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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6/29 08:43:58
Name 눈시BB
File #1 이괄의_난.JPG (829.9 KB), Download : 57
Subject [일반]  남한산성 - 5. 이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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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얘기나 한 번 해볼까 했는데, 생각보다 글이 빨리 써 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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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反正 정상으로 돌아간다
인조 정권은 당연히 궁궐 짓는 걸 금지하고 조도사를 폐지했으며, 광해군 대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문서 자체를 불태우자고 했던 호조도 나중에는 재정이 부족해서 안 된다고 했죠. 인조 정권이 세금을 크게 낮추고, 호조도 땅은 1/3인데 세금은 1/10이라며 너무 적다고 아우성쳤습니다만... 그러고도 25, 26년에 5만 석이 넘는 포흠이 생긴 건 광해군 대의 영향인지 세금 낮춘대놓고 제대로 못 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인조는 돈을 쓰는 데 크게 제약을 받았습니다. 영건 도감에서 남은 재목으로 딸내미한테 작은 궁궐 하나 지어주는데 (200칸) "폐주랑 똑같이 되려고 그러냐" 면서 욕 먹죠 - -a 어쨌든 기존 궁궐의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인조 대에도 궁궐 재건은 계속되긴 했습니다. 인경궁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사를 없앤데다 대신, 대간들이 돈을 함부로 쓰나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었으니 광해군 같은 사치는 없었을 듯 하네요.

하지만 반정 직후 처형한 인물들 외에는 광해군 대의 인물들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때문에 그 중에 재산을 착복한 이들에 대한 처벌은 거의 되지 않았죠. 또한 그들에게 빼앗은 것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대신 공신들에게 나눠줬습니다. 반발이야 계속됐습니다만... 재밌는 건 이걸 주장한 사람 중에 최명길이 있습니다.

광해군이 옥사를 일으키고 거기서 공을 세운 신하들을 공신으로 만들어 많은 혜택을 준 것을 똑똑히 봐 온 백성들입니다. 그냥 바뀐 것도 아니고 폐주의 부정을 탓하며 반정한 것이기에 기대는 컸겠습니다만... 결국 그 놈이 그 놈이라는 걸 말 해 준 것일 뿐이죠. 어쨌든 백성들은 이제 지긋지긋한 공사는 안 해도 됐고, 사대부들도 바른 정권이 들어왔으니 만족했을 겁니다. 잃어버린 15년을 되찾아야죠.

하지만 시간은 인조 정권에게 내치에 집중할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2. 요동 수복
인조 정권은 바로 가도의 모문룡에게 문안사 남이공을 파견합니다. 13일에 했으니 4일만에 바로 보낸 거죠. 인조에게 절실했던 것이 명의 인정이었고, 그걸 바로 알릴 수 있는 이가 바로 모문룡이었죠. 이 때 남이공은 "전에는 다 거부해서 그가 열 받았지만, 지금 다 허락하고 협력하면 그가 어찌 기뻐하지 않겠냐"고 했죠. 모문룡도 반겨서 22일에 바로 차관 응시태를 보냅니다. 서로 광해군 뒷담화를 즐겁게 한 후 -_-; 바로 명에 알리겠다는 것과 칙서를 받을 것을 의논하죠. 광해군이 계속 미룬 칙서는 이 때 인조가 받습니다. 다만 전왕에게 한 말이었으니 그냥 예만 취하고 펴보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뭐 이게 시작이었죠.

나라 안의 상황 및 모문룡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던 인조는 물러나 있던 장만을 다시 도원수로 세웁니다. 반정 한 달 후 그는 장만을 만나 변방의 형세를 논합니다. 이 때의 대화를 약간 옮겨보죠.

인조 : 이번에 중국이랑 협력해서 적을 토벌하겠다고 했는데, 병사가 형편없으니 어쩌냐
장만 : 왜란 후니까요. 아직 시간은 있으니 1~2년 정도 쉬게 하면 될 겁니다. 다만 장수가 부족한데 이괄이나 이서 중에 선택해 파견해야 될 겁니다.
인조 : 우수한 자는 다 데리고 가도 된다.

