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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09 16:03
여담인데, 나무위키의 삼국지 관련 글이나, 삼국지 갤러리 같은데서 보면 아무리 봐도 촉한, 그 중에서 특히 제갈량에 대한 재평가가 참 많은거 같습니다. 재평가는 좀 점잖게 말한 것이고, 솔직히 저는 폄하에 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게 진짜로 오랜 시간동안 신화와 전설에 쌓여 감춰진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단지 역사의 슈퍼스타를 삐뚤어진 관점으로 폄훼하려고 애쓰는건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러니까 "제갈량이 북벌에 실패했으니까 망정이지, 성공했으면 마음을 뒤집어 찬탈했을지 그 누가 아는가?" 라는 뜻인데, 솔직히 역사에 if는 없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서브컬쳐에서 다루는 if 로서는 재미있을지 모르겠네요. (공명전의 마왕 공명 같은)
25/06/09 16:09
최근 촉에 대해서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지 않는 학자들의 연구에 대응한다면 기존의 관념에 대응하는 촉한에 긍정성에 대한 최근 연구를 가져오면 되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역사연구라는건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25/06/09 16:40
그냥 저는 사실왜곡으로만 밖에 안 보여서... 선제의 명을 받들어 위를 정벌하려고 한 건 황제가 되려는 야욕에 가득찬 행보이고, 황제에게 충신을 추천하는 건 주변에 자신의 인재를 배치하려는 야욕이며, 출사표에서 선제를 반복적으로 언급한 건 황제를 권위로 겁박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수준이면 그냥 무슨 소릴 해도 왜곡해서 해석햇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25/06/09 16:52
그래서 그냥 딱 이런 내용을 반박하는 학자들의 내용이 있으면 된다는 것이겠죠. 아무래도 학자의 분석을 가장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는건 같은 학계의 반박이니까요.
25/06/09 16:12
딱히 중요한건 아니지만 역사 계교수가 아니라 역사계 교수입니다.
여기서 계는 한국에서 말하는 학부같은 겁니다. 역사학부 교수 아무개 이런거죠.
25/06/09 16:25
(수정됨) 역사적 인물의 내면에 대한 판단은 결국 여러가지 정황 증거를 주관을 개입시켜 해석한 다음에 간접적으로 유추해낼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보니까, 본인의 생각을 명확하게 서술한 글 같은게 갑자기 어디선가 툭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은 그냥 믿고 싶은대로 믿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근현대사의 영역으로 가면 남아 있는 자료가 많아 의도, 사상을 확정하는게 매우 쉬운데, 삼국지는 우리에게 다소 익숙하다뿐이지 실제로는 사료가 태부족한 머나먼 고대의 일인지라...
25/06/09 16:29
학자의 해석들 중에서도 이런 해석이 있다고 가져 온 것이니까요. 국내 중문학과 교수분의 출사표 분석글에서도 이건 충성을 다루는 글이 아니라 제갈량의 권력을 증명하는 글이라는 논문이 있었기도 했죠.
25/06/09 16:53
저는 제갈량에게 한신의 풍모가 있다고 봅니다만 반대로 한신은 역적의 상인가 아니면 공이 너무크고 지략이 웅대해서 황제가 쳐내지 못하는걸 황후가 투기와 계략으로 처형하고 과거 날조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가 필요하다 봅니다
즉 제갈량도 보기에 따라서는 한신보다도 더 꿈이 웅대하다 할수 있겠죠 창업주 공신들과도 한세대 이상 차이나니 집권 시에는 이미 공신 무리들이 다 죽은 후라서 동시대에서 떨어져 나간 한신보다도 강력한 권력이 있었을것이구요 다만 위략 등 어딜 찾아보더라도 찬탈이나 독자 세력 구축의 흔적은 찾기 어렵습니다 물론 북벌이 성공하지 못하고 일찍 죽은것도 크긴 합니다만 사실 그럴 요량였으면 장완 비위등 승상부를 성도에 남겨두지 않았겠죠 오히려 그의 충성심은 스스로 가정전투 이후 삭탈한 부분과 그의 사후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 목숨을 버림으로서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25/06/09 17:11
제 생각이지만 제갈량은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 유씨 황실을 위해 목숨 버린것 덕분에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사마의도 정변 이후 구석은 물론이요 승상직이고 뭐고 다 거절했지만 아들, 손자가 찬위하니 역심이 있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 감이 있죠.
25/06/09 17:53
네 조조가 두려워한것이 자기대에서 찬탈하지 않아도 아들(조비)가 해서 결국 본인도 후세에 역적이 되는거였죠
제갈량 아들 손자가 목숨버리고 지킨것도 충절의 표상이 될만합니다
25/06/09 18:57
사마의의 정변은 조상의 횡포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거병했던 것이고 조정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관구검이 사마사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을때조차 사마의를 두고선 '사마의는 충신인데 아들은 역신이다. 사마사 대신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로 임금을 받드는 신하를 교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으니까요. 본격적으로 사마의의 자손들이 찬위 가도를 달리기 전까지 사마의는 공식적으로 '대위의 충신'이었습니다.
25/06/09 19:05
관구검의 상소를 삼국지에 주석으로 올린건 사마씨가 아니라 사마씨를 부정하고 찬위한 유송의 학자인 배송지입니다. 배송지가 굳이 사마씨에 대한 당대 인식을 두고서 사마의도 같이 역적이라고 칠려고 했으면 이 상소를 삼국지에 주석으로 안 달면 그만이지 사마의에 긍정적인 기사를 굳이 실어줄 이유가 없죠.
25/06/09 19:01
글쎄요 이미 조조가 그런 명분으로 한실을 서서히 뒤엎은 시점에서 그냥 황조가 바뀌든 말든 유리해 보이는 쪽으로 줄 갈아타기라는 냉소적인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관구검의 명분대기도 과연 그가 실제로 정권 뒤집으면 같은 사마씨인 사마부에게 권역을 실제로 줬을지도 의문이고
제갈량의 충심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반대로 위진의 문벌귀족의 충성심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애초에 훗날 남북조의 패부 체제에 실질적인 영향을 준 건 촉이 아닌 위진이고
25/06/09 19:08
봉건 강상윤리와 정통관이 이미 부정된 오늘날, 권신의 "찬위"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대의 유식자들도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오직 덕 있는 자가 거둔다"고 했고, "예로부터 백성의 해악을 제거하고 백성의 귀의를 받은 자가 곧 민주(民主)다"(《위서·무제기》 주석 《위씨춘추》 인용)고 보았다. 따라서 왕망, 조조, 사마소 등의 역사적 공과를 평가할 때 그들이 찬위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제갈량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
밑에서도 썼지만 교수님이 직접 말하고 싶었던건 이 부분인거 같습니다, 논설 첫 부분부터 사마의와 제갈량이 당대에 '낭고'라고 불린거 얘기하는것 말씀하시는거 보면 동위로 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요.
25/06/09 17:02
(수정됨) 뭐 속마음이야 어쨌든 결국 안했으니 후대사람이 충신의 대명사처럼 쓴것도 못할것도 아니긴하죠 위진남북조시대 즈음에보면 그정도 위치된 놈들 가문치고 찬탈 안한 친구들이...
25/06/09 17:06
(수정됨) '백거이가 《방언오수병서》에서 말했듯이 "주공이 유언을 두려워했던 날, 왕망이 겸손히 참았던 때, 만약 당시에 죽었다면 진실과 거짓을 누가 알았으랴"라고 한 것처럼이다.'
그래서 저 교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시죠. 또 구석을 받으라는걸 거절하지 않고 큰공을 세우면 구석은 물론이요 구석 이상도 받겠다는건 봉건시대 신하로써 매우 불궤한 말이고 이미 비슷한 사례가 여럿 있다는게 저 교수님의 논설이라...
