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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7/08 15:07:45
Name 윤여광
Subject Fallen Road. Part 1 -1장 13화- [-조우#4-]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13화.
[-조우#4-]

#
“아직 부족해.”

  파벨은 본국에서 가져온 서류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진. 그것이 처음으로 구현된 것은 메인 스트림이 완공된 후 정확히 1년이 지난 후였다. 가장 처음 피해를 받은 것은 쇼넬이었다. 갑작스럽게 몬스터들에 의한 피해가 증가함을 이상하게 여긴 왕가에선 조사에 나섰고 곧 그것이 정확히 그 원리는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위적으로 몬스터를 다수 소환시키는 마법진이 원인임을 밝혀냈다. 대륙 내 다섯 국가 중 가장 강력한 마법력을 자랑하는 코르사크가 당연히 용의선상에 올랐고 당연히 그들은 그 사실에 대해 부인했다. 그러나 그러한 농락이 쇼넬 뿐만 아니라 엔트릴과 놀헨에서도 벌어지기 시작하자 삼국 연합 회의는 이것을 정식 안건으로 올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은 쇼넬의 왕가 뿐, 나머지 엔트릴과 놀헨은 영토 전쟁으로 인해 피로 물든 대륙에 또 다시 상처를 남기기엔 그 피해가 미미하다며 일부 소극적인 입장 표명과 함께 결과적으로 코르사크에 대한 대응은 도마 위에 오르기 직전에 다시 가라앉고 말았다. 이 두 개의 나라가 쇼넬과는 다르게 이 사건을 크게 문제 삼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내세운 대수롭지 않은 피해라는 말 보다는 쇼넬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강했다.

“멍청한…….”

  또한 연합의 결정에 강력히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은 쇼넬이라는 국가 내에서도 왕가를 비롯하여 몇몇의 귀족뿐이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겨우 진정된 대륙의 평화를 깰 수 없다며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을 기정사실화하며 비난했다. 전쟁 직후 쇼넬의 왕권은 무기력했으며 귀족들의 뜻을 무시한 채 단독으로 움직이기엔 그들의 힘은 커져버렸다.
  영토 전쟁. 대륙의 넓은 땅을 두고 더욱 위대한 나라를 위한, 제국을 세우기 위한 5개국의 충돌. 그 결과 남과 북의 저그와 코르사크. 대륙 중앙을 동과 서로 길게 차지하는 쇼넬-엔트릴-놀헨 3개국의 연합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단일 국가의 국력으로서 가장 강력했던 나라는 쇼넬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찾아온 왕가와 귀족들 간의 충돌 그리고 갑작스레 손을 잡은 놀헨과 엔트릴의 협공에 그들은 무너졌다. 덕분에 영토를 넓히기는 커녕 오히려 대륙 중앙까지 뻗쳐있던 땅을 엔트릴에 빼앗겼으며 엔트릴과 놀헨의 연합에 묶여버림으로서 그들은 더 이상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 잡혀버린 것이다. 휴전을 빌미로 쇼넬을 묶어둔 두 국가는 남과 북의 두 국가와 원만한 관계를 갖고자 했다. 그것은 쇼넬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표면적으로 쇼넬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시들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쇼넬은 굴욕과 패배로 얼룩진 짧은 역사를 단번에 지워버리기 위하여 그 이빨을 숨기되 무디게 하지는 않았다.

“돌아왔는가.”
“예. 파벨경.”

  그리고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기 위하여 반드시 만들어내야 할 무대의 재료가 바로 코르사크와의 분쟁 즉 진의 증명이었다.

“헬릭은 무사히 라임턴에 도착했는가.”
“예. 라임턴시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 돌아왔습니다.”
“그래. 잘 들어갔다니 됐군.”
“파벨경.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응. 뭐지?”
“헬릭이 라임턴의 레인저들에게 전달할 메시지가…….진정 전하의 뜻이 맞습니까?”
“응. 확실히 그것은 전하의 뜻이야. 뭐 문제라도 있나?”
“아…….아닙니다…….”

  파벨의 다그치는 듯 하는 대답에 그는 말을 잘못 꺼냈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파벨은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의 이어지는 말들은 고개 숙인 그를 위해 방금 전의 어조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억양의 이야기였다.