인 : 지금 군대 보내서 토벌하는 게 될까?
장 : 중원은 형세가 고달프고 혼이 빠져서 딱 우리가 임진년에 왜적 두려워 했던 형상입니다.
인 : 병력은 얼마나 필요할까?
장 : 10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인 : -_-; 그건 어렵자너
장 : 10만명 안 되면 5만명이 아니고선 안 됩니다.

인 : 다른 도의 병력을 매년 징발하니 적이 오기도 전에 나라 망하겠다. 지금부터는 본도 병사만 쓰고 타도 병사는 위급할 때 쓰면 어떨까?
장 : 저도 그런 생각해서 영상(영의정)에게 말하니 영상도 그랬습니다. 이번에 가서 한준겸, 이시발(-_-)이랑 얘기해 보겠습니다. 변경에 오래 있었으니 뭔가 있겠죠.

인 : 적의 형세는?
장 : 사나운 새가 잠시 날개를 접고 있는 형세라 하겠습니다.
인 : 쳐들어올까?
장 : 지금은 산해관에 집중하니까 당분간은 근심이 없을 겁니다.
인 : 반정한 거 알면 안 좋아할텐데?
장 : 간첩을 보내야죠. 돈 준다고 하면 가려는 사람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이괄입니다. 인조로서는 믿을만한 사람을 보내려고 한 거죠. 이후 이괄을 보내고, 이괄이 병력을 요청해서 계속 병력을 올려보내는데 그간의 대화를 보면 이건 명백히 요동 정벌용입니다. -_-; 중국의 명령이 떨어지면 모문룡과 함께 요동을 수복한다, 이게 골자였죠. 이 때 북쪽에는 흉년이 들어 군량이 부족하다고 계속 고심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병력을 보낼 궁리를 하게 됩니다.

이 때 평안도의 병력은 1만 2천~1만 3천 정도인데 도망치는 사람이 많아서 정수를 채우지는 못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괄에게 따로 1만을 주고 남쪽에서도 5천명을 더 올려보내기로 계획했죠.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병력을 뽑아 올려보내는데, 재밌는 건 이게 5년 전부터 쭉 하던 거라고 나와 있습니다. 광해군 대에도 겨울마다 병력을 올려보냈다는 얘긴데, 광해군일기에는 이게 없네요. 고의로 누락시킨 게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심하 전투 이후 평안도의 병력은 2~3만 정도를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이고 이 때 이괄의 요청으로 크게 보강된 것 같습니다. 훈련도는 둘째치구요 -_-; 이 정도면 요동 수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쳐들어오면 한 바탕 해 볼 만한 병력은 되죠.

문제는 이게 적이 돼서 되돌아왔다는 거지만요. 인조 정권이 초반에 광해군의 뜻을 잇고 조용했다고 하지만, 초반에는 이렇게 요동 수복을 신나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3. 황은을 입고자
23년 4월, 인조는 명에 사신을 보냅니다. 가도에서부터 섬들을 거쳐 산동반도로 간 다음에 육로로 북경으로 가는 긴 여정이었죠. 요동은 후금에 막혀 있었고, 이 항로는 섬만 따라가면 되기에 주로 쓰이던 항로였습니다. (발해 때 장문휴도 이 길로 등주를 공격하죠) 모문룡의 환대 덕분에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중국 본토에 상륙하기 전까지는요.

등래순무 원가립은 왜 광해군을 쫓아냈느냐면서 사신들을 박대했고, 11일이나 머물며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 때 원가립은 이런 상소를 올렸다고 하죠.

"광해군이 무도했다 해도 조카가 숙부를 폐위시킨 것은 명백한 찬탈입니다. 중국도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중략) 조선에 사신을 보내 그 죄를 밝히고 그 신민들로 하여금 찬탈한 역적들을 토벌케 하고 쫓겨난 광해군을 복위시켜야 합니다."

