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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7/01 10:59:33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임진왜란 못 다한 이야기 - 항왜, 김충선
항왜 항왜 하다 보니 한 편 써야 될 것 같아서 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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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섬 오랑캐다" (余卽島夷之人也) - 모하당 전집

1. 외인부대
항왜라는 단어는 태종 6년에 처음 등장합니다. 항왜 나가온은 동 8품 조금 뒤에 서고, 섬라곡국(태국) 사람은 서 8품 뒤에 섰다. 나가온에게는 옷과 사모, 은대, 목화를 하사했다는 거죠. 나가온에게 선략 장군을 주고 그 부하 8명에게도 각기 관직을 주었다는 것을 보면 나름 우대한 것 같습니다. 직후에는 망사문이라는 사람이 세 명을 데리고 또 투항합니다. 왜구의 무서움을 겪어본 왕인만큼 그들을 우대하고 정보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보입니다. 이후에는 세종 때 한 번 보이고 쭈욱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은 별 신경을 안 썼고 일본은 지들끼리 싸우느라 바쁜 상황이었죠. 조선은 일본인들을 왜관 밖으로 나가지 못 하게 했고 일본인들은 거기 반발해서 각종 왜변을 일으키는 등 사이가 나빠지기만 할 무렵이었습니다. 뭐 이 때도 조선에 동화된 왜인들이 없진 않았겠죠. 마찬가지로 조선을 탈출해서 대마도로 간 조선인도 있을 거구요. 하지만 그게 중앙 정부까지 닿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들 항왜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 때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임진왜란 때문이었죠.

실록에서 항왜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93년 8월 30일입니다.

"제독이 있을 적에 소위 항왜(降倭)라는 것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올라왔는데 그 수가 매우 많고, 제독이 내려간 뒤에도 또 23명이 올라왔습니다. 투항(投降)의 진위(眞僞)를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투항을 가탁(假託)하여 우리의 허실(虛實)을 탐지하려는 계획이 없지 않을 듯하니, 조정에서 잘 조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처음에는 그들을 골칫거리로 여기고 처형하거나 한 곳에 모아둔 듯 합니다. 간첩이 아니냐는 의심이었겠죠. 투항 이유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일본군도 굶주림에 지쳐 있던 그 때, 병졸들은 살기 위해 투항했을 것이고 좀 지위가 있는 이는 전쟁에 환멸을 느껴서 투항했겠죠. 처음에는 의심하던 조정도 슬슬 그들의 이용가치를 알게 됩니다. 특히 그들 중 조총에 능한 자를 우대했는데, 가장 먼저 이름이 보이는 자가 야여문입니다. 비변사는 그가 개념이(-_-a 원문은 계려計慮) 있다면서 잘 대우해서 마음을 붙잡아 두자고 하죠.

94년 이후에는 항왜를 우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습니다. 하지만 인식을 바꾸는 게 쉬운 게 아니라서 꼬투리를 잡거나 몰래 죽이는 이들도 있었고 이 때문에 항왜들이 칼을 차고 다녀서 조정은 겁 내기도 합니다. 칼을 찬 왜인들이 돌아다녀서 서울이 혼란스러우니 어디로 옮기자느니 하는 말들이 나오고, 여전히 간첩이 아니냐는 의심도 계속되죠. 실제로 간첩이었는지 대우를 못 받아서인지 도망간 항왜도 있습니다.

그랬던 항왜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게 된 건 북방에서였습니다. 이미 이 때부터 북병사 정현룡은 항왜를 선봉으로 쓰며 그들의 진가를 확인하게 되었죠. 조정에서도 그들을 모아 검술과 조총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그들을 장수들에게 몇 명씩 딸려 보내게 되는데, 그 수가 적어서 힘을 다 낼 수 없을테니 아예 부대를 만들자고 하죠. 이렇게 항왜 부대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2. 여여문
위에서 언급한 야여문은 94년부터 여여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아마 본명은 야에몬이 아닌가 싶네요. 선조는 그를 특별히 아껴서 "전날에 우대하라고 했는데 잘 하고 있냐? 병 났다고 하는데 보통 왜인이 아니니까 잘 대해줘야 된다"고 했죠. 그 때 막 창설된 훈련도감에 바로 소속됩니다. 거기서 검술과 포술, 진법 등을 전수하게 되죠. 그가 가르치는 진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매우 교사(巧詐)(교묘)하다면서 널리 가르쳐야 되겠는데 병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의 입지는 꽤나 높아서 재상 급에서도 작전회의할 때 그에게 문의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어이 없었습니다. 98년 3월에 명군과 함께 작전을 하다가 공을 세우고 돌아가는 길에 파새가 그를 죽이고 수급을 뺏어갔다는 것이죠. 이 때 다툼이 있었던 건지 모르는 척 하며 죽인 건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발적인 건지 계획적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선조는 이를 매우 슬퍼했다고 하며 명의 경리 양호도 이를 듣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는 항복 후 조선인 처를 맞아 아이까지 낳았지만 정유재란으로 모두 잃어서 자손도 남기지 못 합니다. 가장 우대받은 항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최후죠.

