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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4/17 00:01:05
Name 피우피우
Subject [LOL] 싱글벙글 롤 토막썰들 (수정됨)
요새 겜게가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 같아서 소소한 썰 풀이나 좀 해볼까 해서 글을 씁니다.
지금까지 롤을 하면서 겪었던 몇 가지 개인적인 경험담들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인데, 좀 많이 옛날 얘기들도 있어서 뉴비(?) 분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내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썰은 평서체로 쓰는 게 맛이 사는 것 같아서 평서체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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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

때는 수시 최종합격자들을 대상으로 한 오티가 한창이던 겨울날, 장소는 학교 근처의 대학가. 수시 오티는 말이 오티지 그냥 다 같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 자리였고 나는 신입생들과 적당히 인사를 하고 술도 적당히 마시다 슬그머니 빠져나와 피시방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사람으로 꽉 차있을 시간이었지만 아무래도 피시방보다는 술집이 더 북적일 시기라 피시방은 평소에 비하면 조금은 한산했다. 내가 즐겨찾던 자리를 찾아 앉고 컴퓨터를 켠 뒤 곧장 솔랭 큐를 돌렸다. 운 좋게도 첫 큐에 바로 1픽이 되었다.

당시는 1픽이 밴을 알아서 다 하고 포지션도 픽순으로 정하던 시절이라 픽순이 곧 벼슬이었다. 1픽이었던 나는 거만하게 '탑' 한 글자를 채팅창에 입력하고 어떤 챔피언을 밴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3픽이 말했다.
「1픽님, 이블린 살면 좀 잡아주세요. 올챔임」
당시 이블린은 오랫동안 걸어다니는 와드라는 오명을 쓰고있었으나 리워크를 통해 OP중 OP로 거듭나며 대회에도 종종 미드로 등장하던 챔피언이었다. 다행히 상대팀이 이블린을 밴하지 않았고 나는 곧바로 이블린을 골라 칼락인을 박으며 역시 거만하게 말했다.
「이렐주셈」
그렇게 우리 3픽이 이렐리아를 픽하는 것을 확인하고나서 나는 방광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도중 한 단어가 내 뇌리를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스왑]

그렇다. 내가 화장실에 있으면 3픽과 스왑을 할 수 없었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재빨리 손을 씻으며, 제발 아직 밴픽이 끝나지 않았기를 기도하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모니터엔 이미 로딩화면이 떠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안돼... 나 이블린 해본 적도 없는데... 이제 난 트롤이라고 욕먹고 리폿까지 먹을거야...'

이렇게 꽁패와 리폿의 두려움에 조용히 절규하던 내 눈에, 내가 애용하는 서리검 이렐리아 스킨과 그 아래 새겨진 익숙한 닉네임이 보였다. 내가 화장실에 가있던 사이에 제대로 스왑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있던 내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제가 이블린이랑 이렐 스왑해드렸어요."
내 옆에서 스타2를 즐기던 사람이었다. 그 분이 나 대신 스왑을 해주셨던 것이다. 마치 생명의 은인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하고 이 고마운 분의 성의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기겠다는 필승의 의지를 다졌다.

"야, 저게 그렇게 중요한거야?"
"응, 스타로 치면 니가 테란이잖아. 그런데 실수로 저그 골랐는데 내가 테란으로 바꿔줬다고 생각하면 돼."
그날,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세상이 아직 따뜻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 바이의 인생 한 방

역시 솔랭을 돌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나는 트리스타나로 원딜을 했고 우리 서포터는 레오나였다. 적 바텀은 베인과 소라카였는데 둘 다 굉장히 못해서 금세 킬을 따낼 수 있었다. 첫 킬은 다음 킬로 이어졌고, 상체 또한 흥해서 게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킬스코어가 어느새 10대 0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정글을 종횡무진 누비며 게임을 이끌어나가던 우리의 바이가 갑자기 탈주를 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유리한 상황이었기에 모두 잠깐 튕긴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별 말 없이 라인전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5분이 지나도록 바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우리는 빨리 게임을 끝내기 위해 모두 미드로 모여 타워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공방 과정에서 한타도 벌어졌지만 우리 팀이 다들 잘 크기도 했고 조합도 문도, 니달리, 트리스타나, 레오나로 밸런스가 좋아서 (니달리를 미드로 쓰던 시절이다) 4대 5 한타도 계속 이기고 있었다.