북경에 도착했을 때도 이런 분위기는 그대로여서 사신들은 인조를 승인해 달라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명도 그나마 성향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광해군 대신 다른 정권이 무력으로 들어섰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이었습니다. 어쨌든 광해군은 원군을 보내준 "충순"한 왕이었으니까요. 원숭환은 아예 조선 단독으로 후금을 토벌하자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입장에서야 광해군이 명을 배반한 것처럼 보였지만, 명은 광해군이 충분히 자신의 명을 따르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죠. 광해군 말에 병력을 보내는 것에 그렇게 민감했던 것은 이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사신을 잡아두고 모문룡과 원가립에게 조선의 상황을 상세히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다급해진 인조는 모문룡을 통해서 광해군이 명을 기만했다는 것과 자신의 거사가 온 백성들이 원했던 것임을 알립니다. 그리고 자신은 후금을 토벌하려 하지만 명이 승인해주지 않아서 그렇지 못 한다고 했죠. 명도 분위기가 슬슬 바뀝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조선을 토벌할 힘이 없었거든요. 예부주사 주장은 "오랑캐 세력이 더 압박해 온 이후에 인조를 승인하면 조선이 전혀 고맙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며 빨리 책봉하자고 강조합니다.
24년 중순부터 슬슬 좋은 소식이 들려오더니 25년 1월, 마침내 황제의 칙서가 내려집니다. 그렇게 원하던 책봉을 22개월만에 받은 것이죠. 당시 조선의 분위기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그 때문에 모문룡에게 너무 많은 힘을 줬다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모문룡의 역할은 결정적이었고, 그는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반정 4개월만에 모문룡에게 지원한 곡식이 수만 석에 이르렀다고 하죠. 해가 갈수록 심해져서 초기에만 1년에 6만 석을 지원했으며, 그의 욕심도 커져서 겨울에만 2만 석을 요구해서 "1년에 주는 양을 정하고 그 후에 더 달라고 해도 주지 말자"는 의논까지 생깁니다. 하지만 조선은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명분상으로도 그렇고, 모문룡은 인조 반정을 지탱하는 결정적인 인물이 돼 버렸으니까요. 그의 행패는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23년 11월 12일, 인조는 유사시 친정할 것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합니다. 명목상으로는 적이 침범할 경우라고 했습니다만... 대신들은 여러 가지 건의를 하였고, 인조는 반대 의견은 무시하고 기어이 친정하겠다고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4. 이괄의 난
이괄은 그 무는 물론 글을 읽고 쓰는 것부터 군재까지 갖춘 인물로 보입니다. 23년에 북병사로 임명된 걸 생각해보면 광해군 역시 그 능력을 인정했다고 봐야겠죠. 그는 부임 전에 반정에 대한 계획을 알게 되고 참여했습니다. 반정 당시 총대장을 맡기로 했던 김류가 늦자 그가 대신 대장을 맡았는데 출발하기 전에 김류가 도착하면서 뺏기게 됩니다. 그 날의 계획도 이괄이 짰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는 반정에 늦게 참가했다는 이유로 2등이 됩니다. 반정 다음날부터 이괄과 김류가 서로 늦었니 뭐 했니 하면서 싸우죠. 이 때부터 분란이 시작됐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23년 5월에 그는 평안 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됐는데, 인조가 친히 어도를 내리고 수레바퀴를 밀어 보냈다고 합니다. 인조로서는 그를 확실히 믿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화난 기색이었다고 하죠. 신경진이 "다 한 번씩은 거치는 것이다"면서 위로했지만 이괄은 "나를 내쫓는 거 아니까 속이지 마라"고 화냈다고 합니다. 당시 장만은 도원수로 평양에 머물렀고, 이괄은 영변에 머물렀는데 실세는 당연히 이괄이었습니다. 그 밑에는 평안도의 병사 수만명과 항왜 검사들이 있었습니다.

1월 14일, 어떤 역모 사건이 벌어집니다. 여기에 기자헌, 현집, 이괄과 아들 이전, 한명련과 아들 한난윤 등이 포함돼 있었죠. 이 날 이미 수십명이 하옥되고 몇 명은 맞아 죽습니다. 이어 17일에 금부도사를 보내어 변경에 있는 장수들을 잡아오게 하는데, 이괄은 설마 해서 체포하지 않고 그 아들 이전과 한명련만 잡아오게 했습니다. 이후에도 이괄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는데, 재밌게도 김류는 이괄이 반역하지 않으리라 했고, 이귀와 최명길은 반역했을 거라고 했죠. 이귀는 나아가서 "아들만 체포하면 그가 기꺼이 명을 듣겠느냐"면서 아들 이전만 체포하는 것 역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21일, 이괄의 진중에 있던 이전을 잡기 위해 금부도사가 도착합니다. 이걸 알게 된 이괄이 그 수하들을 데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는 오직 아들 한 명밖에 없는데 그 애가 잡혀가서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니 어찌 아비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일이 이미 급해졌으니 남아가 죽지 않는다면 몰라도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니, 어찌 능히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받겠는가"

