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배기량 오토바이 면허를 따고, 생산된지 20년이 좀 넘은 600cc 바이크를 할부로 지르고, 뭐 재밌는 거 없나 하고 바이크를 검색어로 인터넷을 뒤지다 알게 된 미드, 썬즈 오브 아나키다. 바이크가 나오는 미드라니. 한국에서의 낮은 인지도와 달리 미국에서의 시청률은 꽤 기록적이었고(중간에 어떤 시즌의 시청률이 무슨 기록을 깼다고 한다), 나름대로 평가도 좋았다(중간에 어떤 시즌이 무슨 상을 받았다). 내용도 흥미로워 보였다. 봐야지, 하고 보았다가 참 뭐랄까 기분이 참 묘해졌다. 이게 막장드라마의 묘미인가.
썬즈 오브 아나키는 기본적으로 '바이커 갱단'의 이야기다. 미국 폭주적 형님들. 한껏 쇼바를 올린 오토바이를 타고 한강변을 질주하는 청년들이 아니라, 가죽 조끼를 입고 할리 데이비슨을 타며 마약도 팔고 총도 팔고 상대 클럽하우스에 총질도 하고 그런 아재들. 바이크만 나오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마약과 총이 나오는 이야기 쪽이 좀 더 재미있을 것이다. 시놉시스도 대충 흥미롭다.
주인공 잭슨 텔러는 캘리포니아를 기반으로 한 바이커 갱단 <썬즈 오브 아나키>의 창립자의 아들이자 부두목이다. 창립자이자 초대 두목이자 주인공의 친아버지인 존 텔러는 오래전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자 조직의 부두목이었던 클레이 모로우와 결혼했고, 클레이 모로우는 갱단의 보스가 된다.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친어머니와, 역시 자신을 아들로서, 그리고 2인자로서 챙겨주는 자상한 새아버지 아래서 갱단의 훌륭항 부두목으로 커가는 주인공은 우연히 친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발견한다.
친아버지는 '썬즈 오브 아나키'가 실패한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월남전에 참전해 전쟁의 참혹함을 느끼며 무정부주의자가 된 존 텔러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자유로운 모터싸이클 동호회인 썬즈 오브 아나키를 창립했었다. 그러나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만든 '자유로운 바이커 모임'도 결국 다른 바이커 갱과 다를 바 없이 총기밀매로 연명하는 갱단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잘못을 고쳐나가려 하다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었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일기를 읽어가며,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품으며, 아버지의 뜻을 되새기며 조직을 다시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여러 사건이 일어난다.
뻔한 이야기지만 '바이커 갱단으로서의 삶'에 만족한 새아버지와 엄마가 짜고 친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었고, 주인공은 복수와 혁명을 꿈꾼다. 여러가지로 햄릿과 비슷한 서사구조이며, 제작자도 이를 인정했다. 여기까지는 서사도 좋고 연출도 재밌다.
중후반은 음. 아. 장점만 나열해보자면 일단 전체적인 사건의 전개 방식이 꽤나 재밌다. 언제나 외부의 큰 사건과 내부의 큰 사건이 펑펑 터지면서 그 사건들이 물고 물리고, 사람들은 속고 속이며 총을 쏘고 총을 맞으며 점점 나락과 막장을 향해 달려간다. 사소한 사고가 점점 큰 사고가 되고, 고뇌하던 주인공은 더 고뇌할 일이 생긴다. 복수 대신 계산기를 두드리는 시간이 늘어나고. 언제나 겨우 어거지로 일을 마무리하면 어이쿠 또 새로운 큰 사건이 터진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전개도 스피디한 편이고, 이야기가 늘어지면 바이크가 빠르게 화면을 질주한다. 그리고 주인공-양아버지-어머니 구도에 입각한 중심 서사는 상당히 잘 짜여져 있다. 잘 생긴 남자들도 많이 나오고, 연기력도 전체적으로 다들 상당히 좋은 편이다(앞서 본 두 편의 미드였던 멘탈리스트/하우스보다는 확실히).