25/06/09 17:41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북벌이 성공했다면 지금 이미지와는 다른 면모가 나왔을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제갈량의 행보는 충신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25/06/09 17:49
제갈량이 충신으로 남고
쓰마이가 역적이 된건 서로 수명이 차이나서다 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결국 제갈량은 역사든 소설이든 충신의 대표로 남아있을뿐 뭐 그외는 전부 상상일 뿐이죠
25/06/09 17:57
그리고 비교적 근대인 이순신 장군도 역사에 남을 충신이지만 만약에 노량 전사 없이 삼남을 전부 통치했다면 민심이 급격히 쏠려 또다른 이씨 왕조가 안되었으리라는 보장이 어딧겠습니까
역사라는것은 if를 붙이기도 재밌겠지만 과정보단 결과로 평가하는게 맞다고 보는 편이라 어쨋튼 제갈량도 이순신도 만고의 충신입니다
25/06/09 18:16
유비에 대한 충성심은 진짜라고 보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역심은 품고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갈량이 유비를 따라나선 것이 유비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유비의 대업에 헌신할 각오를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보통 완력을 쓰는 사람들은 인물 그 자체의 매력에 충성을 하는 편이고 지모를 쓰는 사람은 자기와 뜻이 일치할 때 따릅니다. 관우, 장비와 제갈량 충심이 미묘하게 달랐을 걸로 짐작합니다. 순욱이 조조에 반대하다 죽은 것도 그런 연장선이고요. 그래서 제갈량은 역성혁명을 염두해 두지는 않았겠지만 만약 유선이 대업을 이루는데 방해가 됐다면 갈아치웠을 것 같기는 합니다. 유비의 다른 자식을 내세우든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게 자신이 됐든 말입니다.
25/06/09 18:46
"조씨가 한을 대체하고 사마씨가 위를 대체한 것처럼 정상적인 왕조 교체에 속한다고 본다."
고작 이 한 줄을 객관적 논리라는 방패에 감추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에 자아의탁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25/06/09 19:01
'봉건 강상윤리와 정통관이 이미 부정된 오늘날, 권신의 "찬위"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대의 유식자들도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오직 덕 있는 자가 거둔다"고 했고, "예로부터 백성의 해악을 제거하고 백성의 귀의를 받은 자가 곧 민주(民主)다"(《위서·무제기》 주석 《위씨춘추》 인용)고 보았다. 따라서 왕망, 조조, 사마소 등의 역사적 공과를 평가할 때 그들이 찬위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제갈량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
교수님이 직접 말하고 싶었던건 이 부분인거 같습니다,
25/06/09 19:09
네 그래서 저 셋을 평가할떄도 찬위 뿐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행보, 그들의 자손들의 행보까지 보고 사관들이 기록을 적은 거고 평가를 한 거잖아요?? 제갈량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솔직히 저 해석도 나온지 20년 넘어간 해석인 데다 학계 주류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그거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25/06/09 19:12
예, 그래서 이런 의견도 있다고 말씀드린거고 혹시나 이게 마음에 안 든다면 반박할만한 근거가 있는 연구 내용을 같이 들고오면 좋겠다는 거죠.
'제갈량의 <출사표>는 겉으로 드러난 언어 수사적인 측면만을 살펴보면, 승상인 제갈량이 “한실부흥(興復漢室)”을 위하여 촉한의 마지막 황제인 후주 유선에게 온 맘을 다하여 충성과 충언을 바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그러나 <출사표>를 바치기 전에 제갈량은 이미 촉한의 주요 핵심 국가 권력을 죄다 자기의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었다. 제갈량은 군대 출동을 빌미로, 국가권력을 오로지 하면서 허수아비 황제인 유선을 감시 통제하여 무력화하였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재정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출사표> 그 어느 곳에서도 황제 유선을 최고통치자로서 인정하는 부분은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출사표>는 황제를 억압하고 제갈량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재정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내용으로만 조직되어 있을 뿐이다.' - <출사표>에 나타나는 제갈량의 독재 정치 (2017)/ 홍윤기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https://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564829 국내에서도 이런 논문이 있습니다. 이건 아직 10년도 안 되긴 했네요.
25/06/09 19:17
이게 통설이 아니라면 통설이 왜 아닌지 반박하는 논문을 들고 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쪽에서 논문을 제시한다면 마찬가지로 이게 통설이 아니라는걸 논문으로 증명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25/06/09 19:22
오히려 반대 아닌가요 이게 왜 통설인지부터 주장을 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
이 논문이 왜 현재 학계의 해석과 맞아떨어지며 주류해석이라는 근거가 있습니까??
25/06/09 19:33
https://arca.live/b/histor25385328036y/67246336
정권을 확립하고 정비한 제갈량은 동시에 정치권력을 승상부에 집중함으로써 안정적인 안정적인 지배를 수립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는 남정・북벌을 통해 자신의 출정지인 한중에 있는 승상부와, 부재 중인 성도에 설치된 승상부라는 두 개의 강력한 군부 위에 군림하며 권력의 안정화를 이루었다. 촉한에 있어서 「패부(覇府)」의 존재와 재상으로의 권력 집중은 왕조 교체의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며, 황제의 지위나 목숨을 위태롭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재상의 권력이 몹시 강대하고, 개인적 지도력에만 근거한 정치체제를 시행했기 때문에, 제갈량・장완・비의로 재상의 교대를 거듭할 때마다 정치적 공백이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중략) 이러한 권한의 분산과 절대적인 지도자의 부재는 정치적 혼란기로 이어졌으며, 이로써 그들은 위의 군사력에 대응하는 저항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 촉한정권 권력구조의 재검토 (2010) https://spc.jst.go.jp/cad/literatures/83 가져오려면 이런 얘기들에 반박하는 논문들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제갈량이 찬위의 마음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후한말 패부를 계승하는 쪽으로 보면 제갈량이나 조조가 패부체제를 구축하고 기존 조정 이상의 권력을 누리고 황권 이상의 권력을 누린 권신이다는건 꽤 많이 나오는 얘기일 텐데요.
25/06/09 19:37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실행하지 않은 행위가 안정적인 정권 찬탈을 위한 몸사리기였다는 주장이 나오는 글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순신이 왜구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니 역심이 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급 급전개 아닌가요? 오히려 자오곡 쓰로잉을 했으면 역심 인정하겠습니다
25/06/09 19:39
논거가 있지요. 함부로 기책을 썼다가 권력의 핵심이 되는 군사력을 상실하거나 피해를 입으면 그만큼 촉 내부에서 권위가 추락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굳이 제갈량만이 아니라 위에서 환온이나 유유의 사례도 기실 다를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고요.
그래서 이순신이 제갈량급의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전 이순신이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고 '낭고호시'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이순신과 제갈량은 존경받고 추앙받는 위인이지만 두 사람이 가진 위치와 권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죠.
25/06/09 21:27
그리고 환온이나 유유 사례가 제갈량의 사례에 비교되면서 제갈량이 자제했을 것이라는 근거가 되려면
걔들이 선대여야 맞는거 아닌가요? 제걀량은 걔들이 누군지도 모를텐데 환온과 유유를 보면 쓰로잉하면 찬탈을 못하니까 쓰로잉 자제하자 라는 기적의 판단을 했다는거죠? 역사는 길고 길어서 정례와 반례 뭐든지 끌어다 붙이기 나름입니다 사실 개업군주는 말도 안되는 하드 쓰로잉을 하고도 이겨 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걸 생각하면 쓰로잉을 안한 것 자체가 정권 보전을 위해 협력적이었다는 증거 아닐까요
25/06/09 18:57
최소한 본인이 직접 난을 일으키지 않은 이상 역심이 있었느냐 아니냐는 탁상공론이죠
그리고 제갈량은 유선 생전에도 스스로 작위를 낮추거나 유선이 이엄 말 듣고 소환했을 때 일단 명령 따랐다는 점에서 충성심은 있다 보는게 맞다 봅니다 후대에 환온 유유도 그렇고 찬탈할 때 제갈량의 고사를 댄 거 자체가 위의 조조, 진의 사마의, 오의 손준 손침 등과 달리 진짜 찬탈을 시도한 적이 없으니 찬탈하려는 거 아니다 시늉 낼 때 들이댈 수 있는 게 제갈량말고 없으니까요
25/06/09 19:10
후대에 탁고지신으로써 찬위를 할때 곽광, 주공의 예를 들어서 찬위를 한거랑 비슷한 상황이겠죠. 이 교수님은 그건 그거고 제갈량이 왕도나 주공의 예처럼 '제갈량에게 찬위의 마음이 정말로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근거가 있다'는 주장이시니까요.
