정주를 공략하고 최종적으로 안주를 점령하려 했습니다. 이에 선천 부사 기협, 곽산 군수 박유건, 정주 목사 김진은 휘하 병력과 백성들을 곽산 동쪽 4km 지점에 있는 능한산성으로 옮깁니다. 기존의 방어병 1천명과 합쳐 1만명 가량이 능한산성을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병력은 삼사천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15일 적이 능한산성에 도착했고, 항복 권고 한 번 한 후에 부대를 5개로 나누어 축차적으로 공격합니다. 먼저 적은 주변 숲에 불을 질렀지만 겨울에 이미 나무를 많이 베어 놓았기에 별 효과가 없었고, 서, 남문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지만 역시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에 적은 허수아비를 세우고 소리를 질러 조선군의 이목을 끈 다음 북문에 기습을 가합니다. 순식간에 가해진 기습에 조선군은 전멸했죠. 김진과 박유건은 항복했고, 기협은 권유를 뿌리치고 전사합니다.

이렇게 고립돼 있는 용골산성을 제외한 청천강 북부의 조선군은 전멸합니다.

6) 가도 공략
한편 2군은 철산으로 진격해 사포에 있는 모문룡의 거점을 격파하고 바다를 건너 가도를 급습합니다. 가도에는 4만의 병력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을 보고 도망치기에 급급했죠. 모문룡은 본진을 신미도로 옮기고 바다에 익숙하지 못 한 후금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 하고 각 포구에서 주둔해서 모문룡이 상륙할 길을 끊는 데 만족했죠.

7) 안주성 전투
16일, 후금군은 병력을 정주에 집결한 후 19일에 박천을 점령하고 얼어붙은 청천강을 건너 안주성 북쪽에 포진합니다. 2만여명의 병력을 안주성 하나에 집결시킨 것이죠.

이 때 안주성을 지키던 장수는 평안 병사 남이흥. 그는 구성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안주로 이동하여 강계, 개천, 태천, 박천 등 후금의 손이 닿지 않은 지역의 병력을 모두 불러들입니다. 이 때 병력이 3000이라고 하는데, 평안 감사 윤훤이 보낸 황해도 별승군 1700명을 합친 숫자인지 모르겠네요.  한민족전쟁사에서는 이들을 합쳐 3000명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들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이끌고 갔던 김완이 그냥 후퇴해 버렸거든요. 이들을 뺀다면 1300명이네요. -_- 이런 상황에서 적은 항복 권유를 했고, 남이흥은 거부하고 중군을 보내 결사항전할 것을 전달합니다.

21일 새벽, 적은 1만 4천여명으로 성벽에 오르게 하고 나머지 6000여명은 성 주위에서 화살을 쏘면서 엄호하게 했습니다. 조선군은 대포와 화살, 돌과 물을 던지고 퍼부으며 저지했죠. 계속 이어지는 파상 공격에도 안주성은 버텼고, 정오가 되자 적은 물러났습니다. 4시경에 다시 시작된 공격에서 적은 마침내 운제를 거는 데 성공했고 조선군은 철저히 몰립니다. 마침내 소수의 조선군이 관아까지 후퇴했을 때 적은 다시 항복을 권유했지만, 남이흥은 역시 거부하며 "죽음으로 일전을 결하겠다"고 알립니다. 조정에도 마지막 장계를 올리죠. 오후 6시경, 적은 마침내 최후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남이흥과 안주 목사 김준은 남은 병사들과 함께 화약고를 터뜨려 자폭합니다.

그 모습을 본 아민은 "조선은 충의의 나라라더니 내 이제 그 참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다"고 하면서 포로로 잡힌 백성들을 석방합니다.

지금까지 봐 왔듯 조선군은 사기가 떨어지고 도망병이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열심히 싸웠고, 항복한 장수들도 일단 싸우고 난 후에야 항복했습니다. 전사한 장수들의 모습들을 보면 숙연해지죠. 적은 병력으로나마 그들은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 동안 조정은 뭘 하고 있었을까요.

2. 왕은 강화도로
처음 보고가 들어온 것은 17일이었습니다. 장만은 급히 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면서 파주 산성에도 병력을 투입할 것을 건의합니다. 인조는 경기, 충청, 전라에서 도합 일만명을 급히 뽑아 오라고 명령했고, 경기도에서 이천 정도는 내 줄 수 있지만 총융청과 어영청에서 병력을 뺄 순 없다고 합니다. -_-a 한편 끝까지 옮기지 않았던 함경북도의 정예병을 투입할 논의도 하죠.
급히 강화도로 갈 것인가 남한산성으로 갈 것인가 의논이 시작되었고, 능한산성이 함락되고 적이 안주까지 다다랐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피난갈 준비를 합니다. 친정하겠다고 큰 소리 쳤던 인간은 어디의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1) 후금군의 진출
평양성에는 평안 감사 윤훤이 8000여명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휘하에 황해도 별승군 1700이 있었는데 남이흥의 구원 요청에 김완이 이들을 끌고 갔지만 명령 없이 후퇴했죠. 그런데 윤훤이 애초에 구원을 거부했다는 말도 있군요.
이 때 평양성 안의 군민들은 크게 동요해서 성을 탈출하고 있었고, 윤훤은 종사관 홍명구의 건의를 받아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성을 버립니다. 그가 떠난 평양에서는 백성들이 전 판관 김준덕을 의병장으로 추대, 항전 태세를 취하죠. 이 때 남은 군민이 2000여명이었다고 합니다. 23일 도착한 후금군은 여러 차례 항복을 권유했지만 의병들은 거부했고, 쉽게 함락시킬 수 없을 거라 판단한 그들은 평양을 포기하고 그대로 남하합니다.
황주에서는 황해 병사 정호서가 5000여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윤훤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황주를 포기하고 봉산으로 후퇴합니다.

