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02/03/17 02:32:34 |
Name |
Apatheia |
Subject |
[잡담] 0.2%의 차이. |
세상엔, 아니 우리나라엔
참 많은 게이머들이 있다.
난 오늘 그 중에 96명...
아니 시드 배정자 넷에 이런 저런 사유로 실격하고도 돌아가지 않은 선수도 몇 있었으니
줄잡아 백명 남짓을 만났다.
예선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명쾌하지 못한 문제로 아예 출전 자체를 못하게 된 선수도 있었고
5분, 10분을 지각해 실격판정이 내려진 선수도 있었고.
물론 그들이 예선에 참가한다고 해서
이 힘든 온게임넷 예선이 순순히 그들을 인정할지는 물론 의문이지만
그래도 한번 싸워볼 기화라도 가져보는 것과
메가웹 컴퓨터에 마우스 단자를 꽂아볼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무사히 예선에 참가한 선수들 또한
3판 2승제,
날고 긴다는 선수 셋을 물리쳐야 근근히 본선 티켓을 손에 쥘 수 있다.
시작부터 연습을 같이 하던, 그래서 내 빌드를 빤히 꿰고 있는
껄끄러운 상대를 만난 선수도 있었고
요즘 한참 기세가 등등한 선수를 만나 고전한 선수도 있었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변명의 거리는 되지 못한다.
팬들에게뿐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조차도 말이다...
그저 이겨서, 이겨서 통과해야 할 뿐.
그렇게, 퀵 앤 데드같은 피말리는 접전이 여기저기서 펼쳐지고
살아남은 선수들은 연신 상처입어 비틀대면서도
마지막 한번의 승리를 위해 있는 힘을 쥐어짠다.
50분, 1시간, 1시간 10분...
구경하는 사람들이 되려 다리가 저려와 몸을 뒤틀고
징하다 징해...를 연발하며 몸을 돌리는 그 순간에도
연신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눈으로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손가락이 하나 부러지기라도 할 기세로 마우스를 놀려대는 그들의 모습은
차라리 처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살아남은 자의 사치일 뿐...
그 반열에 끼지 못하고, 앞으로 또 석달여를 기다려야 하는 선수들은
팔짱을 낀 채 동료의 어깨너머로 화면을 들여다보며
두런두런 경기평을 나누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한다.
그렇게 끝난 일곱시간여의 사투.
마지막 인터뷰를 위해 앞으로 불려나간 선수들은
기뻐 보인다기보다는, 살아남았다는 것을 안도하고 있는 듯 보였다.
바이오 하자드던가, 그 게임에서
좀비와 괴물들이 우글대는 소굴을 뚫고
겨우 밖으로 뛰쳐나오는 데 성공한 주인공의 표정과 얼마쯤 닮아있는,
본 레이스도 아니고, 그 출발점에 서기 위해
너무도 길고 힘든 시험을 겨우 통과해 낸.
내 손에 꼭 쥐어진 채 꼬깃하게 구겨진 대진표를 펼쳐서 들여다 보며
누구는 몇강 누구한테 져서 탈락
누구는 누구 누구를 이기고 올라갔고...하는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살아남은 열 두명, 그러나 그런 그들의 뒤로 남겨진 84명...
문득, 이런 가슴아픈 꼴을 눈뜨고 지켜볼 자신이 없기에
팬들은 강자에게로, 황제에게로 몰려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금은 서글픈 생각을 해 보았다.
여러 말 할 것없이, 나 또한 강자의 팬이니까.
그의 예선통과를 전제하고 그 곳에 간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다.
그러나 그 강하고 약하다는 것의 차이는 얼마만큼일까.
10%? 20%?
오늘 지켜본 바로는, 그 차이는 0.2% 정도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차이.
그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쉽게 좌절한 이들에게
말로는 할 수 없는 애정을 보내며.
...그대들을 좌절하게 만든 그 차이는 결코 크지 않음을 말해주고 싶다.
-Apatheia, the Stabl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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