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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고 재즈 기타리스트로 꼽혔던 팻 마티노가 지난 11월 2일 별세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룬 연주자지만 그의 일부 연주들은 재즈를 처음 접하는 이들 귀에도 잘 들어옵니다. 번역한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 중간에 링크되어 있는 연주 외에 다음 연주도 추천합니다:
그의 오랜 매니저인 Joseph Donofrio는 Martino가 2018년 11월 이탈리아 투어 후 공연을 중단하게 만든 만성 호흡기 질환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Mr. Martino의 연주는 그가 아직 십대였을 때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0학년 때 로마 가톨릭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후 ("나와 그곳의 한 사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라고 몇 년 후 썼다. "내 기억이 맞다면 풍선껌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가수 Lloyd Price의 빅 밴드에 합류했고 그 다음은 1962년에 색소폰 연주자 Willis Jackson의 콤보에 합류하여 전문 음악가가 되었다.
20대 초반인 1967년 프레스티지 Prestige 레이블에서 첫 번째 앨범 "El Hombre"를 발매했고 호평을 받은 일련의 음반들이 이어졌다. 경력 초기에 그는 종종 Wes Montgomery와 같은 초기 재즈 기타리스트와 비교되었지만 1970년대에 그는 자신의 사운드를 단조했다. "Pat Martino: 록과 재즈 사이의 장벽을 부수다", 1975년 The San Francisco Examiner의 기사 제목이다.
워너 브러더스 Warner Bros.를 위한 그의 첫 번째 앨범들인 "Starbright" (1976)와 "Joyous Lake" (1977)을 지원하는 투어에서, Mr. Martino는 어린 시절부터 가끔 겪었던 잦은 두통과 발작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1976년 프랑스 무대에 섰을 때 발작이 한 번 발생했다.
그는 자서전 "이곳과 지금 Here and Now !" (2011년, Bill Milkowski와 함께) 에서 "나는 연주를 멈추고 약 30초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말했다. “이 발작의 순간에는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빠져 달아나는 것 같다."
그 책에서, 그는 일련의 오진과 전기 충격을 포함한 잘못된 치료를 겪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연을 그만두고 할리우드의 Guitar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지만 그의 문제들은 더 악화되었다. 그는 어느 시점에 의사가 그에게 2시간이 남았다고 말했다고 썼다.
동맥과 정맥이 엉켜 있는 동정맥 기형이라는 상태가 진단되었다. 동맥류로 인해 큰 종양을 제거하기 위한 응급 수술이 필요했다. 깨어났을 때 그는 기억이 없었다.
"당신이 무언가를 기억하지 못할 때, 당신은 그것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그는 썼다. "그리고 수술 후 깨어났을 때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향 감각이 흐트러진 것은 아니었다"고 그는 계속 썼다. "내가 기타리스트인 줄 알았더라면, 병원 침대 옆에 서 있는 두 분이 실은 내 부모님이셨다는 걸 알았더라면, 나는 그 사건들에 수반되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겪었던 일과 그들이 거기 서서 나를보고 있었던 이유는 나에게 매우 고통 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들은 그저 낯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가족 사진을 보여주고 그 자신의 앨범을 들려주면서 그가 과거를 다시 배우도록 도왔다. 기타를 다시 치는 것은 기억 회복의 또 다른 형태였다.
그는 2004년 캐나다의 앨버타주 에드먼턴 저널 The Edmonton Journal of Alberta 에 "나는 스퀘어 Square 1 부터 시작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단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나자 마치 몇 년 동안 자전거를 타지 않은 아이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다시 자전거를 타려고 할 때처럼 내적 직관적인 친숙함이 활성화되었다. 불균형한 순간들도 있지만 그것은 잠재의식 속에 살아 있고 subliminal, 몇 번의 실수 후에 출현하고, 그 다음은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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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원 - 트위스티 퍼즐의 일종이다. 1990년경 카렐 허셀과 보체크 코프스키에 의해서 발명된 직육면체 모양의 큐브이다. 1층과 3층에는 4개의 30도 조각과 4개의 60도 조각이 있고, 2층에는 큰 조각 두개가 있다. 현재 정식 큐브대회 종목 중 하나이다. 회전제약이 상당히 많아 초심자들이 상당히 고전하는 큐브이다. 회전기호도 루빅스 큐브와는 다르게 순서쌍을 써서 읽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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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그는 다시 공연을 시작했다. 1986년 맨해튼의 Fat Tuesday's에서 한 공연을 리뷰한 Jon Pareles는 Mr. Martino가 그 어느 때보다 기교가 넘치고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Mr. Pareles는 "그는 자신의 곡 tunes의 반음계 하모니들 사이로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비밥 라인의 계속되는 후렴구 chorus를 연주할 수 있 있다"라고 썼다. "그러나 종종 그는 비밥 관습들을 옆으로 치운다. 그는 예상치 못한 비트로 라인을 시작하고, 단일 음 note이나 리프 riff를 고집하기 위해 런 run을 중단하고, 표준적 즉흥 연주 licks에 홀수 길이의 도약 odd-length leaps을 삽입하고 비트 주위의 악센트를 이동한다. 그의 연주는 분명하게 제멋대로이고 기묘한 각도에서 곡에 접근하고 보람있는 샛길들을 간다; 그는 곡 song 형식들을 미끄럽고 신비롭게 보이게 한다."