이괄의 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이괄이 훈련시키고 있던 병력은 총 일만 이천, 그 외에 항외 백삼십명이 있었습니다.

1) 승승장구
이괄은 처음에 그 자리에 있던 장수들을 협박해 따르게 한 후, 주변 자기 휘하 수령들에게 급히 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정주 목사 정호서에게 "서울에 변이 있으니 구원하러 간다"라고 하며 속이려 했죠. 정호서는 이괄의 사자를 벤 후 장만에게 갑니다. 한편 장만의 중군 남이흥의 부하가 잡혔다가 풀려나오면서 남이흥을 설득하는 편지를 들고 오는데, 그는 그걸 그대로 장만에게 바칩니다. 이렇게 장만은 반란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한양에 급보를 보내죠. 당시 장만의 실병력은 수천명에 불과해서 이괄과 함부로 싸울 수 없었고 주변의 장수들을 급히 불러모아야 했다고 합니다.

이괄의 반란군은 안주, 평양 등의 거점을 노리지 않고 샛길로 빠져 한양을 노렸습니다. 안주 방어사 정충신은 바로 원수부로 가서 이를 알렸죠. 장만은 소수나마 안주를 다시 지키라고 했지만 정충신이 안주로 다시 향하는 중에 이괄이 이미 남쪽으로 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장만은 그에게 이괄이 어떤 계책을 쓸지 묻고, 정충신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상중하 세 계책이 있는데 (삼국지 봤나 봅니다 -_-a) 한강을 바로 건너 임금의 행차를 잡으려 한다면 모 아니면 도니까 이게 상책이요, 평안도와 황해도를 점령한 후 모문룡과 세력을 연결하면 쉽게 못 잡으니 이게 중책이요, 샛길로 서울로 달려가 빈 성만 지키고 있으면 소용이 없으니 이게 하책입니다. 이괄은 날래나 꾀가 없으니 반드시 하책을 쓸 것입니다"

이어 한명련도 휘하 1200명을 이끌고 이괄에게 합류합니다. 조정에는 이 사실이 24일에 알려지는데, 급히 이수일을 이괄의 자리에 앉히고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이시발을 부도체찰사로 삼아 평안도로 가게 하고 경기 감사 이서에게 개성에서 적을 막으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황해 병사, 전라 병사도 따로 임명하면서 혹시 모르면 파천하려고 했죠. 물론 실록에는 역도를 벌하기 위해 친정하겠다면서 큰소리 떵떵 칩니다만... 적을 막기 어려우니 팔도에서 병력을 모으라고 하죠.

한편 도원수 장만 밑으로 용천, 곽산, 선천, 정주, 삭주 등의 병력이 도착하면서 어느 정도 해 볼만하게 됩니다. 그는 이괄이 샛길로 가는 걸 알고는 평안남도 병사 신경원에게 급히 막게 하고 계속 병력을 모으라고 했죠. 이 때 "정충신 등에게 병력 8천을 나누어 보내 좌우에서 차단하게 하고 남이흥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전진하겠다"고 했는데 병력이 확실히 얼마인지는 몰라도 이괄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많지 않았을까 합니다. 의주의 병력 삼천은 돌려보내기도 했다는군요.
그 전에 장만은 자산(순천)을 넘은 적에게 투항을 권고했고, 천 명 넘는 적이 항복해 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반란군은 잠시 후퇴하지만, 다시 강동을 넘어 상원, 수안까지 진군합니다. 이 때까지 관군의 반격은 없었습니다. 장만이 병력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반란군이 철저히 샛길로 움직인 거죠. 이괄은 강동, 상원의 군량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챙길 수 있는 양은 챙긴 후 남은 것은 불태웠다고 합니다. 사실상 진격로상의 군수물자들은 전부 없어졌다고 봐야겠죠.