장점은 이쯤하고. 단점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다. 일단 장르변경이 굉장하다. 장르가 바뀌는 속도는 서사의 속도나 바이크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햄릿 -> 조폭물 -> 테이큰 -> 정치스릴러 -> 사랑과 전쟁 -> 아내의 유혹으로 장르가 진화한다. 분명히 처음에 꽤 매력적인 인물들은 실존적으로 고뇌하는 인간 -> 사기꾼 -> 총기난사범 -> 크큭 흑화한다or사랑의 힘을 믿어요의 테크를 밟는다. 첫 시즌과 중간 시즌과 마지막 시즌의 장르와 인물이 완전히 따로 논다. 첫 시즌에서 '하드보일드한 마초 세계의, 사람 한 명 죽이는 데도 고뇌가 필요한 이상주의자 햄릿'이었던 주인공은 마지막 시즌에서 유쾌하게 웃으며 AK를 난사한다. 인물과 장르는 물론 변할 수 있다. 사건의 개연성을 통해 묘사하든 인물의 내적 고뇌를 잘 풀어내든 이 변화를 묘사하는 데에는 뭐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폭주하는 미드에 그런 건 없다. 보다 구체적으로, 스포를 해가며 이야기를 더 해 보자.
-
피와 총과 기름과 바이크와 마약이 난무하는 하드보일드한 마초월드의 햄릿 스토리는 재미가 없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햄릿 스토리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자경단 짱짱맨 정부 뻐큐 우리마을은 우리 조폭이 지킨다 신토불이 신토불이 신토불이야~' 하는 조폭물로 변했다가(그래도 여기까지는 총질하는 재미가 있다), 갑자기 IRA(그 테러리스트 집단 맞다)가 주인공의 아들을 유괴하고 장르는 테이큰으로 변한다. 캘리포니아의 바이커 갱단 부두목이 벨파스트에 가서 IRA가 납치한 아들을 찾는 이야기가 재미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가장 재미없는 시즌이다). IRA 간부들은 전부 아일랜드 사투리를 넘어 거의 드워프어를 쓴다.
납치된 아들을 찾아오는 휴먼 드라마 다음에는 사기꾼 스토리 내지는 정치 스릴러가 펼쳐진다. 신의 탑이나 캐치 미 이프 유 캔에 비견될 빈도로 사기와 배반과 통수가 판친다. 라이벌 갱. 옆동네 갱. 지역 정치인. 라이벌 갱2. 갱단 내의 누군가. 중앙 정부 요원. 동네 보안관. 중앙 정부 요원2가 모두 모여 거짓말 경진대회를 하다가 수틀리면 총을 쏜다. 나중에 가면 대체 누가 누구를 왜 속이는지 헷갈리는 지경이 된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아버지의 복수에 성공, 양아버지를 처단한다. 자, 이제부터 본격 막장물의 시작이다.
아들은 자기 친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양아버지를 죽인다. 엄마는 자기 아들을 지키기 위해(여느 막장드라마가 그렇듯이 꽤 복잡한 사연이 있다) 며느리를 죽인다. 아들은 자기 와이프를 죽인 엄마를 죽이러 가지만 주저하고,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해야 할 일을 하거라 아들아'하고 아들한테 총을 쏘라고 하고 죽는다. 사랑과 전쟁 정도는 순애물로 만드는 극한의 전개. 아니, 사랑과 전개는 그래도 개연성이라도 충분한데 썬즈 오브 아나키의 후반부는 뭐랄까 아오 그냥 뭔가 보고 있으면 머리가 아프다. 참고로 중심 서사만 막장드라마가 아니다. 서브플롯도 막장이고, 개연성은 증발한지 오래다.
서사의 전개 뿐만 아니라 연출도 점점 황당해진다. 아나키즘 평화 자유 공동체 오오 하던 주인공의 사상은 갑자기 '그러니까 우리마을은 우리가 총들고 지켜야지'의 자경단주의가 되고, 흑인 바이커 갱이나 라틴 바이커 갱이나 백인우월주의자 바이커 갱들은 마약 밀매와 거리 매춘업이나 하는 아주 질나쁜 놈들이지만 주인공 갱들은 '총기 밀매'와 '합법적인 고급 성매매 산업'같은 신사적인 일만 하는 훌륭한 갱단으로 묘사된다. 나오는 여자들은 죄다 막장드라마의 주연급이고, 고뇌하다가 총질하다가 고뇌하다가 총질하다가를 반복하는 하드보일드 마초들은 상남2인조와 윈드브레이커에 등장하는 중학생들로 퇴화해간다.
