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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9/22 00:27:06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그 때 그 날 - 과거 (3) 우리 세자가 달라졌어요
1. 옥추경
혜경궁 홍씨는 세자의 마누라입니다. 에 당연한 말이죠. 아무리 수십년 뒤에 썼다 한들 세자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의 회고록이죠. 그래서 한중록의 가치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는 정말 어렵습니다. 실록과 확실히 대비되는 모순이야 거의 홍봉한에 관련돼 있는 거라서 왜곡이겠거니 하겠지만 세자에 대한 것은 믿지 않으면 뭘 믿느냐 이런 상황이 되거든요. 글 속에서 모순을 잡는다 한들, 누구의 기억이 그렇게 허점 하나 없이 완벽하고 말빨이 그렇게 좋겠습니까. 그렇다고 다 믿자니 이건... 씁쓸하네요.
넋두리 한 번 하고 시작합니다. 세자의 병이 어느 정도였냐구요? 지금부터 보시죠.
"경모궁께서는 그 병환 아니 나신 때는 인효가 넘치셔서 거룩하심이 미진한(부족한) 곳이 없으시다가, 병환이 나시면 두 사람인 듯 달라지니, 어찌 이상하고 슬프지 않으리오."
그녀는 세자가 잡설을 많이 봤다고 합니다. 소설부터 도교 관련 서적들, 조선시대에는 "잡학"으로 분류되던 것이죠. 그 중 세자가 주목한 것은 옥추경이었습니다. "공부하면 귀신을 부릴 수 있다"는 이유라고 하죠. 그런데... 역효과만 났습니다.
"무서워, 무서워"
혜경궁은 세자가 옥추경을 본 이후로 밤마다 무서워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감히 옥추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 하게 했다고 하고, 단옷날에 임금이 신하들에게 주는 옥추단이라는 약도 무서워서 받지 못 했다고 하죠. 雷(우뢰), 霹(벽력) 같은 글자도 보지 못 했다고 합니다. 특히 천둥이 칠 때마다 "귀를 막고 엎드렸다가 다 그친 후에야 일어났다"고 하고 있죠. 그가 두려워했던 존재는 뇌성보화천존, 천둥을 부리는 신이었죠. 봉신연의에서도 나옵니다. 글쎄요... 안 그래도 잡학을 좋아했는데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더 집중하다가 더 무서워하게 됐다고 하면 될까요?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것 같은 모습이었죠.
만화 봉신연의에서 태공망이랑 절친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혜경궁은 이례적으로 그 시기를 적고 있습니다. 워낙에 기억에 남은 것 같습니다. 그 때는 1752년 겨울, 저번 편 마지막에 실었던, 영조가 선위소동을 벌인 바로 그 시기입니다. 영조 28년이었죠.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 못 하는 울화증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더위까지 먹으니, 막 입시(임금을 뵘)을 끝내고 나오는데, 울화가 극하여 미친 듯이 괴롭습니다. 이 병증은 의관들과 상의할 수도 없습니다. 몰래 약을 지어 보내주실 수 있는지요? 일이 번거롭게 되면 좋지 않으니 조용히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세자가 홍봉한에게 보냈다는 편지입니다. 그 때를 53년, 혹은 54년으로 보고 있다는군요. 그리고 실록에서 그게 정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영조 31년, 1755년이었습니다. 이 때에 이르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의관들에게도 말했거나,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고 봐야겠죠.
2. 점입가경
이외에도 혜경궁은 여러 가지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자가 양제라는 여인을 가까이 했는데, 53년에 애가 들어섭니다. 보통 세자 때는 공부에 집중하느라 후궁을 들이지 않는다고 하죠. 예외가 [양녕대군] 과 문종이라는군요. 이 중 문종은 애가 하도 없어서 그랬던 거니까 딱 한 명밖에 남지 않습니다. 자기도 그걸 알았는지 낙태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54년 2월에 나왔죠. 이후에도 계속 이름이 나오게 되는 은언군 이인입니다. 이 때 영조의 꾸중은 평소보다 심했다고 하며, 영조는 혜경궁에게까지 화살을 돌려 "남들 다 하는 투기도 안 하냐?"고 꾸중했다고 합니다. 혜경궁은 참 억울해 했죠. 그나마 혜경궁이 딸을 하나 더 낳고, 55년에는 양제에게서 (숙빈 임씨가 됩니다) 둘째가 태어나니 그나마 그 때는 꾸중이 적어졌다고 하네요.
