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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9/14 15:14:14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그 때 그 날 - 과거 (1) 아버지와 아들


▶◀ 고 최동원 선수의 명복을 빕니다. 좋은 데에서 편안히 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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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동
예, 전하. 지금 심정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죠.


"삼종(효현숙) 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에 배알할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영조 11년 1월 21일)

예, 잘 들었습니다. 제 점수는요... 는 아니고, 그의 탄생에 아버지 영조의 기쁨이 이러했습니다. 첫째가 죽고 난 뒤 그의 슬픔과, 현재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거였죠. 그는 태어난 바로 그 날 원자, 즉 첫째 아들로 봉해집니다. 임금이 늙어가는 상황에서 대를 이을 자식을 확실히 정한 거죠. 그는 백일 즈음 수두를 앓는데, 다행히 얼마 안 가서 낫습니다. 그 때의 풍경입니다.

"임금이 원자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원자가 충실하고 커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1년 4월 12일)

임금이 직접 아픈 자식을 안고 달래면서, 병이 나아 가는 것을 기뻐하는 모습, 여느 집안과 다를 바 없는 화목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애정은 계속 돼서 태어난 지 단 1년만에 그는 세자에 오릅니다. 보통 8살은 돼야 하는 것이었죠. 최연소 세자였던 겁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유달리 영특했습니다. 당연히 왕실은 물론 온 나라가 기뻐했죠. 몇 가지 에피소드들입니다.

(세자가 어린 나이에 글씨를 쓰는 데 익숙하게 힘을 넣어서 다들 감탄하며 세자가 쓴 글을 다들 돌려보았는데, 집안의 가보로 삼고 싶다고 달라고 하자 임금이 이를 옳다고 여기면서)
"지난번 부채를 보고서 잡으려고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내 손이 부채에 다쳤다.’고 했더니, 그뒤로는 부채를 보고서도 잡으려 하지 않았다" (12년 9월 25일)

"날씨가 화창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동궁의 성품이 서책을 좋아하고 자못 글자의 뜻을 아는 능력이 있다. 처음 문왕세자편을 배울 적에 ‘왕’ 자는 나를 가리켰고 ‘세자’ 자는 자신을 가리켰는데, 지식이 점점 통달하여져 가고 있다." (13년 1월 2일)

(세자가 책을 또랑또랑 읽고 천지왕춘이라는 글자를 쓰니까 - 아 물론 한자로 썼습니다)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
하니, 세자가 도제조 김흥경을 가리켰다. 임금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세자도 대신을 아는구나.” (13년 2월 14일)

"경의 말이 옳다. 근일에 문왕장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일찍이 명주와 무명베를 보고 사치와 검소를 구분하여 무명옷 입기를 청했으니, 매우 기특하다." (13년 9월 10일)

이런 이야기들에서 알 수 있는 건 그가 얼마나 총명했는지, 왕실은 물론 신하들도 그걸 얼마나 기뻐했는지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 영조였습니다.

2. 어긋남
흔히 소설이나 사극 등에서 세자에 대한 이미지를 만든 건 이모 소장입니다. 현재 이모 소장은 여러 군데에서 공격받고 있죠. 특히 정병설 교수와의 논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는 문학동네 까페에서 이모 소장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연재하고 있으며, 한겨레를 통해 "논쟁이 시작됐다"고 하면서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는 침묵 중인 것 같네요.

아무래도 이 글도 그 분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이루어질 것 같네요.

그에 의해 만들어진 통설을 한 번 보겠습니다. 멀리 갈 필요 없죠. 엔하위키를 봅시다.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세자가 화병으로 인해 미친 거라고 묘사한 반면, 정조나 실록에 의하면 신동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렇게 말이 다른 것은 입장에 따른 차이인 듯하다"

해당 항목에 나온 서술입니다. 이것만 보면 실록에서는 세자에 대해 좋게 좋게만 나오고, 한중록에는 미친 거라고 나온 것 같죠. 하지만 틀렸습니다. 세자가 병이 들었다는 것은 실록은 물론 여기저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영조부터 세자 자신, 세자의 마누라, 신하들까지 세자의 병에 대해서 말할 정도면 병이 들었다는 것 자체는 기정사실이죠. (정병설 교수의 주요 논지입니다) 그렇다고 한중록에는 세자가 미쳤다는 내용이 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실록에 좋게 좋게 나와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세자의 행장 등에 있는 내용입니다. 애초에 세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행장, 그것도 세자가 죄가 없다는 걸 주장하기 위해 만든 행장에서 나쁘게 나올 리가 없죠. 실록이 번역이 제대로 안 됐을 때는 이 정도밖에 참조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해 볼 수 있는 지금은 바뀌어야죠.

