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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7/10/24 06:14:26
Name 윤여광
Subject [yoRR의 토막수필.#36]여담. 두번째.


[BGM]
[여담 instrumental ver. By B.M.K]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 서로 친하다고 생각했고 내 나름대로는 가벼운 장난으로 생각했던 그 말에 그 이가 이렇게 답했다.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는거 아니야. 앞으로 하지 않기.”

  나는 알았다며 또 다시 약간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넘겼지만 한편으론 진심으로 반성하는 나를 발견하곤 세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냥 장난이었는데. 일전의 경험상 그냥 넘기기 힘들었던 말이었을까. 그렇다고 그걸 곧바로 반성하는 나는 뭔가. 조금 우습기도 하고 살짝 헛웃음이 나왔다.

----------------------------------------------------------왜....지금...---------------------------------------------------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좋아하고 어설프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만큼의 감정을 가져본지가 참 오래됐다. 벌써 4년. 남들은 빨리도 찾아오는 첫사랑이라는게 나에겐 참으로 늦게 다가왔다. 19살. 고등학교 3학년. 인생에 있어 첫 고비를 맞이하는 참으로 중요한 시기에 나에게 그런 감정이 찾아들어온 것은 어찌 보면 참 불행한 일이고 어찌 보면 그나마 다행인 일이기도 한 묘한 사건이었다. 길거리를 지나다 그 사람의 외모에 한 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 옆에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서히 마음을 채워나갔던 사람도 아닌 모니터에 보이는 몇 글자만으로 알 수 있었던 사람. 한창 판타지 소설이 유행일 그 무렵 나 역시 그런 류의 글에 관심을 보이며 몇몇 동호회를 기웃거리다 만난 사람. 처음엔 이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몇 년생의 어디 사는 누구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냥 글이 좋았던 사람이었을 뿐이고 온라인상에서 사용하는 닉네임만을 서로 알고 있는 그런 사이. 우연치않게 메신저의 아이디를 통해 서로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거주지를 교환했을때 우린 서로 글 외에 다른 비슷한 점이 있구나 하며 쓸데없이 깔깔대며 즐거워했다. 같은 나이의 시외 버스로 1시간 30분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사는 여자 아이. 거기까지 알게 되는데 시간이 참 많이 걸렸다. 그러다 또 그 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그 친구의 핸드폰 번호까지 얻었고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전화 카드 5천원권을 사서는 쪼르르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금액이 모두 소진될때까지 수화기를 붙잡고 시간을 보냈다. 참 웃기지도 않는 짓이었다 지금 생각하자면. 만나지도 못했고 얼굴도 모르고 그냥 간단한 신변 사항을 알고 있을 뿐인데. 뭘 그리 친한 척을 해댔는지. 어쩌면 나 혼자만의 설레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는 그 친구 나름대로 날 상대하기 귀찮았을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얘기가 통하는 좋은 친구로만 기억하던 어느 가을 날. 문서 파일을 정리하다가 기억에 있지 않은 제목의 글을 하나 발견했다. 천천히 읽어내려가면서 내용이나 문체상으로 그 친구의 글로 생각하고 있다가 글 끄트머리에 적어둔 날짜와 내 이름을 보며 나름 소스라치게 놀라며 감정은 그렇게 갑자기 큰 변화를 맞이했다. 닮아가고 있었다. 글을 전부로 알고 살던 내 필체가 그 친구를 따라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글의 질적 수준에 대한 단순한 동경일수도 있었으나 나는 그 때 그것을 동경이 아닌 다른 의미로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선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말을 할 까 말까. 거절당할게 뻔한 상황인데. 그렇다고 참고만 있자니 마음이 답답하고. 딱히 해결책이 없었던 나는 졸업 한 후에 지금보다는 시간적인 자유가 더 커질 때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적정 수준의 선을 그어뒀다. 내 감정이 그 선을 넘지 않게 조절하는 것 또한 힘들었지만 답도 없이 방구석에 앉아서 손가락만 배배꼬고 있던 몇 일전의 상황보다는 천일보 앞으로 나간 듯 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나는 생각보다 꽤나 간단하게 차였다.

  어찌보면 참 당연한 일이다. 생전 처음 보는 험악한 남정네가 앞에 서서 한다는 소리가 좋아한다니. 좋은 친구로 남자고 말해줘서 고맙고 지금에도 그렇게 있어줘서 고마운 그런 친구. 그래도 그 해 겨울은 참 추웠다. 몸도 추웠고 마음 또한 그랬다. 괜한 짓을 했다며 궁상을 떨 무렵.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 나는 한 단계 상위 교육 기관에 입학하는 날을 맞이했고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얼마 지나지 않아 선후배 대면식이니 신입생 환영회니 하는 별의미 없는 명분뿐인 술판에 반강제로 참여했다. 지금보다야 술이 많이 약했던 시절이라 나는 구석에 앉아 묵묵히 자리만 지키는 타입이었다. 여기 저기서 음정 박자 무시한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가끔 술잔이 깨지며 그만 먹이라며 죽을듯이 소리치는 목소리도 들렸다. 다 의미 없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나는 처음으로 다친 마음을 추스르기에 바쁜 몸이었으니 저들이 술에 취해서 바닥에 구토를 하든 옆테이블의 아무개와 시비가 붙어 술병을 머리로 깨는 차력쇼를 벌이든 알 바 아니었다. 그렇게 자리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한 여인네가 나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인다.