“분명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불과한 이야기지.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멀쩡히 살아있는 제 주인이 있는데 그게 납득할 수 있는 요청이라고 생각 하는가.”
“분명. 하여 여쭙는 것입니다. 헬릭 이 어리석은 작자가 감히 전하를 핑계 삼아…….”
“그런 일은 아니니 걱정 말게. 만일 그렇다면 내가 먼저 그 자의 목을 칠 테니까.”
“파벨경의 손에 그의 피가 튀게 할 순…….”
“내 친형이니…….적어도 그 마지막은 내가 정해 주는 게 좋지 않겠나. 가문과 나라의 역사에 먹칠이나 하고 다니는 그런 쓰레기 따위에 혈육의 정 따윈 사치일세.”
“…….”
“아. 미안해. 그 자식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서 말이야.”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대체 왜 그런 전언을…….”
“두고 보면 알거야.”

  파벨은 희미하게 웃으며 살피던 서류 뭉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봐야할 서류가 더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사색보다는 대화가 더 어울리는 시간인 듯 했다.

“서 있지 말고 잠시 앉지 그러나.”

  파벨이 자리를 내주며 허술하게 만든 간이침대로 옮겨 앉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웃고 있는 것을 보고는 냉큼 그 자리에 앉았다.

“피곤하진 않아?”
“예? 아…….아닙니다.”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는데. 아무리 북서로와 라임턴의 거리가 가깝다지만. 무리다 싶으면 바로 말을 하도록 해.”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저에게 명령만 내려주시면…….”
“할로여.”
“예. 파벨경.”

  파벨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막사 안을 환하게 비추는 불빛을 응시했다. 할로라 불린 사내 역시 파벨을 따라 잔잔한 불꽃의 작은 일렁임을 바라보며 말없이 혹은 숨마저 쉬지 않는 듯 한 침묵에 동조했다. 이따금씩 높게 타오르는 불꽃은 그것이 마치 그들의 심정을 대변해주기라도 하는 마냥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듯 하면서도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할로여. 자넨 이번 원정이 어떻게 끝날 것 같은가.”
“잘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제 식견으로 어찌 감히 전하의 큰 뜻을…….”
“그런 의미가 아닐세.”
“예?”
“물론 우리는 전하를 모시는 신하로서 그 뜻을 이루실 수 있도록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 맞지. 그리고 전하께서 원하시는 길을 바로 가실 수 있도록 받쳐드리는 것 역시 우리들의 몫이야. 후회가 남는 길이 되지 않도록 그 분이 가시는 길이 승리와 영광만이 가득한 찬란한 길이 되도록. 우리는 문을 열어야 하고 이어 지나온 문을 닫아야 하는 그런 존재이지.”
“혼자 가지 못하실 길이라고 보십니까?”
“그렇네.”
“…….”

  파벨의 말에 할로는 크게 흔들리진 않았지만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의심하는 것인가. 우리의 주군을.

“내가 어린 시절의 전하와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던가?”
“예. 몇 번인가 하신 기억이 있습니다.”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어린 시절이었지. 전하 역시 마찬가지였어. 한 나라의 왕녀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 전 정원의 꽃과 나비를 머리 아픈 고서들 따위보다 좋아하던. 그런 날들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던 일이었지만 그 땐 정말 반가웠었지.”

  프로스트 궁. 그곳에서 파벨은 로즈와의 첫 만남을 가졌다. 따분한 회의 따위에 자신을 끌고 온 아버지를 원망하며 이리 저리 궁을 돌아다니던 그는 색색의 꽃들이 만발한 정원의 한 가운데 얌전히 앉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나비를 어떻게든 손에 앉혀보려 작고 고운 손으로 허공을 가르는 한 소녀를 발견했다.

“혹시 모르지. 내가 만약 그 아이가 전하라는 것을 알았다면. 감히 말이나 걸 수 있었을까.”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하하. 그렇지. 쳐다보기도 힘들었을 거야.”

