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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12/09 20:32:47
Name 이치죠 호타루
Subject [일반] 부드러운 혁명(Velvet Revolution)
그 옛날 1989년 -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던 바로 그 때 -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있었던 혁명을 "부드러운 혁명"이라 칭합니다.

Velvet이라는 것이 벨벳 말고도 "부드러운"이라는 뜻이 있더군요. 슬로바키아에서는 "Gentle Revolution"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다고 하니, 벨벳 혁명이라기보다는 "부드러운 혁명"으로 번역되어야 옳지 않을까 싶군요. 체코 어로 이 1989년의 혁명을 "Sametová revoluce"라고 하는데... 체코어 위키피디아의 원문 "Pro svůj nenásilný charakter se tato revoluce označuje jako „sametová revoluce“."를 구글 번역기를 통해 번역했더니, "그 비폭력적인 특성 때문에 벨벳 혁명이라 칭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벨벳 혁명보다는 아무래도 "부드러운 혁명"이라는 번역이 맞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슬로바키아 어로는 "Nežná revolúcia"이라 합니다.

슬로바키아에서 "부드러운 혁명"이라 하지 않고 "점잖은 혁명"이라는 표현을 미는 것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뒤에서 밝히겠지만 이 혁명의 시초가 브라티슬라바에서 벌어진 시위였거든요.



알렉산데르 두브체크(둡체크라고도 하죠)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피어났던 프라하의 봄에 때아닌 무서리가 내린 1968년 이후,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추방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자녀들까지도 예외가 없는 이 혹독한 추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겨울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그런데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1985년이 체코슬로바키아에도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바람이 불어닥치자, 체코슬로바키아도 서서히 들썩들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68년 이후 그야말로 딱 짜여진 체제에서 무려 17년에 달하는 칼춤을 추어 왔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죠. 당장 프라하의 봄 자체가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되는 사항이었으니까요. 이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더 흐르자 1988년에 마침내 보다못한 사람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나, 곧 경찰들에 의해서 진압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적인 이론에 진배없었고, 살기가 팍팍하고 가계부를 볼 때마다 주름살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불만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산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에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의 등불이 되었던 것은, 1968년 8월 20일에 소련군이 진주해 온 것을 항의하며 이듬해 1월에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자살을 했던 얀 팔라치와 그 뒤를 이어 분신으로 항의의 뜻을 표한 두 명의 학생뿐이었으니... 하고 싶은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고 공산당에 항의 한 번 제대로 못 하던 기나긴 독재의 세월에서, 서로가 뜻이 맞음을, 너도나도 공산주의 체제에 불만이 있었음을 알게 되자 마침내 참고 참았던 민중들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죠.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조금씩 체제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자, 마침내 1989년에 이르러서는 너도나도 체제에 반감이 있음을 공공연하게 말할 수준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탄압받던 민주화 인사였던 바츨라프 하벨의 사면/복권에 대한 대규모 청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국제 정세가 불을 질렀죠. 동독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으로 몰려가 망명을 신청한데다가 11월 3일에는 아예 열차편으로 서독으로 건너갔고, 마침내 11월 9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박살난 것입니다.

1989년 11월 9일 - 목요일이군요. 그 목요일로부터 일 주일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것만 같았겠죠.



"국제 학생의 날"이라는 게 있습니다. 1939년 10월 28일에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에 항의하는 의미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 중 복부에 총상을 입어 11월 11일 사망했던 얀 오플레탈(Jan Opletal) 및 그의 장례식(이것이 또 다른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을 주관했다는 이유로 11월 17일에 처형당한 한 명의 교수 요제프 마토우체크(Josef Matoušek)와 여덟 명의 학생들을 기리기 위한 날이죠. 이 11월 17일의 전날 밤... 나치에 항거했던 교수와 학생들이 목숨을 잃은 지 꼭 50년이 되던 바로 그 날 밤, 브라티슬라바에서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평화 시위를 벌였습니다. 모든 정권을 농단하는 권력자들이 시위를 폭도로 인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는지 군대가 배치되었지만, 이 시위는 아무런 유혈 사태 없이 평화롭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를 슬로바키아 교육부로 보내 요구사항을 전달했죠.

그리고 마침내 요제프 교수 처형 50주기가 되던 날... 이번에는 프라하에서 오후 4시, 1만 5천 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이 때 굉장히 희한한 방향으로 사태가 진행되었죠. 오후 7시 30분에 시위대의 진행을 경찰이 막아서고 강제로 해산시켰는데, 비밀 경찰 한 명이 시위의 분위기에 압도된 나머지 쓰러져버린 것입니다.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쓰러진 사람이 워낙에 움직임이 없었던데다가, 이게 강제 진압에 절망하던 학생들에게 "학생 한 명이 경찰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으로 와전되어버린 겁니다. 바로 이게 제대로 터져버렸죠. 사람들을 움직인 동기가 되어버린 겁니다. 문자 그대로 날조된 뜬소문에 의해서... 뭐, 물론 그것 때문에만 움직이지는 않았겠죠. 근본적으로 체제에 대한 불만이 없었다면 그런 뜬소문으로 사람들이 움직였을까요?

