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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12/13 21:34:00
Name 윤여광
Subject [yoRR의 토막수필.#8]그렇지만 비장하진 못한 편지.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눈이 아직 내리지 않았다 뿐이지 새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은 영락없는 겨울입니다. 당신과 만난 지 21년이 지났고 이제 곧 22번째 년도로 넘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나 오래 같이 한 당신에게 한 번도 써보지 못한 편지를 이제서야 써보려 합니다. 손으로 쓰는 편지가 아닌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신은 향기 담뿍 담긴 여기 저기 틀린 글씨가 가득한 편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종이보다는 못하겠지만 조금이나마 내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계속 적어 내려가렵니다. 부디 편한 마음으로 제 얘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일전에 당신이 나에게 말했듯이 나는 당신과 나와의 처음 만남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단지 1년 전, 한달 전, 어제, 그리고 몇 시간 전의 당신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기억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나는 너무나 가까워 이제는 떨어질래야 죽어서도 같이 가게 될 그런 사이가 되버린 듯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문득 생각이 납니다. 내가 당신을 죽도록 미워했던 그 시절이. 그 땐 왜 그리고 당신이 싫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저주스러웠고 찢어 죽이고 싶을 만치 싫었습니다. 매번 남들에게는 친절하게 웃으면서 나에겐 냉정한 말 한 마디 건네주지 않던 당신이 미웠습니다.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자면 지금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당신과의 처음은 그 때인 것 같습니다. 기억나시는지요. 당신과 내가 아파트 11층 옥상 난간에 올라 앉아 소주 한 병 두고 앉아 당장 살아야 하는지 죽어야 하는지 그 추웠던 2년 전 12월의 어느 날. 나는 그 때부터 당신이 좋아졌습니다. 나에 대해서 그렇게나 생각해주는지 차마 알아채지 못했던 좁디 좁은 내 가슴이 오히려 미웠습니다. 당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 치졸한 미움마저 버리고 지금의 나는 조금이나마 달라졌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있기에 나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겨울이라는 계절은 당신에게나 나에게나 좋았던 기억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3년전..즘 될까요. 겨울과의 악연이 시작된 것이. 그 처음이 교통 사고로 허리를 다쳐 방학 내내 병실 신세를 져야했던 일이었죠. 그 때는 참 여러 사람 힘들었습니다. 시작은 그래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지만 그 다음 겨울은 정말 지독하게 춥고 힘들었죠. 당장 수능이라는 망연자실한 현실에 괴롭힘 당하기도 했고 멈춰버린 시계 바늘도 그랬고요. 작년 겨울은 또 생각에도 없는 **택배 물류 터미널에서 유난히 많이 내린 눈 덕에 짜증도 많이 났습니다. 그래도 올 해 겨울은 조용히 지나가려나 봅니다. 아직까지 징조가 없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옆에 두고 따뜻하게 보내는 그런 호화로운 겨울이 아니더라도 벗을 두고 따뜻한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그런 겨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겨울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당신은 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당신의 가슴에는 작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가끔 그것이 비뚤어져 남들에게 좋지 못한 소리도 듣고 어머니 아버지께 심하게 꾸중을 듣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다만 감히 그것에 대해 한 마디만 하자면 너무 위를 바라보지 말아달라는 겁니다. 지금의 당신은 위로 올라가기 보다는 당신이 딛고 있는 땅을 다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먼 훗날 당신이 드디어 원하던 곳 까지 올라간 행복한 현실이 충분히 다지지 못한 뿌리 덕에 한 순간에 먼지가 되 버릴 수도 있습니다. 부디 신중해지시기 바랍니다. 꼭 당신만을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신이 밑바닥으로 추락할 때 나 역시 당신을 따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라 말이죠. 조금은 내 생각도 해달라는 겁니다. 억지는 아닐테죠. 나는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고 나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시작부터 쭉 같이 해온 존재입니다. 그 정도 요구는 할 권리는 있습니다.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지낸 벗을 아끼는 마음을 잘 압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끔은 벗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겠다는 말에 약간의 부담과 약간의 무시를 느낄 수 있는 눈 앞의 벗을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배려가 스스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벗의 자아를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 있습니다. 무작정 주려 하기 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 거친 풍파에 힘들어 하는 벗에게 따끔한 충고를, 달디 단 열매를 수확한 이에겐 짧은 축하의 말로 대신하고. 지금도 충분히 최선을 다하는 당신이지만 그렇기에 한 번 더 신중을 기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목숨보다 소중한 벗을 대하는 일이기에 말이죠.



