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7일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일어난 날입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로 같은 날 이슬람 정당 출신 대통령이 통치하는 2022년의 프랑스를 묘사한 미셸 우엘벡의 소설 <복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테러(로 인한 친구의 사망으)로 우엘벡은 소설 홍보 활동을 중단했으며, 소설의 문제적 내용으로 인해 프랑스 사회에 논란이 벌어지게 됩니다. 막상 읽어본 결과 소재가 자극적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을 뿐 이전의 그에 비해선 많이 기력이 쇠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립자>로 대표되는, 초기의 우엘벡은 서구 사회 바깥의 단독자로서 그것을 공격하고 논란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허나 <지도와 영토>에서 그랬고 <복종>에 이르러 공격성은 줄어가고 우울감은 더욱 커졌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물론 그와 별개로 <복종>은 난해하지도 않고, 생각할만한 거리를 던져주는 충분히 좋은 소설입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시간이 흐르며 그러한 우울감을 겪어가고 있으니까요. 물론 50대인 우엘벡 본인에 비견할만하겠냐마는.
다음은 소설 내용 요약과 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중간의 이탤릭체는 소설 인용부분입니다. 페이지가 정확하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2022년,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IS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의 전복이 아니라 그들의 방식을 명백히 거부하는, 온건하고 민주주의의 룰을 따르는 합법적인 이슬람 정당이 (아마도) 공정한 선거결과에 따라 이룩해낸 결과였죠.
지속적인 우경화 현상을 겪고 있는 프랑스는 마침내 극우파 국민전선이 지지율 1위의 정당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을 전통적 좌파인 사회당과 사회 구석구석을 훑으며 기존 이슬람의 극단성을 탈피한 모습으로 다양한 집단에서 지지를 얻는 이슬람박애당이 양분합니다. 국민전선은 여유롭게 결선투표에 올라서고, 이슬람박애당이 사회당을 근소한 차로 제치고 2위로 오르게 됩니다. 바야흐로 프랑스 국민에게 극우파냐 이슬람이냐 하는 파국적인 선택지만이 남게 됩니다.
사회당과 좌파 언론에게 국민전선의 승리보다 두려운 건 없었기에, 사회당은 다른 정당이나 다른 종교 등에 훨씬 온화한 제스처를 보이는 이슬람박애당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이슬람박애당은 거의 모든 방면에서 사회당의 의견을 받아들이지만, 단 한 가지 교육, 그러니까 정교일치 교육의 실시만큼은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극우파와의 내전의 전운이 감돌자 결국 사회당은 정교분리 교육과 정교일치 교육을 따로 실시하자는 이슬람박애당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 이슬람 학교에 엄청난 자금이 쏟아 부어져 양 교육 간의 질적 격차가 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고, 그러면 부모들이 자녀를 어느 학교에 보낼 지도 당연한 일이었죠.
“이슬람박애당은 특수한 정당입니다. (중략)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인구, 그리고 교육입니다. 인구를 구성하는 하위 집단은 출산율을 최대한 높여 자기들의 가치를 계승하는 게 승리하는 거예요. (중략) 경제니 지정학이니 하는 것들은 신기루일 뿐이에요. (p.99-102 어딘가)
무엇보다 무슬림의 진짜 적,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대상은 가톨릭이 아니라, 현세주의, 정교분리 원칙, 무신론적 유물론이거든요.“ (p.186-189 어딘가)
“처음엔 국민전선이 우파 대중운동연합과 동맹을 맺고 정부 관료 다수와 연합하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그러다 점차 세를 불리기 시작했고 여론조사에서도 지지도가 상승했죠. 그러자 대중운동연합이 겁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전선의 포퓰리즘이나 미심쩍은 파시즘 때문은 아닙니다. (중략) 대중운동연합은 동맹관계에서 현재 전혀 열세가 아님에도, 만일 동맹에 동의한다면 자기들이 상대에게 흡수되고 궤멸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겁니다. 게다가 유럽이 있고요, 사실 이 부분이 근본적인 지점이죠. 대중운동연합이나 사회당이나 할 것 없이 진짜 목표는 프랑스의 종말, 즉 유럽연방에 통합되는 것이거든요. 그들이 공개적으로 반유럽 노선을 표방하는 정당과 연합한다면 유럽에 대한 자기들의 입장을 고수할 수 없을 것이고 동맹관계는 얼마 못가 물거품이 되겠죠.