25/06/09 19:12
그래서 그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논증이겠죠?? 제가 아는 한 유선의 권력이 제갈량 시절 조씨 집권기 헌제나 사마씨 집권기 조씨 황가들마냥 무력화되었단 근거를 대진 못하더군요
25/06/09 19:15
위에서 제가 새로 가져온 논문에서도 촉한 황권의 무력화를 말하기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공을 세우면 구석은 물론이요, 십명도 받겠노라'는 발언은 신하로써 불궤한 발언이 맞겠지요. 제갈량의 반례로 구석의 예를 한사코 사양하고 동진 원제 사마예에게 충성한 왕도의 예를 들고 있고요.
25/06/09 19:19
반대로 내가 공을 세운 게 없으니 받을 수도 없다는 해석도 될 수도 있죠??
예전에 영조 시절 유엄이 건륭제가 쳐들어오면 그냥 우린 항복하면 된다 라는 실록 기록도 실제 의도는 그게 아니고 어쩌고저쩌고 라는 식의 해석이 나오는데 말이죠
25/06/09 19:26
(수정됨) 유엄은 그래서 영조에게 무례하고 저질스러운 발언이라 족히 논할 가치가 없다고 타박받기도 했고...무엇보다 영조는 자신의 집권 명분과 왕권탈취에 대한 스캔들인 '게장 드립'은 결코 용서치 않았지요.
왕망은 구석을 받고 전한을 탈취했고 조조 역시 구석을 받고 후한을 탈취했다는건 온 천하가 알던 시절입니다. 한의 신하를 자처하는 인물로서 '공이 있으면 구석은 물론이요 그 이상도 받겠노라'라는 발언은 선을 넘은게 맞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발언을 하고도 제갈량은 오히려 이엄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제갈량이 죽은 다음에는 사마의를 수식하는 '낭고' 발언이 나오며 유선은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제갈량의 사당 짓는걸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제갈량'이라는 이름 석자를 때고 보면 '황권도 위협하는 권신'이라 볼 여지도 있겠지요.
25/06/09 19:26
그냥 제갈량을 의심할 정도면, 어려운 나라에 순수 충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구나 합니다. 제갈량이 틀림없이 역심 있다고 까는 게 아니라, 망탁조의를 무조건 인간 이하쯤으로 보지 말자는 큰 맥락에서 던지는 글 같기도 한데, 제갈량빠라서가 아니라 이런 논법이 예컨대 친일논쟁에 써먹히는 걸 알기 때문에 기분은 좀 별로입니다.
곁들여, 이막 저 사람은 행적을 전부 보지 않더라도 저 글 하나만 읽어도 참.. [제갈량 사당 세워주고 이막 살려준 가상 유선]의 제갈량 호감도<<<넘사벽<<<실제 유선의 제갈량 호감도 이렇게 보입니다.
25/06/09 19:29
그래서 지금 제가 제시하는 학자들이 무슨 친일파 수준의 논리를 가져서, 아니면 독재를 옹호하려고 이런글을 썼다는 주장이신거 같은데 위에서도 몇번 말씀드립니다만, 정 이 논설에 반박하고자 하신다면 이 논리에 학제적으로 반박하는 논문을 들고 오시면 될 거 같아요. 전 어디까지나 학자의 논설을 가지고 온 거지 '친일 토착왜구'짓 하려고 이런 논설을 들고 온 것은 아닙니다. 이런 프레임은 뭐랄까...딱히 할 말은 없으니 '상대의 본심은 타락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색깔론 페인트칠을 하자'는 거 같달까요?
25/06/09 19:49
제 생각인데, 된장까스님이 자꾸 '논문' 방패를 들이미시는 거 같은데요,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중국사 논문 뒤져가면서 근거를 제시할 사람은 없을 거 같고 (삼까페나 삼갤 정도겠죠) 그 전제하에 말씀드리자면, 제갈량이 충신인가를 단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다들 제갈량의 삶의 행적을 보고 그럴거 같지 않다는 강한 심증을 가지고 있을 뿐이죠.
이글 본문만 봐도 논리에 적절치 않은 부분은 다 짤라먹은게 보입니다. 이엄이 구석을 권한 것을 강력한 권신의 행세로 의심하고 있는데, 제갈량의 답변은 매우 강한 부정이었죠. 저 빌미가 된 [여러 신하와 함께 승진할 때 십명(十命)도 받을 수 있거늘, 하물며 구석(九錫)이겠는가!] 는 위를 정벌하면 신하로서 더 할 나위없다는 표현이지, 구석을 내놔라는 이야기가 아니죠. 이막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막이 제갈량을 헐뜯는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당한건, 그냥 담백하게 이막의 상소가 후주에게 마음에 안 들어서였겠죠. 그런데 이막이 헐뜯는 건 '일리가 있다' 면서 그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구요. 동윤을 기용해 궁 내 기강을 바로잡아서 후주가 두려워했다는 걸 마치 동윤이 후주를 억압했다는 식으로 왜곡하는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입니다. 다 이런 식이죠. 출사표를 왜곡해서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결정적으로, 제갈량이 황권을 위협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당대에 살던 인물들이 아무도 그런 소리 안했구요. (후주 본인조차) 정말로 제갈량이 후주의 권한을 다 뺏어가 독차지하는 재상이었다면, 제갈량 사후에 위상을 격하하던가, 아니면 제갈량 파의 세력을 축출할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제갈량의 사후 장완-비의 라인을 그대로 가동했죠. 제갈량의 자손도 아주 어여삐 여기면서 키웠구요.
25/06/09 19:57
(수정됨)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학자들의 논문 방패를 들이밀었다고 한다면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의 논문들을 창으로 쓰면 되지 않겠느냐고 대답드린것 뿐입니다. '그 전제하에 말씀드리자면, 제갈량이 충신인가를 단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다들 제갈량의 삶의 행적을 보고 그럴거 같지 않다는 강한 심증을 가지고 있을 뿐이죠.'라고 하시는데...
본문의 교수님을 비롯해서 지금 제가 들고온 학자분들은 여러 전거를 들어 제갈량의 권신됨과 석연치 않음을 말하고 있는데 반박하는 논리들은 그저 제갈량은 역신이나 권신이 아니라는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 개인의 심증'이라는 얘기밖에 되질 않는다며 스스로 인정하시는 꼴이 아니신지요? 거기다가...오에서는 사사로이 손준이 손침에게 보정의 권한을 물려줬다고 다른 보정대신들이 그게 말이 되느냐고 손침을 공격했는데 제갈량은 장완-비의 라인을 사사로이 후계자로 삼아 재상의 권력을 물려줬으며 유선은 이를 사후승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선은 성인이 되어 나이 30이 가까워 성인으로써 통치가 가능했는데도 말이죠. 유선이 겨우 친정권을 좀 행사하기 시작한게 본문에서 나오듯이 비의 시절에서야 간신히 가능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40세에 육박하고서야 가능했던 겁니다. 이렇게 봉건사회에서 신하가 자신이 가신 권력을 사사로이 후계자로 지명하는 사례를 우리는 보통 권신 세도가의 정치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리고 본문의 교수님이 지적하는건 인신으로써 더 할나위 없다는 표현을 써도 빌미가 된 [여러 신하와 함께 승진할 때 십명(十命)도 받을 수 있거늘, 하물며 구석(九錫)이겠는가!] 는 쓰면 안된다는 겁니다. [정말로 큰 공이 있다고 구석 이상을 받고] 한실을 찬탈한 왕망, 조조의 사례가 있는데 구석은 물론이요 십명도 받겠다는건 굉장히 오만하고 위험한 발언이라는 지적이고 굳이 한실의 충신을 자처하는 자가 그 말을 써야 하는가라는 것에 대한 의문인 거지요.
