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적은 석대본의 말을 들은 듯 듣지 못한 듯 그대로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묵적은 묵묵히 있다가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묵적의 뒤에 서 있던 현일과 현초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선사를 위해 장례와 각종 뒤처리를 해주신 것에 소림을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석대본은 노기가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언짢은 표정이었으나 소림의 명망있는 젊은 제자들이 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자 머리를 살짝 숙이며 답례했다.
그러나 포권을 마치고 고개를 든 묵적은 전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나 선사께서 변을 당하신 장소는 석 대가의 본가였습니다. 선사께서는 석 대가가 가장 아끼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우였을 것입니다. 그런 선사께서 끔찍한 모습으로 변을 당한 것에 대하여 소림에서는 일단의 설명을 요구할 것입니다.”
“지금 내게 책임을 묻는 건가? 반학은 내 사십년 지기였네. 반학과 나, 벽호(霹虎)가 황하 인근 뱃사공과 상인들을 위하여 황하수로채(黃河水澇砦)를 격파하고 있을 때 자네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걸세. 자네가 반학과 나의 관계에 대하여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다고 지금 나를 추궁하는 것인가?”
묵적은 지지 않고 맞섰다.
“추궁이라니요. 당치않습니다. 선사께서도 강호출두 이후 소림의 신승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강호인으로서 언제든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듣기로 선사의 외문무공(外門武功)은 강호일절이라 도검에 베여도 피가 나지 않으며 다섯 장 이상의 바깥에서 날린 암기는 그대로 튕겨낼 정도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소림사하면 불가(佛家)의 장중한 내가기공을 떠올렸으나 오히려 무공에 식견이 밝은 고수들은 소림사의 외문무공을 더 높게 치곤했다.
공능 역시 젊었을 적부터 강호의 찬바람을 몸으로 부대끼며 외공이 절정에 달한 고수였다. 그런 공능의 몸은 단일한 철 덩어리처럼 단단할 것이었다. 그러나 발견될 당시 공능의 가슴은 완전히 함몰된 상태여서 마치 화포에라도 당한 것 같았다.
그러나 석가장의 깊숙한 내실에서 화포에 맞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화포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무기, 혹은 어떤 무공으로 그와 같은 상처를 낼 수 있었던 것일까?
묵적은 비록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 보름 가까이 지나서야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이동하는 동안 가능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여 사건의 얼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묵적은 석대본의 노기어린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 쳤다.
“선사께서 입으신 가슴의 상처를 제가 볼 수는 없으나 들려오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들 뿐 입니다. 소승(小僧)은 물론 석가장을 떠나기 전 자심정에 들려 선사의 유해를 챙길 것이나 그 전에 이번 사건에 대하여 얼마간 정탐(偵探)을 할 생각입니다.”
“그 생각의 본원(本源)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본원이라니요?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석대본이 재차 따지듯이 캐물었다.
“그 생각은 소림의 것인가? 아니면 자네 개인의 것인가? 나는 지금 모욕감을 느끼고 있다네. 자네의 대답 여하에 따라 많은 것이 뒤바뀔 것이야.”
석대본의 음성은 진중했으나 묵적은 별반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제 것입니다.”
묵적은 대답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폐부를 찌르듯이 압박해오는 무형지기(無形之氣)를 느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노회한 노인에 불과해보였던 석대본의 눈은 도깨비처럼 일렁거리고 있었으며 그의 몸 전체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열기가 전해져 왔다.
묵적은 물러서지 않고 마음속으로 염화선공의 구결을 암송했다. 곧바로 뱃속에서부터 서릿발 같이 차가운 기운이 피어오르며 석대본의 무형지기를 대적해 나갔다.
그러나 현일과 현초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해서 두 사람은 재빨리 뒤로 다섯 척 넘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위협감을 느꼈던 것이다.
“자네 개인의 생각이라고? 자신감이 넘치는 것인지, 분수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자네는 자네에게 그만한 권한과 능력이 있다고 믿는가?”