  어린 파벨은 그 소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분명 저 아이도 나와 같이 따분함을 못 이겨 궁을 헤매다 정원의 유혹에 못 이겨 드레스가 꽃잎에 물드는 것조차 잊은 채 저리 주저앉아 있는 것이다 하며 입궁을 해도 혹은 넓은 자택의 한가로운 일상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또래와의 첫 만남에 설레고 있었다.

“안녕이라고 당차게 인사하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셨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어. 이 분이 이 나라의 왕녀시구나 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큰 불경을 저지르셨으니.”
“하하. 그러게 말이야. 자네 말대로 아예 모르는 편이 더 좋았겠군.”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그를 쳐다본 어린 왕녀의 얼굴엔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그와 같은 기쁨이 그려져 있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모든 일을 도맡아 돌봐주는 성가신 사람들에 만날 때 마다 알 수 없는 머리 아픈 이야기와 기분 나쁜 헛웃음만 가득한 다른 귀족들과의 일상이 불쾌하고 답답했던 그들에게 진정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또래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은 대단히 큰 행운이었다. 물론 그것이 각자 신분에 대한 명확한 고시를 하지 않을 상태에 한해서 라고는 해도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놀았지.”
“말씀하실 때 마다 드는 생각입니다만 저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상상하기 싫은 일이라네. 무서워서 말이지.”
“맞는 말씀이십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지. 신나게 정원을 뒹굴다보니 금세 정이 들어서는 참 유치하네만 다음에도 종종 궁의 정원에서 놀이를 하자며 약속을 했어. 친구가 생겨 기쁘다며 말이지. 손가락을 쥐어 잡고 약속이라고 여느 소녀와 다를 바 없이 웃고 있는 그 분이 왕녀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네.”

  근위병들의 살기 가득한 외침. 그리고 자신을 포박하는 거칠고 서늘한 손길 가운데 어린 파벨은 이것이 무슨 일인가 당황하여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서러움을 꾹꾹 참고 자신이 멀린가의 사람이며 이 무슨 무례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근위병들의 행동을 멈춘 것은 그의 당찬 외침이 아닌 작고 고운 손을 앞으로도 종종 꽃놀이를 하자는 약속에 내준 소녀였다.

“깜짝 놀랐지. 내가 감히 전하의 손을 붙잡고 친구가 되겠다며 약속을 했다니 말이야. 당장에 벌을 받아 마땅한 몹쓸 짓이었어.”
“그래도 그 인연이 전하와 파벨경을 지금 이 순간까지 함께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래. 그것은 분명 우리 가문 최고의 영광일 것이야. 물론 그게 다소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해도 말이지. 하하.”
“부럽습니다.”
“응? 뭐가 말인가?”
“전하의 그런 총애를 받으시는 파벨경이 부럽습니다.”
“할로여.”
“그리고 그러한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시는 두 분의 곁에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 상투적인 이야기를 듣고자 했던 것이 아닌데. 파벨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고 있는 할로의 어깨를 토닥였다. 물론 그의 말이 진심인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몇 번이고 했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낸 것은 영광이라느니 부럽다느니 하는 역시나 매번 듣던 대답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자네 역시 다른 이들이 보기에 충분히 부러운 인연을 갖고 있지 않나.”
“네?”
“바로 나와 말일세. 파벨 멀린이라는 로즈 쇼넬 왕녀의 측근 중의 측근과 함께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아니었다면 자넨 지금 이 시간 어두운 골목가 어디에선가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먹을 것을 동냥하거나 다른 패거리들과 싸움이나 하고 있었겠지. 아닌가?”
“그…….그렇습니다.”
“너무 불쾌해하지는 말게. 다만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네가 나와의 관계를 잊어버릴 것 같아서 말이야. 하하.”
“그…….그렇지 않습니다. 저…….저는.”

  파벨은 다시 한 번 할로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알고 있어. 자네가 어떤 마음으로 나와 함께 하는지.”
“......”
“나 혼자서는 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아. 내 능력 밖의 일. 혹은 시간이 부족하거나. 내 부족함을 채워 주는 것이 자네일세.”
“제…….제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하늘 위의 신을 대하듯 어렵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하께서 날 동무로서 의지하고 싶어 하시는 것과 같이 나도 자넬 내 동무로서 의지하고 싶으니까 말이야.”