조정은 임진강에 다시 방어선을 설정하고 강화도로 피난을 결정합니다. 장만과 부원수 정충신, 강원도의 병력이 투입되었고 총융사 이서는 총융청군과 하삼도군을 지휘해서 한강 방어선을 지키게 했죠. 27일 인조는 강화도로, 세자는 전주로 향합니다. 한편 진창군 강인을 후금군 진영에 보내 화의를 모색하죠.

+) 이괄의 난 편에서 실수한 게 세자가 전주로 간 건 이 때였습니다. - -a

왕이 떠난 한양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피난하거나 민가를 약탈했고, 치안은 마비 상태였죠. 한양 수비군도 빠져나가서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3. 화의 교섭
아민은 의주를 점령한 후 바로 화의를 제기했습니다. 18일 윤훤은 이를 받았지만 일방적으로 침공해 놓고 화의를 제기하냐면서 거부하죠. 이에 아민은 서울까지 치고 가겠다면서 협박했고, 실제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주변에서 말렸다는군요.
27일 조선의 사신이 도착했고 28일에는 아민이 사자를 보냅니다. 이들은 29일에 강화도에 도착했죠. 4일간의 논의가 지속되었습니다.

후금이 내건 명분은 "조선이 명을 지원해 후금의 배후를 괴롭혔다는 것" "후금은 포로들을 석방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는데 조선은 오히려 후금을 적대시했고 모문룡을 잡으라는 요구도 묵살하고 지원한 것" "새로운 왕이 즉위했는데도 조문 사절이나 축하 사절을 보내지 않은 점" 등 7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요구한 것은 아예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이었죠. 물론 후금이 형이었죠 -_-; 문제가 걸립니다. 명과의 관계를 절대 끊을 수 없다는 것, 화맹의 예를 굳이 해야 하냐는 것, 그리고 예물을 얼마나 보낼 것이냐는 거였죠.

후금 쪽도 급하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조선이 의외로 협조적으로 나오자 더 진격하기도 그렇고 후퇴하기도 그런 상황이었죠. 일단 1월말 병력을 뒤로 물리고, 이 때 군량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 그 때는 병력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고 함경도와 하삼도의 병력도 도착한 상황이었습니다. 초반의 충격 효과가 사라진 상황에서 왕은 섬으로 피했고 조선군은 다 집결한 상황이었죠. 3만 6천명으로는 그들을 다 상대할 수 없을 뿐더러 점령지에서조차 의병이 일어난 상황이었습니다. 이 의병들이 후금군과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후금군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주었을 것 같네요. 평양 이전까지는 수가 적어도 죽도록 싸우는 조선군을 상대했던 게 후금군이었죠. 아민이야 계속 까칠하게 굴었지만요 -_-a

결국 후금은 서로 연호를 쓰지 않기로 하면서 명과의 관계를 인정했고, 처음 요구했던 목면 5만필도 1만 5천 필로 크게 줄입니다. 2월 15일, 조선은 후금에 예물을 보내는데 목면 1만 5천 필, 면주 2백 필, 백저포 250필, 호피 60장, 녹비 40장, 왜도 8병, 안구마 1필이었습니다. 한편 화맹 의식도 인조는 그냥 향을 피워 하늘에 맹세하고 백마와 흑우의 피를 마시는 의식은 대신들이 하기로 했죠.

3월 3일, 마침내 화맹이 이루어집니다. 후금군의 즉시 철수, 양국의 불가침 조약(압록강을 넘지 않는다) 봄과 가을에 사절 교환,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난자도에 시장을 만들어 무역을 한다는 등의 조건이었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당시 맹세문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정묘호란은 일단 끝납니다. 십 일 정도의 전투와 두 달 가량의 교섭,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철수하는 후금군이 어땠는지와 잘도 도망갔던 모문룡의 반응, 그리고 정묘호란에 대한 평가는 다음 편으로 넘기겠습니다.
... 쓰면서도 열 받는데 스트레스 받으신 분은 안 보시길 권 합니다.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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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03 18:35
수정 아이콘
모문룡이 정말 4만이나 되는 병력이 있었을까요? 대부분 그냥 요민이 아니었을까 하는...
근대에 가까워지니 병력 수 뻥튀기는 많이 사라지네요.
그래도 당시 팔기군이 6만이라니 그 수가 생각보다 적네요.
11/07/04 00:49
수정 아이콘
마지막 문장에 통감하며 읽었습니다...흑
그런데 안구마라는건 뭐길래 1필을 줘도 괜찮을정도로 명마였을까요?
호떡집
11/07/04 01:05
수정 아이콘
정묘도 답답한데 병자가면 쓰러질 듯 하네요.

정리하고 글쓰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건필하세요.

지도가 있어서 이해가 잘 되네요.
Je ne sais quoi
11/07/04 06:33
수정 아이콘
일단 작은(?) 거라 한 편으로 나오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무리수마자용
11/07/04 09:49
수정 아이콘
일본보다 정보력에서 앞서있다는 느낌을 받는군요 잘읽었습니다 제가 m체질인지 이번글도 좋네요 히히 [m]
Amunt_ValenciaCF
11/07/04 09:58
수정 아이콘
데프콘에서도 나왔죠. 평안도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고...중간에 요격하지 못하면 다음 방어선은 청천강인 것까지 똑같네요. 예나 지금이나 지형지물 파악이 중요하죠.

병자호란 볼 지 말 지 심각하게 고민중입니다;;
백마탄 초인
11/07/04 11:03
수정 아이콘
정말 아쉽네요;; 아무리 정예병이라지만 3만 병력에;; 우린 홈그라운드 이기도 한데....

좋은 글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중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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