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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3/10 19:51:22
Name 눈시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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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후삼국 이야기 - 4. 미륵의 시대




제목은 언제나 거창하게. 지도는 복잡하게. -_-; 후삼국시대 육상전 1편입니다.

지금까지는 대접이 좀 박했죠? 이번엔 궁예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드라마 태조 왕건 최대의 수혜자라고 할 만 하지만 이전에도 후삼국에서 궁예의 이미지는 좀 독보적이었나 봅니다. 신채호는 '일목대왕의 철퇴'로, 이광수는 '마의태자'로 궁예를 다루었으니까요. 지금도 그의 비극적인 출생과 성장, 미륵 사상, 역시 비극적인 죽음으로 상당히 관심을 받는 인물이죠. 역사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한창일 때 그 중심축은 궁예와 정도전이었습니다. (다른 한 축이었던 원균은... -_-; 재평가 하면서 더 악행이 알려진 인물이죠)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이 편에서는 궁예 시대의 확장을 중점적으로 보도록 하죠.

첫 글에서 얘기했다지만 '어디를 장악했다' 라면 몰라도 '어디까지 진출했다'는 게 완전 영토 획득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진출의 경우 '어디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왔다' 정도고, 장악한 지역 내에서도 반기를 들거나 중립지역인 곳이 존재했을 테니까요. 특히 상주, 강주, 웅주의 경우는 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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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빠른 세력 확장
889년 원종과 애노가 일어나던 해, 견훤은 미다부리정에서 거병합니다. 마침 이 직전 그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에서 거병했죠. 궁예는 이 때 세달사에서 도 닦고 있었나 봅니다.
891년 궁예는 죽주(경기도 안성)의 기훤에게 투신합니다. 하지만 이 양반은 영 아니었나 봐요. 892년 궁예는 북원경(원주)의 양길에게로 가죠. 이 해 견훤은 무진주에서 그 긴 관직을 칭하면서 완전히 독립합니다. 시작은 견훤이 빨랐죠. 하지만...
그 해 궁예는 양길의 명으로 동쪽 명주의 여러 고을을 공략합니다. 이 때 울진까지 내려왔다는 걸 보면 태조 왕건에서처럼 한직으로 쫓겨나서 독립한 게 아니라 그의 인정을 받고 전폭적인 지원 하에 움직인 걸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894년 궁예는 명주로 들어가 장군을 칭합니다. 이 때 병력이 겨우 600, 아무리 궁예가 능력이 좋아도 겨우 이 병력만으로 독립해서 동쪽을 공격했다고 보기는 힘들죠. 명주 여러 고을을 깨뜨리면서 인망을 쌓고, 사람들을 모아서 600의 병력으로 양길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명주의 장군 김순식과 그 아버지 허월도 포함돼 있었겠죠. 궁예는 독립 후 명주로 갔고, 병력을 3500으로 불린 후 다시 태백산맥을 넘어 서북쪽으로 진군합니다. 그게 그의 사상 덕분이었든 능력 때문이었든 이 정도로 삽시간에 세를 불린 것은 대단하다고 봐야죠. 길공구님은 김순식 역시 이 덕분에 명주 전체(현 강원도 동쪽의 긴 영역이죠)에 대한 지배권을 얻을 수 있었으며, 양 쪽 다 손해 보지 않는 장사였다고 평가하시더군요.

