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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7/23 16:28:40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교황청의 역사: 제3부 - 카노사의 굴욕과 서임권투쟁 (수정됨)
1부: 로마의 후계자 https://pgr21.net/freedom/87331
2부: 혼돈의 시대 그리고 혁명가의 탄생 https://pgr21.net/freedom/87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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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레고리오 7세, 혁명의 기수가 되다

두 명의 교황의 킹메이커로 활약한 토스카나의 힐데브란트. 교회개혁의 기수이자 교황청에서 가장 강력한 추기경이었던 그는 1073년 만 58세의 나이로 드디어 교황좌에 등극하게 됩니다. 그는 교황명으로 그레고리오를 선택했는데, 이는 그를 후원했었던 그레고리오 6세를 기리기 위해서였고, 또한 서기 6세기의 대교황 그레고리오를 본받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전임자들이 추진한 개혁안은 사실 그레고리오 7세의 손을 거친 것들이었으며, 이는 당시 세상사람들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즉위는 장막 뒤에서 배우들에게 연기지도를 하던 감독이 직접 무대 위에 올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과 같았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자기 자신이 기독교 세계를 타락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고, 교회를 혁신하고 지상세계에 하느님의 평화를 가져다주어야 하는 사명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평소에 오랜 친구 클뤼니 수도원의 원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도대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생활하는 주교를 본 적이 없고, 또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군주 또한 보지 못했다네"

그는 이제 교황으로서 죄악이 지배하는 세상을 정화할 뜻으로 개혁을 강력히 밀어붙였습니다. 이를 위해 성직매매의 금지는 물론, 사제의 결혼을 금지하였고 강력하고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습니다. 초기 교회의 엄숙함과 검소함이 다시 미덕이 되어야 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이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인으로 당연히 파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 그레고리오 7세, 독일의 주교들을 파문하다 

물론 이를 실제로 집행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각지의 주교들은 사실상 봉건영주와 같은 이들로 재산과 권력을 가진 유력자들이었고, 이들은 교황이 단순히 명령한다고 해서 쉽게 물러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독일의 주교들이 그러하였는데, 이에는 그럴만한 배경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독일 유력영주들의 투표로 선출되는 군주로서, 이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불안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교를 임명하거나 성직의 매관매직 등을 통해 유력영주들과는 다른 별도의 지지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고, 특히 주교들은 서거할 경우 그 영지가 다시 황제에게 돌아가서 황제는 이를 자신의 지지자에게 배분할 수 있었습니다. 황제는 독일의 주교들의 지지를 얻는 대신, 주교들의 행실 하나하나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바로 그 독일 주교들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그동안 누렸던 특권을 박탈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황제 대신 교황의 권위와 재판권을 직접 행사하려고 했던 것이고, 이는 주교들 입장에서는 월권이자, 황제 입장에서는 본인 권력에 대한 찬탈 행위였습니다.   

그런 와중 그레고리오 7세는 한 술 더 떠서 1075년 기독교세계의 모든 군주들을 충격에 빠뜨릴 칙령을 반포하게 됩니다. 

교황의 칙령(Dictatus Papae) 

하나, 로마교회는 하느님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하나, 로마교황만이 홀로 보편적(universal)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나, 교황만이 주교를 파면하거나 용서할 수 있다
하나, 교황 사절들은 비록 낮은 지위일지라도 그 어떤 주교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들을 폐위시킬 수 있다 
하나, 오직 교황만이 공의회를 개최하고, 새로운 법을 세울 수 있다 
하나, 오직 교황만이 제국문장을 사용할 수 있다 
하나, 모든 군주들은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 교황은 황제들을 퇴위시킬 수 있다 
하나, 교황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재판받지 않는다 
하나, 누구도 교황에게 호소한 자를 단죄할 수 없다 
하나, 교회의 모든 사항들은 교황 앞에 가져와야 한다
하나, 로마교회를 따르지 않는 자는 가톨릭이라 부를 수 없다 
하나, 교황은 신민들의 군주에 대한 충성서약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총 27개 조로 구성된 이 칙령은 지금까지 전무했던 것으로 교황의 권위를 절대화하고, 그 어떤 세속군주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아득한 옛날 과거 겔라시오 교황이 동로마 황제게 교회(Sacerdotium)와 국가(Regnum)의 영역 중에 교회가 우위에 있다는 점을 설교한 것을 근거로 삼았고, 또한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그 어느 것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교황이 왕을 폐위하고 봉할 수 있다는 발상은 과거 자카리아 교황이 프랑크왕국의 메로빙거 왕을 폐위하고, 카롤링거의 피핀을 국왕으로 인정한 전례에서 얻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이제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3. 서임권 투쟁의 전주곡

그레고리오 7세는 도대체 왜 이렇게 극단적인 주장을 하게 된 것인가?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전혀 극단적인 것이 아니고, 원래 그래야만 하는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교황권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관철시켜야만 세상을 죄악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특히 세속군주들이 주교와 성직자들을 멋대로 임명했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했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시정하려면 세속군주로부터 주교를 임명할 권한을 빼앗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사실 그레고리오 7세 입장에서는 빼앗는 게 아니라 돌려받는 일이었겠죠.  