뭐 이것도 끝이 아니라서 54년에는 또 문제가 벌어집니다. 대사간 신위가 상소를 올렸는데, 거기서 영조가 딴지를 걸죠.
공평하고 크게 중정해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나를 공정하지 않다 한 것이다.”
하고, 불가하지 않을 듯하다는 말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신위가 이미 원량(세자)에게 소장을 올렸으면 아들을 대하여 아버지를 말한 것인데, 어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가?” (30년 12월 2일)
또 어떻게 해야 될까요? 땅바닥에 드러누워야죠. -_-;
외적으로도 일은 많았습니다. 아니, 영조의 입장에서보면 이 일은 자기가 그 동안 이루어 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일이었죠.
경종 때 소론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노론을 죽이려 달려들던 준론, 이른바 준소와 노론에 그래도 관대했던 완론, 완소-_-?였죠. 이들의 중심에는 김일경과 목호룡이 있었습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후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이지만 계속되는 처벌을 요구한 노론도 숙청해 버립니다. 정미환국입니다. 탕평의 화려한 시작이었습니다. 소론을 없애려 한다면 노론을 없애겠다는 강력한 의지였죠. 이 직후 일어난 이인좌의 난 역시 이 때 소론이 중심이 되면서 유명무실해졌고, 배신자가 속출하면서 그나마 쉽게 끌 수 있었죠. 아무래도 친노론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지만, 영조는 참 악착같이 탕평을 지켜냈습니다.
그런데... 집권 노론은 물론 소론 준론들 역시 그럴 마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영조는 정말 오래 참아 왔습니다. 세제 때부터 소론은 그를 죽이려 했고, 효장 세자를 독살하고 궁궐에 부를 지른 사건 역시 배후엔 소론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참았습니다. 이인좌의 난이 있었어도, 심심하면 벽서(벽에 익명의 글을 올린 것)가 붙어도 참았죠.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순 없었던 모양입니다.
영조 31년, 1755년 나주에 또 벽서가 붙습니다. 배후를 찾아보니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던 윤취상의 아들 윤지, 그리고 그 추모자들의 짓이었죠. 노론은 당연히 강력한 처벌을 원했고, 영조도 결국 따릅니다.
"이제야 지난 날의 형정이 너무 너그러웠음을 깨닫겠다" (31년 3월 2일)
영조의 탕평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건은 이걸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해 5월 2일, 이번일 (바로 위의 일)로 역적을 토벌했으니 기념으로 과거를 치르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심정연이란 자의 답안지에 뭔가 깨알같은 글씨가 있었죠. 실록에는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쓰지 않고 있습니다만... 역적에 관련된 거라면 간단하죠.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 그는 제대로 뒤를 이은 게 아니라 찬탈자일 뿐이라는 거였습니다. 곧바로 심정연을 불러서 국문하니 이렇게 말 했습니다.
"이는 바로 신의 일생 동안의 마음이기 때문에 과장(과거시험장)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써 두었습니다."
"익명서는 과연 신이 만들었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바로 신의 원수입니다. 신은 심성연과 심익연의 아우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훈척인 사람과 임금의 권우를 받는 사람은 모두 미워하여 먼저 제거하고자 하여 이처럼 음참하고 망측한 계책을 낸 것입니다."
그냥 "나 죽여주소"죠. 그러면서 그는 너무도 태연하게 자신과 뜻을 함께 한 이름들을 열거했습니다.