3. 그들의 전투력
조정이 특히 주목한 것은 그들의 기술과 전투력이었습니다. 그들을 주로 이끈 것은 김응서로 백의종군 후에는 아예 항왜부대만 이끌고 다녔죠. 요시라와 늘 접촉했듯 일본인이 익숙했던 걸까요, 아니면 자기도 서북 출신이어서 차별받는 입장이 비슷해서 그랬던 걸까요. 이게 인연이 되어서인지 그는 심하 전투 때도 항왜병들을 데리고 갑니다.

자세한 모습이 나오는 항왜 중에는 사백구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백사림이 황석산성에서 패하고 도망칠 때 그를 구한 인물이죠. 이 때 빠져나가기 힘들게 되자 일본 옷을 입고 백사림을 묶은 후 나가면서 "왜 이 뚱뚱한 조선 도둑놈을 성 안에 들어오게 놔 뒀냐. 위에 보고하면 니네는 벌 받을테니 내가 눈 감아주고 얘는 죽일테니 그리 알라"면서 유유히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백사림을 굴 속에 숨긴 후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백사림은 그가 돌아오지 않자 적진에 항복해서 자기를 잡으러 오는 게 아닐까 해서 다른 곳에 숨었다고 합니다. 새벽에 사백구가 다시 오는데 쌀밥, 간장 등의 먹을 것과 물을 가지고 왔다고 하죠. 그런데 백사림이 없으니 울면서 찾는데 그가 나타나니 허리를 껴안고 울었다고 하죠. 역시 왜인으로 꾸며서 적진으로 들어가 먹을 것이랑 입을 것을 구해왔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백사림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밥을 먹었다고 하죠.

김응서는 "지금 우리 나라의 유식한 무리들도 가장(家長)이나 처자식을 구제하지 않고 있는데 무식한 오랑캐의 무리로서 지성스러운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라고 덧붙이면서 그에게 포상할 것을 청합니다.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던 일본인들에게 조선에 항복한 것은 그저 주인을 바꾼 것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실제 왜구들은 동남아 국가들에 진출해 용병이 되기도 하고 집성촌을 이루어 살기도 했죠. 항복한 이유야 어쨌든 그들은 조선에 절대 충성했고, 사백구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조선인들도 부끄러워할 정도였죠. 이순신 역시 항왜를 잘 이용해서 조총을 복원하고 정탐에 썼습니다. 명량 해전에서 "저게 마다시다!"고 했던 준사가 있죠.

왜란이 끝난 후에 그들은 주로 북방으로 가게 됩니다. 자, 여기서부터는 가장 유명한 항왜의 흔적을 따라가 보죠.


전국무쌍 2에 나온 사이가 마고이치 ( - -); 총으로 사람 뚜드려패고 다닙니다.

4. 사야가
예상과는 달리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기 힘듭니다. 97년 권율의 장계에서 적 한 급을 베었다는 것, 그리고 인조 때 김충선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이죠. 승정원일기에는 이괄의 난을 진압할 때 큰 공을 세웠다는 게 기록돼 있습니다.

모하당 전집에 있는 기록을 생각하면 뭔가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뭐 일단 모하당집의 내용을 따라가 보죠.

그가 태어난 건 1571년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하죠.

+)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김충선에 대한 얘기는 과장된 게 많습니다. 동래성 전투에 참전했다느니 하는 활약을 보일 틈도 없었습니다. 조선에 오자마자 바로 항복했거든요.

이 때 박진에게 항복하는데 그 이유를 "이 나라의 예의 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다이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후 바로 조선군에 합류해서 동래, 양산 등지에서 싸워 그 해 12월에 이미 가선대부에 오르죠. 다음 해 4월에는 권율과 한준겸의 청으로 이름이 하사되고 자헌대부에 오릅니다. 성은 "바다를 건너 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해서 金으로, 이름은 忠善. 그 뜻이야 두말할 필요 없겠죠.
98년에는 울산성에서 공을 세우고, 1600년에 대구 우륵동에 정착해 진주목사 장춘겸의 딸과 결혼합니다. 이후에는 북으로 올라가서 10년간 국경을 지키고 13년 정헌대부에 오른 후 우륵동으로 돌아옵니다. 24년에는 이괄의 부장으로 역시 항왜였던 서아지의 목을 베었고, 병자호란 때는 바로 그 쌍령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게 적을 깨뜨렸다는 것에서 후퇴할 때 병력을 잃지 않고 잘 했다는 것 등 여러 말들이 있네요 - -a 아무튼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곡했다고 하네요.