신성로마황제 입장에서는 교황의 행위는 본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였으며, 더욱 중요하게는 본인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약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세습 봉건영주를 믿지 못하는 황제는 주교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황제가 주교들에 대한 인사권을 쥐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교회개혁을 처음 추동한 것은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3세였으나, 그는 그가 시작한 개혁운동이 신성로마황제의 권력근간을 뒤흔드는 일이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레고리오 7세의 명을 받은 교황사절들은 부패혐의로 독일의 유력 주교들을 파문하였고, 이에 격분한 주교들은 하인리히 4세 앞에 달려가 그레고리오 7세의 즉위를 무효화하라고 종용했습니다. "아니, 애초에 그는 그가 교황에 즉위했다고 황제에 통보조차 하지 않은 인물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는 로마시민의 환호로 즉위했지 추기경단이 적법한 선거로 뽑은 사람이 아니다"가 주요 근거였습니다. 

그런데 하인리히는 아직 교황에 직접 맞서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센과 이에 우호적인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이를 진압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레고리오 7세와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고, 굳이 그와 각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본인의 주교들을 교황에게 내주거나 또는 그들을 직위에서 해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죠. 일단 교황이 뭐라고 하든, 시간을 끌면서 못들은 척 했고 당장의 군사작전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작센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후 1076년 보름스(Worms) 제국주교회의를 소집해서 "그레고리오 7세의 교황선출은 무효이며 그는 당장 폐위되어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했습니다. 

4. 전대미문의 사건! 교황, 황제를 파문하다!

그레고리오 7세는 이에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황제가 자신을 폐위했다는 소식을 듣자 역으로 황제를 파문했고, 황제의 모든 신민의 충성서약은 무효라고 선언했습니다. 교황이 황제를 파문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언에는 호소력이 있었고, 강력했습니다. 결의에 가득찬 선언은 기독교 세계 전역으로 퍼졌고 그레고리오 7세 개인의 권위와 함께 빛났습니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다시 위트레흐트(Utrecht)에서 주교회의를 소집해서 교황의 권위를 무력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의 수는 적었고, 교황을 파문하고자 했던 이는 빌헬름이라 불린 주교 단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하필 주교회의가 개최된 위트레흐트 대성당은 그날 번개를 맞아 전소되었고, 바로 그 다음 달 교황파문에 찬성한 주교 빌헬름은 급사했습니다. 이는 일종의 신성한 계시가 되어, 본래 황제를 지지하던 주교들도 두려움에 가득차 황제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반란에 실패한 독일의 봉건영주들은 이를 황제를 굴복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세력을 규합했고, 하인리히 4세는 수세에 몰려 결국 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봉기를 일으킨 독일영주들과 교황사절들은 만남을 가져 공동선언문을 작성하게 됩니다. 

"황제여, 일년 이내로 회개하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그대를 폐위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할 수밖에 없도다" 

 그리고 몇 가지 조건을 덧붙였습니다. 

하나, 파문당한 주교들을 궁정에서 모두 쫓아낼 것
하나, 그레고리오 7세를 정당한 교황으로 인정할 것
하나, 교황의 주교 서임권을 인정할 것 

5. 카노사의 굴욕...하지만 황제의 승리 

독일주교들이 진영에서 이탈하고, 독일영주들이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상황. 하인리히 4세는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인가?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계속 교황에 맞서는 것은 큰 리스크가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이 그레고리오 7세를 적법한 교황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그의 파문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레고리오 7세가 요구한 대로 황제의 주교 서임권을 완전히 바칠 수도 없는 노릇. 여기서 그는 기가 막힌 수를 발휘했습니다. 일단 교황과 영주들이 선언문에서 내세운 조건은 "회개하는 것 아닌가?", "교황 앞에서 무릎꿇고 회개하면 기독교의 수장인 그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그게 그의 책무 아니던가?"

