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는 권위가 곧 자본
※ 권위에 대한 몇가지 생각을 두서없이 자유롭게 적어보겠습니다.
권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을 텐데요. 권위를 자본이라 보는 관점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을 가지고, 여러 유용함을 얻게 됩니다. 저는 자유주의자이지만, 권위가 효용이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권위는 시간을 절약해줍니다. 권위는 혼란을 막기도 합니다. 권위로써 안전이 추구되기도 합니다. 권위로써 불성실한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권위로써 사람들의 다툼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권위를 똑똑한 사람이 갖고 있을 경우, 대다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 집단도 지능 평균을 초월해서 꽤 잘 돌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자유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자유에는 어떤 허점이 있고, 권위에는 어떤 강점이 있는지 냉정하게 봐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자유의 결점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권위주의는 권위가 곧 자본이기에, 그리고 그 자본에 따라 여러 효용이 생겨나기에, 그리고 그 효용이 단지 권위자뿐만 아니라, 집단 전체에 미치기 때문에, 권위를 높이려는 동기를 갖게 됩니다. 권위자만 권위를 높이려 하는게 아니라, 그 권위로인해 이로움을 누리는 많은 사람들이 권위를 높이려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실력과 인품이 뛰어나면, 그에따라 권위가 올라갈 것입니다. 과거 대단한 성과가 있었어도, 권위가 올라갈 것입니다. 실력과 인품이 뛰어나다는 것은 곧 그가 권위자일 때, 집단 내지 사회의 미래가 밝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기대감이 권위를 높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하는 말들이 똑똑하게 들리고, 의롭게 들리기 때문에 권위가 높아집니다.
권위주의는 권위가 곧 자본이기에, 그 자본을 더욱 키우려는 의욕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에따라 거짓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실력과 인품을 과장하거나 허위로 높이려는 강한 동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권위자 본인이 그렇게 동기를 가질 수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를 우상화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도히 칭찬을 하고, 환상적인 대상으로서 높이는 것입니다. 그가 권위를 갖게 될 때, 나아가 권위를 높이게 될 때, 자신이 이로워질 거란 무의식적 예측이 들기 때문에, 그런 심리가 발동할 수도 있는 거라 봅니다. 사소하게는 일반 유튜버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별로 사소하게는, 선거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권위를 갖게 된 사람이 그 권위에 걸맞은 실력과 인품을 가지고 있다면, 별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권위가 자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경우가 문제입니다. 과장과 허위가 늘어나면서, 자본을 버블처럼 키우게 됩니다. 사실을 말하는 사람을 억압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을 알게 될 정보채널을 폐쇄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말을 감추려고, 거짓말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반대파를 제거하거나, 극단으로 몰아 혐오해야 하는 이유는, 반대파로부터 사실이 들어오고 그로인해 허위가 까발려질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과 북한은 일당 독재입니다. 북한은 정보를 매우 폐쇄시켜놓았고, 중국은 그보다 덜하지만 역시 정보가 자유롭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나오는 통계들도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권위란 엘리트권위만 있는게 아닙니다. 대중권위도 있습니다. 수가 많으면 권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대다수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작은 공간 안에서 다수인 경우도 있습니다. 실은 소수인데, 특정 공간에서 특정 시간에는 얼마든지 다수일 수 있는 것입니다. 소수라고 해도, 그들 공간내에서는 다수이고, 대중권위가 돌아갑니다. 그로인해 극단주의가 강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역시도, 권위가 곧 자본입니다. 대중권위도, 권위가 곧 자본입니다. 대중이 정말로 그 권위에 부합한, 실력과 인품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대중이 그 권위에 부합한, 지혜와 문화를 가졌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러면서 권위 자본에 이로움이 크게 좌우된다면, 거짓으로써 자본을 끌어올리려 할 것입니다. '대중은 훌륭하고, 대중은 선하다!' — 이것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일반 대중을 놓고 그러는 수도 있지만, 대개는 집단을 놓고 그렇게 되기 쉬울 것입니다.
대중은 절대로 잘못을 하지 않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건 누군가 때문일 것입니다. 사악한 선동꾼이 있어서, 대중이 그렇게 한 것이지, 대중은 잘못이 없습니다. 대중은 오히려 피해자입니다. 혹은 반대 집단이 너무나 사악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대중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정의로운 대중이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대중권위는 앞서 권위의 효용, 시간절약 ・ 혼란방지 ・ 안전추구 ・ 불성실감시 ・ 다툼방지 이런 것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밖에 엘리트권위와 다른 효용이 있다고 봅니다. 그중 하나는 내부에서 악당이 등장하는 걸 막는 것입니다. 혹은 내부에서 배신자가 등장하는 걸 막는 것입니다. 혹은 엘리트가 독재를 하는 걸 막는 것입니다. 그게 악당이자, 배신자라 할 수도 있겠지요. 대중권위가 있으면, 독재자가 생겼을 때, 이를 전복시킬 수 있습니다. 대중이 자존감이 떨어져 있고, 선에 대한 자신감이 부실하면, 독재를 전복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중권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버블이 일어나고 거짓이 많아지는 경우가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특별히 더 이야기할 것은, 대중권위가 개인의 자유를 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권위가 자본이 되고, 그 자본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권위가 과도히 추구되고 집행되면서, 개인의 자유를 해치게 되기 쉬운 거라 봅니다. 대중이 안전에 매우 민감해졌다고 해봅시다. 다르게 행동하는 개인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저 인간이 나쁜 놈일 수도 있는 일이니, 사전에 규제하고 억압하려 할 것입니다. 나쁜 놈은 아니지만, 어리석어서 사고를 칠 수 있는 일이니, 감시하고 통제하려 할 것입니다.