이후 우록동으로 돌아가서 42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그의 6대손이 그의 글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 바로 모하당 전집입니다.

지금까지 봐 왔듯 모하당 전집의 기록에는 많은 의문이 남습니다. 예를 들면 임진년에 이미 가선대부에 올랐고, 93년에 자헌대부에 올랐다는 점이 있는데... 이순신이 1차 출동에서 이기고 자헌대부를 받았고 원균과 이억기가 가선대부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항왜가 이 정도의 직위를 받을 정도면 어마어마한 신뢰를 받았다는 것인데 실록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죠. 더불어 이름을 받은 게 93년이었다는데 권율의 장계에는 여전히 사야가로 돼 있습니다. 다만 그의 장계에도 첨지라고 적고 있는 걸로 봐서 정삼품 급의 대우는 받은 것 같네요. 애초에 가문기록이 과장된 게 많고 모하당 전집이 위서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 가려보긴 해야겠습니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조선에 충성했고, 항왜들 가운데서 큰 인정을 받은 사실은 확실합니다. 목사씩이나 되는 양반의 딸과 결혼하는 건 쉽지 않죠.
  이순신과 나눈 편지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거기서 조총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순신은 일본군 것보다 더 성능이 좋은 조총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크게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장의 야망 13 천도에 나온 사이가 마고이치 ( . .); 통솔 95 무력 99 지략 92의 무시무시한 능력치를 자랑합니다.

5. 그의 정체는?
그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의견이 분분하고, 임진왜란을 소재로 할 때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죠.

가장 처음 떠오르는 것은 그의 이름 사야가입니다. 이름으로 치면 사야카라고 추측됩니다만 (여자이름 아닌가요 -.-) 일본에는 "사이가"라는 철포(조총) 집단이 있죠. 임진왜란 편에서 언급했듯 이들은 해적, 닌자, 절처럼 어느 곳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자기에게 대우해주는 다이묘에게 고용되는 용병집단이었죠. 그 중에 사이가 마고이치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한 사람을 뜻 하는 것이 아닌, 사이가衆(무리 중)에서 대대로 쓰는 두령 명칭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죠. 그들은 전국시대에 할거했던 불교 일파인 혼간지를 돕다가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고, 이후 히데요시에 의해 완전히 섬멸됩니다.

+) 당시 불교도 종파에 따라 전국시대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죠. 특히 지금의 오사카에 있던 혼간지는 전국에 있는 신도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노부나가를 계속 괴롭혔다고 합니다. 때문에 노부나가는 이들을 학살하죠 -_-;

그가 큐슈 북부의 나고야 성까지 100명을 이끌고 간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바다의 가야금이라는 소설에서부터 이 설을 주장했죠. 다만 그 본인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아서 사이가중의 일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이 대신 나오게 되었죠. 김충선은 자신의 자를 선지善之라고 지었는데, 일본측의 기록에 사이카슈의 명단에서 스즈키 요시유키(鈴木 善之)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편 마루야마라는 교수는 그의 정체를 하라다 노부타네라고 주장했습니다. 큐슈에 있던 작은 가문의 당주였는데 큐슈의 패자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주인을 옮기다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했고, 몰락했다고 하죠. 이후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 철포대를 이끌고 출병했다가 울산성 전투 전후로 행방불명됐다고 합니다. 히데요시에게 반대했던 사이가가 그의 심복인 가토 기요마사 휘하로 출전할 수 없다는 것과 철포대를 이끌었다는 것을 통해 나온 주장입니다.

한편 일본정벌기를 쓴 안병도님은 오카모토 에치고라는 항왜를 밀고 있습니다. 이건 김경진님에게도 연결돼서 격류, 임진왜란에도 그렇게 묘사되죠. 그는 히데요시와 대립했고 조선에 항복했다고 하죠. 이후 울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가토와 직접 회담도 했다고 합니다. 이 때 자신이 당당히 조선인이라는 것을 밝혔다고 하죠. 한편으로는 옛 의리가 남아 있었는지 도망갈 길을 마련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안병도님은 이를 통해 오카모토 에치고가 사이가 출신이었다고 설정했습니다.