"흉서는 심정연이 짓고 신이 썼습니다" (윤혜)
"심정연과 윤혜가 나라를 원망하여 반역을 하였는데 신이 나라를 원망하는 놈들과 서로 친하여 흉언에 참여하였으니, 이는 신이 죽을 죄를 지은 것입니다." (강몽협)
"신이 심정연·윤혜 등과 함께 주무하여 서로 결탁하고 함께 흉모를 하였고, 또 흉언에 참여하였습니다"
"심정연과 윤혜가 함께 흉서를 만들었는데, 심정연이 짓고 윤혜가 쓴 것입니다. 심정연과 윤혜가 항상 말하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서 벼슬을 하지 못하니,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번 과거에 심정연이 흉서를 투서해 그 뜻을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유명두)
"성상께서 이미 이처럼 의심하시니, 신은 자복을 청합니다. 신은 갑진년 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 (신치운)
"신은 심정연과 서로 알아서 함께 흉서를 만들었는데, 흉서 가운데 제일 부도(심한)한 말이 신에게서 나왔으니, 실로 신이 주장한 것입니다" (김도성)
너무나도 거리낌 없이 "내가 역적이요, 나 죽여주쇼"라고 하는 말들... 박시백 화백은 이것을 "집단 자결을 하듯"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때 죽은 이만 200여명, 이 중 김일경의 종손만 해도 11명이나 됐다고 합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소론 준론은 진심으로 영조를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영조 후반에 가면 노론 천하가 되지만,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고 할 만 하죠. 이런 과정 속에서도 영조는 다른 소론들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사건 확대를 막았고, 남은 소론들 역시 엎드려 빌었죠. 이를테면 박문수 역시 이 과정에서 일을 당할 뻔 하지만 영조는 그를 끝내 지켜줍니다. 박문수는 이후 세수도 하지 않고 빗질도 하지 않으며 속죄하며 살았다고 하죠.
뭔가 또 길어졌군요. 이 부분, 경종-영조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번외편으로 써야 될 것 같네요. 저 소론 준론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김일경, 목호룡이 신축, 임인년에 노론을 숙청한 사건에서 나온 것이 바로 신임 의리입니다. 그들은 영조까지도 축출하려 했고, 그에 맞서서 영조와 노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이 바로 신임 의리죠.
자, 이런 상황에서 세자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노론이 세자를 죽이려 했다는 이유 중 큰 게 여기서 나옵니다. 실제 실록에서도 보면 "소론의 누구를 벌 주라"는 요구에 세자는 늘 "불허"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친소론적인 모습 때문에 노론의 미움을 샀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생각은 곧 영조의 생각이었습니다. 간단한 일 하나도 크게 혼 나던 세자였습니다. 이런 정치적인 큰 사건에서 영조의 마음에서 벗어났다면 무사했을까요? 이렇게 분노하는 상황에서조차도 소론을 지키려 했던 것이 영조였습니다. 세자의 말은 늘 영조의 말이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세자가 친소론 친노론 이런 걸 과연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도 궁금해지죠. 세자의 병이 아예 세상으로 드러난 것이 이 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혜경궁의 말대로 [정말 신기하게 영조 앞에서는 그런 모습이 나오지 않은] 게 세자였죠. 악착같이 싸우고 있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친소론이라는 모습을 내보일 수조차 없었죠.
+) 이런 사건들 중에 보면 김일경이 "영조를 나리라고 했고 자신은 臣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육신 패러디죠.
3. 일탈의 길로
이 기간 세자의 모습은 그리 다를 게 없었습니다. 영조는 여전히 꾸중했고, 칭찬했고, 충고했습니다. 세자는 과묵하게 일 했죠.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영조가 이리저리 친국하며 화내는 동안 세자는 "알았다" "안 된다"만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이 즈음에 확실히 뭔가 달라지긴 했습니다. 한중록에서는 그 일에 대해 아주 자세히 적고 있죠. 일단 실록에서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내가 동궁으로 있을 때에는 거의 휴식할 겨를이 없었고, 또 두 연강을 폐한 적이 없었다. 옛날 황형(경종)께서 하루 안에 공사를 가지고 소대하는 것이 두세 차례에 이르렀고, 그렇지 않은 날이 없었음은 네가 어찌 들어서 알지 못하겠는가"
"오늘 이후에는 매월 초1일에 쓰기 시작하여 그믐날에 이르기까지 어느 날에는 소대하였고, 어느 날에는 차대하였으며, 어느 날에는 서연하고 어느 날에는 공사를 보았으며, 어느 날에는 무슨 책 무슨 편을 읽었으며, 어느 날은 하지 않았는지와 강관 및 강생을 열서하여 내가 볼 수 있도록 대비하라" (31년 9월 10일)
간단히 두 글자로, 일기 쓰라는 거죠. 자기가 검사하겠다구요.