895년 궁예는 철원 등을 장악했고, 896년까지 도미노 현상으로 패서의 대호족 박지윤, 왕건의 아버지 왕륭 등이 대거 귀부합니다. 뭐가 그리 바쁜 건지 곧바로 왕을 칭하고 남하, 898년에 김포, 강화 등 북한강부터 한강 중하류를 모두 장악하죠. 이에 위협을 느낀 양길, 기훤 등은 연합하여 궁예를 치지만 비뇌성에서 패배하고 그 세력은 궁예에게 흡수되죠. 패배한 측이 완전 소멸되었다는 점에서 비뇌성 전투는 일리천 전투처럼 결전의 성향이 짙습니다. 이 호족 연합군은 경기도 남부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양길이 있는 원주(당시로서는 삭주 남부), 남쪽으로는 중원경이 있는 충주까지 연합해 있었는데 이게 무너져 버린 거니까요. 역시 머리가 여러 개인 것보단 고려라는 이름으로 뭉칠 수 있었던 게 주효했겠죠. 궁예 역시 명주, 삭주 북부, 한주 북부를 차지하긴 했지만 한반도의 노른자위인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서 꼭 치러야 할 전투였습니다.
중부의 강력한 세력 양길과 친양길지역이던 많은 군소 호족들이 무너진 효과는 컸습니다. 900년 궁예는 왕건을 보내 경기도 광주부터 충주, 청주에 이르는, 명주, 삭주, 한주 전체를 장악하고 웅주, 상주를 노리는 위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때 견훤은 완산주에 도읍을 하며 비로소 후백제를 건국하죠.

그럼 900년 당시 두 국가의 세력이 어땠는지 군현 수로 살짝 비교를 해 보죠. 신라 통일 후 군현 수는 이랬다고 합니다. (시대마다 다르고 고려 건국 때 또 달라지니 확실하진 않습니다)
한주 27군 46현 삭주 11군 27현 명주 9군 25현
웅주 13군 29현 상주 10군 30현 양주 12군 34현
전주 10군 31현 무주 14군 44현

이 군현 수와 위의 지도에 나오는 각 주의 크기를 보면 어느 쪽이 노른자 땅인지 짐작이 가죠. 이 때 궁예가 한주, 삭주, 명주를 차지하고 웅주에는 서원경(청주) 정도의 소규모만 점유했으니 무시하고... 반면 견훤은 8년 동안 노력해서 전주와 웅주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궁예 47군 98현 vs 37군 94현
군현 수로 보면 900년에 이르러 양국의 세력이 비슷하다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패서의 10여개 현이 904년에야 귀순하고 견훤 역시 자신의 근거지인 금성(나주) 인근 10여개 현을 다시 공격했어야 했다는 것, 견훤이 웅주를 지배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양 쪽 다 10에서 15 정도는 빼야겠죠. 그래도 어느 정도 비슷해지네요. -_-a 견훤은 전라도라는 곡창지대를 점령했지만 궁예 역시 현재의 서울 - 개성에 이르는 한강과 예성강 인근의 요충지를 차지한 상태죠. 거기에 궁예는 신라 5소경 중 북원, 중원, 서원경 세 개를 차지했으니 어느 정도 궁예가 더 유리했다고 봐야겠네요. 이게 바로 비뇌성 전투의 여파겠죠. 궁예가 명주에서 거병한 지 단 6년만의 일이었습니다.

2. 삼한일통을 향하여

"백제의 땅에 고려의 깃발을 꽂는 것이옵니다."

이렇게 900년 두 세력의 힘은 엇비슷하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투사할 수 있는 병력도 그리 차이가 나진 않았을 거구요. 보시다시피 삭주와 명주는 그 크기에 비해 군현 수가 적었고, 당과 발해의 쇠퇴로 무주공산이 된 북쪽지역에 대해서도 충분히 병력을 배치해야 됐을 것이고, 실제 북쪽으로 땅을 넓히는 데도 힘 썼습니다. 명주의 병력은 태백산맥으로 가로막혀서 동북면의 여진족에 대한 경계나 남쪽으로 양주를 치는 데 동원할 수 있었을 지는 몰라도 견훤과의 직접적인 전장이 될 웅주와 상주에 투입하기는 힘들었겠죠. 이 점을 보면 오히려 웅주와 상주에 동원할 수 있는 실병력은 견훤이 더 많았을지도요.
하지만, 이 때 보여준 전략은 꽤나 달랐습니다.