  컵에 물이 반 정도 차있는 것을 보고 당신은 저걸 마셔봤자 목마름이 가시기나 하겠나 하는 투정을 갖고 있습니다. 조금은 밝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해 나가는 겁니다. 물론 지금 처한 상황에 만족하고 머무른 다면 그렇게나 열망하는 전진이라는 것은 있을 순 없지만 가끔은 이만큼이나 이뤄낸 당신 스스로를 칭찬하고 격려할 줄 도 알아야겠지요. 그러지 않는다면 반 밖에 차지 않은 물컵마저 없을테니까요.



  할 말이 없군요. 미안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담백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이건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이기 때문이죠. 맘에 드는 이야기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맘에 드는 이야기만 적어내려 갔다면 그건 오히려 내가 한 이야기가 아니기에 당신을 더 화나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이번 겨울은 조용히 따뜻하게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힘들게 달려온 지난 한 해를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여유 정도는 허락 할 수 있게 말이죠.



  이제 정말 몇 일만 지나면 내년이군요. 당신과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내년에는 이걸 하고 저걸 해야지 하는 것이 이젠 당장 내일 해야 할 일이 되 버렸군요. 서둘러야겠네요.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요. 아직도 2년 전 잠시 멈췄던 시계 바늘을 원위치로 돌려놓지 못한 당신과 나 아닙니까. 내년의 시작은 모두와 함께 할 수 있어야겠지요.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만큼 거기에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얼마 남지 않은 올 해를 보낸다면 분명 내년의 출발선은 모두와 같을 겁니다. 핸디캡 따위에 주눅들어 있는 당신의 모습은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재수없을 만큼 꼴볼견입니다. 내가 더 실망하지 않게, 나 따위에게 그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냐는 식으로 비아냥 당하기 싫다면 달리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우리의 새 출발선에서.



2005년 12월 13일.
우리의 새 출발선에서.
21살의 나에게 지금까지 같이 달려온,
곧 22년째 삶을 같이 하게 될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는
그렇지만 비장하지 못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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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양보
05/12/13 21:39
수정 아이콘
처음에는 신께 드리는 편지인가 했더니 아니었군요. 항상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을 남겨주시는 윤여광님께 감사드립니다. 올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다가올 2006년도 힘껏 달려보아요^^
Nada-inPQ
05/12/13 22:01
수정 아이콘
핸티캡 따위에 주눅들어 있는 당신의 모습은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재수없을 만큼 꼴불견입니다.
온 세상을 가질 듯 하다 뒤로 쳐져 헐떡이며, 주저 않아있는 당신의 모습은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재수없을 만큼 꼴불견입니다.
홀로 취하고 홀로 쓰러지고 홀로 좌절하는 당신의 모습은 당신의 모습은...악몽입니다
윤여광
05/12/13 22:09
수정 아이콘
Nada-inPQ님//그러시면 안되요....자기 자신에게 고개를 돌려버리면 그 누구도 당신을 돌아봐주지 않습니다.
Nada-inPQ
05/12/13 22:16
수정 아이콘
네..그렇죠..감사합니다...^^
매번 저렇게 생각하지만 나약한 인간이라, 자기는 죽어라 챙기죠..;;
노래가 좋군요...악몽은 깨어야 하는 법인데 말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근데, 전 저 글 중에서 저 부분이 젤루 마음에 듭니다..건필하세요~꾸뻑
05/12/13 22:57
수정 아이콘
이번엔 색다른 스타일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youreinme
05/12/13 22:58
수정 아이콘
술 한잔 했습니다.

글과 소리 모두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여광님.
순수나라
05/12/14 01:41
수정 아이콘
주위에 고요함과 보태져 한층 더 조용히 당신의 글을 한번더 읽어 봅니다

참 좋은 글 입니다

나도 언제쯤이면 이런글을 쓸쑤 있을까 합니다

이글을 읽으면서 왠지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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