안전에 매우 민감해져 있다는 것은 곧 실력과 인품은 떨어져 있다는 걸 뜻한다고 봅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힘이 약하니, 안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용감함이나 평정심이 없으니, 안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안전에 민감한 대중이란 건, 권위가 버블이 일어난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일들은 권위를 자본으로 보면, 이해가 됩니다.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유교 문화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권위가 자본이라 할 때, 그것이 갖고 있는 효용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본을 높이려는 동기가 일어납니다. 실력과 인품이 자본과 얼추 맞다면 좋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거짓 ・ 억압 ・ 불공정 ・ 분노 따위가 생기기 쉬울 것입니다.
조선시대를 생각해봐도, 저는 이렇게 봅니다. 유교는 어질 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핵심이라 봅니다. 윗사람이 어진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그것이 유교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사이비 유교입니다. 어질 인이 있어야, 말이 되는 구조입니다. 어질 인은 없고, 충효만 있으면, 사이비 유교입니다. 유교에는 신이 없는 대신, 어질 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 곧, 윗사람의 권위를 가리킵니다.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권위를 갖고 있고, 그러니 이게 말이 됩니다. 그러나 더이상 어질 인이 없어져 버렸다면, 권위는 자본이므로, 그 자본을 어떻게든 높여야 할 것입니다. 그로인해 거짓을 비롯하여 온갖 안 좋은 것들이 늘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 얘기도 더 하고 싶지만, 민감한 문제이니 말 줄이고, 이 얘기를 마지막으로 해보겠습니다.
옛날 드라마에는 소시민적 영웅, 이런 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봅니다. 힘든 여건 속에서, 훌륭한 인품을 발휘해서, 역경을 이겨내는 스토리 말이죠. 오늘날에는 그것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에따라 그런 드라마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힘든 건 보기 싫고, 짠내난다느니, 신파라느니, 아무튼 그래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드라마는 일반 서민들의 자존감을 높여줬을 것입니다. 자존감을 높여주면서, 사람들은 좋은 방향으로 의욕을 갖고 살게 하고, 좋은 인격적 태도를 받아들이려 하고, 이런게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인데, 그런 힘든 것들을 혐오하거나 폄하하면서, 거부할 때, 이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부분이 제거되면, 다른 부분에서 자존감 또는 대중권위를 높이려 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전쟁입니다. 적을 만들고, 혐오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런 드라마들이 많았던 것은 아마도, 방송사가 적어서 높은 시청률이 가능했기 때문이었을 듯합니다. 그런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청률이 높으려면,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야 합니다. 특정 시청자층만 핀셋으로 겨냥해서 만드는게 아닙니다. 두루두루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게끔 만들고, 그게 사람들간 화합을 만드는 면이 있었을 거라 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높은 시청률의 드라마가 안 나온다는 점이, 현재 한국 문화의 약점을 만든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시민적 영웅, 이런 걸 높게 봅니다. 세상에는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어도, 인격적인 훌륭함을 갖고, 사람들을 이롭게 한 영웅들이 많다고 보고, 그것은 작은 사회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그런 사람들을 높게 여겨야, 다수의 대중들이 더 건전한 방향으로 삶의 태도와 의욕을 갖고, 세상을 더 밝은 곳으로 보고 그렇게 낙천적으로 활기있게 살아갈 수 있는 거라 봅니다. 그런데 그게 없다. 그러면, 이제 정치, 성별, 지역, 세대 등으로 쪼개져서 싸우고, 그것이 더 극단적 양상을 띄게 될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안 그러면 그냥 자존감이나 권위는 포기하고, 우울해져서 무기력하게 살기 쉬울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전통 사극이라도 좀 계속해서 만들어주면 좋으련만, 시청률이 안 나와서 돈이 안 되니 그런 건지, 사극이 잘 안 만들어지는 듯합니다. 사극은 현재의 삶을 떠나서, 역사적 시련 앞에서 인물들의 고뇌와 선택을 보면서, 함께 공감하고, 마음을 다지는 효과가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