25/06/09 20:06
제가 첫 댓글에서 언급한 바가 있지만, 또 위에서 보니 링크를 보건데 된장까스님이 아마 직접 찾으신게 아닌게 확실하네요. (삼갤 주 레퍼토리였음)
님이 예시로 든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손준이 사사로이 손침에게 보정을 물려주니 신하들이 반발했죠? 그런데 촉에서는 장완-비위-진지가 권력을 이양받았는데 누가 반발했습니까? 그게 불충하다고 촉에서 언급하던 사람이 있던가요? 손준-손침은 가족 관계기 때문에 권력을 물려주는게 부자연스럽지만, 제갈량이 대체 왜 생판 남인 장완에게 권력을 물려주고나서 '나의 권세가 영영가겠지' 이러겠습니까? 이걸 '충성스럽고 능력있는 인사를 후임으로 추천' 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황제에게 절대 안 물려주려는 음험한 권신'으로 해석을 하는 거 자체가 오류라는 겁니다.
25/06/09 20:13
(수정됨) 당연히 아무도 여기에 반발을 할수 없죠, 손준-손침 라인은 보정 중 일부였기 때문에 다른 보정들이 말이 안된다고 들고 일어났던 것이고 제갈량은 분명 같이 유비의 탁고대신이었던 이엄을 이미 숙청한 상태였으니까요. 본문에서 지적했듯이 유비는 탁고대신으로 이엄도 분명히 지목했고 그에게 군권을 나누어 주었는데 제갈량은 이엄의 군권까지 다 가져가 홀로 탁고대신의 권력을 독점했고 [구석이 아니라 십명이라도 받을 수 있다]라는 불궤한 발언을 두고 되려 이엄을 숙청할만큼의 권력을 챙겼습니다. 제갈량 라인이 모든 촉의 권력을 다 독점했기에 '사사로이 권력을 독점한 제갈량은 분명 신하로써 주제를 넘었다'고 주장한 사람은 되려 처형되는 마당입니다.
제갈량이 왜 생판 남인 장완에게 권력을 물려줬으냐고요? 그거야 양아들 제갈교는 요절했고 친자인 제갈첨은 이제 7살밖에 안되었으니 자기 라인에게 사사로이 물려줄 수 밖에 없던 거지요. 오히려 제갈량이 탁고의 권력을 독점하고 이걸 유선에게 반환하지 않으며 자기 계파에게 계속 물려주라고 명시한거부터가 이 권력독점 체제를 당시에 제어할 사람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오의 사례가 그 반례인거고요. 정말로 제갈량이 탁고대신으로써의 명분에 충실했다면 성인이 된 유선에게 권력을 돌려줬어야 정상입니다, 그는 '탁고대신'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사사로이 후계자를 지명하고 유선에게 이를 강요했으며 유선은 이를 사후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는게 실제 현실입니다.
25/06/09 20:21
그러니까 비뚤어지게 해석하는게 근거가 있냐는 말인데요. 지금 된장까스님은 제갈량 일파가 권력을 독점했기에 이막이 바른 소리를 했는데도 황제가 참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은 자신의 계파에게 권력을 독점시켰다- 이 말씀인데
저는 대체 죽는 사람이 혈연도 아닌 계파에게 권력을 물려준다는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논리하고도 안 맞아요. '제갈량의 권력 독점을 본 후주는 장완에게 재상 자리를 안 줌으로서 장완을 견제했다' 와 '장완 등의 제갈량 계파가 두려워서 모든 권력을 물려주었다' 그냥 바로 상충되지 않습니까? 이걸 기어코 제갈량의 권력욕에 끼워맞추려고 하니 이상한 논리가 되는 셈이죠. 그냥 담백하게, 제갈량은 후임을 추천하고 죽었고, 후주가 보기에 적절한 인선이여서 승인했고, 다만 제갈량의 재상 자리는 특별하니까 이후 라인에게는 재상 자리를 주지 않았고, 나랏일을 훌륭하게 치르던 신하가 죽었는데 이막이 개소리해서 빡쳐서 죽였고. 이걸 죄다 뒤틀고 있잖아요.
25/06/09 20:24
(수정됨) 그러니까 제갈량에게 대체 그런 권한이 어디 있느냐는거죠. 탁고대신은 어린 황제가 성년이 되면 탁고의 의무를 다하고 성인 황제에게 권력을 되돌려주어야 하는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제갈량은 [죽을때까지 성인이 된 유선에게 친정할 권리를 주지 않았으며, 그런 권력을 물려줄 후계자로써 장완을 지목했고 결국 유선은 비의 시절에야 간신히 친정의 권한을 가져오는데 성공합니다.] 적어도 제갈량이 제대로 된 탁고대신이 아니었음이, 본래 황제가 가졌어야 할 전제권력을 명분이 없음에도 독점했음이 이로써 증명은 된다고 보시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유선은 장완에게 재상의 권한을 주지 않음으로서 [보정이 아님에도 보정의 절대 권한을 받은] 장완을 필사적으로 견제했고 계속 이런식으로 황권을 돌려받기 위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본디 자신이 받아야 할 권한인 [친정 권력]을 되찾은 겁니다. [제갈량이 죽고 십여년이 훨씬 넘은 뒤에서나] 간신히요.
원래대로라면 유선이 성년이 되었을때 제갈량은 탁고대신으로써 권력을 유선에게 돌려줘야 했지만 제갈량은 그 대신 같은 탁고대신 이엄의 권한을 빼앗고 숙청하고 절대권력을 쟁취하고 마침내는 [구석이 아니라 십명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불궤한 발언을 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제갈량 생전에 없어졌다는게 이런 문제제기인 겁니다.
25/06/09 20:39
원래 통설은 이렇습니다. 후주가 놀기를 좋아하고 정사를 보길 게을리해서 제갈량이 여러 차례 간언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 대로라면 제갈량은 후주에게 억지로 권력을 쥐어주고 싶었지만 황제가 귀찮은 정무를 게을리 한 거겠죠.
된장까스님은 제갈량이 어거지로 권력을 독점해서 후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용기를 내고 싶었지만 정계를 제갈량파가 다 차지해서 제갈량의 후임조차 자기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했다. 후주는 대단히 오래 산 사람입니다. 정말로 후자가 맞으려면, 후주가 이 인사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간접적으로나마 표하거나, 아니면 촉, 그것도 아니면 위나 오에서 관찰자가 뭔가라도 언급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 언급이 전혀 없잖아요. 막말로 후주가 나중에 진에 끌려가서 '제갈량같은 놈 땜에 살기 퍽퍽햇는데 진에 오니 살기 좋습니다.' 라고 해도 후주는 전혀 문제될 게 없는데 전혀 그런 소리가 없지요. 후주의 행태를 보면 전자임이 강력하게 의심이 듭니다. 정말로 자신의 권력이 뺏겼다고 아쉬워할 사람이면 진지쯤 되는 무렵에서는 정사에 깊이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주는 그냥 놀아제끼죠.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대체 권신이 '자기 계파'에게 권력을 주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혈연 관계라면 이해라도 하죠. 제갈량이 그걸 통해 얻는게 뭘까요? 뇌피셜로 장완에게 '제갈첨이 크면 권력을 물려주도록' 같은 언급이라도 했을까요?
25/06/09 20:55
'후주가 놀기를 좋아하고 정사를 보길 게을리해서 제갈량이 여러 차례 간언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대체 제갈량 시절에 이런 얘기를 언제 한 적이 있었는지요? 출사표에서도 대충 환관 기용하지 마라, 나의 승상부를 존중해라라고 했지 어디에 제갈량 시절에 놀기 좋아하고 정사를 보기 게을리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까? 애초에 유선이 친정하기 시작한게 비의대부터라고 나오는게 현실인데 친정도 못하는 황제가 놀기를 좋아해서 정사를 게을리 할 수는 있습니까?