사회당 내부의 반인종주의 세력이 정교분리 세력을 누르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그들이 극한의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고 진퇴양난의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여전히 이민자들을 끌어안는 사회 통합과 거리가 멀고 교육은 조금도 중요하게 다뤄본 적이 없는 대중운동연합에 덜 힘들어요.” (p.174-177 어딘가)
더욱 몰락했지만 여전히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정통 우파 역시도 이슬람박애당에 협조했는데, 이는 극우파가 주장하는 반유럽노선은 통합 유럽을 지향하는 정통 우파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사실 이슬람 정당과 정통 우파가 정책적으로 충돌하는 부분이 의외로 사회당보다도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이슬람은 승리합니다. 그리고 신임 대통령이 제안한 가정의 복귀, 즉 가부장제와 반자본주의식 분배주의는 대중의 큰 지지를 받고, 일부다처제를 비롯한 이슬람식 문화 또한 어떠한 저항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집니다. 내전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초기엔 직업 활동을 전면적으로 중단했을 경우에 한해 가족수당을 지급한다는 조건 때문에 좌파의 원성을 샀으나, 실업률이 대폭 감소하자 원성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국가예산 적자도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가족수당 인상이 교육예산―앞선 정부에서는 단연 우선시하던 예산이었다―의 준엄한 삭감으로 상쇄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육제도에서는 의무교육이 초등교육에서―즉 거의 12세에서―멈추었다. 졸업증명서 제도도 부활시켰다. 중등교육부터는 의무교육이 아닌 이상, 이제는 시험이 아니라 졸업장이 교육과정을 인정하는 일반적 수단이 되었다. 다음으로 수공업 전문교육이 장려되었고, 고등교육의 경제적 부담은 철저히 개인의 몫이 되었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가정에 본래의 자리와 존엄성을 돌려주는 것”에 목적이 있는 이 모든 개혁은 공화국의 새로운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총리가 공동연설을 통해 선언했다.‘ (p.242-243)
‘분배주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시에 배제하고 국가 자본주의라는 ‘제 3의 길’을 지향한다. 기본적 사상은 자본과 노동의 분리를 없애는 것으로, 분배주의에 따른 표준적인 경제 형태는 가족기업이었다. 생산 품목에 따라 보다 광범위한 인원이 필요한 경우는 모든 노동자들이 기업의 주주이자 경영의 공동책임자가 되어야 했다.
대통령은 나중에 분배주의가 이슬람의 가르침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밝혔다. (중략) 과연 새로운 프랑스 정부의 주요 정책은 한편으로는 거대 기업들에게 국가적 지원을 전면 중단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공예 장인들과 자영업자들에게 유리한 세제를 채택하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대번에 대중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p.245-246)
주인공 프랑수아는 더 이상 학문적 지향점이 없는, 권태와 고독에 빠진 채 오직 성욕만이 그를 위로하는 중년의 문학 교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도 이슬람을 약간 거북하게 느끼고 있으나 어떤 확고한 종교적(기독교 혹은 무신론) 신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죠. 그는 무신론자라고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종교를 멀게 느끼고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에선 무언가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애정생활도 끝난 처지인 나는 무엇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혹시 와인 수업을 듣거나, 모형 비행기라도 수집해야 할 것인가?’(p.42)
‘사실 내겐 즐거움의 원천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이 성적 쾌락 외에 다른 즐거움은 없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지적인 삶에 대한 나의 관심은 현저히 감소했다. 사회적 삶도 육체적 삶 못지않게 거의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잘 것 없는 성가신 일들의 연속이랄까.’(p.122-123)
“총장님은…… 총장님은 제가 이슬람으로 개종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중략) 선생님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잖습니까? 그랬다면 장애가 될 수 있었겠지요…… 그렇다고 진정한 무신론자도 아닐 것 같고요, 진짜 무신론자는 극히 드물죠.”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 외려 무신론이 서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만.”