903년, 궁예는 왕건을 보내 나주를 공략합니다. 또한 웅주를 계속 압박하면서 청주를 완전히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죠. 공주 장군 홍기가 이 때 투항했고 매곡성의 공직도 궁예 휘하였다는 걸 생각하면 웅주, 특히 금강 유역에 대해서 궁예가 진출을 시작했다고 봐야겠죠. 즉 이 때 궁예는 후백제 압박에 신경 썼던 겁니다. 왕건이 나주를 공략한 후 계속 후백제의 뱃길을 위협하고 수군으로 양주까지 진출했으며 더 나아가서 무진주성을 직접 공격했고, 웅주에서는 (아마도 이흔암이) 웅주까지 진출했으며 상주에서는 왕건이 사화진 등에서 맞서 싸워서 조령과 죽령을 차지했습니다. 양주의 김인훈을 구원한 게 백제군에게서 구한 것이면, 결국 궁예는 이 때 후백제가 움직일 곳을 모조리 막아버린 겁니다. -_-; 또한 이 때 패서의 10여 군현이 줄줄이 귀부하면서 후고구려는 반석에 올랐을 것입니다. 이 903~4년은 궁예가 도읍을 철원으로 다시 옮기고 국호를 마진으로 바꾼 시기로 궁예의 인생에서 중요한 포인트겠죠.
이에 대한 견훤의 대응은 어땠을까요?
기록에 보이는 견훤의 대응은 상주에서 맞서 싸운 것과 나주를 탈환하려 한 것을 빼면 대야성이나 그 이남 지역을 공략한 것 뿐입니다. 주로 상주, 강주 등을 공략한 거죠. 웅주에서 맞서 싸운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왕건이 나선 게 아니라서 그 쪽에 관한 기록이 없지 계속 패배했거나 이 때까지도 웅주에 대해 영향을 제대로 못 미쳤다는 거겠죠. 궁예의 영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엄두도 못 냈거나 신라를 공격하는 데에만 집중한 거겠죠. 하지만 이마저도 상주와 강주에서 번번이 막힙니다. 저번 편에서도 계속 말했던 나주의 가치가 여기서 나오는 거죠. 상주에서야 육군으로 갔지만 강주, 양주는 수군을 파견했을 테니까요. 낙동강 중류를 장악하긴 했지만 최고의 요충지 대야성은 끝내 함락하지 못 했고, 겨우 차지한 이 곳도 낙동강 상류와 하류에서 협공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구요.(이건 실제로 왕건이 시도해서 성공합니다)

당시 웅주에서 견훤이 지킬 수 있던 곳은 지금의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 정도였겠죠. 충남 보은에 있는 요충지 삼년산성이 이 때 점령됐는지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닿았다면 후백제는 건국하자마자 멸망할 위기에 몰린 겁니다. 그 아래는 바로 황산, 조금만 더 가면 후백제의 중심지 익산, 전주였습니다. 백제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기억나시죠?
궁예는 계속 신라를 압박했지만 신라에서는 밖으로 나오지 말고 성에서 맞서 싸워라는 명령밖에 내리지 못 했다고 합니다. 아마 궁예는 명주에서 양주로, 한주에서 상주로, 바닷길로 강주, 양주로 계속 세력을 넓혔을 것입니다. 그의 우선 목표가 어디였는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견훤과 왕건이 상주, 강주 등 현재 경상도 일대의 지배권을 다투는 것만 계속했던 후삼국 후기에 비해 궁예는 웅주, 양주 등 백제와 신라를 직접 멸망시킬 수 있는 상황까지 진척시켰고, 이 시점에서 삼한통일에 제일 가까이 다가섰던 것만은 분명하겠죠.

3. 고구려를 버리다

"대~동방국! 대~동방국! 하하하!"