이 때 황해도 병력이 수안 남쪽을 차단, 반란군은 황주와 봉산 사이의 산산으로 향합니다. 이 때 장만은 휘하 병력을 보낸 후 계속 기다리다가 28일에 출병합니다. 반란군이 지난 곳을 다시 정리한 그는 마침내 황주 서쪽 신교에서 마주쳤습니다. 이 날이 2월 2일입니다.

... 그런데 이 날 투항병을 공격하러 오는 줄 알고 관군이 자기가 알아서 무너졌다고 하네요. -_-; 이 싸움에서 포로가 30명, 전사자가 30명이었고, 반란군에 투항한 자는 1천 8백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승리한 반란군은 다시 남진합니다.

+) 연려실기술에서는 이 때 수안에 갔다가 길을 돌아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게 먼저고 황주의 패배가 나중인 듯 합니다. 아니면 길을 나누어 갔는데 그 중 한 갈래와 관군이 싸웠다고 봐야겠죠. 지도상에서는 편의상 한 길로만 간 걸로 했습니다.

한편 부찰사 이시발-_-; 독전어사 최현, 황해 감사 임서 등이 평산 산성에서 적을 기다렸다가 6일 마탄 혹은 저탄(연려실기술)에서 마주칩니다. 이 때 관군이 전투를 준비하는 중에 적이 갑자기 들이닥치면서 패합니다. 방어사 이중로, 이덕부 등이 전사했고 남하하던 정충신이 급히 구원하러 갔지만 이미 늦었다고 하네요. 이괄은 이 때 잡은 장수 일곱 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보냈습니다.

2) 한양 점령
7일 조정은 급히 붙잡은 이들을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입니다. 반란군이 계속 남하하는데 관군은 맞서 싸울 생각을 안 한다며 장만 등을 탄핵하는 말들이 계속 나오죠. 이럴 땐 행동이 빨라서 8일에 피난길에 오릅니다. 강화도가 거론됩니다만, 일단 충청도로 피하기로 하고 세자를 세워서 분조를 만들어 전주로 보냅니다. -_-; 무슨 임진왜란도 아니고 말이죠. 산성으로 피하자느니, 팔도에 의병을 소집하자느니 하면서 전쟁 분위기가 물씬 납니다. 인조의 첫번째 피난길이었습니다.

이 때 이서는 병력 수천을 이끌고 청석동에 주둔했고, 이흥립은 수원의 병력 3천을 이끌고 임진강을 지킵니다. 한편 충청, 전라의 병력이 한양에 도착해 임금을 호위하죠. 이 때 이괄은 항왜를 시켜 이서의 병력을 교란시킨 후 본대는 샛길로 빠져 임진강을 돌파해서 한양으로 향합니다. 임진강을 지키던 파주 목사 박효립, 이흥립, 이귀 등은 그걸 모르고 있거나 수가 적어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죠. 장만의 병력도 급히 쫓아왔지만 이미 강을 건넌 뒤였습니다. 한편 최명길은 총독부사로 개성에 있었는데 적이 오자 빠져나와 파주로 갑니다. 8일, 인조가 피난하는 동안 반란군은 벽제관에 이르렀고, 9일 오후 한양에 도착합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최초로 쿠테타 병력이 한양에 도착한 것이죠.

"도성 안의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새 임금이 즉위하였다" 이괄군의 말이었습니다. 이 때  이괄의 아우 이수와 이충길, 이시언의 아들 이욱 등이 호응해서 수천 명을 이끌고 이괄을 호위했고, 각 군청의 서리와 하인들이 의관을 갖추고 나와서 맞이하였으며 백성들은 길을 닦고 황토를 깔고 맞이했다고 합니다. 개선장군이나 다름 없는 행차였죠. 한편 선조의 열째 아들 흥안군 이제가 임금을 따라 피난가다가 중간에 빠져서 이괄에게로 갔고, 이괄은 그를 임금으로 삼죠. 경기 방어사 이흥립도 이괄에게 항복해서 반란군의 위세는 커져 갔습니다.

