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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6/28 02:10:33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남한산성 - 4. 인조반정



광해군의 묘입니다

1. 마지막 몸부림
22년 4월 18일, 황제의 칙서가 도착합니다. 하남 안찰 부사 양지원을 남로 감군으로 삼고 조선은 그에 따라 병력을 모아 요충지에 배치 후 명령을 기다리라는 거였죠. 또한 그들의 요구는 그에 대한 군량 및 선박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여기에 절대 반대했고, 오히려 섬이라면 몰라도 조선 본토에는 명나라의 배를 댈 수 없게 했죠. 군량 같은 문제는 비변사도 반대했습니다. 조선의 상황이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후금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건 그들도 동의한 상황이니까요. 광해군이 동의한 건 선박 차출 문제 뿐이었습니다. 그 용도가 요민들을 중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으니까요. 거기다 그 값도 명에서 지불한다고 했구요.

하지만 그런 광해군의 요구는 철저히 거부되었습니다. 거의 대꾸도 못 하고 예예거리만 하고 온 모양입니다. 거기다 만 명을 생각하고 있던 병력은 이만 명이 돼 버렸죠. 광해군은 몇 차례에 걸쳐 화를 내면서 거부하라고 명령하죠. 당시에는 광녕까지 점령당해서 후금이 중국을 더 강하게 압박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양지원이 칙서를 받은 때는 그 이전, 예전 상황에 따른 칙서를 지금 받으라고 하는 상황이 돼 버렸죠.

+) 덤으로 이 때 중국이 요동을 겨드랑이의 때 정도로 생각한다면서 큰 소리쳤는데 글쎄요 (...)

"국가의 위망(危亡)에 관계되는 일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해 쟁론해야지, 어찌 한것 감군을 두려워해서 입도 열지 못하는가"

문제는 이런 명에 따른 비변사의 대답이었습니다. 대충 따져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지금 병력 보내면 안 되는 건 우리도 아는데 중국 요구는 예전처럼 압록강 건너라는 게 아니라 요충지만 지키라는 거다.
2) 2만이라는 건 병력을 더 올리는 게 아니라 지금 거기 병력이 상하번 합치면 2만이니까 그거 얘기한 거다.
3) 안 그래도 중국이 의심하는데 칙서 거부하면 안 된다.
4) "산해관(山海關) 밖이 비록 이미 다 함락되었지만 번국이 중국을 섬기는 것은 성패(成敗)에 따라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딸린 사관의 평도 참 재밌습니다. 인조 대에도 모문룡에 대한 욕을 심심하면 볼 수 있는데 모문룡이 조선을 위해서 있는 거라고 돼 있군요.

이렇게 광해군과 비변사의 논의는 갈려 버립니다. 광해군은 모든 걸 거부하라고 하며, 명에서 내려 줬다는 3만냥의 은도 거부하려 했습니다. 반면 비변사는 어렵긴 해도 들어야 된다고 거듭 주장하죠. 양지원은 몇 차례나 왕을 윽박지르지만, 결국 6월 10일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 하고 돌아갑니다. 이 때 제법 많은 뇌물을 주어 설득한 것 같네요. 그리고 "교만하고 사치스러워서 자기 잇속만 챙긴다"는 평가로 보아 말을 그렇게 하지 대신들 및 대간들도 광해군의 뜻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부터 갑자기 생뚱맞은 얘기가 시작됩니다. 존호를 올리는 것이었죠.
광해군은 일생 동안 여섯 차례나 존호를 받습니다. 임해군, 영창대군의 역모를 처리한 것으로, 왜란 때 나라를 구했으니, 허균의 역모를 막았으니 등의 것이었습니다. 이건 계속된 옥사로 신하들이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그의 왕권이 강력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죠. 하지만 이 때의 존호는 뭔가 다릅니다.

당시 존호를 올리자고 한 인물들은 대사헌 남근, 대사간 유대건 등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황제의 마음을 감동시켜 칙서와 수만 냥의 은까지 받았으니 그 기념으로"였습니다. 광해군의 거부에도 존호를 받으라는 청은 계속됩니다. 왠지 피마새에서 충성 서약 사건이 생각나는군요. 원래 왕은 겸손의 미덕을 보이려고 존호를 계속 거부하다 "부득이하게" 받기는 하죠. 하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다르게 봐야 될 것입니다. 5월부터 시작된 존호 문제는 결국 11월에야 일단락됩니다.

