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한 소녀가 죽었다.
1.
국민학교때, 한 아이를 좋아했다. 나와 같은 반에서 자주 어울리는 친구의 쌍둥이 동생이었다. 그 아이는 옆 옆 반이었는데, 언니와는 달리 좀 덤벙거리는 성격이라 종종 교과서나 준비물을 집에 두고 왔다며 제 언니에게 빌리러 오곤 했다. 시원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빛나던 큰 눈이 아직도 설핏 기억난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아이를 좋아했던 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와 같은 반이었던 그 아이의 쌍둥이 언니와 친하게 지내며 그 애의 집에 자주 놀러 가게 됐고, 자연스럽게 그 아이와도 함께 어울릴 일이 많아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어느 날엔가, 쌍둥이 언니에게 빌렸던 책을 돌려주러 그 아이의 집에 갔었는데, 집에는 그 아이뿐이라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그즈음 나는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던 차였다. 문을 열어준 그 아이는 내가 내민 책 대신에 내 손을 잡았다. 이것 좀 전해줘, 나 그냥 갈게- 하는 말에 들어와서 기다려, 나랑 놀고 있으면 되지- 하고 나를 잡아 끌어준 아이가 고맙고도 미워서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렸다. 속으로는 '내 맘도 모르면서' 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 핑계쯤으로 덮여있었고 그 속으로는, 진짜 마음속으로는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그 아이가 너무 고마웠고 정말정말 좋았었다. 내가 혼자 그렇게 멋대로 구는 동안 그 아이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날, 그 아이의 집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고 현관에서 울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정말로, 더는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아이를 의식적으로 멀리하면서부터, 나도 모르게 나와 친구였던 그 애의 쌍둥이 언니도 멀리하게 되었던 것 같다. 조금씩 서먹해지던 관계는 그 나잇대의 아이들이 한 번씩 그러하듯, 아주 사소한 일로 다투고 관계가 틀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나는 심한 상사병에 시달렸다. 눈을 떠도 감아도 그 아이의 얼굴만 떠올랐고 그럴 때면 가슴이 저리고 숨을 쉬기 힘들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나고, 밤에도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아이와 닮은 쌍둥이 언니를 한 반에서 계속 마주쳐야 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닮은 얼굴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 애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를 의식적으로 피해 다니는 것이 괴로웠다. 좋아하면 안 되는 걸 아는데, 그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 아이는 가끔씩 복도에서 나와 마주칠 때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럴 때마다 그 아이가 너무 미웠고 너무너무 고마웠다.
견디다 못해 그 아이의 언니에게, 그러니까 나와 같은 반이었던 친구에게 내가 먼저 사과를 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내가 먼저 그 아이의 비위를 맞췄다. 그 날부터 나는 다시 그 아이의 집에 놀러 갈 수 있었고 그 아이와 웃으며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 아이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생각 같은 건 더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날부터 나는 멍청하게 앉아서 울지도 않았고 밤에 잠을 뒤척이지도 않았다. 여전히 그 아이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고 그럴 때면 가슴이 저리고 숨을 쉬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애가 보고 싶으면 볼 수 있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나는, 좋아하는 그 애와 함께 잘 지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엔, 그냥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2.
국민학교에서의 지독한 짝사랑이 끝나고, 나는 두 번 다시 친구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머리로는 그럴듯한 이유까지 대가면서 친구를 좋아하면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중학교에 입학한 지 한 학기도 채 되지 않아 같은 반 친구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주 보란 듯이 또 친구를 좋아하고 있는 내가 미웠다. 힘들 걸 뻔히 알면서 대체 왜? 아무리 물어도 심장은 답이 없었다. 그 애를 보면 미친 듯이 뛰어대고, 그 애를 생각하면 눈물 나게 저린 것 말고는.
그 애는 나와 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도 친했다. 그 애는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주목받는 아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랬으므로, 그 애와 노는 무리는 달랐지만 서로 같이 자주 어울렸다. 그 애는 시원시원한 성격이었고, 나 역시 그 애 앞에서는 그런 척하기 바빴다. 그 애가 아무런 의미 없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나를 뒤에서 안을 때마다,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을 들킬까 봐 오금이 저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애를 좋아하는 마음은 국민학교때의 한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국민학교때엔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좋았지만, 중학생이 된 나는 그렇게 소박하지가 못했다. 자꾸, 자꾸 욕심이 났다. 그 애가 한 번 더 손을 잡아주길 바랬다. 그 애가 한 번 더 내 어깨를 감싸주길 바랬다. 그 애가 한 번 더 나를 안아주길 바랬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해 주길 바랬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욕심이 넘치는 마음엔 브레이크가 없었다. 더이상 그 애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생각 따위는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내 마음을 티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내 머리 한구석에라도 처박혀 있었을까? 그때의 나는 이성 따윈 없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너무 무모했던 것 같다.
3.
"너 A 좋아하지?"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란 건 이런 거구나,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어떻게든 태연한 척하면서 아니라고 부정해야 했지만, 온몸이 떨리고 목구멍이 콱 막혀서 아무런 표현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내 앞에서 친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교실에서야 친하게 지냈다지만 교실 밖에서는 딱히 어울릴 일이 없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소위 노는 학생이었고, 나는 성적만 좋은 날라리였으므로 교실에서 제법 어울려 놀긴 했지만, 딱히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 그 친구가 문득 종례가 끝나고 집에 가려는 나를 불러세워서 굳이 담배나 한 대 피우자고 했을 때부터 뭔가 알아차렸어야 했다.
