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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7/06 04:25:15
Name 페일퓨리
Subject [일반] OBS 중계를 보고 떠올린 군시절 추억
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야구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ML의 양키스의 팬이 되었습니다. 뭐 그때는 중계채널도

AFKN 하나였고, 거기서 양키스 게임을 캐치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만, 세월이 지나면서 중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 행복해져갔습니다. 특히 박찬호 선수의 ML진출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저는 공군에 입대하였습니다.

사령부였던 저의 자대는 분위기가 퍽 좋았습니다. 사무실에서 장교들과 함께 TV를 보는 일도 잦았죠. 특히 2001년의 월드시리즈와

2002년의 월드컵이 거의 TV 필수시청기간처럼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2001년 월드시리즈의 매치업이 뉴욕 양키스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였다는 데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01년 디백스에는 김병현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주전 클로저로...

때문에 디백스가 무슨 국민구단처럼 인기가 많았죠. 거기에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의 원투펀치는 그냥 야구팬에게도 엄청나게

매력이 있는 요소였으니까요. 그렇게 월드시리즈는 시작이 되고, 중계를 시청하던 장교들은 ML팬인 제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면서 경기에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사람들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습니다. 양키스가 안타를 치면 저는

주먹을 쥐며 좋아했고, 디백스가 안타를 치면 저는 탄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같이 근무하던 권대위가 제게 물었습니다.

"넌 어디를 응원하는 거냐?"

"양키스 응원합니다."

"뭐? 왜?"

"어릴적부터 팬입니다."

"......"

주변 공기가 험악해졌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4차전... 그야말로 최강의 포스로 NL을 대표하는 클로저가 된 김병현이 8회에 등판,

3자 삼진의 위용을 떨칩니다. 장교들은 제가 응원하는 양키스가 져서 어쩌냐며 비웃었고, 저는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요기 베라의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4차전 9회 2사 후에 티노 마르티네즈의 천금같은 동점투런이 터졌습니다.

이어서 연장 10회말에는 저의 영웅 데릭 지터의 워크오프 홈런이 나왔죠. 이때부터 장교들은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근무한 곳은 대령 1, 중령 2, 소령 1, 대위 3, 중위 2, 상사 1명에 병은 저 혼자 있는 곳이었죠. 그들의 짜증이 짓누르자 정말

생지옥같았습니다. 그리고 5차전이 열렸습니다. 장교들은 괜히 그 시간에 일을 마구 투하해서 중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는

열심히 디백스를 응원했습니다. 하지만 김병현 선수는 다시 9회 2사 후에 스캇 브로셔스에게 홈런을 맞고 마운드에 주저 앉았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릴적부터 양키팬입니다. 그리고 사실, 김병현 선수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통파 투수를 선호하고,

사이드암이나 언더핸드는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디백스 역시 저와 아무 관계도 없는 팀이지요. 그런데 단순히 한국인 선수 한 명이

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는 디백스를 응원해야 했던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저는 그들이 보기에 정신적으로 뭔가 결함이 있는

듯이 보였나봅니다. 결국 저는 군기교육대에 입소했습니다. 헌병 교관이 왜 왔냐고 묻기에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 응원하다가 왔다고

했더니 각종 욕설과 함께 +알파 코스를 선물해주었습니다. 군대라는 곳이 참 비합리적이기로는 알파 브라보를 다투지만, 이 사건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어제 OBS 중계는 뉴욕 양키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였습니다. 국내 채널에서 양키스 중계를 보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인디언스와

게임이 있거나, 아니면 포스트시즌이거나. 저는 그냥 MLB.TV를 구매해서 늘 라이브로 보므로 별 불만은 없지만, 가끔은 인디언스의

경기만 중계하는 OBS 편성을 보면 조금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나마 추신수가 부상당한 이후로는 다른 팀 경기를 해주긴 하더군요.