建義守正彰道崇業
의를 세워 정을 지키고 도를 밝혀 업을 드높였다.
무엇이 義이고 正이며 道일까요. 業은 삼국지에 흔히 나오죠. 칙서를 거부하고 명의 사신을 그대로 돌려보낸 왕에게 바친 존호입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12월 말에 다시 존호를 올리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건 끝이 없었죠. 이런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는데 나라 일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대신들은 군사 분야에서는 계속 태업했고, 여기에는 열성적으로 매달렸으며, 광해군은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이 즈음 명에서 칙서가 다시 도착했는데, 광해군은 계속 핑계를 대며 미룹니다. 이 칙서를 받았다는 내용이 없는 걸로 봐서 인조라면 몰라도 광해군은 접수하지 않은 듯 합니다.

2. 광해군
한명기 교수는 광해군이 경연에도 참석하지 않고 정치를 거의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명과 후금에 대한 외교에서만큼은 계속 관심을 기울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봤듯 그는 자기의 정치생명이 끝나는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았죠.

군사 분야에서도 이건 마찬가집니다. 군기시를 만들어 조총과 화포를 만들 재료를 최대한 조달했고, 육군 및 수군의 훈련을 직접 참관하며 훈련도를 살폈습니다. 재위 말년에는 후금의 침공 가능성이 크게 줄었던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는 당장이라도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느낌의 명령을 내리죠. 이런 점을 볼 때 그가 전쟁을 준비하려 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준비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있죠. 내부가 안정돼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해군은 거기에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옥사나 폐모론 같은 거야 권력 싸움 내지 왕권을 강화하는 단계로 볼 수 있겠지만, 궁궐 문제는 다르죠.

일단 생각해 볼 것은 그 때 거둔 게 많긴 했지만 나라가 완전히 망할 정도로 크진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거겠죠. 이전 글에서 언급한, 인조 때 탕감한 11만석의 원곡은 5년간의 포흠, 미납 세금(-_-)이었습니다. 특히 두 궁궐을 동시에 지었던 17년부터 21년까지의 미납이었죠.

+) 여담이지만 애초에 목표는 광해군 때 미납된 요금 모두를 탕감이었던 거 같은데, 호조에서 아우성치면서 줄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계속 백성들을 생각하며 탕감하고 아예 문서를 불지르자던 착한 호조는 25, 26년에 5만+a의 미납금이 생기자 독촉하지 않은 수령들 잘못이라면서 악착같이 받아내자고 하죠 (...) 인조야 천천히 받자고 대답했지만요. 아무튼 수령들의 비리나 기타 여러 문제 등으로 탕감도 잘 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혹은 궁궐만큼이나 전쟁 준비에도 많은 비용을 들인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전 글에서 군기시가 쓰는 철은 1만근인데 3개월간 10만근이나 썼다고 했는데, 군기시 관련 기사는 14년이고 뒤의 기사는 1617년입니다. 22년에 병기 제조에 힘 쓴 사람들을 가자하는데, 이 때 이정배가 철 3만여 근을 사들인 공으로 가자됩니다. 1만근만 썼다는 건 비교적 상황이 좋을 때였죠. 전국에 조도사를 파견한 것도 궁궐 문제와 함께 국방에 쓸 물건들을 조달하는 목적도 분명히 있었구요.

뭐 이 정도로 변명은 가능하겠습니다만... 글쎄요. 인경궁과 경덕궁을 동시에 시작한 것은 누르하치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1617년이었습니다. 거기다 그 이유가... 직접 보시죠 -_-;

"창경궁 공사가 막 끝나자마자 요귀(妖鬼)의 재앙이 이 궁에서 먼저 일어나더니 창덕궁에까지 옮겨지고 말았다. 사세상 요귀가 작란하는 곳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먼저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를 착수했던 것인데 그것도 다만 공사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소궐(小闕)만 우선 짓도록 한 것이다" (18년 5월 16일)
당시에도 이게 어찌나 황당했는지 사관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왕이 늘 요괴스러운 변고를 가지고 유지를 내려 공사를 중단하라는 논을 막음으로써 신하로 하여금 감히 말도 못하게 하였다. 그때 세 궁궐을 지키는 장졸(將卒)들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요괴스러운 변고가 있다면 우리도 그 사이에서 잠을 잤는데 어찌하여 한 번도 꿈에 악귀가 나타나지 않았단 말인가.” 하였다."