“강호의 일에 권한과 능력을 따지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의 권한을 누가 정할 수 있겠습니까? 명본 방장께서 권한을 정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석 대가께서는 부조리한 일이 생기면 그저 일의 책임자를 찾아 문책하는 편이신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모름지기 강호인이라면 마음에 결리는 일이 있으면 책임자를 찾기 전에 나서 심력을 쏟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호인이라... 자네는 아까부터 계속 강호인을 들먹이며 강호의 법칙을 이야기하는데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군 그래.
자네도 내 나이가 되면 알게 될 걸세. 아직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수많은 얼굴들이 있네. 그러나 태반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얼굴들이지. 자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강호의 법칙은 결국 그런 것에 불과하네. 남는 것이라곤 고통과 회한뿐이지...”
어느새 강렬했던 석대본의 기운은 사그라들어 있었다. 대신 묵적의 앞에는 아까보다 몇 배는 더 수척해 보이는 노인 석대본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학의 얼굴이 떠오르는 군.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 나는 언제나 농으로 녀석에게 중이 된 걸 다행으로 여기라 했었네. 그나마 중이라도 돼서 여인들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핑계라도 댈 수 있지 않았나?”
“선사가 살아계실 동안 알현한 적은 없으나 말씀만으로도 어떤 분일지 상상이 갑니다.”
석대본은 피식 웃었다.
“자네는 자신감도 있고 내 무형지기에 맞서는 것만 봐도 능력도 어느 정도 출중해 보이는 군. 그러나 정탐을 핑계로 본가의 식솔들을 못살게 구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겠네. 이미 그들은 한바탕 고초를 겪었거든.”
“무슨 말씀이신지요?”
“관아(官衙)에서 사람이 왔었네. 하북성을 담당하는 안찰사(按察司)라더군.”
묵적의 눈빛이 번뜩였다.
“하북성의 안찰사라면 정삼품에 해당하는 고위관료인데 일개 살인 사건을 조사하러 직접 나섰단 말입니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네. 안찰사사(按察使司) 소속의 무사 한 명이 본가에 식객으로 머물러 있었네. 당연히 살인이 발생한 후 사건에 개입하려 들었지. 그리고...”
석대본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깊고 음울한 한숨이었다.
“소동이 있었네. 오래 이야기하려니 피곤하군. 날도 저문 것 같으니 더 물을 것이 있으면 내일 다시 오거나 형 집사에게 물어보게나. 이만 나가보게.”
석대본의 축객령(逐客令)을 뒤로한 채 묵적 일행은 방을 나왔다.
묵적 일행과 석대본의 밀담은 꽤 긴 시간 동안 이루어 졌으나 집사 형무윤은 그때까지도 계속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무윤은 곧바로 그들을 객소로 인도했다.
형무윤은 묵적 일행이 누각 한 채를 통째로 처소로 사용하게끔 배려해주었다. 형무윤이 나가자 방 안은 금방 조용해졌다. 묵적과 현일, 현초 누구하나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석가장의 넓은 장원은 개미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는 것처럼 적막했다.
문득 현일이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그 말을 들은 현초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어떻게 되던 최선을 다해야지요.”
현일은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묵적을 바라보았으나 묵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고 참선에 들어갔을 뿐이었다.
현일은 자신이 눈앞의 나이 어린 사숙에게 벌써 얼마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현일은 묵적에게 의지하는 기분이 싫지 않았다.
청년 셋이 머물기에 지나치게 넓은 누각은 쓸쓸했으며 누각을 감싼 장원은 어두웠다. 어둠 사이로 간혹 흉흉한 기운이 감지되기도 했으나 현일이 돌아보면 그새 적막뿐이었다. 사방에 온통 믿을 수 없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었다면 두려운 마음이 일만도 했다.
그러나 현일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 혹여 자신의 신념을 깨뜨리는 상황이 닥치더라도 왠지 자신의 눈앞에서 간화선을 외고 있는 이 사숙과 함께라면, 이 사숙을 믿고 따른다면 모조리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고 참선에 든 현일은 어둠속에서 사숙의 뒷모습을 보았다.
스치듯이 광명(光明)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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