힘겹지만 억제기까지 밀어내며 유리하게 게임을 풀어나가던 도중 바이가 돌아왔다. 아이템도 새로 사는 것을 보니 제대로 접속을 한 것 같아서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바이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접속하자마자 미드 라인을 따라 협곡을 가로질러 적진으로 혼자 돌격하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바이가 적에게 공짜로 2킬을 안겨주자 게임이 힘들어졌다. 적의 베인과 쉬바나, 그리고 스웨인이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이의 피딩을 받아먹고 몇 번의 한타에서 승리를 거둔 뒤 크게 자신감을 얻은 적 팀은 이제 다이브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밀리다가 우리의 2차 타워를 지키는 과정에서 마지막 한타가 열렸다. 가장 잘 큰 딜러였던 나를 노리고 쉬바나가 궁극기로 달려들었다. 스웨인도 점멸로 호응하며 내게 딜을 쏟아부었다. 다행히 궁으로 쉬바나를 밀어내고 로켓 점프로 스웨인과 거리를 벌렸지만 이어서 말파이트의 궁이 쇄도했다. 저 멀리 앞라인에서 아군 문도와 니달리, 레오나가 적의 베인, 소라카, 쉬바나, 스웨인과 교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게 달라붙는 말파이트를 떼어내 줄 사람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잘 컸다고 한들 순식간에 너무 많은 딜이 때려박힌 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 때, 말파이트의 발 밑에 표식이 생기며 빨간 선이 나타났다. 우물에서 놀고있던 바이가 말파이트에게 궁극기를 쓴 것이었다. 궁에 이어서 Q도 한 번 써주고 바이는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쿨하게 우물로 다시 돌아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바이가 그렇게 말파이트를 물어준 덕분에 나는 말파를 처치할 수 있었고, 아군과 합류해 앞라인부터 하나씩 잡아가며 한타를 승리로 이끌고 게임을 끝낼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트롤링을 하며 역캐리의 정석을 보여줄 뻔한 바이였지만 그의 기행은 혹시 이 한 번의 드라마틱한 궁극기를 위한 설계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모두 그의 깊은 뜻에 고개를 숙이며 신고 버튼을 눌러 4리폿을 먹여주었다. 바이 개X끼...




3. 롤개팅

학부 시절, 별 생각 없이 소개팅을 하고 싶단 얘기를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모 여대를 다니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안 그래도 나에게 소개를 해주려고 점찍어둔 친구가 있었단다. 왜 하필 나일까 궁금했는데 그 친구의 이상형이 같이 롤을 아주아주 많이 할 수 있는 남자였단다. 그럼 내가 딱이긴 하지.

그런 사람이 있는데 왜 진작 소개해주지 않았냐고 따졌더니 그 분이 지금 휴학을 하고 본가에 내려가있어서 만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곤 조금 뒤에 다시 연락이 와서 롤 친추할 때 뭐가 필요한지를 물었다. 아마 그 친구와 얘기를 좀 해본 결과, 소개팅은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친추라도 해두자는 식으로 얘기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예비 소개팅녀(?)와 서로 친구 등록을 했다. 롤을 아주아주 많이 할 수 있는 남자가 이상형인 분 답게 그 분은 내가 언제 들어가든 거의 항상 접속중이었다. 친추만 해놓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도 뻘쭘하니 이런저런 얘기를 좀 하고 간간이 듀오 큐도 돌렸다. 듀오를 돌리다가 우리 팀 노말큐에 그 분을 끼워서 같이 하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그쪽 파티에 들어가서 게임을 하기도 하고, 가끔씩 팀랭도 같이 하고... 그런 식으로 그 분과 협곡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문제는 같이 롤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그냥 평범한 롤 친구 느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협곡 데이트를 너무 많이 한 나머지 현실 데이트를 하기엔 어색한 사이가 되었던 것일까? 아무튼 이미 서로 이름보다 닉네임이 더 익숙한 사이였다. 나중에 그 분이 복학을 하고 서울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결국 소개팅은 유야무야 되었다.

당시엔 이렇게 소개팅이 무산되어버린 것이 내심 아쉽기도 했다. 내 이상형도 같이 롤을 아주아주 많이 할 수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분은 게임만 많이 하던 게 아니라 '이걸 나진이', '가차없죠', '악역은 익듁하니까' 등 커뮤니티의 롤 관련 드립에도 깊은 조예가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이 분과 만나서 잘 된다면 롤챔스 얘기를 하거나 롤 드립을 치면서 놀고 가끔 직관도 같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은 했었다. 그렇지만 이런 아쉬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롤에 대한 내 열정이 약간 식은 탓도 있었지만, 후배 커플과 함께 게임을 했던 경험이 결정적이었다.