특히 주목할 사람이 장만입니다. 광해군 대부터 변방에서 일했고 방비에 크게 힘 쓴 사람이었고, 광해군도 크게 신뢰했죠. 인조 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광해군 말년에 그는 병조 판서에 올랐는데, 건강을 이유로 계속 사직을 청합니다. 그는 몇 차례 궁궐을 짓는 걸 그만두자고 건의하지만, 광해군은 거부했죠. 그가 국경 방비에 가장 믿었던 사람이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직 상소에 대한 광해군의 대답입니다.

"사직하지 말라. 가을철이 이미 닥쳐서 오랑캐 기병의 세력이 더욱 성해지고 있다. 경이 이미 나랏일이 위급한 줄을 알았다면 왜 올라오지 않고 물러가서 큰소리만 치는가. 영건하는 일에 대해서 경의 생각이 이와 같았다면 무오년(1618) 사변이 생긴 초기에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이미 거의 다 완성되어서 전에 들인 공력을 포기하기가 어렵다." (22년 6월 29일)

적이 당장 쳐들어올 것 같이 말 하면서도, 궁궐 짓는 건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장만은 18년에 공사 중지를 건의했고, 광해군은 "미리 공사를 중지하면 인심이 더 붕괴될 거 아니냐"면서 거부했습니다.

광해군은 왜란을 통해 많은 실무 경험을 쌓은 왕입니다. 특히 북방을 많이 돌아다녔고, 백성들의 생활상을 알게 되었으며, 군사적인 지식 역시 충분히 쌓았습니다. 이와 비교할 만한 이는 창업 군주인 이성계와 이방원, 실무 경험으로 생각해도 문종 정도겠죠. 거기다 전후였고 정권은 불안했습니다. 그에게는 국가 재건이라는, 창업과 비슷한 임무가 부과되었고, 그 능력 및 경험 역시 부족하진 않았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후금에 대한 화친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걸 꿰뚫은 경험자의 생각이라고 봐야겠죠. 고려 때의 척춘경, 넣어도 될 지 의문이지만 이성계, 일본과 화친을 주장한 이정암과 곽재우처럼 적과 제대로 싸워 본 사람이 오히려 온건론을 주장할 때가 많습니다. 직접 칼을 맞대 본 만큼 적의 강함을 아니까요.
궁궐을 짓는 것도 그 때 본, 왕권이 땅에 떨어진 기억 때문이었을까요? 하지만 현대에 여기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최대한 옹호하려고 이것저것 찾아봤습니다만, 그 정도를 덜 순 있어도 한창 국가도 자기 위치도 위험할 때 자충수를 둔 건 확실해 보입니다.

광해군의 외교가 결국 성공해서 홍타이지도 잘 구슬렸고, 청은 쳐들어오지 않았고 인경궁마저 완성되었다면 그는 더 나가지 않았을까요? 여기서부턴 가정일 뿐이니 확신할 수 없네요. 지금까지의 제 결론은, 인조가 아니었더라도 좋은 말년을 맞을 순 없었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가 한 일이 얼마나 옳았든, 말년의 그는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이었으니까요.

3. 능양군
정원군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입니다. 그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죠. 이 중 셋째 능창군은 옥사에 휘말려 교동에 안치되었다가 살해당합니다. 자살했다고도 하네요. 이게 충격이 됐을까요. 정원군이 이 때문에 홧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의 첫째 아들이 능양군이었습니다.