  할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어깨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모시는 이의 황송스러운 말에 감명한 것인지 자칫 민망할 것 같은 파벨의 고백과 같은 말에 부끄러워서인지. 혹은 그 둘 다 인지.

“자네가 날 받쳐주듯이 나 역시 마찬가지야. 전하가 이 험한 여정의 끝까지 무사히 도달하실 수 있도록 믿어드리는 것. 그리고 잡아드리는 것.”
“명심하겠습니다.”
“사실 자네가 걱정일세.”
“제가…….말씀이십니까?”
“부러질 것 같단 말일세. 자넨 분명히 단단하고 꺾이지 않을 곧은 사람이지만 그럴수록 부서지는 일은 갑작스럽고 쉽게 다가오거든. 될 수 있으면 자넬 내 가까이에 두고 위험한 일은 격지 않게 했으면 좋겠지만 자네가 워낙 뛰어난 인재인데다 또 자네만한 사람이 없다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는군. 항상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아닙니다. 제 할 일을 다 할 뿐입니다.”

  전장의 최전선. 로즈 왕녀의 홍연기사단이 승리의 진격을 시작하기 전 길을 뚫어내는 돌격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할로는 언제나 죽음에 노출되어 있다. 더불어 자신이 지시하는 비밀스러운 행동 역시 할로의 몫이었다. 파벨은 자신이 아끼는 이를 죽음으로 내몰아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싫었다. 엄연히 따졌을 때 전장에서 어느 위치에 서느냐는 그다지 큰 위안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할로를 걱정하는 파벨의 마음은 자칫 왕녀를 모시는 최측근으로서 자세가 물렀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모시는 주군께 누를 끼치게 될까 그는 마음 놓고 그를 아낄 수도 없었던 노릇이었다.

“이것 참. 정신이 없군 그래. 피곤한 사람을 붙잡고 쓸데없는 얘기나 하고 있고.”
“아닙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됐네. 어서 가서 쉬도록 하게. 오늘 밤은 아무 생각 말고 쉬도록 하게. 이건 명령이야.”
“아닙니다. 내일을 위해 한 번 더 점검한 후에…….”
“지금 내 말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그런 명령이시라면…….몇 번이고 불복할 것입니다.”

  파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쩔 수 없는 고집. 앞을 보나 뒤를 보나 하나같이 고집이 이렇게나 완강한 사람들이 서 있으니 파벨로서는 참으로 답답했다. 그리고 밀려오는 고마움…….미안함.

“편할 대로 해. 내일 졸리다고 눈 한 번 깜빡였다간…….”

  파벨은 말을 이어가다 잠시 멈칫했다. 융통성 없는 이 꽉 막힌 친구에게는 이런 농담은 독이나 마찬가지다.

“예?”
“아니야. 이만 물러가도록 해.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그럼…….”

  할로는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그대로 막사에서 물러갔다. 그가 떠난 뒤 파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네.’

  정확히 언제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파벨의 뒤에 서서 묵묵히 명령을 따르며 그의 뒤를 지키며 서 있었다.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앞으로만 나아가는 주군의 걸음에 맞춰 따라갈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뒤에서 닥쳐올 불행에서 자유로워진 두 사람은 거칠 것 없이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그럴수록 할로에게 남는 상처는 많아지고 깊어지기만 한다. 그런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적절한 방도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파벨은 마음에 걸렸다.

‘이제 곧…….조금만 참으면 돼. 이제 곧 완성되는 거야.’

  파벨은 사절단에 앞서 라임턴으로 파견된 친형인 헬릭을 떠올렸다. 쓸모없는 인간. 이제껏 단 한 순간도 도움이 되질 않는 무능한 쓰레기.

“쓰레기치곤 영광스러운 마지막이 되겠지.”

  친형제로서의 정은 이미 없다. 그는 앞으로의 험한 길을 걱정하면서도 헬릭의 앞날에 대해선 조금의 어긋남도 없을 것임을 다짐했다. 끝낸다. 단 그 마지막은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쓸모 있었던 경우로 기록될 것이다. 그것이 형제의 인연을 끊어 내는것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될 것이다.
* 박진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9-06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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