이렇게 신나게 늘어난 궁예의 확장을 자랑했지만, 영토를 늘리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이 때 궁예의 영토는 웅주, 상주 등 고구려와는 영 인연이 없는 지역이 늘어났습니다. 거기다 이 지역은 최전선이죠. 거기에 일단 자신의 기반인 패서의 목소리는 커져만 갑니다. 특히 왕건은 나갔다 하면 이기고 나주, 상주 양주 어디든 시키면 가니 얼마나 예쁘면서도 경계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패서는 자기의 기반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항복을 받은 땅입니다. 거기만 이뻐하면 겨우 늘린 다른 영토의 호족들을 달래기 힘들었을 것이고, 궁예 자신으로서도 확실한 자기 편이 더 필요했을 겁니다.
결국 궁예는 고구려라는 이름을 버리게 됩니다. 마진. 마하진단의 준말로 대동방국을 뜻하는 것이라는군요. 웅주를 한창 공략하던 903년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청주인들을 이주시켰으며 904년에 국호를 바꿨다는 것은 고구려에서 더 나아가서 삼한 전체를 끌어 안겠다는 의지였겠죠. 그게 잘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필 청주에서 데리고 온 아지태. 하지만 청주인들은 궁예의 기대와 달리 계속 분열하며 패서 세력의 확실한 대항마가 되지 못 했고, 왕건은 승승장구 할 뿐이고, '아지태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을 왕건이 맡아 처리하면서 패서의 힘은 더 커져 버립니다. 왕권 강화를 시도하는 것에 더 나아가서 미륵 사상에 광적으로 집착한 것은 이것 때문이겠죠.

911년, 왕건이 나주 지배를 확고히 하고 무진주를 치던 해, 궁예는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바꿉니다. 이제 신라와 백제를 확실히 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까요? 아니면 이런 세력분열에서 왕권 강화에 대한 몸부림이었을까요? 2년 후 913년 왕건은 아지태 사건을 해결하면서 발언권이 더 커집니다. 왕건은 914년 역모 혐의를 추궁받았다가 최응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고, 궁예의 왕후 강씨는 915년 두 아들과 함께 궁예의 손에 죽습니다. 관심법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아마 패서인들이겠죠. 왕건을 죽이지 못 한 것도 그저 머리가 이상해져서가 아니라 죽이기에는 너무 커져 버린 것일지도요.
패서의 대표라 할 만한 왕건을 죽이려 하고, 역시 대표격인 왕비를 죽인 시점에서 이미 양쪽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겁니다. 그렇게... 궁예의 최후는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 이 때 견훤은 뭐 하고 있었냐구요? 대야성 치고 있었죠 -_-;;; 뭐 태조 왕건에서처럼 이런 태봉의 내분에 뒷공작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요. 왕건이 계속 나주로 왔다갔다 하고 이흔암이 웅주에 있었던 걸 보면 혼란한 상황에서도 군사적인 타격은 없었던 것 같네요. 혹은 이게 백제가 태봉의 혼란을 틈타 나주와 웅주를 노려서 파견된 것일 수도 있구요.

4. 궁예 사후

"태봉의 상여가 나간다~" - 형미

궁예의 몰락 원인 중 하나에는 불교계와의 대립도 있을 겁니다.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던 해에 석총을 죽였고, 형미도 죽었죠. 왕권 강화에 대한 집착이었을까요. 정작 미륵신앙인 법상종과 대립한 것은 큰 타격이었을 겁니다. 왕건과 견훤도 불교를 적극 이용했고, 궁예 자신부터가 선종 출신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렇게 주요 세력들이 궁예에 등을 돌리면서 918년, 왕건의 역성혁명이 시작됩니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의 사기장이 왕건에게 찾아 오죠. 이미 군부조차도 그를 떠난 거죠.

자... 궁예에 대한 다른 많은 떡밥, 궁예에게 후손이 있어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는 거나 그의 말년의 정치, 최후에 대한 가설 등은 후삼국 이야기 마지막 편인 "놈놈놈"으로 돌리겠습니다. 이제 궁예가 죽은 후 전황이 어떻게 바꼈는지 대충 짚고 끝내죠.

