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중 철학자는 루돌프 오이켄(1908), 앙리 베르그송(1927), 버트런드 러셀(1950), 장 폴 사르트르(1964) 이렇게 네 사람뿐입니다. 다만 사르트르는 철학자로서라기보다는 소설가로 수상자 명단에 올랐고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루돌프 오이켄은 오늘날은 현대 독일 철학 전공자들조차도 이름을 접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따라서 철학 분야 외 식자들 사이에서도 알려진 철학자들 중 철학적 저술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는 베르그송과 러셀 두 사람 뿐입니다. 아래 연설에서 러셀은 상당히 니체적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흥미로운데, 니체는 러셀이 가장 디스하는 철학자들 중 한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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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의 노벨상 수상 수락 연설에서 발췌
• 출처: The Nobel Prize
https://www.nobelprize.org/prizes/literature/1950/russell/lecture/
인간의 모든 활동은 욕망에 의해 유발됩니다. 의무와 도덕 원칙을 위해 욕망에 저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취지로 일부 진지한 도덕주의자들이 발전시킨 완전히 잘못된 이론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아무도 의무감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의무를 다하기를 욕망하지 않는 한 의무가 그에게 구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싶다면, 오로지, 또는 주로, 그들의 물질적 상황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들의 전체 체계를 그것들의 상대적 강도들과 더불어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다릅니다. 말하자면 그는 무한한 몇 가지 욕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욕망들은 결코 완전히 충족될 수 없으며 낙원에서조차도 그를 계속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보아뱀은 충분한 식사를 하고 나면 잠이 들고 다른 식사가 필요할 때까지 깨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약간의 대추야자에 기대 절약하며 살던 아랍인들이 동로마제국의 부를 얻고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로운 궁전에서 살았을 때, 그들은 그 때문에 비활동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굶주림은 더 이상 동기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 노예들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만 해도 진수성찬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욕망들이 그들을 계속 활동적이게 했습니다: 특히 우리가 탐욕, 경쟁, 허영심, 권력에 대한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네 가지 욕망....
허영심은 엄청난 행위성향 potency의 동기입니다. 아이들과 관계가 많은 누구라도 그들이 어떻게 끊임없이 장난을 치며 "나 좀 봐"라고 말하는 지 알고 있습니다. "나 좀 봐"는 인간의 마음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허풍에서 사후 명성 추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임종 직전 사제가 회개할 것이 있느냐고 물었던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군주가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예",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한번은 황제와 교황이 동시에 방문했습니다. 나는 경치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을 탑 꼭대기로 데려갔고 그들 둘 다를 떨어뜨릴 기회를 소홀히 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나는 불멸의 명성을 얻었을 것입니다". 사제가 그에게 사면을 베풀었는지 여부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찰해온 동기들의 영향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들 모두를 능가하는 동기가 있습니다. 나는 권력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권력에 대한 사랑은 허영심과 매우 유사하지만 결코
[허영심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허영심이 만족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예이며, 권력 없이 영예를 갖는 것은 쉽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영예를 누리는 사람들은 스타급 영화배우들이지만 그들은 아무런 영예도 누리지 않는 비미 활동 위원회 Committee for Un-American Activities 에 의해 호출될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왕이 수상보다 더 큰 영예를 가지고 있지만 수상이 왕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보다 영예를 선호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사람들은 영예보다 권력을 선호하는 사람들보다 사건들의 진로에 영향을 덜 미칩니다. 1814년 블뤼허는 나폴레옹의 궁전을 보고 "이 모든 것을 갖고서도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했으니 그는 바보가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허영심이 전혀 없는 나폴레옹은 선택해야 할 때 권력을 선호했습니다. 블뤼허에게 이 선택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권력
[에 대한 사랑]은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만족할 줄 모릅니다. 전능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도 그것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정력적인 사람들의 악덕이므로, 권력에 대한 사랑의 인과적 효과는 그것의 빈도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로, 중요한 사람들의 삶에서 단연코 가장 강력한 동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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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뤼허 - 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1742-1819). 워털루에서 나폴레옹과 싸운 프로이센의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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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대한 사랑은 권력의 경험에 의해 크게 증가하는데, 이것은 강력한 통치자들의 권력에 뿐만 아니라 작은 권력에도 적용됩니다. 1914년 전의 행복한 시절에, 부유한 마나님들이 일군의 하인들을 얻을 수 있었을 때, 가복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데서 그녀들이 얻는 쾌락은 나이가 들면서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유사하게, 어떤 독재 정권에서도 권력 보유자들은 권력이 줄 수 있는 쾌락을 경험하면서 점점 더 독재적이 됩니다. 인간들에 대한 권력은 그들이 하기 싫어 하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데서 보이므로, 권력에 대한 사랑에 의해 행동하는 인간은 쾌락을 허용하기보다 고통을 가하기가 더 쉽습니다. 상사에게 어떤 정당한 사유로 휴가를 요청하면 권력에 대한 그 상사의 사랑은 허락보다 거부에서 더 큰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이 건축 허가를 요청하면, 해당 하급 공무원은 "예"라고 말하는 것에서보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에서 더 큰 쾌락을 얻을 것입니다. 권력에 대한 사랑을 대단히 위험한 동기로 만드는 것은 이런 종류의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사랑에는 더 바람직한 다른 측면들도 있습니다. 저는 지식 추구는 주로 권력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동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 기술의 모든 발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정치에서도, 개혁가는 독재자 못지않게 권력에 대한 강한 사랑을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동기로서의 권력에 대한 사랑을 전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완전한 실수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