“너 이 자식. 니가 뭐 잘났다고 나를 차!”

  억울해도 이렇게까지 억울할 수 있을까. 나름 아끼던 마음 고백하자마자 대번에 차인 나를 두고 내가 뭘 어째? 이걸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할까 말까 하다가 그것도 사치다 싶어 조용히 말했다.

“저기. 그 쪽이랑 저 오늘 처음봤는데요. 당신 내 이름 압니까?”

  그 여자. 순간 당황했는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어흑 하는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까딱까딱 갸누질 못한다. 취해도 단단히 취했다. 참 꼴보기 싫은 진상. 어떻게 생겨먹었나 얼굴이나 기억하자. 나중에 만나면 피해 다니게. 그 때 그 얼굴을 쳐다보는게 아니었다. 아니. 맨 정신에 기억에 남겨두려고 했던 것 자체가 실수였다.

“닮았네...”

  참 많이 닮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그녀와 어느 한 구석도 닮아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자꾸만 쳐다본다. 이런 짓은 삼류 연애 소설속에서나 하는 짓인 줄 알았더니. 내 로맨스도 그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나보다. 손에 닿으면 날아갈까 고귀한 것과는 거리가 먼 그렇다고 흔해빠진 일상 속의 지루한 로맨스도 되지 못하는 c급.

“아 미안 미안. 내가 착각했네. 참 많이 닮아서.”

  그러고보니 이 친구도 나랑 같은 처진가보다. 동경도 아닌 동정. 감정은 참 쉽게 변한다. 그리고 쉽게 변하는 감정에 맞춰 이성도 뿌리없이 흔들리는 갈대 마냥 이래저래 흔들린다.

“차인 사람끼리 사귀면 재밌을려나.”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대리만족이었겠지. 그냥 흘린 말이었는데 곧이어 나온 그녀의 대답 덕에 나는 지금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며 그 때의 기억을 회상한다.

“해보지 뭐. 재밌나 재미없나.”

  사귀자는거냐 라는 말 대신 한 번 슥 쳐다보니 그녀는 맞다는 말 대신 핸드폰을 내민다. 번호를 찍으란 소린가. 나는 그 때서라도 술이라도 진탕 마셔 나중에라도 술에 취해서 실수한 일이라며 변명할 여지라도 만들었어야했다. 순한 양이 돼서는 혹여나 번호가 틀릴까 두 번이나 다시 쳐다보고는 그녀에게 건넸다.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이름을 말하니 피식 웃으며 내 핸드폰을 뺏어가더니 번호를 누르고 자기가 알아서 저장까지 시켜둔다. 술 취한 정신으로 그런 짓은 잘도 한다라며 생각할 때 쯤. 언제 끝날지 몰랐던 그 자리가 끝났음을 알리는 회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내 핸드폰을 다시 슥 내밀더니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과 옷가지를 챙겨 자리를 떠났다. 그 짧은 사이에 일어난 일이 뒤늦게 어이가 없어 돌아오는 길 내내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어차피 아침이면 술기운에 기억도 못할거라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지금이 몇 시인가 확인하려 기상과 동시에 열어본 핸드폰에 시계 대신 떠 있는 메시지 하나 덕에 산산히 박살나버렸다.

“오늘부터 1일이네.”

  번호와 이름을 보니 어제 그녀다. 아직 덜 깬 잠이 확 날아가는 순간. 뭐가 1일이냐. 부랴부랴 챙겨서 학교에 도착하니 타이밍좋게 전화가 온다.

“어디야.”

  몰랐는데 맨정신에 말하는 어조도 참 비슷하다. 마치 예전의 그 친구와 대화하듯 순하게 지금 막 도착했다고 대답하자 점심 시간에 식당에서 보자고 말하고는 끊는다. 어젯밤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일말의 틈도 없이. 별 수 없이 멍한 정신으로 수업을 끝내고 식당에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그녀와 만나 밥을 먹었다. 먹는 내내 두 사람다 말이 없다. 나야 밥을 먹든 말든 시도때도 없이 말하기 좋아하지만 지금은 어색해서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거였지만 그녀는 어땠는지 알 길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 조용히 있을 수 밖에. 말 좀 해라 말 좀 해라. 몇 번이나 기도했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다 먹더니 드디어 입을 연 그녀.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내용과는 써억 일치하지 않았다.

“커피 마시자.”

  마시는거야 어렵지 않지만 속에서 받아줄런지는 미지수다.

"시작은 좀 그렇지만...“

  드디어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얼씨구나 싶어서 상황을 수습해보려 입을 열려는 찰나. 또 맥을 끊는 그녀의 말.