그럼 지금부터 한중록과 실록을 비교해 보면서 세자의 성장 과정을 보겠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풀어보면서 하죠 뭐.

한중록에는 세자의 어릴 때가 어떻게 돼 있냐 하면... 위의 실록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오히려 더 자세하게 돼 있죠.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한중록에는 영조의 존재가 없습니다.

실록에 나온 그 에피소드들, 사치한 것을 구분했다든지 세 살 때 글자를 썼다든지 하는 얘기에 다들 기뻐했다고 하는데, 실록에서는 아무리 봐도 그 중심에 영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중록에는 "모시던 이들이"라고 하며 세자 측근의 일로 축소해 놨죠. 물론 그녀가 궁에 들어온 게 어렸을 때고, 그 때부터도 이미 양 쪽 사이에 반목이 생긴 걸 보고 들어왔을 겁니다. 세자도 기억도 못 할 정도로 어릴 때이니 그것까지는 기억 못 했을 수도 있죠. 어차피 칭찬하는 건 금새 잊혀지고 꾸중 들은 건 쉽게 기억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로 일관적으로 영조의 존재를 무시한다는 것, 한중록을 볼 때 비판이 필요하다는 거죠. 하지만 무조건 무시할 순 없습니다. 보는 관점이 다를 뿐 많은 부분에서 실록과 비슷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한중록은 이렇게 세자가 신동이었다는 점을 강조한 후, 곧바로 부자지간이 틀어진 부분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1) 경종의 궁인들
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가장 먼저 지적한 것은 세자가 너무 빨리 부모의 곁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부모 밑에서 안고 키워야 될 애를 너무 빨리 세자로 정해서 보모에게 맡겼다는 것이죠. 세자가 머문 곳은 저승전, 세자를 교육할 수 있는 장소가 모두 마련된 곳입니다. 세자는 두 살 때부터 스승을 두어 공부를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위에서 보여 준 모습들입니다.

그에 이어 영조는 세자를 모실 궁인들을 죽은 경종을 모시던 이들로 뽑습니다. 정조는 이를 "궁에 화기(애애한 기운 -_-a)를 불어 넣기 위해서"라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나아가서 "누명에 두려워 하던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라고 적고 있는데, 이건 경종과 영조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거라서 따로 한 편을 써야 될 것 같습니다. 좀 어렵습니다만... 간단히 노론이 지지했던 영조가 탕평을 외치면서 소론들을 포용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영조가 원한 것은 노론이 앉힌 임금이 아닌 만백성이 우러러 보는 임금이었습니다. 당연히 소론의 임금도 돼야 했죠. 이렇게 나온 것이 그의 대표적인 업적인 탕평입니다. 그는 평생동안 경종이 얼마나 자기를 위해 줬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경종의 궁인들에게 세자를 맡게 한 것은 그걸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왕을 모시던 궁인들이니 얼마나 노련했겠습니까. 영조가 바란 것은 그런 거였죠. 하지만 혜경궁은 이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문제 된 것은 세자의 어머니 선희궁이 미천한 신분이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씨 족보에서 미천하다고 무시되는 경우도 있다는군요) 그리고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은 이전엔 이들의 윗사람이었죠. 영조는 이걸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증언 한 번 듣겠습니다.

혜X궁 : 아, 고년들이 진짜... 영민하신 영조대왕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죠.
(한중록의 내용은 다 이렇습니다. 칭찬인지 까는 건지 -_-; 영조는 다 좋은데 이렇다~ 세자는 진짜 천재인데 미쳐서~)

그들은 선희궁의 낮은 신분을 탓 하며 세자를 낳았다 하나 "일개 신하"일 뿐이라며 미친 듯이 까 내렸다고 합니다. 선희궁 역시 자신의 위치를 알기에 자기 아들한테도 "너"라고 할 수 없었다고 하네요. 이런 게 계속되면서 영조도 마침내 알았고, 그 대장 격인 한상궁으로 세자가 일곱살 때 내쫓습니다. 뭐... 혜경궁은 이 때 "한상궁만 쫓아냈으니 달라질 게 뭐냐"고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들을 "더럽고 흉하다"고 하며 이들이 아들과 아버지 사이를 반목하게 했다고 적고 있죠.