그날 밤,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선언했고, 극장가가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다음날인 11월 18일, 이미 극장가는 공공 토론의 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배우들은 대본 대신 학생들과 극작가들이 쓴 시국 선언서를 읽었고, 체제 반대 포스터가 곳곳에 나붙었습니다. 언론이 완전히 공산당의 노예가 된 상황에서 여론을 퍼뜨릴 방법은 이것밖에는 없었죠. 여기에 자유 유럽 방송(Radio Free Europe, 물론 체제가 체제다보니 곧잘 금지되곤 했었죠. 아마도 이 때도 비밀 방송 신세였을 겁니다)에서 전날에 학생이 죽었다는 오보가 전달되면서 일이 더욱 커졌습니다. 오보였지만 시민들의 반발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고, 망설이던 시민들을 설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11월 19일에는 슬로바키아의 예술가, 과학자, 사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11월 17일에 있었던 강제 진압을 비난하고 "폭력을 반대하는 모임"(Public Against Violence, 슬로바키아 어로는 Verejnosť proti násiliu, VPN)을 결성했습니다. 동시에 체코에서는 "시민 포럼"(Civic Forum, 체코 어로는 Občanské fórum, OF)이 결성되었죠. 목적은 같았습니다. 폭력적으로 평화 시위를 진압한 책임자 처벌, 철저한 진상 규명, 그리고 정치범의 석방.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도 황급히 "아무도 죽은 시민은 없었다"고 발표했지만, 뜬소문을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뭐 자업자득이죠. 그러게 스스로 잘 했어야지.

재미있는 것은 결국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음이 그런대로 빠르게 확인되었는데, 외려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요구는 더 커진 것입니다. 이미 이 시점에서 국민들의 체제에 대한 염증이 어마어마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죠. 이미 이 시점에서 중간에 오보가 끼어 있었음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오보가 크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 혁명의 시작은 학생들의 평화로운 시위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것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체제에 대한 사람들의 염증이었죠. 괜히 이걸 가지고 오늘날의 촛불시위가 선동과 날조로 시작된 거네 어쩌네 하고 말도 안 되는 날조를 하는 데 끼워맞출 수구 세력들이 있을까봐 옥상옥(屋上屋)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둡니다.

어쨌거나 11월 20일이 되자 학생들과 극작가들은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를 이끌던 라디슬라프 아다메치(Ladislav Adamec)는 시위대와 학생들에게 동정적인 입장이었지만, 특별 위원회의 투표에서 아다메치가 패했습니다. 때문에 정부는 요지부동이었죠. 이 날 시민 포럼에서는 공산당 일당 독재의 폐지를 요구 사항에 적어넣었습니다. 명백한 반체제 운동이 된 것이죠. 이날 프라하에서는 1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하도 지난 서울에서의 시위가 엄청나게 컸던 터라 겨우 10만? 하고 갸우뚱하실 분도 있으시겠지만... 당시 슬로바키아를 제외한 체코의 인구가 1천만이었습니다. 프라하의 크기가 서울보다 약간 작은데 그 인구가 120만 가량 되었죠. 거기서 10만이 모인 겁니다. 같은 비율로 환산하면 서울에서만 백만의 인구가 모인 셈이죠. 게다가 이건 프라하만 센 거고... 그 정도로 체코슬로바키아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은 컸습니다.

다음날 아다메치가 시민 포럼과 회동을 가졌습니다. 아다메치는 폭력적인 시위 진압은 없을 것임을 약속했지만, 체제 수호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시위가 며칠간 계속 일어나게 되었죠. 사람들은 계속해서 정치범들의 사면 및 석방을 외쳤죠. 프라하의 봄의 주인공이었던 두브체크가 이 혁명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도 이 날입니다. 요지부동이던 정부는 위기감을 느끼기는 했는지 4천 명의 "인민 민병대"(People's Militias, 슬로바키아 어로는 Ľudové milície,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어용 집단)을 프라하로 부르기도 했지만 곧 돌려보냈습니다.

11월 22일, 계속되는 줄다리기에 시민 포럼은 다음주 월요일인 11월 27일에 두 시간의 파업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언론이 가세했습니다. 슬로바키아에서 "검열되지 않은 생방송으로" 시위 현장이 보도된 것이죠. 다음날에는 군부가 어떠한 폭력적인 시위 진압에도 가담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습니다. 두 시간의 파업에 대한 참여 열기도 더욱 드높아졌습니다. TV와 라디오까지 파업에 동참하겠다고 하는 통에 마침내 공산당도 두 손을 들었습니다. 아다메치와 프라하 공산당 서기장 미로슬라프 슈테판(Miroslav Štěpán)이 사임한 것입니다. 이 때, 11월 25일 토요일에, 프라하에서 80만이, 브라티슬라바에서 10만이 - 브라티슬라바의 인구는 프라하의 1/4 가량입니다 -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 되었죠.