“앞으로 잘하면 되지. 모로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잖아.”

  지금 이 상황이 어딜 봐서 서울로만 가면 되는 상황인지. 아니 애시당초 갈 곳이나 있었나? 라고 따졌어야 했던 일이나 나는 또 바보처럼 응 하며 납득해버렸다. 그렇게 나는 첫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 말대로 시작이야 좀 그렇긴 했지만 막상 겪어보니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느 정도 이야기도 통하는 편이었고 일단은 둘이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생각보다는 괜찮은 시간을 보내며 나는 내심 그것이 내가 그녀를 서서히 좋아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꽤 훌륭한 연애를 즐기고 있다고 믿기 시작한 한 11월 무렵. 조금씩 무언가 마음 한 구석을 찌른다. 불안할 만큼 알 수 없었던 그 감정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불만.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닮은 사람이기에 생기는 불만.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이 있으니까 그 때의 그 마음은 없어졌을거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지금의 그녀를 만나며 예전 내가 얻지 못했던 그 사람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하나 하나의 행동이 달랐고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 달랐다. 그녀 역시 나에게의 예전의 마음을 보상받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제서야 확신이 생긴 것은 이건 아니다라는 뜻이었다. 어느 쪽이 주도했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으나 나는 시작은 그녀쪽에서 일방적으로 찍었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합리화로 마지막은 내가 찍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기를 청했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기에 나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 어디 조용한 카페에서라도 앉아서 얘기 했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찬바람이 쌩생 부는 인도에 그녀를 세워두고 입을 열었다.

“뭐....난 그렇네...”

  대강의 이야기를 끝내자 조금은 놀랍게 그녀는 쉽게 내 말에 수긍한다는 뜻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쯤 되자 설마 너도 그랬던 거냐 하며 되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을 간지럽힌다.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고맙네. 그래도 나라는 사람 없이 시작한거면 이런 배려도 쉽지 않았을텐데.”

  이기적이라면 한참 이기적이었던 내 마지막을 그녀는 그렇게 인정해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간단했던 만큼 나는 그렇게 쉽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의외로 죄책감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쩌면 죄책감이 두려워 그녀 역시 나를 두고 예전의 그를 그리워했을거라는 추측만으로 마음을 채우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내 첫 연애는 갑작스러웠던 시작만큼 또한 간단하게 막을 내렸다.

  나는 아직 그 친구를 마음에서 완전히 지웠다고 확신할 수가 없다. 지워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누구에게 같은 식으로 상처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리가 생기기전 누군가를 좋아하지 말자며 다짐했었다. 남들이 흔히 묻기를 너는 여태 여자 친구 안만들고 뭐하냐는 질문에 나는 쉽게 대답한다.

“여유가 없으니까.”

  나에게 여유가 없다면 먼저 좋아하는 일은 없을거라고 믿어왔는데.

----------------------------------------------------------왜....지금...---------------------------------------------------

  지워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다시금 나를 엄습한다. 그러다 꼭 지워내야만하나 하는 필요성을 따져보다 이내 다시 지우지 않으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간단한 결론에 고민에 빠진다. 지금 이 감정이 단순한 충동인가 아니면 지워낼 수 있는 각오가 되어있는가.

  그러다 내 그림자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는 내 발자국을 봤다. 내가 옆으로 조금만 비켜서면 쉽게 보일 저 자국이 조금 더 큰 형체가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내 그림자로 내가 걸어온 모든 자국을 가릴 순 없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또한 지우고 싶은 그 기억을 가릴 수 있어 보였다.

  충동적인 감정은 아닐거라 믿는다. 나는 지금 마음 가득 차 있던 그 친구의 기억을 조금씩 정리하며 약간의 자리를 만들고 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다. 낡은 사진첩에 가득한 사진 중 흔들리거나 이상하게 나온 사진 몇 장 걸러내긴 새로운 사진을 정리된 자리에 끼워넣는 것 만큼 쉬운 일이니까. 그렇다고 그 사진을 버리지는 못하겠지. 다른 어딘가에 공간을 찾아 그 안에 차곡차곡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지워낼 수 없다면 밀어낼 수 있는 여유만큼이라도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마침내 새 사진들이 사진첩을 가득 메우게 되면 먼지 쌓인 낡은 사진들은 다른 어디엔가 고이 쌓아져있겠지.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여유가 없다고 감정을 충동적이었다고 속이지도 말자.

  그리고 자리가 생기면
혹여나 다시 더 정리 할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것은 당신을 현재의 기억에 담아 둘 자리가 많이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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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쥴레이
07/10/24 07:15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My name is J
07/10/24 08:28
수정 아이콘
작년까진...

'귀찮아서요..'



올해엔...

'가난해서요'


음....그렇다구요. 으하하하하!
잘읽었습니다.,^_^
Love.of.Tears.
07/10/24 17:24
수정 아이콘
그 '다행'스런 일이 정말 '다행'으로 이뤄지도록 이쁜 사랑해라...
Good_Life
07/10/24 22:53
수정 아이콘
여광님 오랜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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