한편 문제가 된 것은 이들이 세자에게 가르친 게 병정놀이였다고 합니다. 글을 읽어야 될 세자에게 괜히 싸움질만 가르쳐서 후에 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죠. 왠지 "우리 남편은 천재였는데 하필 가르친 년놈들이~" 이런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만... 교육의 중요성이야 두말할 필요 없으니 그녀의 말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닐 겁니다. 뭐 세자 자신의 기질과 글 대신에 그런 걸 교육한 것, 둘 다 문제였다고 보면 되겠죠.

이들이 소론이었기에 세자가 소론 편을 들게 되었고 노론의 미움을 샀다는 말이 대표적인데... 글쎄요? 일단 의문 하나만 찍고 갑니다.

(2) 아버지가 무섭다
"영조께서는 영명 인효하시고(일단 이런 찬양은 기본적으로 해 놓고) 꼼꼼히 살피시며 재빠른 성품이시고, 경모궁께서는 덕성은 거룩하시나 (역시 일단 칭찬 한 번 하고) 과묵하시고 행동이 날래지 못 하시니라. 평소 묻는 말씀에도 즉시 응대치 못 하셔서 머뭇거리며 대답하시고, (중략) 영조께서 매양 갑갑해 하시니 이것이 또한 큰 원인이 되니라."

혜경궁은 둘의 기질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면서 그래도 가까이 두어 보살펴야 됐는데 멀리 보내서 사이가 더 멀어졌다고 탓 하고 있죠. 이 부분을 보면 남편 일인데도 마치 자식에 대해서 걱정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사이가 멀어지면서 서먹해지고, 영조가 세자를 답답해 해서 계속 꾸중하고 세자도 그게 무서워서 피하다보니 더더욱 멀어졌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와 결혼했을 때부터 세자가 병이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머리를 감지도 못 하고 스승이 들어올 때에야 급히 감았고, 윗사람들에게 문안 갈 때도 준비가 너무 늦어서 "왜 저렇게 느리지? 병인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적고 있죠. 하다 못해 점을 치니까 "저승전에 있어서 그렇다"고 해서 여기저기 기도도 하고 빌어보기도 했지만 안 돼서 결국 경춘전으로 옮겼다고 하죠. 이걸 좋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근처에는 선희궁의 거처도 있었고, 화평 옹주가 있는 연경당이 있었거든요. 화평 옹주는 영조의 이쁨을 받던 딸, 그녀 덕분에 세자도 아버지의 이쁨을 더 받을 수 있었다는 거죠.

하지만 이것도 얼마 못 갑니다. 1748년 6월 화평 옹주가 죽었거든요. 혜경궁은 이 때부터 "제대로 챙겨주지도 않으면서 남 보는 데서 세자를 흉 본다"면서 영조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한편 화평, 화완 옹주와는 달리 영조의 미움을 받던 화협 옹주가 있었습니다. 혜경궁은 영조가 그녀를 미워하는 이유에 대해 이전 효장세자가 죽어 아들이 필요한 상황에서 태어난 딸이라서 그렇다고 평가하고 있죠. 이 때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참 유치하다고 해야 될까요. 영조는 맨날 세자에게 "밥 먹었냐"고 물어본 다음에 대답을 들으면 귀를 씻고 그 물을 화협 옹주가 있는 쪽으로 버렸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세자는 늘 누이에게 "우리는 귀 씻을 물 취급이다"고 자조했다고 하죠.

이렇게 한중록은 어릴 때부터 일관되게 영조가 잘못했고, 그 잘못 때문에 세자가 미쳤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실록을 보죠.

(3) 공부가 싫다
임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
하니, 세자가 한참 동안 있다가 대답하기를, “싫을 때가 많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의 이 말은 진실한 말이니, 내 마음이 기쁘다.” (20년 11월 4일)

... 너무 솔직하다고 할까요. -_-; 하지만 한중록의 서술과는 달리 이 때도 "그래... 그래도 솔직하니까 좋네"라는 식으로 넘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맘이 편할 리가 없죠. 영조는 옛 고사를 흉내 내서 공부가 좋을 때는 하얀 "콩"을, 싫을 때는 검은 "콩"을 두어 세자의 스승에게 보여주게 했고, 세자의 주변인들에게 최대한 싫을 때가 없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런 건 계속됩니다.