에 뭐 이런 부분도 있긴 합니다.
"이제 원량의 자신을 책망하는 하령을 보았다. 이것이 어찌 부덕한 내가 교훈한 소치이겠는가? 실로 저 하늘에 계신 선조의 영혼이 종팽을 도우시어 그런 것이다. 아! 원량이 만약 오늘의 마음을 채워 나간다면 우리 나라가 거의 잘 다스려지게 될 것이다. 아! 대소 신공들은 내 원량의 이 뜻을 본받아 지성으로 보도하라" (32년 5월 8일)
잘못한 걸 알았으니 됐다 이런 거죠.
세자가 병이 있다는 말이 나온 이후, 이 병에 대한 말이 계속 나옵니다. 의관들에게 묻고, 대답하고, 제대로 못 한다고 자르고, 병 나아가니까 기뻐하고 이런 거였죠. 하지만... 뒤로 갈수록 나오는 건 서연에 대해서입니다. 워낙에 유별난 조선의 선비들인지라 "병 낫는데는 공부가 특효"라고 강요하기도 하고, 서연을 열라고 하는 게 몇 번이나 나옵니다. 위에 인용한 것 역시 서연을 제대로 열지 않으니 언제 뭘 했는지를 적어놓으라고 한 거였죠. 이쯤 되면 병은 핑계입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칭찬하는 모습 역시 나오지만, 세자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한중록에서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적고 있습니다. 나주 괘서 사건 때 한중록은 "부자 사이에 근심스런 일이 많았으니, 갑갑해 했던 일은 다 기록도 못 하겠다"고 적고 있습니다. 뭐 세자가 친소론이라서 영조가 싫어했다 이런 소설은 쓰지 말고, -_-; 그 중의 에피소드를 봅시다.
어느 날 세자는 어머니 선희궁의 병 때문에 갔다고 하는데, 영조는 그 때 화완옹주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 세자가 오는 것을 꺼려서 "빨리 가라"고 화를 냈다고 하죠. 이 때문에 세자는... "높은 창을 넘어" 처소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다 큰 세자가 아버지의 말에 겁에 질려 월담을 한 겁니다. 영조는 여기에 "딴 데 가지 말고 정치하는 방법이나 공부해라"고 했다고 하죠. 그래도 자기 엄마 병 때문에 간 거였습니다.
휴... -_-; 실록과 한중록의 간극을 좀 메워보자면 이렇죠. 영조는 세자가 여기저기 놀러다닌다고 생각했고, 한중록에서 "화완 옹주와 가까이 있는 게 싫어서" 내쫓은 게 아니라 그냥 돌아다니는 거 보고 공부나 하라고 한 거라구요. 이렇게 하면 좀 메꿔지죠? 아무튼 이 때 세자는 자살 소동도 벌입니다.
한중록에서는 영조 32년 설 때 영조가 존호를 받았는데,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에도 세자를 참석시키지 않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대리가 아니라도 이런 자리에 참석시키는 게 당연할 건데 말이죠. -_-a 이 무렵에는 세자 수업(서연)도 더 드물게 받았다고 하고 있구요. 실록의 뉘앙스가 꾀병이라면, 여기는 진짜 병이 심각해지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어딘가에 계속 숨고 싶어했습니다. 애용했던 곳은 취선당 밧소주방, 에 그러니까 잔치음식 만드는 곳이라는군요. 여기서 혼자 멍하니 있었나 봅니다. 그러다 걸리죠. 묘하게 위에서 인용한 32년 5월이었습니다. 이 날 영조가 왠일로 세자를 보러 갔는데, 하필 세수도 제대로 안 하고 있었다고 하죠. 그런데... 영조는 이런 세자의 모습을 보고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립니다.