후주가 이 인사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간접적으로나마 표하거나, 아니면 촉, 그것도 아니면 위나 오에서 관찰자가 뭔가라도 언급을 했어야 합니다. - 예, 그랬는데요? 조예부터가 조서에서 '제갈량은 유선 형제를 핍박하고 권력을 홀로 독차지 하고 있다'고 하고 있고 오의 손권은 본문에서 나오다시피 촉주가 유약하고 어려서 걱정이라고 떠봤다가 등지한테 '촉의 진짜 실세는 제갈량이다'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유선은 촉오동맹에서 어떤 역할도 할수 없었고 대외적인 촉오관계는 모두 제갈량이 주관했습니다. 유선이 성년이 된 이후까지요. 거기다가 후주는 제갈량-장완이 자신이 딴짓 못하도록 감시역으로 둔 동윤을 몹시 미워했고 진지를 발탁한 이후에는 그게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후주가 나중에 진에 끌려가서 '제갈량같은 놈 땜에 살기 퍽퍽햇는데 진에 오니 살기 좋습니다.' 라고 해도 후주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 - 낙불사촉을 잊으셨는지요? 적어도 유선이 그립지 않다는 촉은 제갈량이 집정하고 제갈량의 사당 지어달라고 제갈량의 계파인 형주사인들이 계속 칭얼거리던 그 촉이 아니었습니까? 유선이 그립지 않다던 촉은 제갈량의 촉이 아니라 딴 사람의 촉이었나요? 정말로 후주가 놀아 재꼈다고만 할거 같으면 후주 재위 말기에 황호가 전횡한다고 욕먹을 일도 없습니다. 본래 한나라 황제들이 환관을 이용해서 친권을 행사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놀기 좋아하고 정사에 관심만 없었으면 황호가 그렇게 비호받지도 못합니다. 이제 권신이 자기 계파에게 권력을 준다는 사실은 인정하시는 모양인데 팩트는 제갈량은 [탁고대신]이고 [그 권리를 놓지 않은체 후계자에게 물려줄게 아니라 친정할 권리를 유선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탁고의 법도가 맞고요. 그러니 실제로 촉에서 우선이 친정한것은 비의 시절때부터죠.
25/06/09 20:58
류지나 님// 이렇게 '본인의 심증'수준도 딱 제 레벨에서 막히는 마당인데, '님만의 심증'으로 학자들을 깔거면 이럴 시간에 후한말~삼국시대 관련 논문들 뒤적거려서 학문적으로 이 논리에 반박할 논리를 가진 논문을 마련하는걸 권장드립니다.
25/06/09 20:13
개인적으로 제갈량이 제위까지는 욕심이 없었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스로가 촉한의 권신이 되고자 하는바는 명확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유비 사후 형주파와 익주파가 균형을 이뤄서 서로 견제하는걸 설계한 느낌인데 제갈량을 위시한 형주파가 아예 득세해버리고 그냥 승상부와 상서대가 권력의 핵심 OF 핵심이 되어버렸죠. 한데 세력이 약했던 촉한 입장에서 절대적인 1인 권력자의 운영되는 바가 더 좋은 체재라고 생각은 하지만 마냥 유비와 제갈량이 이상적인 군신의 관계의 표본이냐 이건 모르겠단 느낌이죠. 그러다 보니 유선이 제갈량 사후 승상부를 해체 해버렸고 득세한 형주파들에게 권력은 어느정도 주었지만 견제를 하였죠. 촉한사영이라고 하지만 전부 형주출신이구요. 여튼 촉한은 제갈량이 사서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기록이 적어 뇌피셜로 상상해야 할 부분이 많아서 참 애매합니다. 이궁의 변이나 고평릉사변처럼 익주파를 제거하는데 뭔가 있을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냥 이엄이 군량 수송을 담당했는데 늦어지고 거짓말하다 권력을 뺏겼다 수준으로 끝나버리니 아쉽습니다.
25/06/09 21:01
재밌게 읽긴 했는데 자꾸 논문 얘기하시는 건 좀...
텍스트북으로 확립된 내용은 반복해서 논문으로는 잘 나오진 않는 법이라...
25/06/09 21:03
'통설이 아니다, 학자들의 뇌피셜이다'라는 말에는 딱히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그럼 그 통설화된 내용, 텍스트북이라도 가져와서 얘기하라고 말하는 수밖에요.
25/06/09 21:01
(수정됨) 된장까스 님// 와... 낙불사촉하고 저의 근거를 연결시키는 건 놀랍습니다. 이걸 '촉이 그립지 않습니다 -> 제갈량이 권력을 독점해서 촉이 그립지 않은거다' 라고 논리의 비약을 하시는군요. 저는 이 해석을 보니 뭔 소릴 하셔도 그렇게 받아들이실 거 같아서 더 할말이 없네요.
등지 일화도 '제갈량은 영웅이다 = 촉은 믿을만하다' 라고 했는데, 이걸 제갈량이 실세다라고 해석을 하시는군요. 그리고 괜찮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어차피 된장까스님도 직접 논문을 뒤적거려 찾으신게 아니고 삼갤에서 떠도는 레퍼토리 주워다가 (몇 년 됐습니다) 언급하시는 거니까요.
25/06/09 21:06
솔직히 말씀드리면 본문에서 그 대목이 '제갈량이 실제 실세고 유선은 촉에서 아니것도 아니다' 인식을 오에 알리는 행위였다고 쓰여있는데도 본문을 아예 읽지 않으신듯하여 논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일개 신하가 타국의 임금과 대등한 관계에서 자신의 임금 무시하고 진행하는거 부터가 임금이 권력 의사결정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증거였다고 말하는 마당인데 이것도 이해 못하실거 같으면 무슨 말을 더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괜찮습니다. 본문을 들고와봐야 어차피 이해도 못하시고 오래전에 망한 삼갤 수준 논리라는 식으로 업데이트가 안 된거 보면 삼국지 인식도 과거에서 별로 크게 벗어나지도 않으신 분 같고요.
25/06/09 21:07
뭔 소립니까. 등지의 발언을 그대로 옮겨볼까요?
"오와 촉 두 나라는 네 주의 땅을 갖고 있고, 대왕은 한 시대의 영웅이며, 제갈량 또한 한 시대의 호걸입니다. 촉에는 첩첩의 험준한 요충지가 있고, 오에는 삼강의 험준함이 있으니, 이 두 장점을 합쳐 함께 입술과 치아의 관계가 된다면, 나아가서는 천하를 겸병할 수 있을 것이고, 물러나서는 삼국 정립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대왕께서 지금 만일 위나라에 귀순하게 된다면, 위나라는 반드시 위로는 대왕의 입조를 바라고, 아래로는 태자가 궁으로 나아가 받들기를 요구할 것입니다.[4] 만일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반란을 토벌한다는 이유를 들 것이며, 촉은 반드시 흐름을 따라 할 수 있음을 보고 나아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강남의 땅은 다시는 대왕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게 '후주는 별거 아니고 제갈량이 실세다' 라는 말이라구요? 그리고 낙불사촉도 말씀좀 해주시죠.
25/06/09 21:08
(수정됨) 손권이 "촉주(유선)가 어리고 국세가 약해 위(魏)에게 밀릴까 염려된다"고 말하자 등지는 "대왕(손권)과 제갈량은 시대의 영웅이며, 촉과 오의 협력은 천하를 얻을 길"이라 답해 손권을 설득했다. 이처럼 제갈량의 권위는 국제적 위상까지 반영되었다.