인물들은 점점 단조로워진다. 멍청하지만 착한, 나약하지만 가늘게 끈질긴 주인공의 첫 와이프는 나중에 거의 성녀가 되고, 가족과 욕망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던 엄마는 그냥 미친년이 된다. 첫 시즌에서 사람 한 명 죽이는 데 몇시간씩 고민하던 우리의 주인공은 유쾌하게 미소지으며 AK를 난사한다. 아니 그래, 인물은 사건을 겪으며 과격해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인물의 변화가 서사와 연출로 커버가 안 되는 수준의 '극단적인 전개와 묘사'를 통해 제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스트 씬은 최악을 넘어 죄악의 영역에 가깝다.
-
이거저거 깠지만 막장물/마초물을 좋아하는 남자들에게는 꽤 어필할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닌가 싶다. 일단 나도 계속 욕하면서 끝까지 봤으니까. 아, 흥미로운 평으로는 이런 게 있었다. '섹스 앤 더 시티를 재밌게 볼 수 있는 남자의 수보다 썬즈 오브 아나키를 재밌게 볼 수 있는 여자의 수가 적을 것이다' 어느 정도 동의할 만한 평이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첨에 볼땐 확실히 참을성을 필요로 했는데,
고단한 왕위계승에 대한 우화로 읽히길레 한참 재밌게 봤다가
시즌 7부터는 도저히 너무 나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관뒀네요.
결국 악마랑 싸우다보면 자신도 악마가 된다는 이야기 같던데,, 너무 늘어지더라구요.
그래도 오피는 참 멋있었다는..
*덧, 헥스밤님 인생미드 여쭤봐도 될까요? 전 좀 빡쎄고 진중한 장르를 좋아해서,,
제 인생미드는 보드워크 엠파이어(단연코!), 보스턴리걸, 식스핏언더, 하우스오브카드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드라마 끈이 짧습니다. 완주한 드라마는 멘탈리스트/하우스밖에 없고
한시즌 이상 본 드라마도 명탐정 몽크, 사랑과 전쟁, 덱스터, 왕좌의 게임, 섹스앤더시티, 배갤정도...
두 화 이상 본 드라마도 열 편이 넘지 않는 것 같습니다..
-
그중에 제일 재밌게 본 건 멘탈리스트입니다. 가볍고 흥겨운데 서사 전체의 완성도도 좋고
(물론 중반 시즌의 루즈함은 정말로 버티기 힘듭니다) 후반-라스트 에피소드의 <완성된 서사>는 정말 좋습니다.
전에 이에 대해서 리뷰도 쓴 기억이 있습니다.
https://pgr21.net/pb/pb.php?id=freedom&no=53577
덧글을 봐도 후반부-라스트로 이어지는 부분은 다른 분들도 재밌게 봐주신 듯 합니다.
-
보스턴리걸, 식스핏언더, 하오카 전부 자주 추천받고 꼭 보고픈 미드인데 아직 한 편도 못봤씁니다 흐..
소프라노스는 한때 재밌게 봤는데 어느 순간 빤한 배신과 통수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휙휙 넘겨가며 보다 말았던 기억이 납니다. 매드맨 역시 중간에 한번 타이밍을 놓치고 나니 다시 시작할 엄두가 잘 안 나던.. 의외로 위기의 주부들을 엄청 감명깊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
전 위에 추천되어있는 나머지는 다 봤는데 선즈 오브 아나키만 못봤습니다.
제 취향이 아닌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손이 안가더군요. 브레이킹 배드도 비슷했는데 이건 하도 추천들을 많이 해서 결국 완주는 했습니다만...
이런 종류로는 역시 소프라노스가 원탑이고 보드워크 엠파이어나 와이어정도를 재밌게 봤네요...
제 미드 탑텐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 웨스트윙/ 엑스파일/ 프렌즈/ NCIS/ 빅뱅이론/ 보스턴 리갈/ 왕좌의 게임/ 프레지어/ 소프라노스정도겠네요.
이거 말고도 재밌게 본 드라마들이 많지만 다 쓰려면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