11월 27일에 마침내 계획했던 두 시간의 파업이 오후 2시를 기해 시작되었습니다. 무려 75%의 사람들이 파업에 동참했습니다. 평화로운 민주화 움직임의 정점이라 할 만했습니다. 이에 결국 공산당은 11월 29일의 의회에서 공산당의 "국가를 이끄는 역할"이라는 문구를 삭제함으로써 항복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체제는 완전히 그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벨벳 혁명의 주역이었던 시민 포럼의 지도자이자 극작가였던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이 12월 29일에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혁명은 그 승리를 완전히 공고하게 굳혔습니다. 여섯 달 후,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자유 의회 선거였던 1990년 6월의 선거에서 시민 포럼(CF)과 폭력을 반대하는 모임(VPN)이 압승을 거두면서 민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혁명... 하도 휴전선 위의 몹쓸 김씨 삼대조 - 암군, 폭군, 수양제와 해릉양왕에 비견될 쓰레기들... 하여간 갖은 수식어를 달고 달아도 모자랄 놈들 및 종북주의자들이 그 숭고한 단어의 뜻을 수시로 더럽혀댄 통에 쓰기가 몹시 걸리는 것도 사실입니다만(당장 북한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길게 설명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촛불시위만으로도 충분히 혁명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혁명이죠. 부드러운 혁명.

저 개인적으로는, 아직 좋아하기에도 이른 것도 있지만, 오늘날의 촛불시위를 과거 공산주의 일당 독재 국가에서 벌어진 혁명과 비견해야 할 정도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정치적으로 참으로 비참한 것이며, 그렇기에 오늘날의 촛불시위와 탄핵은 희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뜻은 그러한 비극을 희극으로 어느 정도 돌리는데 성공했습니다.

아직 이 일이 어떠한 결론이 난 것은 아닙니다. 이제야 정치권이 사람들의 뜻을 받들었고, 사람들의 요구에 따른 것뿐이죠. 당장 탄핵이 완전히 종결된 것도 아닙니다. 수사는 여전히 진행중이고, 대통령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든 것을 쥐고 흔들며 권세를 부리고 정권을 농단했던 이들은 뻣뻣하게 목을 세우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아직 "성공했다"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해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마침내 조금이나마 이루어지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날의 촛불시위는...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11월 혁명. 어쩌면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또 하나의 부드러운 혁명.



* 이 글은 영문 위키피디아의 Velvet Revolution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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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군-
16/12/09 20:41
수정 아이콘
그렇다면, 이번 혁명은 뭐라고 이름을 붙혀줘야 할까요? 병신년에 일어났으니.. 병신혁명? 병신탄핵??
어감이...;;
이치죠 호타루
16/12/09 20:43
수정 아이콘
하필 올해가 올해인지라 어감이 영 그렇네요 크크크크크 그냥 한국의 명예혁명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네요. 아니면 외국에서 카네이션 혁명 자스민 혁명 하듯이 촛불 혁명(Candle Revolution)?
16/12/09 20:48
수정 아이콘
촛불 혁명 멋지네요
정지연
16/12/09 20:50
수정 아이콘
저도 촛불 혁명이 제일 좋아 보입니다.. 촛불집회가 그간 많았지만 이번만큼 확실한 결과를 보여준 경우가 없어서 촛불집회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봐도 될듯 합니다
보통블빠
16/12/09 20:58
수정 아이콘
촛불 혁명 너무 멋있는 단어입니다!!
Clumsynerd
16/12/09 20:58
수정 아이콘
촛불 혁명 정말 맘에 드네요. 교과서에 실렸으면 합니다.
VinnyDaddy
16/12/09 21:10
수정 아이콘
인정!!!!! 반박불가!
16/12/09 23:12
수정 아이콘
촛불혁명, 캔들 레볼루션

크.. 어감도 좋네요
16/12/09 20:50
수정 아이콘
촛불혁명 밀어봅니다.
아이유인나
16/12/09 20:49
수정 아이콘
무혈이네 부드럽네 하지만...세월호 아이들과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 있은 뒤에야 겨우 이 상황까지 올 수 있었죠. 후...
이치죠 호타루
16/12/09 20:51
수정 아이콘
동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에서 다치고, 물대포를 얻어맞았죠... 언론은 사람들의 정당한 분노를 폭력으로 침소봉대하기 바빴고, 피눈물 흘려 가며 사람들이 요구해도 청와대는 태산마냥 꿈쩍하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날 탄핵소추안 통과라는 조그마한 결과도 값지게 보이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닉네임을바꾸다
16/12/09 20:53
수정 아이콘
김씨 삼대조와 비교되는 수양제나 해릉양왕이 무덤에서 일어날거같...뭐 중요한건 아니고...클클...
이치죠 호타루
16/12/09 20:54
수정 아이콘
어쩌면 히틀러와 비교하는 게 제일 깔끔했을 수도 있겠네요. 껄껄
보통블빠
16/12/09 20:59
수정 아이콘
근데 해릉양왕은 무덤에서 일어날 자격이 없어보입니다...
닉네임을바꾸다
16/12/09 21:05
수정 아이콘
뭐 보통 자기에 대한 평가는 후하지 않습니까...일어나긴 할거같...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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