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듣기론 석가장의 장주는 석대본이나 사실상 안살림은 집사인 형무윤이 도맡아 하고 있다더군요. 자연히 그 권력도 막강하다고 합니다.”
“일개 집사일 뿐인데 권력이 강하다고요?”
현일이 돌연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은밀하게 물었다.
“사숙은 상인의 힘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묵적이 잠시 생각하는 동안 현초가 끼어들었다.
“상인의 힘은 돈 아닙니까, 사숙?”
묵적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비슷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상인의 힘은 물론 돈에서 나오겠지만 그 방식은 무림인의 힘이 무공에서 나오는 것과 같겠지요.”
“어떤 방식 말입니까?”
“무림인이 무공을 사용할 때, 그 방식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지요. 대신 내공과 초식의 운용을 골자로 한 숙련의 개념입니다. 아무리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혔다 한들 그 무공을 시의 적절하게 운용하는 법을 모른다면 고수라고 할 수 없지요.”
현일이 동의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묵적은 계속해서 자신의 논리를 폈다.
“상인의 돈벌이 역시 같은 원리로 이루어지겠지요. 어떤 시기에 어떤 물품들을 들여와 팔아야 하는지, 혹은 어떤 매장에 어떤 직원들을 배치해야 하는지 등등을 알지 못한다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얼마가지 않아 다 까먹고 말 거예요.”
“사숙의 말씀이 맞습니다. 실제로 현 석가장의 부귀를 유지하는 힘은 형무윤에게서 나옵니다. 석대본은 물론 걸출한 인물이지만 상계에서 필요로 하는 인물은 영웅이 아닙니다. 대신 형무윤처럼 두뇌회전이 빠르며 영악할 줄도 아는 인물을 필요로 합니다.”
“일형의 말대로라면 석가장의 실세는 형무윤이겠군요. 어제 그가 우리에게 접근하여 응대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것 같네요.”
“그렇습니다. 석가장에서 일어나는 일 중 형무윤이 의도하지 않은 일은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석대본이 석가장에서 힘이 없는 것은 아니나 석가장의 힘의 원천인 상가(商家)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 자연스레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들게 됩니다.”
“어쩌면 이번 일의 핵심은 형무윤, 그분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 아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현일은 낮게 읍했다.
“제 조사가 미흡하여 아직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그저 이름이 형태경(邢太慶)이라는 것, 아버지와는 달리 무림 인사들을 좋아하며 따른다는 것, 무공 또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요. 적어도 면전에 대고 이름을 물어볼 필요는 없어졌으니까요.”
현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가 곧 어린 사숙이 농담을 했다는 것을 알고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농담이 웃겨서라기보다는 묵적이 어설프지만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오전 중에 형태경을 만나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어보려던 묵적 일행의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분명 전날에는 친절하기 그지없었던 석가장의 사람들의 태도가 냉랭하며 쌀쌀해졌던 것이다.
면전에 대고 박대를 한 것은 아니었으나 현일은 그들의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을 체감했다.
전날에는 직접 자신들을 응대하던 형무윤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아 형태경이나 살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도 모른다는 답변 밖에 들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미로처럼 복잡한 석가장의 경내는 묵적 일행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동을 하려 해도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지나가는 석가장의 식솔로부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다섯 번째 되풀이해서 들은 후 현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숙? 이제는 노골적으로 우리를 적대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를 가지고 적대시했다고 할 수는 없지요. 차라리 우리를 적대시한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현일은 사숙과 이야기하면 언제나 자신이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를 적대시하면 낫다는 말씀 말입니다.”
“지금 저들은 우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아예 없는 존재 취급하고 있지요. 여기서 말썽을 좀 피운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 와중에 허점도 노출할지 모르지요.”
묵적은 장원의 한 쪽에 나 있는 소로(小路)를 주시했다. 소로 주위엔 돌담이 쌓여있었으며 분명 흙길인 것 같은데 풀이 한포기도 나있지 않아 이채로웠다.
“저 곳을 뚫고 가지요.”
묵적이 가리킨 소로는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였으나 현일은 날이 밝았는데도 이상하게 음영이 드리워져 있는 소로가 험한 기관진식(機關陣式)으로 둘러싸인 험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길이었다.