여기에 참가한 인물은 이서, 신경진, 김경징, 김류, 이귀, 최명길, 김자점 등 서인 세력이었습니다. 거기에 훈련 대장 이흥립까지 끌어들이죠. 1623년 1월, 이 모의는 한 차례 들통나지만 이귀는 이를 강력히 부인했고, 김자점은 로비를 써서 겨우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이 때 부각되는 인물이 상궁 김개똥(-_-)이죠. 실록에는 김개屎(X 시)라 돼 있습니다. 그녀는 별로 예쁘진 않았지만 총명해서 광해군의 총애를 입었고, 김자점이 그녀에게 뇌물을 주어서 살았다고 합니다.

겨우 고비를 넘긴 반정 세력은 3월에 다시 거사를 치루기로 하지만, 이 역시 발각돼서 광해군에게 보고가 올라옵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반응은 시큰둥, 유희분과 박승종이 계속 조사할 것을 청했지만, 이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오래 계속된 역모 문제에 이제 지루해진 걸까요. 이 정도면 충분히 왕권이 강화됐을 거라 생각한 걸까요. 결국 단 한 번의 역모를 막지 못 한 그는 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1623년 3월 12일, 반란군은 집결합니다. 이 때 병력을 책임진 이서가 오지 않고 총대장 김류도 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귀가 급히 이괄을 대장으로 삼고 급히 일을 진행시키려 했는데, 다행히 이서도 도착하고 김류도 뒤늦게 나왔다고 합니다. 이후의 도화선이 될 사건이었죠.

3경, 반란군은 창의문을 넘어 돈화문에 도달, 이흥립이 문을 열며 무혈입성합니다. 이 때 광해군이 다급히 한 말은 "이이첨의 짓이냐?" 였습니다. 안국신의 집에 숨은 광해군은 곧바로 잡혔고, 반란군은 서궁의 인목대비를 구출해 명분을 확보합니다. 이 때 대비는 당장 광해군의 머리를 가지고 오라고 할 정도로 분노를 크게 드러냈다고 합니다. 이후 상궁 김개시부터 유희분, 이이첨이 처형됩니다. 이 때 이이첨은 "나는 살아선 효자요 죽어선 충신이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네요. 박승종은 달아났다가 자살했습니다.

이후 대비의 명의로 교서가 내려지는데, 이 때의 명분은 자기 친족을 죽인 것(일단 어미인 자기를 유폐했고, 형과 동생을 죽인 것), 큰 옥사를 일으켰고 민간 수천 채를 철거하고 궁궐을 건축한 것, 구신들을 내쫓고 간신의 말만 들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것으로 그 양은 이전의 것들을 다 합친 것과 비슷했습니다. 이런 명분으로 그를 내쫓아 광해군이라 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왕으로 앉힌다는 거였죠.

그가 바로 인조입니다.

인조 반정의 정확한 원인을 짚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능양군 자신의 원한이 서인의 불만과 맞 닿았다는 게 제일 크지 않을까 싶네요. 또한 가장 크게 내세운 것이 명을 배반한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 확실한 명분을 챙길 수 있었죠. 광해군 말에 이르러서는 군사적인 방비는 물론 후금에 대한 부분에서는 적극적이지 않았을 뿐 광해군에게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지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부터 얘기해 보겠습니다.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고 하지만, 반정 정권이 이를 얼마나 생각했을지는 의문입니다. 애초에 이건 폭군을 몰아낼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이후에 재평가 했을 때도 "이건 관용어나 다름 없으니" 신경 안 썼던 거 같네요 -_-a 그 이후로도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에서 명을 배반했다는 것이 계속 강조되었고, 현대에 이릅니다. 실제 이게 얼마나 큰 문제였는가는 별개로요. 다만 그가 폐위당하기 1년 전부터 명을 섬기느냐의 문제로 국가가 마비될 정도의 상황에 이른 것은 확실합니다.