그것도 추신수가 복귀할 때까지만이겠지요. 만일 클리블랜드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해서 린스컴의 자이언츠나, 할러데이의 필리스와

경기를 하게 된다면, 국내의 그 수많은 자이언츠, 필리스 팬분들은 어디를 응원하실까요? 어떤 곳에서는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 선수가 뛰는 팀을 응원하지 않으면 '매국노' 운운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그리고 매국노까지는 아니어도 부정적인

시선이 있는 것을 느낍니다. 한국 선수가 한 명 있으므로 해서 그 팀을 응원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고 보는 것... 많이 비뚤어진

시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아들손자 대물려서 양키스 응원하고 싶습니다. ... 후우, 찬호형이 양키스 불펜에서 계속 잘해줬으면

만사 오케이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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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06 04:48
수정 아이콘
아 정말 매우 공감되네요.. 저는 예전부터 아스날을 응원해왔었는데 박지성이 맨유에 가고난후부터 페일퓨리님과 같은 대우를 받았네요,.. 저도 군대에서 비슷한일도 있었구요.
양념반후라이
11/07/06 05:08
수정 아이콘
야구는 잘 모르지만 7년된 첼시팬으로서 참 공감 가네요.
첼시뿐만 아니라 국내의 비 맨유팬이라면 다들 겪어본 일이겠죠.
특히 툭하면 박지성한테 털리는 아스날 팬분들. [m]
abrasax_:JW
11/07/06 06:37
수정 아이콘
정말 어이가 없네요... 그런 군인들과 같은 산소를 마시고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런 게 '애국'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겁니다.
Jeremy Toulalan
11/07/06 07:56
수정 아이콘
2006년이 생각나네요.
월드컵 때 저는 우리나라도 응원했지만 프랑스도 응원했습니다. 프랑스에 여러 축구선수들을 좋아했고 응원했습니다.
토고전때 짜릿한 역전승으로 환호했던 기억도 있지만 스위스와 졸전 끝에 골대 2번 맞고 겨우 비겨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응원하는 두팀간의 대결. 친구들이 거리 응원을 가자고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대한민국의 승리를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1:1로 비겼죠. 스트레스를 무지 받았습니다. 이렇게 떨어지면 지단은 그 경기가 은퇴전이었습니다. 더군다나
32강 본선에서 이렇다할 모습도 많이 못 보여줬고요. 그래서 기분이 꽤 안 좋았습니다.
왜 우리나라를 응원 안하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대답은 '마지막 지단의 플레이를 더 오래 보고 싶다'였습니다.
평소에 축구 관심 많이 가지던 사람들은 같은 입장에 서진 않더라도 이해는 하는데 오히려 관심없어 보이던 사람들이 더 열내더군요. 프랑스인이냐면서..

결국 어찌어찌해서 프랑스는 3차전 이기고 한국은 져서 프랑스가 결국 결승갔고 지단은 마지막 불꽃을 태웠지요.
그런데 참 프랑스 대 한국이 붙었을땐 살벌하더군요.
길거리 나가서 프랑스 목이 터져라 응원한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서 혼자 조용히 보면서 응원한건데 술먹으면서 토론도 했습니다. -_-;

맨유 응원보다도 힘든게 국대응원 같습니다.
11/07/06 08:29
수정 아이콘
야구는 박사장님 텍사스 시절 이후 KBO만 봐서 그런 일이 없지만 축구쪽으로 보면 참 공감이 됩니다.

저는 맨시티 팬이거든요 -_-
더비매치만 했다 하면 그저 조용히 보거나 맨시티를 응원하는 사람들끼리 보게 되더군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보게 된다면 마음속으로는 5:0 쯤으로 캐발라버려라!!! 하는데도
그냥 지성횽이 한골 넣고 맨시티가 2:1로 이겼으면 좋겠다. 라고는 말하게 되요 ㅠㅠ
김약사
11/07/06 08:56
수정 아이콘
좀 어긋난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예전 97년도에 KBS 위성 시절에 라리가 한창 중계해줄 때부터 바르셀로나 팬이었는데,
최근 일련의 일 때문에 바르셀로나팬이라고 하면 색안경쓰시고 보는 분들 미워요 ㅜ.ㅜ..
빨리 백승호군이 성장해서 1군 데뷔해서 바르셀로나가 국민클럽(?) 이 되는 날을 조심히 기다려 봅니다.
몽키.D.루피
11/07/06 09:09
수정 아이콘
그해 월드시리즈가 비정상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기도 했죠. 그만큼 극적이었던데다가 그 중심에 한국인 선수가 있었으니..(무난하게 끝날 걸 극적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이었죠.) 저도 고등학교에서 쉬는 시간 마다 티비 켜놓고 보던 기억이 납니다.
루크레티아
11/07/06 11:17
수정 아이콘
그냥 눈치가 있느냐 없느냐 같습니다.
소수파로 포지셔닝 하는 경우에는 자신이 피곤해도 괜찮으면야 상관 없지만 피곤하기 싫으면 그냥 적당히 맞춰줘야죠.