잠시 위로 올라가서 두 번째 지도를 봐 주세요. 우선 환선길, 이흔암이 반란으로 숙청당하고 이흔암이 맡고 있던 웅주는 백제에게로 넘어 갑니다. 김순식은 반기를 들어 독립하고, 덕분에 명주 전체가 혼란스러워졌겠죠. 왕건이 이를 진압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코 앞의 웅주와 상주도 밀렸는데 군사를 일으켜서 태백산맥을 다시 넘기가 쉬웠을까요.
청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그 근처에 진을 설치하면서 청주 전체가 무너지진 않았지만 청주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매곡성의 공직은 백제에게로 넘어갑니다. 백제는 이 틈을 타서 북진, 운주, 웅주 등이 확실히 백제 땅이 되었고 후에 왕건이 몇 차례 웅주를 공격했지만 934년 운주전투까지 웅주는 견고한 백제의 방어선이 됩니다. 견훤은 920년 대야성을 마침내 점령하고 현재의 창원, 김해 일대까지 진출하며 강주를 완전 점령할 움직임을 보입니다. 또한 현재의 당진과 충주 근처에 중앙군을 파병, 둔전을 하면서 상주까지 점령할 움직임을 보이죠. 북쪽은 북쪽대로 혼란해져서 유검필이 파견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주의 유력 호족이자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귀부했다는 거겠죠.
이렇게 견훤이 곳곳을 노리는 와중에도 925년까지 왕건은 이에 대응하지 못 합니다. 마침내 925년, 조물성에서 두 영웅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신라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 삼한일통을 위한 전쟁이 시작된 거죠.

후삼국시대를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전후를 나눈다면, 전기의 주인공은 당연 궁예라고 생각됩니다. 궁예가 보여준 전략은 후기의 전투들과는 양상이 꽤나 다르니까요. 그런 면에서 후삼국의 세 영웅 중 전략가의 모습으로서는 궁예가 으뜸인 것 같구요. 여러 반론은 있겠죠. 나주를 친다는 대담한 전략의 공을 왕건에게 줘야 될 지 궁예에게 줘야 될 지 같은 거요. 글쎄요. 설사 왕건이 짠 거라 하더라도 왕건을 전폭적으로 밀어 준 궁예는 대단하다고 봐야겠죠? 이런 자세한 얘기는 왕건을 다룰 때 하기로 하고 이번 편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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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10 20:45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의문점이 생겼는데
패서가 궁예의 기반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궁예는 청주인들로 하여금 패서지역과 맞서게 하고 그것이 실패하면서
패서지역의 힘은 더 커진다는 서술이 잘 이해가 안가네요.
자신의 정책이 실패했는데 자신의 기반인 패서지역이 더 강해진다는 것이 당최 이해하기 힘드네요.
그리고 그것을 곤란해하는 궁예도 이해하기 힘들구요.
제가 눈시BB님의 전 게시글들을 읽지 않아서 그런가요..
아우구스투스
11/03/10 20:48
수정 아이콘
역시 잘 봤습니다. 재밌어요 항상. 당연히 추천때립니다~

그런데 진짜 저도 후삼국기 다시 보면서 느낀건데 태조왕건에서 대표적으로 부풀린 캐릭터가 아지태더라고요. 아지태가 드라마에서는 상당한 비중인데 실상 책이나 역사서에서 보면 그냥 그때 그 사건만 나온 반짝 인물이더라고요.
11/03/10 21:12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요즘 태조왕건보면서 이거보는데 재미가 쏠쏠하네요 흐흐
11/03/10 22:08
수정 아이콘
계속 보고는 있었는데 댓글 남기는걸 깜빡했네요. 많이많이 올려주세요~
루크레티아
11/03/11 01:28
수정 아이콘
궁예야말로 어쩌면 정말 우리나라에서 사서의 전형적인 희생양 케이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렇게 잘 나가던 국가의 군주가 한 순간에 미쳐 돌아서 폭군으로 변한다는 케이스는 정말 세상에 없는 케이스라서 말이죠. 본문에서 적어주신대로 궁예는 어찌보면 왕건이라는 양날의 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아니면 왕건이라는 먹음직스런 생선에 박혀있던 패서의 호족연합이라는 수 많은 가시들을 제대로 발라내지 못했던 대가를 제대로 치룬 격일 것 같습니다.

그 만큼 신라 하대의 상황은 나라꼴 자체가 지방 호족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만큼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반증일수도 있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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