뭐 보시다시피 중구난방이죠. :) 그가 정확히 누구였을지, 정확히 투항한 시점이 언제였을지... 일일이 찾아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럴 시간 및 능력은 없네요.

전부 과장이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개 철포병이었거나 소규모 철포대를 이끌던 사이가 패 출신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봉장이라거나 3000명을 이끌었다는 건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그가 실록에 이름이 안 나오는 건 모하당 전집에 과장이 있다는 것과 동시에 아직 조정이 항왜 문제를 생각하기도 전에 항복했고, 주로 전장에서 싸워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가 항복한 이유가 뭐일까요. 휴전 중이나 정유재란 때 항복했을 가능성도 높지만, 정말 왜란 초기에 바로 항복한 거라면 그 이유가 궁금하죠. 그의 말대로 조선의 문화를 동경해서가 가장 맞겠지만요. 뭐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인물입니다. :)


태합입지전 5에 나오는 사이가 마고이치. 저 왠지 이 쪽으로 계속 미는 거 같죠? ( ..)

6. 그들의 최후
김충선의 후손들은 대구 우륵동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김충선 자신이 삼난공신으로 큰 공을 세웠고 조선에 동화돼서 후손들이 책을 낼 정도였으니 항왜들 중에서는 정말 잘 된 케이스죠. 그 후손들 중에서도 과거에 붙은 인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다른 항왜들도 그 같진 않았습니다.

김충선도 그랬고 항왜들은 주로 북방에 투입됐습니다. 이괄은 단 130명의 항왜들을 선봉으로 세워 크게 이겼고 조정은 그 때문에 왜인들을 용병으로 투입하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죠.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의 존재 가치는 역시 전쟁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김응서(이름을 바꿔서 김경서)를 따라 만주로 출병한 항왜들은 그와 같이 잡혔고, 청나라에 완전히 동화되거나 김응서와 같이 무언가를 준비하다가 죽은 것 같습니다.
나머지도 조선에 쉽게 동화되지 못 하고 자기들끼리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항복했으니 병자호란 때면 50~60은 되었을 것인데 이 때도 투입된 걸 보면 조선은 그들을 조선인이라기보다는 그냥 용병 수준으로 생각한 것 같네요.

그 이후에 항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본명이 사여모였던 김성인 같은 경우는 김충선처럼 이름을 받았는데, 현재 그 후손들이 대종회를 결성해서 다른 후손들을 찾고 있지만 찾아낸 건 4천여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마 그들의 후손은 대부분 함경도에서 살았거나 왜노비가 되어 조선에 동화된 게 아닌가 싶네요. 여진족도 다수 들어와 살고 자기 능력을 발휘하기 쉬웠던 함경도가 차라리 그들에게는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후손들 역시 자기 조상이 왜인이라고 하기 어려웠을 테구요. 자기들끼리 모여 살던 그들이 완전히 조선에 동화된 시기는 예상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도요. 긍정적으로 얘기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 그들 앞에 있던 것은 성리학의 교조주의가 갈수록 심해지던 조선 후기였습니다.

유게에 김충선 관련 글이 올라왔을 때 김충선의 후손이신 분이 답글을 다셨는데 참 가관이더군요. 정색하고 독도는 어느 땅이냐고 물어보는 사람까지 있었다니 -_-; 다만 유언으로 관직에 진출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진출한 사람이 있는 거 같은데 애매하네요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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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01 11:09
수정 아이콘
정말 이름이 잘 어울리는분이죠.이괄의 난이 아니었더라면 항왜들이 후금과의 전투에서 활약했을텐데..
Je ne sais quoi
11/07/01 12:38
수정 아이콘
오오~ 이런 걸 몰랐다니...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백마탄 초인
11/07/01 13:19
수정 아이콘
항왜라는 어떻게 보면 역사의 관심에서 멀어진 이런 소재로 한번 드라마라도 했으면 싶습니다..

역사의 조연들의 삶이랄가요?

항상 눈시BB님의 글을 잘 보고 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__)꾸벅
물여우
11/07/01 15:09
수정 아이콘
항왜 굉장히 흥미있네요. 잘 봤습니다. ^^
hm5117340
11/07/01 16:15
수정 아이콘
님 역사 관련글은 시간 날때 마다 밑에서 부터 차근차근 읽어보고 있습니다.
전혀 모르는 분야지만 쉽게 읽을수 있어 좋네요. 감사합니다.
호떡집
11/07/02 11:5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배경음악이 귀에 익어서 찾아보니 글래디에이터의 Now We Are Free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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