저도 예전에 일하던 곳의 상사가 롯데 자이언츠의 극성팬이었는데, sk를 보면 거의 갈아마셔버릴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문제는 제가 sk팬이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념 있는 내가 저 개념 없는 것을 배려해주자.' 라고 말이죠. 그래서 그냥 야구 이야기를 하더라도 무덤덤하게 경기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응원팀이나 다른 이야기를 하진 않았습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인간들이야 당연히 개념이 없죠.
하지만 굳이 그런 개념 없는 인간들에게 꿋꿋하게 맞서 가면서 인생을 피곤하게 살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가끔은 그냥 '그래 너 잘났어요.'하면서 더러운 똥을 피해주는 센스도 필요하더군요.
11/07/06 11:56
수정 아이콘
장난식으로 괴롭히는거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군기교육대는 뭔가요? [m]
11/07/06 12:42
수정 아이콘
음..
어릴적부터 팬이었거나 한국선수가 뛴다는 이유로 그팀을 응원하거나 특정팀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많겠지만
주위 모든사람들이 특정팀을 응원하고 혼자서 상대팀을 응원하는 입장이라면 감정표현을 자제하는게 맞겠죠.
(주먹을 쥐며 좋아했고, 탄식을 하고 등에서 보면 페일퓨리님은 그러지 않으셔서 미움을 샀을 수 있겠네요)
군기교육대(너무 어이없어서 사실 믿어지지 않습니다) 를 빼면 다른 장교들 반응도 그다지 옥먹을만 한것 같진 않구요.
맨체스터의 펍에서 맨유-바르셀로나 결승을 보며 바셀이 득점할때마다 환호한다면 끝나고 무사히 집에 가기 힘들듯..

저도 비슷한 경험을 오래 했습니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는데 희안하게 전 프로야구 원년부터 해태 팬이었던 거죠.
당시 4번타자 김봉연선수에게 끌려서(응?) 해태를 응원했는데, 83년부터 해태가 잘나가다보니 고등학교 다닐땐 피곤했죠.
해태가 삼성한테 이긴 다음날은 항상 표정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으니. 흐흐.

한국선수가 뛰는 팀 응원이나 국대 응원, 지역팀 응원은 소속감의 일종이라 생각하고 자체로 나쁜 건 아니라 봅니다.
좀 심한 감도 있지만 소수자(?)의 비애 정도로 받아들이면 그다지 인생 피곤하지 않은 듯 합니다.
페일퓨리
11/07/06 16:08
수정 아이콘
제가 좀 눈치 없이 군 점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병이었던 제가 위관 영관들 사이에서 그렇게 대놓고 표현을 했겠습니까, 엉엉.
제일 뒤 구석에서 조용히 주먹만 불끈, 탄식을 해도 아아~가 아니라 흙. 1음절로 끝내곤 했지요. 매의 눈을 가진 권대위에게 들킨 것이
억울할 뿐입니다. 군기교육대 입소는 사실입니다. 제가 있던 사무실이 장교들의 성향이 참 뭐랄까 더러워서, 당시 병들 사이에선
'군수부 지하에는 시체가 묻혀있다. 터가 좋지 않다.'는 평을 듣곤 했지요. 머드님 추측과는 다르게 얘기할때도 조심스럽게
"저... 야구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닌 거 아니겠습니까?" 식으로 말했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는 일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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