확실한 건 모문룡이 가도로 간 이후 후금과의 대립은 없어지다시피 했다는 것입니다. 후금이 곧 쳐들어올 거라고 했던 광해군의 말과는 달리 후금이 강경하게 대했거나 무언가를 요구했던 적이 없었죠. 모문룡을 가도로 보낸 것은 그만큼 효과적인 한 수였던 것입니다. 오히려 후금의 위협이 극히 준 상황이었기에 인조반정이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는 거죠. 이건 정묘호란까지 계속됩니다. 폐위 1년 전, 그는 후금에 국서를 보내는데 여기에는 누르하치를 칸이라 부른 것이 확실히 기록돼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 광해군이 지향한 외교의 마지막 수순이라 생각하면 되겠죠. 뭐 여기에도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에 대해 온건했고, 명을 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이후 광해군은 여러 곳으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버진이를 만났을지는 모르겠네요. 아들과 며느리가 자살하고, 그 소식에 아녜 유씨가 죽은 상황에서도, 역모 사건에 연루되고 청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도 그는 꿋꿋이 살아남습니다. 역모가 실패했다는 말을 듣자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 풀고 울었다고도 하죠.

1641년 7월, 그는 세상을 떠납니다. 향년 67세, 나이로 따지면 역대 왕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만, 재위기간보다 세자였던 때와 유배기간이 더 길었던 왕이었습니다.

글쎄요. 지난 글 동안 광해군에 대해 제법 많은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결국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앞으로 더 공부해 봐야 알겠죠. 지금은 그저 어떤 만화책의 그에 대한 평가를 넣으며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거 재밌어서 한두권씩 사다가 다 모았는데 정말 괜찮네요.

"세자 시절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빛나는 외교에서 보이듯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은 열린 이성과 현실감각, 그리고 유려한 솜씨로 내치도 성공을 거두었으리라. 그런 상황을 만든 부왕 선조의 책임이 크겠지만"

"누굴 탓하랴.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몫인 것을."

===================================================

1기를 끝낸 느낌이군요. 이제부터 인조 얘기가 시작됩니다. 이괄의 난까지 단숨에 달려가고 싶은데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평화롭게 전국무쌍 2를 하고 있는데... 호위 무장 중에 고니시 마리아가 있더군요. -_-; 열전을 보니 조선에서 데려 온 양녀라는 말은 없고... 쓴 웃음 한 번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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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1/06/28 02:3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다시 봐도 아쉬움이 남는 왕이네요.
11/06/28 04:1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ChRh열혈팬
11/06/28 09:46
수정 아이콘
마지막 대사는 박시백화백의 만화에 나오는 말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 이번 학기 발표주제여서 열심히 자료 찾기도 하고, 눈시BB님께 여쭈어보기도 하고...^^

그런데 이 내용이 2개월만 빨리 연재되었으면 제가 좀 더 쉽게 발표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ㅠ_ㅜ ;; 농담입니다.


P.S.: 앞부분에서 "이렇게 광해군과 비변사의 논의는 갈려 버립니다. 광해군은 모든 걸 거부하라고 하며, <은>에서 내려 줬다는 3만냥의 은도 거부하려 했습니다" 에서 <은> 부분은 <명>으로 수정해야 할 것 같아요.
하야로비
11/06/28 13:3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이제 쿨타임 찼으니 선조를 깝시다(?)

선조의 찌질함은 단순히 우리 장군님(ㅠ_ㅠ)을 못살게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대, 그 다음다음대까지 악영향을 주었죠.
광해군이 참 안타까운게...저는 광해군이 '왕'에 대한 깊은 열등감에 시달렸을 거라 생각하며
(내가 진짜 왕인건지 내편은 왜 아무도 없는건지 신하들도 사실 날 무시하는 건 아닌지 어떡해야 왕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건지)
그러한 열등감이 광해군의 무리수(임해군, 영창대군 제거, 인목대비 폐모, 궁궐 재건에 대한 집착, 편중된 인사정책 등등)를 불러왔을 거라 생각합니다.
안타깝죠 참...물론 타고난 그릇이 다르긴 했지만 세종대왕이 부왕 덕분에 정말 편하게 왕 노릇 할 수 있었던 것과 참 비교되네요.
호떡집
11/06/28 17:10
수정 아이콘
선조는 만악의 근원이군요.

인용하신 박시백 화백의 글은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극뽁했으면 아빠의 역버프 받아서 명군으로 남았을텐데...
11/06/29 00:00
수정 아이콘
광해군이 당한것도 아쉽지만 조선이 멸망할때까지 수백년간 끝내 복권되지 않은것도 아쉽습니다.20세기 들어와서야 재평가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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