역사가들은 종종 등지(鄧芝)가 탁월한 외교 능력으로 오촉(吳蜀) 동맹 회복에 큰 공헌을 했다고 칭송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발언에서 유선(劉禪)을 경시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손권이 "촉주가 어리고 약하다"고 말했을 당시 유선은 17세로, 전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이는 아니었다. 한(漢)·위(魏) 교체기에는 젊은 영웅들이 많았다. 손오(孫吳)의 창업주 손책(孫策)은 15세에 아버지 손견(孫堅)을 따라 동탁(董卓) 토벌에 참전했고, 20세에 강동(江東)을 정벌해 6군을 점령하며 손오의 기반을 닦았다. 손책이 암살당한 후 18세의 손권(孫權)이 뒤를 이었다. 등지가 주군의 위엄을 지켰다면 이에 반박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손권의 "촉주 유약론"에 대해 답변 없이 "손권은 시대의 영웅, 제갈량은 당대의 준걸"이라며 제갈량을 손권과 동등한 '일국(一國)의 군주'로 격상시켰다. 손권은 현명한 "웅략의 군주"였기에 촉한이 실질적으로 제갈량이 주도함을 알고, 황제의 위계를 내려놓고 직접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등지를 칭찬했다: "두 나라를 화합시킨 것은 오직 등지뿐이다." 실제로 손권은 제갈량과 빈번히 교류했다. "유비가 병사하고 유선이 즉위하자 제갈량이 정권을 잡아 손권과 동맹을 맺었으며, 중요한 일은 항상 육손(陸遜)을 통해 제갈량에게 전달하고 손권의 인장을 새겨 육손에게 수여했다."(《오서 육손전》) 손권은 육손을 통해 교류했으나 완전히 권한을 위임하지는 않았다. 육손이 제갈량에게 보낸 서한에는 손권의 옥새가 찍혔으니, 이는 고대 중국의 엄격한 군신(君臣) 예법을 반영한다. 반면 제갈량은 "유선이 정치에 서툴다"는 구실로 "내외의 권력을 총괄"(《촉서·후주전》 주석 《위략》)하며 외교에서도 유선을 완전히 배제하고 손권과 대등한 '대화'를 진행했다. 군신 간의 예법을 무시한 이 행위는 그의 독단적 권력 행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니까 본문을 안 읽었다고 하는겁니다. 등지가 뛰어난 외교관은 맞되, 유선의 권위를 생각하면 제갈량과 손권을 그런식으로 동위으로 두고 유선이 낮게 취급당한걸 무시하면 안 되는 말이라는게 본문의 논지입니다. 적어도 자국의 임금이 유약하다 소리를 들으면 봉건시대적 논리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게 정상입니다. 마치 경신대기근 당시 군약신강이라서 조선이 그 모양이라는 강희제의 말에 동평군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 것처럼 말입니다.
25/06/09 21:25
등지의 발언은 유선이 17세던 시절이지요? 제갈량이 아직 탁고를 해도 무방한 나이고 이 때 분명히 제갈량이 실세인 건 맞을 겁니다.
그리고, 제갈량이 실세가 아닌 적은 없습니다. 저는 제갈량이 실세가 아니라고 하는게 아니라, '권력을 탐하는 권신' 이냐는 겁니다. 등지의 발언 어디에서도 제갈량의 권신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제갈량의 위상이 높았고, 황제가 유약하다는 말에 등지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정도가 담백한 진실이겠지요. 그리고 사실 제갈량이 정국을 다 차지했다면, 왜 기어코 죽을 때까지 북벌에 나섰을까요. 사실 황제를 본인으로 갈아치우고 북벌에 나서는게 마땅하지 않나요? 제갈량이 권신이라면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5/06/09 21:33
이제 제갈량이 실질적 권력을 쥐고 국정을 오로지 했다는 단계는 인정하시는거 같은데 팩트는 이후에도 손권이 육손에게 자신의 인장을 찍어 제갈량과 소통하게 한 것에 반해 제갈량은 더 이상 촉주인 유선이 아리고 유약하지 않은 시점가지도 권력을 잡았다는게 팩트입니다. 그리소 본문에서 굳이 손책과 손권이 어린시절부터 권력을 잡았단느 것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이라 등지가 주군의 위엄을 지키려고 했다면 이점을 파악해서 유선이 어리고 유약하다라고 지적받는 것에 반박을 햇어야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라 어쨌든 신하일 제갈량을 올려치는 용도로만 썼다는 것입니다. 진정 유선이 군주라면 이 대목에서 유선에 대한 비호도 반드시 들어가야 봉건시대의 논리에 맞다는게 핵심이고요.
그리고 사실 제갈량이 정국을 다 차지했다면, 왜 기어코 죽을 때까지 북벌에 나섰을까요. 사실 황제를 본인으로 갈아치우고 북벌에 나서는게 마땅하지 않나요? 제갈량이 권신이라면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도 본문에서 설명합니다. 여기까지 서술하자,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제갈량의 "야심"이 분명하다면, 왜 유선을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았는가? 진옥병(陳玉屏)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논했다: 당시 상황에서 공적은 제갈량이 촉한을 위해 세웠고, 권력은 군사와 외교를 모두 장악했으며, 재능은 유선과 천양지차였다. 덕망 역시 두터웠고, 유비의 '군이 취하라'는 유언까지 있었으니, 선양(禪讓)의 조건은 충분했다. 그러나 필자는 실제 상황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았다고 본다. 진(秦)·한(漢) 이후 황제의 지위는 "군권신수(君權神授)"로 신성불가침했다. 유교적 교화로 "천자는 하늘의 명을 받들고, 천하는 천자의 명을 받든다"는 관념이 뿌리내렸다. 권신이 선양을 통해 제위를 찬탈하는 것은 큰 위험을 수반했다. 왕망(王莽)은 10여 년을 준비했으나 실패했고, 동탁(董卓)·원술(袁術)은 즉시 멸망했다. 조조(曹操)는 천하의 3분의 2를 장악했으나 끝내 황제가 되지 않았다. 사마씨(司馬氏)도 3대에 걸쳐 위(魏)를 찬탈했으며, 조융(趙翼)은 이렇게 지적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승상과 구석(九錫)을 사양했고, 사마사(司馬師)·사마소(司馬昭)도 거듭 사양하다 결국 진왕(晉王)에 오른 후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선양을 받았다. 조조와 비교해 유비의 즉위는 "인화(人和)" 면에서 유리했다. 조조가 "한실을 찬탈한 역적"으로 낙인찍힌 반면, 유비는 "한경제(漢景帝)의 후예"로 인정받았다. 220년 조비(曹丕)가 한을 멸하고 위를 건국하자,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으로서 한실 중흥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반대가 있었다. 익주 전부사마(前部司馬) 비시(費詩)는 유비의 즉위를 반대하며 상소했다: 전하께서 조조 부자의 전횡을 막기 위해 군사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적이 멸망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황제를 칭한다면 인심이 흩어질 것입니다. 한고조(漢高祖)께서도 진(秦)을 멸한 후 왕위를 사양했는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한의 전) 영토도 다스리지 못한 채 즉위하려 하십니까? 유비가 한나라의 계통을 계승하는 것조차 극력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물며 제갈량은 다른 성씨의 신하로서, 유언으로 중책을 맡은 시점에 이미 한나라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하고, 왕조를 바꾸려 했으니, 이것이 천하의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확실히, 유비는 임종 시에 제갈량에게 "스스로 취하라"고 허락했지만, 이는 결코 유비의 희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조치였으며, 전제 조건은 유선이 "재능이 없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제갈량이 집정할 때, 유선은 여전히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할" 수 있었고,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제갈공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그래서 진수가 그를 "현명한 재상을 임용하여 이치에 따르는 군주가 되었다"라고 칭찬했으니, 제갈량이 어떤 이유로 그를 쉽게 폐위시킬 수 있었겠는가? (중략)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삼국시대는 전쟁의 시대였으며,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서는 국가를 세울 수 없었다. 조조, 사마의, 손책, 주유, 육손 등은 모두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제후들을 위협하고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제갈량이 한나라를 대신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촉한 조정에서 높은 명성과 절대적인 권위를 세워야 했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나는 군공을 세워야 했다. 이상입니다.