3) 진압
한편 장만은 파주를 넘어 10일 새벽에는 고양 벽제관의 북쪽 혜음령에 도착합니다. 임금은 이미 떠났고 도성은 반란군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죠. 장수들을 모아 의논하기를 "시간을 더 주면 적세가 늘어날 것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칠까 다른 도의 병력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 하니 정충신이 "무악재를 점령하면 적이 공격할 수밖에 없을테니 높은 곳을 이용해 적을 치자"고 했고, 채택됩니다. 이괄로서도 요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충신이 장만의 명령 없이 단독으로 무악재를 점령했다는 말도 있군요.

이 날 이시발(아나 -_-;)은 공명첩 수천장을 성 안으로 몰래 보내 도성 내의 백성들이 호응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괄은 관군이 적은 것을 보고 쉽게 여겨 돌격했지만, 관군은 산꼭대기에서 죽을 각오로 싸워서 겨우 지켜냈습니다. 바람도 동풍이어서 힘들었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갑자기 바람이 서북풍으로 변했고 관군이 돌격, 반란군의 장수 이양이 죽고 한명련도 화살을 맞을 정도였습니다. 이괄이 이를 보고 자리를 옮기려고 할 때 남이흥이 "이괄이 패하였다!" 고 크게 외쳤죠. 이게 먹혔을까요? 제대로 먹혔습니다. 반란군의 한계일까요.

반란군은 이리저리 흩어져 민가에 숨거나 항복했고, 이괄은 급히 도망갔습니다. 이제 역시 도망가다 잡혀서 죽었죠. 임금 자리에 올랐다가 죽었으니 행복했을까요.

이괄은 12일 그 수하들에게 목이 잘립니다. 인조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으며, 18일에 공주를 떠나 22일에 도성으로 돌아옵니다. 그 엄청나던 기세에 비하면 초라한 결말이었습니다.

4. 후폭풍
반란이 한 번 일어났으니 그 후폭풍은 거셀 수밖에 없었죠. 거기에 역모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인조는 역모에 크게 민감해졌고 변방보다는 자기를 지키는 병력을 키우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마치 선조처럼요. 마지막까지 믿었던 이괄이 일으킨 반란이니 어쩔 수 없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중요한 때에 인조가 그렇게 방향을 바꿈으로써 더 큰 일이 닥쳐 버립니다.

이괄이 정말 반란을 계획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시작부터 상을 가지고 다투었던 공신 세력들간의 다툼으로 봐야겠습니다만... 이괄은 군권을 쥐고 있었고 이게 최악의 결과를 만들었죠.

자세한 건 다음 편에 다루겠습니다. 겨우 반란 하나에 힘을 다 빼 버린 조선이었습니다만... 후금은 날로 강성해졌고 가도의 모문룡은 여전히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를 날이 왔죠.

다음 편은 "정묘호란"입니다.

여담으로 이 때 이괄 휘하의 항왜들이 큰 활약을 해서 부산포에 있는 왜인들을 동원하자는 말이 나왔습니다. 일단 거부되었지만, 임진왜란 등을 통해 조선은 일본인들을 그냥 광전사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당시 부산포에 있는 일본인들은 거의 상인이었는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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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29 10:06
수정 아이콘
공교롭게도 조선이나 명이나 청군이 들어가기 전에 이미 내분(이자성의 난,이괄의 난)으로 자멸위기...
만주족에게 천운이 따랐다고 해야 할려나요.
초신성
11/06/29 12:18
수정 아이콘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특히, 지도를 보면서 읽으니 이해가 빨리 되는군요.
호떡집
11/06/29 13:55
수정 아이콘
아..아까운 북방의 강병들....눈물나네요.
무리수마자용
11/06/30 02:08
수정 아이콘
평안도에 아우토반을 깔아준 장본인이군요 크크크 그런데 지금까지의 인조의 정책을 보면 인사기용은 큰 변화가 없다고 해도 외교정책은 광해군때랑 상당히 차이가 많이 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에게 책봉을 받아야 왕노릇할수 있었다는 상황도 있지만, 분명 후금 입장에서는 짜증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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