1987년에, Mr. Martino 는 "The Return"이라는 새 앨범을 발매했다.
Patrick Azzara (그의 아버지도 예명으로 사용했던 Martino를 예명으로 사용)는 1944년 8월 25일 필라델피아에서 Carmen과 Jean (Orlando) Azzara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키로 알려진 그의 아버지는 기타리스트이자 가수로도 활동한 재단사였다. 그는 그의 기타를 어린 Pat에게 숨겼지만, 자서전에서 Mr. Martino는 이것이 "그의 역심리학"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소년이 악기를 잡자 그의 아버지는 그의 경력을 격려하고 그를 다양한 음악가들에게 소개했다.
Mr. Martino는 근처에 살았던 미래의 팝 스타 Bobby Rydell과 함께 밴드를 하는 것을 포함하여 소년 시절에 밴드에 있었다. 아버지는 애틀랜틱 시티에서의 콘서트 후 무대 뒤에 있던 당시 기타 거장들 중 하나인 Les Paul에게 아들을 데려 갔는데, 그는 어린 pat에게 아무 곡이나 잠시 연주해 볼것을 요구했다.
Mr. Paul은 Martino의 1970년 앨범 "Desperado"의 라이너 노트에 "그 기타에서 나온 소리는 믿을 수 없었다"고 썼다. "그의 손재주와 피킹 스타일은 절대적으로 독특했다. 그는 작은 커피잔을 들고 있는 것처럼 피크를 쥐었다 … 새끼손가락은 매우 정중하게 뻗어 있었다. 픽이 기타줄을 치자 그 공손함이 사라졌다."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되면서, 재즈에 대한 Mr. Martino 견해는 크게 아시아 철학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는 1975년 Examiner에 자신을 재즈 뮤지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그는 "재즈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음악의 한 관용구가 아니다. 재즈는 자발적 즉흥 연주이다. 갈 곳 없이 집을 나서서 그저 즐거움을 위해 관찰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걸으면 당신은 자신이 즉흥적으로 행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기타 연주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때는 그랬지만 말이다.
"나는 내 악기에 의해 비인격화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더는 나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기타를 포함한 내 환경의 관찰자이다; 나는 모든 것에서 기타를 본다."
자서전에서, 그는 연주 능력을 회복한 과정을 기술했다.
"악기를 가지고 계속 이것 저것 해보자 기억의 섬광과 근육 기억이 점점 내게 쏟아져 되돌아 왔다 - 지판의 모양들, 집의 서로 다른 방들로 가는 서로 다른 계단들. 그 집에는 너만이 아는 비밀 출입구들이 있다, 즐거울테니 거기 가자."
수술 후 그가 만든 음반에는 블루 노트 Blue Note 레이블의 "All Sides Now" (1997)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앨범에서 그는 Mr. Paul을 비롯한 다른 유명한 기타리스트들과 트랙들을 공유했다. 역시 블루 노트에서 발매된, 그의 두 앨범 "Live at Yoshi's" (2001)와 "Think Tank" (2003)는 그래미 어워드 후보에 올랐다.
Mr. Martino는 수술과 회복 기간이 자신이 음악에서 추구하는 바를 바꾸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내 기술 craft과 경력에서 더 성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곤 했다”라고 그는 Edmonton 신문에 말했다. "오늘날, 내 의도는 순간과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완전히 즐기는 것이다."
Mr. Martino의 유족으로는 26년을 같이 산 아내 Ayako Asahi가 있다.
Mr. Martino는 수년 동안 다른 건강 문제가 있었지만 그의 오랜 매니저인 Mr. Donofrio는 그의 회복력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그는 "그가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예전보다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고 말했다.
Jeff Roth가 리서치에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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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기타리스트 아는 분이 별로 없어서 제목만 보고, 팻 메스니인줄 알았습니다..
기타 잘 모르지만 뇌수술과 기억상실을 겪었다고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빠르면서도 정확한 리듬과 섬세한 연주가 인상적이네요.
(제가 재즈기타리스트들에게서 많이 들었던 솔로 릭들이 이분 연주에서 많이 들리는걸 보면 아마도 많은 영향을 끼치신듯)
70대면 요즘 세상에 이른 나이인데, 좀 더 장수하셔서 연주하셨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하늘나라 가셔도 기타 연주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RIP
팻 마티노 정말 인간 역전의 연주자죠. 과거 연주야 말할 것도 없고, 회복한 이후 연주나 앨범들도 좋습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돼서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요 몇 년 사이 재즈 연주자 할배들이 꽤 많이 돌아가셨는데, 웨인 쇼터나 기타 다른 나이 차신 할배들 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음악들 하면 좋겠어요. 부고가 너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