꼭 진법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라 기초정도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묵적이 가리킨 길이 어딘가 수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길이었다.
소로는 대놓고 지나가는 이를 유혹하고 있었으며 문제는 그 덫에 아무도 걸리지 않을 거라는 게 자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묵적은 새앙쥐도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덫에 지금 걸려주자고 말하고 있었다.
‘사숙이라면 무슨 생각이 있겠지.’
현일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동의하였다. 현초는 꺼림칙한 내색이었으나 사숙과 사형의 결정에 반(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묵적은 어둠에 쌓인 소로를 항해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묵적이 소로의 흙길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현초는 눈을 부릅뜨고 소로를 두른 돌담의 좌우를 주시했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현일은 고소(苦笑)를 지으며 묵적의 뒤를 따랐다. 현초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으나 어찌할 도리 없이 일행을 따라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한참동안 돌담으로 둘러싸인 소로를 걸었다. 여전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싹 긴장한 채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현초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허탈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걷고도 풍경의 변화가 없이 소로가 계속되자 점차 일행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절진에 갇힌 것이다.
“어떻게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진 길에서 길을 잃을 수가 있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현초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절진을 조사한답시고 돌담의 돌을 빼려고 용을 쓰거나 바닥의 흙의 성분을 추리하려 했다. 그러나 현초의 짧은 식견으로는 어떤 경위로 그들이 절진에 갇히게 된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 점은 묵적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착에 빠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강행수를 두었으나 자신들이 갇힌 절진은 화살비가 날아오고 석상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절진이 아니라 지금껏 그들이 석가장에서 당해왔던 그대로 철저히 무시당하는 절진이었다.
돌담에 박힌 돌의 표면을 쓰다듬던 현초가 슬며시 말했다.
“사숙, 이 담장을 무너뜨리면 어떻겠습니까?”
현일이 면박을 주었다.
“너도 참 어처구니없구나. 차라리 시도해본다면 담장을 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정상 아니겠느냐? 어찌 부수는 것 먼저 생각한단 말이냐.”
“그도 그렇네요. 사형 말이 맞습니다. 헤헤.”
묵적 또한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장원 내에 있는 것이라고는 흔치않게 높은 담장이었다. 일 장을 훌쩍 넘길 만큼 높아 어지간한 경공으로는 오르기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현초는 벌써 준비 자세까지 마친 상태였다.
“제가 올라가 볼까요, 사숙?”
기대감에 찬 현초의 눈빛을 묵적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럼 초형(初兄)에게 부탁할게요. 조심하세요.”
묵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초는 표홀한 신법으로 땅바닥을 박차고 날았다. 소림의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이었다.
그러나 한 마리 학처럼 박차고 오른 현초의 비상은 얼마가지 못했다. 담장에 발을 디뎌 담장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높이까지 오르자 마치 천장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크게 부딪친 것이었다.
그나마 부딪히기 직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현초가 공중에서 몸을 반 바퀴 돌려 일섬퇴(一閃腿)의 수법으로 발을 사용하여 차냈기에 다행이었다.
카캉!
현초의 발과 부딪힌 곳에서 쇠 병기 소리가 났다. 현초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지켜보던 묵적과 현일의 안색 또한 대경하여 크게 변했다.
바야흐로 그들이 고대하고 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고대했다기에는 너무 치명적이며 위험했다.
아무것도 없던 공중에서 느닷없이 수십 개의 창영(槍影)들이 환상처럼 나타나더니 곧바로 쏟아져 내렸다.
현일은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놀라 얼어붙었다. 그는 비록 소림의 촉망받는 제자였으나 부동심의 수련이 미흡했던 것일까, 촌각의 시간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현일이 망설인 시간은 아주 잠시였으나 곧 그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공중에서 미처 자세를 바로하지 못한 현초가 창영에 꿰뚫리기 일보직전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한줄기 바람이 일었다. 긴박한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공력을 끌어올린 현일은 온몸의 감각이 바짝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
현일은 무의식적으로 먼지처럼 솟아오르는 소로의 흙 알갱이들을 하나하나 셌다. 시간이 멈춘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부연 먼지 위로 묵적의 뒷모습이 보였다.
현일이 날아오르는 신형을 따라 미처 고개를 들어올리기도 전에 묵적은 떨어지는 현초의 곁에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