이에 황제는 당시 그레고리오 7세가 머물고 있었던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성으로 향했습니다. 혹독한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알프스를 넘어 카노사 성 앞에 당도하였고, 성문 앞에서 3일 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계속 참회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눈보라를 견디면서 무릎꿇고 울면서 용서를 구하는 모습. 이 또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교황은 결국 성문 밖에 나와 그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용서가 미덕 아니던가. 교황은 정치적 이익과 종교적 의무 가운데 결국 종교적 의무를 선택한 것입니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두 팔로 안고, 그에게 겉옷을 씌워주면서 성 안으로 인도하였고, 그날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독일영주들은 사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황제가 카노사의 굴욕을 감내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황이 황제를 용서하고 파문을 철회할 것이라고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독일영주들은 교황이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교황의 파문 철회와 상관없이 계획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하인리히에 맞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명분은 하인리히에게 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독일영주들은 슈바벤의 루돌프를 왕으로 옹립하여 무장투쟁을 지속했고, 한 때 승기를 잡는 듯했습니다. 이 와중 그레고리오 7세는 루돌프를 인정하고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번째 파문은 첫번째 파문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여론은 명분이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로마황제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인리히 4세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루돌프는 전사했습니다. 그 결과 반란군은 와해되었고, 하인리히 4세는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옹립하고 그레고리오 7세를 가짜 교황이라고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진군하였고, 그 결과 영원의 도시 로마는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카스텔산탄젤로에 도피하여 제국군이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이미 니콜라 2세 교황 시대부터 교황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시칠리아의 노르만군이 교황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북상, 제국군을 패배시켰으나 이들은 바이킹의 후예 답게 로마시를 방화하고 철저히 약탈했습니다. 그 결과 그레고리오 7세는 풀려나게 되었지만, 로마시민들은 제국군과 노르만군을 끌어들인 교황에 대한 분노로 가득찼습니다. 처음 그레고리오의 즉위를 열렬히 환호했던 그들은 이제 그레고리오를 누구보다 증오하게 되어 그를 쫓아냈습니다. 결국 그레고리오 7세는 노르만군의 세력 하에 있었던 살레르노에 망명,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70세.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평생 정의를 사랑하였고, 죄악을 미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망명지에서 죽는다"

6. 서임권 투쟁의 결말 

표면적으로 보면, 그레고리오 7세의 혁명은 결국 실패한 혁명이었습니다. 그는 하인리히 4세의 무력 앞에 결국 패배하였고, 망명지에서 죽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가 남긴 유산은 그의 삶보다 훨씬 더 거대했습니다. 교황이 황제를 파문할 수 있다는 사실, 영적 권위가 세속적 권력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어주었고, 이는 그의 그레고리오의 사후에도 줄곧 황제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오 이후에도 줄곧 개혁파 교황들이 등장, 모두 그레고리오의 유지를 받들었고, 황제와 국왕들을 압박했습니다. 

서임권에 관한 오랜 논쟁 끝에 결국 교황과 황제 사이에 협약이 성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보름스협약 (1122년) 이었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의 사후 37년이 지나 하인리히 4세의 아들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스토 2세 사이에 체결된 협약으로, 교황의 서임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황제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협약으로 양쪽의 주장이 적절한 타협점을 찾은 결과였습니다. 

하나, 성직자는 원칙적으로 교회법에 규정에 따라 선출된다 
하나,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등지에서는 교회의 영적예식(성직자의 영적권위)을 거행한 후 황제의 세속의식(영지에 대한 성직자의 법적 권한)을 거행한다
하나, 독일 국내에서는 황제가 성직자에 대한 세속의식을 거행한 후 교회의 영적예식을 거행한다

이는 쉽게 말하면 독일에서는 황제가 여전히 주교를 서임에 대한 권한을 갖지만, 교회의 추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반대로 이탈리아와 부르고뉴에서는 교회가 주교서임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갖고 황제가 이를 사후적으로 추인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는 결국 교회가 승리한 협약이라고 부르는데, 비록 황제의 권한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지만, 교황의 주교서임 권한을 법적으로 완전히 인정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레고리오 7세가 시작한 혁명은 최종적으로 교황권의 강화와 그의 법적 권리의 확대로 귀결되었고, 이는 중세 교황의 권력을 규정 짓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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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에서는 교황과 십자군 전쟁을 다뤄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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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나
20/07/23 16:34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 부분이네요. 학교교육처럼 카노사의 굴욕이 교황권의 정점, 황제의 굴복이라고만 가르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개망이
20/07/23 17:01
수정 아이콘
와 너무 재밌네요ㅠ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새강이
20/07/23 17:06
수정 아이콘
저는 세계사를 덜 배웠네요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이 이기고 끝난줄 알았는데 저런 역사가 있었다니..
aurelius
20/07/23 18:30
수정 아이콘
저도 과거에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좀 더 복잡했었더군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교황이 목표한 바가 다수 달성되었으니 꼭 교황이 졌다고 보기에는 어렵고요. 복잡하지만 흥미롭습니다.
20/07/23 20:24
수정 아이콘
카노사의 굴욕의 결과도 그렇고, 교황권이 최대였던 인노켄티우스(인노첸시오) 3세의 경우에도
세속군주들이 명령을 씹는 경우가 다반사....
Je ne sais quoi
20/07/23 17:5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 이야기는 저도 몇 년 전에야 실체(?)를 알았는데 처음엔 깜짝 놀랐었죠
솔로몬의악몽
20/07/23 17:58
수정 아이콘
이제까지 카노사의 굴욕이 세속권력의 일방적인 패배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삼성전자
20/07/23 20:40
수정 아이콘
내가 무릎을 꿇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군요.
카노사 굴욕 어딘가에 무슨 귀족여성아 등장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네요. 들을 때마다 새롭네요. 크킹하러 가야지
Love&Hate
20/07/24 10:10
수정 아이콘
크킹하러 가신다니 크킹으로 알려드리면 이 여자 입니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paradox&no=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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