후배 커플은 CC였기 때문에 둘 다 나의 과 후배였다. 어쩌다보니 이 친구들과 같이 피시방에 가서 롤을 하게 됐는데, 노말 게임인데다 후배들과 티어 차이도 좀 났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즐겜을 할 생각이었다. 후배 커플은 커플이니만큼 봇 듀오를 했는데 아뿔싸, 라인전이 잘 안 풀린 모양이었다. 옆자리의 공기가 점점 서늘해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CS 좀 잘 먹어봐;"
"내가 놓치고 싶어서 놓치나?"

미묘하게 가시돋친 말들이 들려올 때마다 내 긴장은 점점 높아졌다. 즐겜이고 뭐고 '씁... 이 게임 무조건 캐리해야한다...'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애초에 내 티어가 제일 높으니 내가 잘해야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나까지 똥을 싸는 순간 이 곱창나버린 분위기를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불편함 속에서, 거의 승급전을 치를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빡겜을 해서 결국 게임을 이겼다. 그렇지만.

"xx형 덕분에 겨우 이겼네"
"그러게, 너도 좀 잘하지 그랬냐?"

이건 내가 캐리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때 느꼈다. 여자친구랑 같이 하는 롤은, 파멸이구나.




+) 진짜 토막썰

미스포츈으로 원딜을 했는데 적 서폿이 쉔이었던 적이 있다. 라인전 도중 쉔이 점멸-도발 콤보로 킬각을 노렸지만 내가 이 콤보를 점멸로 반응해서 피했고 깊게 들어온 쉔을 역으로 잡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피지컬에 스스로 흡족해하면서 곧바로 전체채팅을 날렸다. 오덕체가 한창 유행하던 때였다.

「야레야레 쉔 쿤! "점멸 도발"이 아니라 "도발 점멸" 이라구?」

그런데 쉔이 여기에 「나닛?!」이라고 반응해줘서 너무 즐거웠다. 이게 전체채팅의 참맛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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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것들이 몇 개 더 있었는데 쓰다보니 너무 길어지네요.
혹시 재밌게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리고 나중에 또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이어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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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7 00:51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전 다이아 랭크에서 ap갱플하다 욕먹고 불리해졌는데 우리정글러가 바론스틸 두번하면서 아군 응원하는 모습에 개과천선해 이겼던 기억이나네요 지금은 사람때매 접었지만 역으로 사람이 기억에 남는겜이긴하네요
피우피우
22/04/17 11:12
수정 아이콘
확실히 재미있는 팀원들을 만났을 때가 롤 하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기억에 남는 겜이란 말 공감되네요.
소믈리에
22/04/17 00:57
수정 아이콘
최근 겜게 3,4페이지 글 중에 가장 재밌게 읽은듯 합니다. 추천

시즌3 쯤인가 점화강타 이블린 그립읍니다
리신도 하이그나이트 걸고 패면 맞다이 이기던 시절
마체테도 필요없던 시절
22/04/17 01:01
수정 아이콘
스왑이 좋긴한데 리스크가 좀 있죠.
옆자리분이 어떻게알고 스왑을 해주셨을까요 크크
지니쏠
22/04/17 01:14
수정 아이콘
신청하면 챙! 소리가 나긴 하죠
피우피우
22/04/17 11:10
수정 아이콘
저도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참 신기했습니다 크크
주변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던 게 아닐까..
아이슬란드직관러
22/04/17 01:13
수정 아이콘
추추천천
지탄다 에루
22/04/17 01:15
수정 아이콘
와 너무 흐뭇해지는 글입니다 재미있어요~~
세인트
22/04/17 01:49
수정 아이콘
쎌라비님 이후로 이런 좋은글 싸... 아니 쓰는 분이 또 나오시다니 너무 좋군요 추천박고갑니다 모든 토막썰이 다 재밌습니다. 이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필력이겠지요.
manymaster
22/04/17 03:34
수정 아이콘
쎌라비님 썰에서는 커플끼리 특히 순한 말이 오가던데, 이번 썰은 정반대로 커플끼리 더 험한 말이 오가네요.
제가LA에있을때
22/04/17 03:39
수정 아이콘
크크 저도 오늘 자랭하는데 픽 잘못한거 훈훈하게 마무리하고 게임 잘 했습니다. 비록 지긴 했지만…. 전 탑이고 전 이겼으니까요!
及時雨
22/04/17 11:12
수정 아이콘
스투하는 분들이 이렇게 다정합니다
22/04/17 11:32
수정 아이콘
추천했으니 다음편 써오십시오. 재밌습니다. 크크.
리니시아
22/04/18 09:34
수정 아이콘
크크크 뭔가 건전하네요
22/04/18 17:21
수정 아이콘
추천드립니다 다음편 없으면 빨리 롤을 하셔서 만들어오십시오 너무 재미있게 읽었네요 크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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