“12시 안에 네가 책읽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 정도 되느냐?” (현대가 아니라 옛날 기준이니 24시간 중에서)
하니, 대답하기를,
“1, 2시입니다.” (2~4시간 정도요)
하였다. 응교 조재민이 말하기를,
“12시를 아마 깨닫지 못한 듯 합니다.” (아직 하루종일 좋아할 때는 아닌가 봐요)
하니, 동궁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변호할 생각 마라 ㅡㅡ)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정직한 대답이다.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겠다.” (그래 최소한 거짓말은 안 하네)
(23년 10월 3일)

이외에도 동몽선습을 "겨우 다 읽었다"고 고백하는 모습도 있다는데 이건 승정원일기에 있는지 찾을 수 없네요. -_-a

그래도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좀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죠. 세자가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정사에 참가해서 정치를 배우게 하자는 논의도 있었고, 영조가 세자를 불러서 이런저런 걸 읽어보라고 하면서 칭찬한 다음에 대신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너를 모실 사람이다."면서 강조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건 계속돼서 세자 나이 겨우 15살에 대리청정을 하기에 이르죠. 한중록과는 크게 다른 모습입니다. 마지막에 다시 논하죠.

(4) 선위 소동
이런 세자를 흔들기에 충분한 일이 일어났으니, 영조가 심심하면 일으켰던 선위 쇼입니다. 태종 때부터 오래 이어져 온 왕권 강화의 수단이죠. 당연히 신하들은 울고 불며 명을 거두어달라고 빌어야 했고, 덕분에 왕권을 강화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큰 단점이 있죠. 선조가 했던 것처럼 세자의 권위를 크게 낮추는 것입니다. 이런 일의 원조인 태종은 그렇게 하면서도 세자의 권위를 최대한 세워 줬고, 정통성에서 약점이 있는 세종대왕도 그 덕분에 별 갈등 없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아니었죠.

영조가 처음 선위하겠다고 한 건 15년, 세자 나이 5살 때였습니다. 주요 명분은 이거였죠.
"이미 나를 임금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무슨 소란스러울 일이 있겠는가" (15년 1월 11일)
이 날의 사관론은 이 일의 배경을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조가 그렇게 주장했던 탕평, 하지만 노론은 소론을 없앨 궁리만 했고 소론은 영조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죠. 이 때문에 영조는 단식까지 하면서 맞섰습니다. 그 최종 결정이 선위였죠. 이건 그 다음 해에도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아예 비 내리는 가운데 숙종의 묘 앞에서 엎드렸죠. 자기가 부덕해서 나라가 이 모양이니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 주겠다구요. 이 때 세자 나이 여섯 살. 이번에도 결론은 "당파 싸움 안 하겠다"고 하고 끝 납니다.

그리고 1749년 1월 22일, 한 차례 선위 소동이 벌어집니다. 이번엔 좀 달랐죠. 다음 날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이 엎드려 있는데, 이 때의 대화입니다.

“니들이 이렇게 말 하니 좀 생각해 보자.” (한참 있다가) "그럼 대리 청정은 어때?"
하니, 김재로가 “그것도 안 되는디요 -_-”
그러자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아나. 결제해야 될 거 전부 승정원에 냅 둬! 나 임금 안 해!"
그러자 조현명이
“아니 천하의 일을 다 책임지면서 이렇게 화 내는 경우가 어딧답니까?”
라고 했다. (물론 아주 정중하게 했죠 -_-a) 이 때 신하들이 안절부절 못 하다가 그나마 선위는 취소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대리 청정은 봐 드리겠심다.”

한 마디로 대리 청정 시키는 게 안 먹힐 것 같으니까 일단 선위 쇼 벌인 다음에 "그럼 대리 청정은 어때?"라고 하고 "대리 청정 안 된다고? 그럼 나 일 안 해!" 이렇게 한 겁니다. -_-; 애초에 이게 목적이었던 거죠. 이어서 이렇게 말 하고 있습니다. 대리 청정의 목적이었죠.

“어린 세자로 하여금 아득히 국사를 모르는 상태에 두었다가 뒷날 만약 노론과 소론에 의해 그릇된다면 내가 비록 알더라도 어찌 일어나 와서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오늘 이 거조는 뒷날에 반드시 효험이 없지 않을 것이다.”