얼마나 그 자리에서 떨었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아무튼, 정신이 들고서야 나는 학교 뒷골목에서도 한참을 들어와야 하는 그곳에 누군가 있지는 않은지 앞뒤 좌우 상하를 다 살필 수 있었다. 골목에 들어와 내게 권했으나 내가 사양하는 바람에 그 친구의 입에 물린 담배가 필터 앞까지 타고 있었다. 그 친구는 담배를 바닥에 뱉어 발로 비벼 끄더니 또 하나를 꺼내 내게 다시 권했다. 담배를 받아 입에 갖다 대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친구는 내게 담뱃불을 붙여주고는 제 입에도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둘이서 담배를 다 태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나는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조심하라고 알려 준거야."
"뭐?"
"니가 걔 좋아하는 게 너무 티 나니까... 조심하라고. 다른 애들이 알면 어쩌려고 그렇게 티 내고 다녀?"
담배를 다 태우고도 입을 떼지 못하는 내게 그 친구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 친구가 먼저 말을 꺼내기까지 나는 그저 속으로 망했다, 이제 어쩌지, 하는 생각뿐이었으므로 그 친구가 내게 왜 A를 좋아하는지를 물었는가 하는 의도 같은 건 가늠할 겨를이 없었다. 멍청하게 서서 당황하는 나를 보고 그 친구는 내 팔뚝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웃었다.
"뭐야, 그럼 내가 이거 소문낸다고 하면서 너 협박이라도 할까 봐 쫄렸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 양아치 아니라며. 니가 그랬잖아 애들한테."
"................ 고마워."
"됐어, 다른 애들한테 들키지나 마. 애들 거의 다 그런 거 싫어할 텐데."
고마워, 소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정말 고마웠다. 그 친구가 모른 척해주지 않는다면 내 학교생활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반 친구들은 온갖 욕을 해가며 날 괴롭힐 거고, 담임교사 귀에도 들어갈 거고, 그럼 담임교사와의 면담을 거쳐 학생주임과도 면담을 할 거고, 그럼 집에도 알려질 거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그 애가 알게 되면 난 더이상 그 애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될 게 뻔했다. 그런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지옥이었다. 그 지옥에 날 밀어 넣지 않은 그 친구가 너무 고마우면서도, 언제든 날 그 지옥에 밀어 넣을 수 있는 그 친구가 두렵게 느껴졌다. 눈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렀다.
둘이서 골목 바닥에 책가방을 깔아놓고 그 위에 앉아 다시 담배를 태웠다. 들켰다는 두려움 속에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드는 것도 같았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내가 A 좋아하는 거?"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오빠가 있거든. 나랑 사귀는 오빠 친군데, 우리 오빠 몰래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어."
"......?"
"그 오빠가 나를 딱 그런 눈으로 보거든. 니가 A 보는 그런 눈으로."
"아......"
그 아이의 곁에 있으려면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거나,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으려면 그 아이의 곁에 없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4.
중학교 3년 내내, 아니,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도 한동안 그 애를 짝사랑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나는, 정말 두 번 다시는 친구를 좋아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국민학교때와는 달리, 친구를 좋아하다 들킨다는 것은, 단순히 그 애와 더이상 함께 지낼 수 없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됐으므로. 친구를 좋아하다 들킨다는 건 내 학교생활을 망치는 건 물론이고, 내 가족 관계를 파탄 내고, 나아가서는 내 삶을 날려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물론 심장은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으므로 이후로도 학교는 내게 천국과 지옥 사이 그 어디쯤에 있는 곳이었다.
5.
나는 운 좋게도 내가 학교에서 친구를, 선배를 좋아한다는 것을 들키지 않고 학교생활을 마치고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사회에 나온 후 만난 이들, 나와 비슷한 학교생활을 겪었던 이들에게서 그들의 학창시절이 어땠는지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정말 운이 좋은 놈이란 걸 깨달았다.
들키지 않으려고 혼자 밤마다 울면서 괴로워하고 낮에는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면서 노력했지만 어쨌든 나는 들키지 않았다. 들키지 않았으므로 교사들의 경멸도 받지 않았고 학교가 자퇴를 종용하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부모에게 알려 가족과 연을 끊는 일이 생기지도 않았고, 부모에게 머리채 잡혀 정신병원에 처박히지도 않았다. 친구들의 멸시와 괴롭힘에 못 이겨 자살하지도 않았고 좋아하던 사람에게 모진 말도 듣지 않았다. 그러한 운은 불행히도 우리 같은 사람들 모두의 학창시절에 깃들어주질 않는다고들 했다.
중학교 때, 담배나 피우자며 나를 불러냈던 그 친구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 얘기를 교실에서 했다면? 혹은 교실이 아니더라도 학교 어딘가에서 했다면? 그래서 다른 아이가 들었거나 교사가 들었다면? 그것이 소문났더라면?
그랬다면 내가 학창시절을 온전히 버텼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었겠지.
나는 그런 학창시절을 보냈다. 운이 있어야지만 무사히 성인이 될 수 있는, 그런 시절을.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강산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학교라는 담장 안은 그렇게나 변한 게 없는 것인지, 여전히 누군가는 운이 따라주어야만 무사히 성인이 될 수 있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 담장 안에서, 부디 오늘 하루도 들키지 않길, 내일도 무사히 넘어가 주길 바라는 수밖에는 없는 아이들이 가여워 마음이 아프다.
0.
한 소녀가 죽었다.
운이 없던 한 소녀가 죽었다.
운이 없던 한 소녀가 누군가를 사랑한 죄로 죽었다.
운이 없던 한 소녀가 누군가를 사랑한 걸 들킨 죄로 죽었다.
한 소녀가 죽었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어쩌면 누군가의 한 마디로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소녀가.
+ 추신 : 이 글에 비난의 의도는 없으므로 마지막 문장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