25/06/09 21:38
아니 그러니까 본문의 주장이 '제갈량이 위를 격파했으면 선양했을 것이다' 라고 거의 확신을 하고 있는데... 이게 대체 무슨 근거라고 말씀하시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제갈량 속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니구요. '제갈량은 촉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북벌을 했다' <-> '제갈량은 자기가 황제가 되기 위하여 북벌을 했다' 인데, 후자의 근거가 대체 뭔가요.
아니 본문에 있으니까 본문의 황당함도 얘기하죠. 위연의 작전을 물리친게, 위연의 작전이 들이맞으면 제갈량이 황제로서 군공을 세울 수 없으니 위연을 기용하지 않았다구요? 이건 진짜 어거집니다. 일단 위를 격파해야 황제고 뭐시고가 되는게 아닌가요? 어차피 위연은 제갈량 휘하 군단장일 뿐이라 모든 영광은 총사령관에게 돌아가는게 지당한 시절입니다. 저는 이 논리가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갈량이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을 가졌고, 그 야심을 이루기 위해선 군공이 필요했고, 군공이 필요해서 촉을 쥐어짜내서 북벌을 했다 뭐 이런 논리가 성립이 되는데... 이 의심을 들이대려면 제갈량이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이 있는 걸 확정지어야겠지요.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25/06/09 21:30
(수정됨) 제가 생각하는 제갈량 권신론의 가장 부정적인 부분이 이겁니다.
황제 자리에는 관심이 없는, 그러나 권력은 탐하는 권신이라 칩시다. (정도전 드라마의 이인임 포지션 같은) 그런데, 권력을 탐했다면, 그리고 권력을 얻었다면 그 권력을 휘둘러서 대체 무엇을 했냐는 겁니다. 권신은 결국 그 권한을 잘못 휘둘러 나라를 망치던가, 아니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던가 해서 권신이라고 비판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제갈량은 둘 다 아니죠. 사실, 이거 가지고 [제갈량은 촉을 전시 국가 체제로 만들어서 나라를 망쳤다] 는 논리로 이어지긴 합니다만, 대체로 제갈량은 훌륭한 정치가로 여겨왔었죠. 이건 이거대로 논쟁이 있겠지만, 아무튼 제갈량은 사욕은 확실히 안 채웠습니다. 본문은 제갈량이 '일이 잘 풀리면 황제 자리 강탈할지도' 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역사에서 IF는 소용이 없잖습니까. 나온 결과로만 보고, 정사에 묘사된 제갈량은 훌륭한 재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했구요. 제가 아까부터 자꾸 '제갈량 계파의 권력 이양' 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권신으로서 대체 무엇을 추구하며 그렇게 했느냐 이거죠. 제갈량은 소싯적에 자신을 관중, 악의에 빗댄 바가 있습니다. 특히 관중은 되게 의미심장하죠. 관중은 제환공을 모시며 제나라를 패자로 만들었는데 제환공은 관중을 절대 신임해서 권력을 맡겼고 관중은 흐트러짐없이 임무를 수행했었죠. 제갈량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가 '재상 정치' 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걸 가지고 황제의 권력을 독차지했다라고 하면 관중이나 제갈량의 그릇을 너무 폄하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25/06/09 21:41
(수정됨) '아무튼 제갈량은 사욕은 확실히 안 채웠습니다.' 이 부분은 본인 스스로 쓰시면서도 스스로 내심 거리낌이 있으실겁니다. 모든 권신이 권력을 잡았다고 이인임마냥 사리사욕에 몰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모르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을 얻었다면 그 권력을 휘둘러서 더 높은 곳, 극 황위를 넘보는 쪽으로 집중되는 경향성은 충분히 있을수 있는데, 문제는 제갈량의 언행을 뜯어보면 [탁고대신으로서 제대로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인신의 몸으로써 촉의 권력을 오로지 장악하다보니 찬위의 뜻으로 해석되는 문제되는 언사나 권력의 지나친 집중]으로 보건데 [충분히 그런 마음을 품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게 본문의 핵심이고, '제갈량 같이 재능 있는 사람이 그러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라고 그런 상황의 제갈량의 마음에 대해서도 옹호하는게 본문의 진짜 논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건시대의 충성논리로 제갈량을 평가하기보단 제갈량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렇게 볼 여지가 있고 그 쪽에서 한번 평가하자는게 본문의 결론인거죠. 심지어 이 교수님도 제갈량은 훌륭한 정치가가 아니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논지의 결론은 [제갈량이 설령 찬위를 할 마음이 있었더라도 그의 훌륭함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으로 끝납니다. '천년이 넘도록 사람들은 제갈량을 고대 사회 충신과 현상의 귀감으로 여겼으나, 위 분석을 통해 필자는 제갈량이 "자취(自取)"했을 가능성을 도출했다. 이는 제갈량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가? 객관적으로 분석하면 제갈량이 한을 대신해 황제를 칭한 것은 죄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 순응한 것이다. "하늘이 한나라의 덕을 오래전에 싫어했다"는 《후한서·효헌제기》의 구절은 당시 사회 여론의 주류를 정확히 보여준다. 동한 왕조는 부패로 존재 가치를 잃었고 "천하가 모두 한나라의 운수가 다한 것을 알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위서·무제기》 주석 《위씨춘추》 인용)임을 알았다. 이는 대세이자 역사 발전의 필연이었다. 한나라 기운이 이미 다했는데 한가 천자를 보필할 가치가 있는가? 보필할 가치가 없다면 대체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예로부터 난세에는 웅대한 재능을 가진 자들이 역사의 무대에 오른다. 동한말 상황은 "군마다 황제를 삼고 현마다 스스로 왕이 되려 했으며", 조조가 말했듯 "나라에 내가 없었다면 몇 사람이 황제가 되고 왕이 되었을지 모른다"(《위서·무제기》 주석 《위무고사》 인용). 원소, 유비, 손권 등은 조조를 한나라의 적이라 비난했으나 그들 역시 한나라 신하가 되려 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조조, 손권, 사마의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재략을 가졌으며 "자취"의 선제 유조를 손에 넣었다. 만약 수명이 길고 북벌이 성공해 중원을 수복했다면 제갈량 자신이나 그 자손이 구석을 받아 황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
+ 25/06/09 21:45
'관중은 제환공을 모시며 제나라를 패자로 만들었는데 제환공은 관중을 절대 신임해서 권력을 맡겼고 관중은 흐트러짐없이 임무를 수행했었죠.' 예 그렇습니다. 근데 관중은 제환공을 모시면서 존왕양이의 기치를 한번도 저버리지 않은 반면에 제갈량은 [큰 공로를 세우면 구석이 아니라 십명이라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라고 한 게 문제죠. 두번이나 [큰 공로를 세워 구석 이상을 받은 신하]에게 찬위 당한 한실의 신하를 자처한다면 함부로 해선 안되는 발언인건 분명합니다.
+ 25/06/09 21:48
한때 유행했던 원균 정상화론과 비슷한 거 같은데요.
거의 2천년이 지나도 댓글 장판파를 열리게 하는 삼국지 인간군상의 위대함과 드라마틱함이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 25/06/09 21:49
가설을 증명하려면 증거를 대야하는데 당대나 연결된 시대에 그런 분석이 있었나? 하고 읽어봤는데 증거는 없고 현대인의 뇌피셜만 있는건 좀 그렇네요; 문과계 학문들은 이런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아쉽더라고요
줄곧 중/한에서 충의지사로만 묘사됐는데 역심이있었단 주장이 있었어? 하고 관심갖고 읽어봤는데 말이죠. 사실 글의 맨 위에 달린 류지나님 리플을 읽고 평소에 어느 분야에서나 흔히 통용되는 논리인 '인재풀론'에 따라 생각하면... 역사지식의 중요도가 떨어진 지금과 달리 고대부터 근세까지는 문장을 짓든 유세를 하든 모든 고지능활동에 고사 레퍼런스를 들어 말하는게 기본이었지요. 거기다 당대기준이면 사료접근성이랑 해석력자체가 아예 다른데 이게 결정적인 차이. 그래서 폭넓은 고사 지식을 요구받던 과거의 최고 천재들(동북아에서 이 "최고지능"들의 종착점은 거진 관료, 학자, 문인 등이었죠)과 현대에서 그닥 천재도 아닌 사람들(보통 현대 최고지능들은 과학계,금융계나 기업가, 마인드스포츠쪽을 하든 하니까)이 다른말 한다? 이러면 후술할 경우가 아닌 이상 뭐 볼일있나 싶긴 해요. 그 경우야 뭐... 권위차이와 인적레벨의 큰 차이를 뒤집을 고고학적 서지학적 증거고...