“제 생각에 그건 피상적인 것일 뿐입니다. 제가 만난 진짜 무신론자들은 ‘혁명가들’이 유일합니다. 그들은 신의 부재를 냉담하게 목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하일 바쿠닌 식으로 신의 존재를 아예 거부해요.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신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라고요.” (p.303-308 어딘가)
‘확실히 단순한 생의 의지만으로는 평균 서구인의 삶에 점철된 고통과 근심의 총체에 저항하는 것이 내게는 역부족이었다. 나로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까.’ (p.251-252 어딘가)
‘나는 난생처음 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주를 창조하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일종의 창조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나의 첫 반응은 명확했다. 한마디로, 공포였다.’ (p.320)
그는 이슬람 정당이 정권을 잡으며 소르본 대학이 이슬람화하는 바람에 교수직을 잃지만, 이내 총장의 요청과 선교에 의해 결국 개종과 동시에 이슬람식 가부장제를 받아들입니다. 애초에 그는 자유와 인간의 존엄이란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작중 계속해서 언급됩니다. 특정 집단에 대한 우월주의자라서라기보다, 그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런 그가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거북함을 극복하고, 끝내 신과 우주에 대한 공포를 인정하고 그 질서에 복종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자유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실제 우리 현대인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 저출산 현상은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 전반의 문제죠. 그리고 그 원인에는 여러 것들이 있지만, 여성의 지위 향상과 결혼에 대한 인식의 변화, 즉 개인/자유주의의 확산 역시 분명히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인구가 월등히 유지되는 개도국들의 경제적, 사회적 침투에 두려움을 느끼는 어느 나라 정부에서 출산율 증가를 위한 정책이 아무 실효를 거두지 못할 때, 너의 자유보다 집단의 생존이 우선이라며 가정의 수호자로서 여성의 각성을 촉구하고 비혼자나 딩크족을 질책하거나 멸시하고, 사회적/제도적으로 페널티를 부과하는 분위기가 결코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장담하지 못하겠네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며 여전히 부유한 유럽의 나라들이지만 그러한 번영의 흔적은 점차 사라져가고, 사람들은 권태에 빠지거나 혹은 그저 그냥 살아가죠. 종교, 그러니까 기독교는 문화와 생활양식으로 남아있을 뿐 사람들의 정신에 더 이상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그 자리는 견고하지 못한 무신론과, 성공과 소비에 대한 열망이 채웠습니다. 반면 이제 유럽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집단이 된 이슬람은 강력한 신앙적 기반으로 일치단결하기 쉬우며, 경제나 정치보다 (가부장적인) 가정의 유지와 인구의 확산, 그리고 가치를 계승할 교육에 더 큰 가치를 둡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가 현대화나 세속화가 되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슬람 국가 중 가장 세속화되었고, 아예 세속주의가 헌법에 명시된 터키조차도 최근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강하게 사회를 장악해나가고 있죠.
종교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것은 기독교의 이야기일 뿐, 현대적 가치와 자본주의 등에 별로 물들지 않은 이슬람은 여전히 강력한 종교적 동력이 있습니다. 신은 죽었다지만 현대인 모두가 그 자리를 무신론과 과학으로,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온전히 채운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은 죽었지만, (치워지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우엘벡 본인이 밝혔듯, 이 소설은 이슬람 혐오주의 작품이 아닙니다. 이슬람교를 등장인물의 표현을 통해 나름대로 분석하지만, 다른 어떤 가치와 대비해 이슬람을 까내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엘벡은 자유의 투사가 되고자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이슬람에 정복된 사회 자체보다도, ‘한 사회가 자유를 향한 투쟁의 전통과 작별하며 자발적으로 도달한 자포자기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데어 슈피겔」지 비평 발췌) 이는 이슬람 정당이 최종적으로 마주한 상대가 전통적인 좌파나 우파가 아닌 국민전선, 즉 극우파라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극우파와 이슬람은 서로를 혐오하고 있다는 것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대부분의 쟁점에서 공통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요컨대 반현대적 이슬람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극우파의 승리 또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인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 초중반에 내전에 대한 암시가 있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극우파는 힘을 잃고 소멸되거나 이슬람 사회에 편입되죠. 정통 우파는 처음부터 극우파에 대부분의 힘을 뺏긴 것으로 나오며, 좌파 정당과 언론은 이슬람보다 극우파의 집권을 두려워하기에 이슬람을, 특히 온건한 얼굴을 한 이슬람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무신론과 휴머니즘의 거부, 여성의 절대적 복종, 가부장제로의 복귀. 그들의 쟁점은 모든 면에서 정확하게 일치했다.’ (p.335-336 어딘가)
‘그의 태생적 반인종주의에 발목이 잡힌 좌파는 처음부터 그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고, 심지어 그를 들먹거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다.’ (p.184-186 어딘가)
우엘벡은 정치적 올바름과는 거리가 먼 소설가이며, 그가 묘사한 이슬람과 정치 집단은 분명히 어느 정도 편견이 있습니다. 2022년이라는 너무 이른 미래를 작중 시점으로 설정해 여론의 변화가 지나치게 급격하고 도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도 분명히 듭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성보다는 그가 묘사한 디스토피아 자체, 그리고 그에 빠져드는 사람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주인공 프랑수아와 혐오주의, 고립주의에 기반을 둔 극우파는 모두 길을 잃은 현대 서구인을 상징합니다. 기댈 곳을 잃고 고독해지거나, 그렇게 파편화된 자들이 모여 증오의 에너지를 발산하거나. 작중 묘사된 프랑스처럼 이슬람(내지는 이민자)이나 극우파의 위협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길을 잃고 앞만 본 채 하염없이 걷는 사람들, 잃어버린 것들을 혐오주의로 대체하는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죠. 우리 중 누구라도 그럴 수 있으며, 어쩌면 이미 어느 정도 그러한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권위에의 복종과 자유로부터의 도피, 어떤 이에게는 인식되지조차 못한 채 커져가는 그 가능성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건 꽤나 슬픈 일이네요.
같이 읽으면 좋은 서평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3982 혐오주의 소설이라 하지 마세요...
http://www.huffingtonpost.kr/junga-hwang/story_b_8660658.html 이미 복종한 자는 더더욱 복종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