정식 세자 교육. 여기에 박시백 화백은 해석 하나를 더 덧붙입니다. (다른 출처가 있겠지만 일단은 ( ..)) 경종 때 노론은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왕이 자식이 없으니 (아들 빨리 낳으라고 빌어도 모자를 판에) 세제로 앉히라고 했고, 왕이 몸이 약하니 대리 청정을 시키라고 했었습니다. 경종은 이를 받아들이는 척 하다가 한 방에 뒤집기를 시전해서 노론을 다 몰아내 버렸죠. 이 때문에 연잉군 역시 소론에 의해 몰릴 뻔 하다가 경종이 일을 확대하지 않아서 살아났었습니다. 결국 이거라는 거죠. "대리 청정 그까이 거 별 거 아니야~"

정식 세자 교육과 자신의 정당성 확보. 이런 목적 속에 대리 청정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세 번이나 땅바닥에 엎드려서 선위를 취소하기를 빌었던 세자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대리 청정하는 것은 이전과는 다르단 것을 모를 리가 없었죠. 모든 비극의 시작은 이 대리 청정 때부터라고 봐도 될 겁니다. 혜경궁은 이 일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대리 청정 후에 난 탈이니 어찌 서럽고 서럽지 않으리오"

3. 어디부터 시작인가

영조 23년 11월 11일, 영조는 세자를 불러서 배운 것을 읊어 보라고 합니다. 나름 훈훈한 광경이었습니다. 열네 살의 세자는 의외로 대답을 잘 했고, 여러 문답 끝에 영조도 "웃으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지금 대답하는 것을 들으니 네가 평소에 헛되이 읽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다만 한조로서만 말한다면 어느 제왕이 우수하다고 여기는가"
여기서부터 꼬입니다.

“문제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 한나라 고제를 말하지 않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경제의 치적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기질로는 필시 무제를 좋아할 것인데, 도리어 문제를 좋아함은 무엇 때문이냐?”

고제는 한의 시조 유방, 그와 무제를 함께 엮은 것은 세자가 "무武"를 좋아한다는 의미였죠. 반면 문제와 경제는 내치를 잘 했던 황제들. 이 사이의 간격은 확실합니다. 그 이후의 대화를 좀 줄여 보죠.

세자 : 무제는 쾌활(명랑하고 활발)했지만 오활(세상 물정 모름)하기도 했어요
영조 : 뭐가 쾌활이고 뭐가 오활인데?
세자 : 급암(무제 때의 신하인데 굳이 설명 안 하겠습니다)이를 포용한 건 영웅이라 할 만하고 쾌활하다 하겠죠.
영조 : 그걸 어질다고 할 만 하긴 한데 그게 왜 영웅이야?
세자 : 급암이의 강직함을 표용했으니 한 고조를 닮았죠.
영조 : 급암이를 포용한 게 영웅이라면 니가 그렇게 할 수 있겠냐? (당최 뭔 소린지 모르는 건 넘어가고 -_-) 니는 어디 정벌하고 그럴 임금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수성을 해야 될 임금이 될 건데 무제가 호쾌한 것을 믿으면 되겠냐? 뭐 이렇게 무식하냐? 이게 그냥 웃으면서 할 얘기냐? 문제는 이런이런 것에서 잘 했다. 너는 이거 배워야 된다.

듣는 세자는 오죽 황당했을까요? 이건 1년 후에 또 벌어집니다. 24년 5월 19일의 일입니다.

영조 : 한나라 고조와 무제 중 누가 더 훌륭하지?
세자 : 고조요.
영조 : 문제와 무제 중에는?
세자 : 문제요.
영조 : 어디서 약을 팔아? 넌 분명히 무제를 통쾌하게 여길 건데 왜 문제를 훌륭하다고 하는데?
세자 : 문제, 경제의 정치가 무제보다 좋았잖아요.
영조 : 니는 앞으로 문제, 경제 반만 해도 족하다. 내가 무제로 니를 경계했는데, 니 시 중에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는 글자가 있더라. 니 기질이 이렇게 드센 게 문제야! (원문은 기(氣)가 승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를 보다 못 한 이이장이 "기가 승한 것 같지만 안중(뭐 대충 편안하고 무겁다 이런 거겠죠)하기도 해요"라고 말립니다. 하지만...
영조 : 아 됐고, 촌음을 아끼라는 말이 있거든? 니네가 서연이나 소대가 있을 때마다 세자 잘 가르쳐야 된다. 왕 노릇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제대로 가르쳐 주라고!

휴... -_-a

한중록과 실록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중록에서는 "세자가 과묵하고 굼떠서 임금의 말에 제대로 대답을 못 했다"고 한 반면 영조는 "이 놈이 너무 급하고 기가 세서 큰 일이다"고 하고 있죠. 한중록에서는 영조가 세자를 너무 미워해서 세자가 겁을 먹었다고 한 반면, 실록에서는 영조가 세자를 아꼈는데 세자가 글 공부를 제대로 안 하고 기질이 너무 드세서 영조가 이를 싫어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정 반대죠. 하지만... 그 사이에 접점이 있습니다.