+ 25/06/09 21:53
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9154
셋째, 중국사를 읽으려면 고전경전만 읽지 말고, <자치통감>, 이십사사만 읽지 말아야 한다. 당대학자의 연구성과를 많이 읽고, 당대의 눈길로 시대를 통과하여 과거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 주변 대부분의 민족과 비교하면 중화문명은 역사상의 경험과 교훈을 종합하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독특하고 발달된 문명의 성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전통사학의 성취는 일정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가장 방대한 사료를 가지고 있지만, 위대한 역사학은 나타나지 못했다. 진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중국역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순환성"이다. 하나의 왕조가 건립된지 1,2백년이 지나면 '관핍민반(官逼民反)'이 발생하고, 농민반란이 일어나며, 얼마 후에 신흥왕조로 대체된다. 이렇게 순환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모든 왕조가 동일한 궤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한 왕조의 건립초기에는 정치가 청명하고 심지어 태평성세가 나타난다. 새로운 핸드폰을 가지게 되면 처음 반년간은 잘 돌아가는 것처럼. 그러나 몇대가 지나고 나면 부패하고 혼란에 빠지며 각종 문제가 나타난다. 그러면 부득이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새로운 왕조가 건립된다. 그리고 새로운 왕조도 다시 똑같은 길을 걷는다. 이 규율이 2천년간 지속되었고, 남겨진 역사서는 "이십사사"가 된다. 그리고 조대가(朝代歌)를 하나 남겼다: "삼황오제하상주(三皇五帝夏商周), 진한삼국양진우(秦漢三國兩晋憂), 남북수당오대진(南北隋唐五代盡), 송원명청제통휴(宋元明淸帝統休)" 그래서 당대의 눈으로 역사를 읽으면, 우리가 역사에 대해 더욱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 --------------- 중은우시의 이 글로 갈음합니다.
+ 25/06/09 22:16
"제갈량은 찬탈의 욕심이 있었다"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에 맞춰 근거를 짜맞춘 글이네요.
제갈량이 당대의 일반적인 신하 이상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제갈량이 권신이었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있고요. 그런데 권력이 있었다와 찬탈 의도가 있었다는 구분해야 합니다. 저자는 이막과 이엄의 사례에서 별다른 근거 없이 인물의 심리 상태를 추측하여 의도가 있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막이 처형된 이유는 단순히 제갈량을 비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상이 그(제갈량)의 위세를 두려워했다"는 발언이 허수아비 군주였던 유선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라 여겨진다"거나 유선의 보복심 때문에 제갈량 사당을 짓는걸 반대했다고 하고 있고, 구석을 권하는 이엄을 엄히 질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심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당대에 제갈량의 충성을 의심했던 인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어요.
+ 25/06/09 22:19
후대 환온과 유우 등의 사례와 제갈량의 사례가 비슷한 점은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어쨌거나 제갈량은 찬탈 시도를 한 적도 없고, 의도를 드러낸 적도 없습니다.
+ 25/06/09 22:21
그리고 학계 논의 좋아하시니 최진열 교수 인용해봅니다. "유비는 죽기 전에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의 재주가 미치지 못하면 공이 황제의 자리를 취하시오" 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후주 유선에게 충성을 다했다." - 최진열 저 <역사 삼국지> p.848
+ 25/06/09 22:24
사실 최진열 교수님 썰 얘기할거면 그분의 히트작 중 하나인 '현재 가정의 배정 위치는 잘못되었다'도 한번 논하고 싶기는 한데 그것도 받아들이실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네요.
+ 25/06/09 22:21
제갈량은 왜 북벌을 했는가? 첫째, 제갈량이 익주는 피폐해졌다고 인정하면서 북벌을 단행한 것은 당연히 한실 부흥을 위해서다. 촉한은 병사가 총인구의 10%를 차지하는 병영 국가였다. 그 군대에는 비익주 출신자들이 다수 포함된다. 즉 외래 정복자가 익주에 뿌리내리기 위한 정통성이 한실 부흥이란 국시인 것이다. 한실 부흥이라는 국시를 수행하지 않는 촉한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니 제갈량은 국가의 존재의의를 걸고 북벌에 임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의 북벌에서 두번째 목적은 [제갈량 본인의 군사력 장악을 위한 것]이다. 유비 생전에 제갈량이 군을 이끌었던 것은 방통이 전사하고 형주에서 유비를 구원하러 갔던 것이 유일하다. [유비 생전 군주권의 물리적 기반인 군사력은 유비와 일족이나 다름없는 관우 장비가 장악했고 제갈량은 유비에게 그럴 정도의 신뢰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유비 사후 제갈량은 유비 사후 남정과 북벌로 군권 장악을 이루었으며 승상부는 촉한의 실질적 정부로 기능했다.] [제갈량은 자신의 신념인 한대적 정신으로 인해 선양받지 않았으나 그것조차 가능할 만큼의 권력을 북벌을 통해서 장악했던 것이다.] - 와타나베 요시히로 저 <삼국지의 정치와 사상> 사실 본문처럼 찬위의 마음이 있을수도 있다는 분도 계시고 이렇게 '한대적 정신'으로 찬위의 마음은 없었으나 본인의 촉 내부의 권력장악을 위해 힘쓴건 사실이고 찬위 그것조차 가능할 만큼의 권력을 장악했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긴 하죠.
+ 25/06/09 22:26
와타나베 요시히로 이 분은 [찬위의 마음은 없었다, 다만 그것조차 가능할 정도의 권력은 분명히 존재했다]라고 주장하시는 겁니다. 제갈량이 촉 내부에서 권력 장악을 위해서 힘쓴것도 분명한 사실이라는 쪽이기도 하고요.
+ 25/06/09 22:28
와타나베가 그렇게 주장했다는건 이해했고, 전 본문에서 아전인수식으로 북벌 의도를 해석한 것에 대한 코멘트입니다. 제갈량이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건 동의힙니다.
+ 25/06/09 22:33
뭐 이 주장의 대마는 제갈량이 했던 [조예를 베고 옛 도읍으로 돌아가는 큰 공로를 세우면 십명이라도 받을것인데 하물며 구석이랴!]가 인신의 몸으로써 할 만한 소리는 아니다라는 것과 [제갈량은 탁고대신으로서 권력을 오로지 독점한 뒤 권력을 유선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 핵심이니까요.
+ 25/06/09 22:49
이엄은 당장 줘팰 수가 없으니까 적당히 말로 달랜거고, 그 정도로 권력을 독점했음에도 찬탈 의도나 시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에서 진짜 찬탈 의도가 없었다고 봅니다.
+ 25/06/09 22:57
적당히 말로 줘팼다고 한다면 왕도처럼 아예 구석은 받지도 않겠다라고 씹어버려도 그만이긴 했죠. 만약 제갈량과 이엄의 세력 가운데 이엄의 세력이 더 강력했다면 이 편지들이 공개되었을때 무사하지 못할쪽은 누구였을지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 25/06/09 23:05
네 알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평행선일거라 더 답변 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발제와 토론을 좋아하신다면 네이버 부흥카페나 위진남북조 마이너 갤러리를 방문하시길 추천드립니다.
+ 25/06/09 23:27
폄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근거없이 누군가를 깎아내려 헐뜯을 때 쓰는 말입니다 역심을 드러낸 일이라는 것도 인정되지 않는 방향이 통설로 평이 갈리고 당대부터 근후대까지 충신으로 평가받는 인물을 결국 실패한 잠재적 역신으로 평가한다면 그 행위에 걸맞는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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