"술 들인 이를 찾아내라"
당시 영조는 정말 중요한 (농사 중에 먹는 새참 때나 제사 때나 군사들 위로해줄 때나... 어라 예외가 너무 많잖아;;) 일 외에는 술을 먹는 걸 금지했습니다. 금주령이 정식으로 떨어진 상황이었죠. 안 그래도 술을 조심하라는 충고 역시 실록에서 볼 수 있구요. 이래놓고 자기도 몰래 먹었다는 의심이 드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만... 일단 넘기고, 이 때 영조는 세자가 술을 먹었다고 생각하고 누가 술을 줬는지 토해내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진짜 먹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죠. 혜경궁이 감싸기 위해서 적을 수 있으니까요) 어이 없는 말을 들은 세자는 제대로 변명도 못 했다고 합니다. 거기다 오죽 무서웠던 아버지의 말, 세자의 대답은 "먹었습니다" 였죠. 누가 주었냐고 하니 아무 이름이나 댔고, 영조는 심하게 꾸짖습니다. 이 때 세자를 모시던 최상궁이 자기가 더 억울했는지 "술냄새라도 나는지 맡아보세요"라고 하죠. 이 때의 풍경입니다. 감상하시죠
"먹고 아니 먹고 간에 내가 '먹었노라' 아뢰었으면 자네 감히 다른 말을 할까 싶은가, 물러가소"
자기 변명해주지 말라는 거죠. 하지만...
"야 이 xx야. 니가 내 앞에서 상궁을 꾸짖냐? 어른 앞에서는 개나 말도 꾸짖지 못 하는데 이게 말이 되냐?"
... 더 나열할 필요는 없겠네요. 세자는 "변명하기에 그랬다"면서 굽신굽신댔고, 다행히 일은 거기서 끝납니다. 술을 줬다고 한 해정이라는 궁녀는 귀양 가고 춘방관, 세자의 스승들을 불러 훈계했죠. 아랫사람은 고생한다고 이들은 세자에게 가서도 욕 먹습니다. 자기가 억울한데 도와주지 않았다는 거죠.
+) 이 때 욕 먹은 관원이 두 명이었는데 혜경궁은 한 명은 이름을 모른다고 적고 있습니다. 정병설 교수는 승정원일기에 김시묵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홍씨 가문과 친한 사람이라서 혜경궁이 일부러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고 추측하더군요.
한중록에서는 이렇게 관원들을 쫓아내다가 실수로 촛대를 건드려서 불이 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일에 아무도 대응을 못 했고, 혜경궁도 근처에 있던 세손만 데리고 도망가야 했죠. 세자가 이 때 불이 난 걸 몰랐던 건지, 아니면 정말 될 대로 되라였는지 불이 나든 말든 춘방관들을 쫓아가 욕 하다가 대신들을 만나서 또 욕 했다고 합니다. 기세 좋았죠. 문제는... 영조가 모를 리가요. 그리고 그가 나타나자 세자는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신나게 욕 먹고 돌아가는 길, 세자는 "아무리 해도 못 살겠다"고 외칩니다. 그리고 우물로 뛰어가죠.
에휴... 뭐 이런 일의 연속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지네요. 이것조차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세자의 일탈도, 영조의 꾸중도 더더욱 커져 갑니다. 정말 끝이 없었죠. 아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 경종-영조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한두편쯤 후에 따로 쓰겠습니다. 과거의 번외편이 될지 미래의 번외편이 될 지는 어느 쪽이 빠르냐에 따라 결정될 거 같네요 ( . .);
+) 빼기는 그래서 나주 고변 사건 넣었는데 역시 구성이 이상해졌네요. -_-a 이 때도 그렇게 열 받았던 영조가 (사실상 탕평이 끝난 거나 다름 없는데도) 탕평을 포기하지 않은 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얼마나 참고 얼마나 견뎌냈고, 얼마나 깊게 생각한 걸까요. 그리고... 아마 세자에게 한 것도 이렇게 정말 자기 생각대로 꾸준하게 밀어붙인 결과일 겁니다. 하아...
+) 뭔가 넣을 곳이 없어서 따로 씁니다만... 위에서 언급했듯 실록과 한중록이 다르면서도 시기가 희한하게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두 개를 엮어 본다면 세자가 자기 잘못을 아니까 기쁘다고 했던 실록의 기록은 겉으로는 세자가 서연을 자주 열지 않아서 그런 거지만 속으로는 저런 것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이후에 실록과 한중록이 결정적으로 다르지만 시기가 일치하는 부분이 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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