우선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세자가 글보다는 무예 닦는 걸 좋아했다는 것이죠. 이미 영조 20년, 세자 나이 10살에 "4개월이나 서연을 열지 않았다"는 상소가 있습니다. 병이니 뭐니 하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죠. 영조는 지나칠 정도로 세자에게 글공부를 강요했고, 세자는 지나친 건지는 몰라도 이걸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거기다 위에서 보듯 말을 제대로 했는데도 저렇게 욕을 먹고 있죠. 세자가 말을 잘못했다면 그 꾸중은 어땠을까요?

세자가 어렸을 때는 글공부가 싫다고 해도 "정직하니 됐다"고 했던 영조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주변 스승들은 "이렇게 답 해야 된다"고 가르쳐 줬을 것이고, 세자의 기질을 바꾸려고 했을 겁니다. 세자도 나름 노력을 했고 말조심을 하려고 했겠죠. 그게 한중록에서 "제대로 답을 못 했다"의 모습일 겁니다. 하지만 영조는 이런 것조차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죠. 아니 이 쯤 되면 정말 "제대로 답을 못 할" 상황이죠.

한중록에서 나타나는, 어릴 때부터 세자를 싫어했다는 어느 정도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중록은 세자가 어릴 때부터 대리 청정까지의 일을 꽤나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영조가 세자에게 꾸중을 한 게 확실히 어디서부터였는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또한 영조는 세자가 개인적으로 싫다고 하더라도 그냥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왕실의 유일한 아들이요 자기 뒤를 이을 세자니까요. 그래서 나름 참고 참고 세자를 가르쳐 주려 했겠죠. 하지만 한중록에서 나온대로 부자는 떨어진 사이, 그것도 괜히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 불러서 이런 저런 걸 물어보는 상황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가 무서워지는 세자의 모습을 그린 한중록과, 무예만 좋아하는 아들을 꾸짖게 된 실록의 모습이 겹치죠. 한중록은 혜경궁 개인이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것, 당하는 입장에서는 칭찬은 전혀 기억에 남지 않고, 수십년이 지난 후에는 더더욱 그럴 겁니다.

과도한 사랑과 기대를 보여 주던 아버지, 그래놓고 아들이 자기 뜻대로 가지 않자 기대는 더 커지면서 꾸중은 늘어난 아버지. 그리고 그걸 감당하지 못 한 아들. 교육의 문제든 그 자신의 문제든 열 살 때부터 자기가 당연히 해야 할 서연도 4개월이나 빠졌다는 건 세자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영조의 질문에 한 대답은 반항으로 볼 수도 있죠. 이렇게 둘은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릴 때 보여 준 신동의 면모도 너무 빠른 조기 교육과 주입식 교육의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글쎄요. 저보다는 자식 교육에 머리 아프실 분들이나 부모님의 기대가 너무 커서 고생하셨던 분들이라면 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가운데서 세자의 대리 청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비극의 시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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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14 15:54
수정 아이콘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부모가 애들 쪼이는(?) 건 진짜.....-_-;;
11/09/14 15:57
수정 아이콘
언제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최근들어 드라마 탓인지 가장 흥미가는 부분인 영,정조때의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시대는 조선 초기의 왕vs공신(신하) 구도와는 또 다른것 같아서
재미도 있지만, 그와 함께 수반되는 두통은 어쩔 수 없는것 같습니다.^^
Geradeaus
11/09/14 17:54
수정 아이콘
잘 읽고 갑니다.
무리수마자용
11/09/14 22:02
수정 아이콘
비극의 시작은 언제나 행복허고 평온한 일상레서 시적하눈 것 같습니다 [m]
11/09/14 23:24
수정 아이콘
왜 사람들이 연예인의 사생활을 알고 싶어하는 지 알거 같네요.
사실 국가의 왕이라는 것만 빼면 한 가정사일 뿐인 건데, 그게 이렇게 재미있군요-_-;
tannenbaum
11/09/15 02:03
수정 아이콘
오오 올라왔군요 혹시 추석연휴에 올라오지 않을까 기다렸던 애독자 1人입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었습니다.

'실록vs나머지야사' 들을 보면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어느게 더 진실된 기록일까요?

재미는 야사가 더 좋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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