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11/19 16:51:44
Name 모찌피치모찌피치
Subject 나는 망했다.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2년 간 어마어마하게 풀린 돈으로 자산가격이 올라가자, 그것을 자신의 예리한 통찰, 총명한 안목으로 오해하고 서로의 공적을 치하하던 놈들도 다 사라졌다. 나 역시 직장부터 자산까지, 모두 시장 베타에 온전히 노출되어 있었으니 두 배로 아플 수밖에 없다.

성과급이 안 나올 뿐, 설마 잘리기야 하겠어 싶은 안일함은 이미 수 차례 부정되었다. 옆동네, 옆회사는 이미 피바람이 불고 있다. 돈놀음을 혐오하는 반자본주의자가 기뻐할 만한 풍경이다. 물론 그네들도 본인 집값이 떨어지는 건 시뻐하는 듯 하다.

우리 회사는 당장 멀쩡해보이지만(그러니까, 충분한 유동자산이 있는 것 같지만), 당장 다음 주에 '쨔잔, 그런데 절대라는 건 없군요.'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일단 회사랑 가깝다고 얻어놓은 비싼 월셋방부터 정리해야할지, 매일 저녁 혼자 배달해먹던 치킨의 호사를 포기해야할지, 뭐라도 일단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도 책임질 입이 나 혼자라는 것은 축복이다.

과거 금융위기도 이랬을까? 젊은이의 끝자락을 아직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는 나는 IMF도, GFC도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으니 알 도리가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흘러가자 자연스레 과거 IMF 시절에는 어땠을까 싶다. 지금보다 더 낮은 노동자 인권, 외벌이가 당연하던, 시총 10위 기업들도 속절없이 무너져가던 시절, 옆동네 춘식이가 시장에 그대로 두드려맞고 직장과 자산을 모두 상실하는 것을 보던 마음을, 자신도 곧 그 모습이 되리라 짐작할 수 있던 상황을 보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혼자인 나와는 다르게, 자신의 지갑만 바라보는 세 명의 식구가 어깨 위에 얹힌 채로 받는 스트레스는 어땠을까.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나야, 돈벌이 수단을 잃고 빚더미 위에 던져져도 욕 한번 시원하게 박고 자살하면 되지, 속편한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가족이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치기어린 나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눈앞의 끔찍한 미래가 해결책이 없는데 죽음조차 탈출구가 될 수 없는 기분을, 그것을 견뎌낼 수 있게 해준 믿음을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볼 수 없다. 물어보기에는 이미 10년도 더 훌쩍 늦었다. 그 때 내 나이보다야 아버지가 당시 조금 더 나이가 많았겠지만, 나는 열 살을 더 먹는다고 쳐도 의연히 맞바람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미리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존경했을 텐데.

나이가 들면 부모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던데, 나는 아직도 한참 남았다.

* 오르골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6-25 10:53)
* 관리사유 :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피를마시는새
22/11/19 16:56
수정 아이콘
정말로 상황이 끔찍한 경우는 농담으로라도 망했다는 말을 못하더군요. 글쓴이 분께서는 버티실 수 있을 겁니다. 파이팅하세용
이경규
22/11/19 17:04
수정 아이콘
혼자인게 그런건 좋아요. 당장 뭐 잘려도 딸배하면서 고시원들어가서 살아도 크게 부담은 안되는
22/11/19 18:00
수정 아이콘
그래도 화성에 혼자 남겨진건 아니잖아요.
22/11/19 18:02
수정 아이콘
마셔 !
No.99 AaronJudge
22/11/19 18:03
수정 아이콘
아……

참 책임질게 내 몸뚱이 하나면야 뭐 무모한 도전이든 빚더미든 악으로 깡으로 해보기라도 하는데
책임질 사람이 늘어나면……아…
No.99 AaronJudge
22/11/19 18:05
수정 아이콘
저는 경제 관련으로는 문외한에 가깝지만, 연준이나 한국은행총재님 또는 여러 전문가들의 예상을 주워들어보면 올 겨울 내년 초가 참으로 추울것같네요….두려워지는군요
유료도로당
22/11/19 19:00
수정 아이콘
혹시 우리회사 얘기인가 했네요. 금융업계에 발을 좀 걸치고있다보니 상황이 워낙 비슷해서요...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멀리보면 시장은 결국 사이클이고 하락장엔 열심히 일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버티다보면 또 해뜰날이 오겠거니 합니다. 모두들 힘내시길...
22/11/19 19:20
수정 아이콘
언젠가 웃으며 오늘 얘기할 날이 있겠죠
하종화
22/11/19 19:45
수정 아이콘
어렵고 버거워도 윗 세대들이 imf나 서브프라임 사태 등의 경제위기를 어영부영 헤쳐나갔던 것처럼 잘 헤쳐나가실 거라 믿고, 잘 헤쳐나가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Hope-N.EX.T 라는 노래가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노래 하나 추천드리고 가겠습니다.
감전주의
22/11/19 23:42
수정 아이콘
어영부영이라고 하기에는 자살하거나 가족이 해체된 사람도 많은지라 쉽게 얘기하긴 힘들죠
지나면 추억이지만 지나가기까지가 고통이긴 하니까요
하종화
22/11/19 23:45
수정 아이콘
현 시점에서 글쓴이분에게 필요한건 냉정하고 냉철한 상황인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아도 어떻게든 희망이 필요할 테니까요.
가볍게 말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헤쳐나가보자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우두유두
22/11/19 20:12
수정 아이콘
힘냅시다
성야무인
22/11/19 20:51
수정 아이콘
정말 힘들때는 힘들다는 이야기도 안나온다는데

지금 그 시기인것 같습니다.

솔직히 답이 없습니다.

모두들 힘내자구요..
이민들레
22/11/19 22:08
수정 아이콘
이 또한 지나가지 않겠습니까. 역사상 가장 사회안전망이 잘되있는 시대인걸 감사하면서 살아야죠 뭐
나혼자만레벨업
22/11/19 22:10
수정 아이콘
그 시절이 훨씬 어려운 시절이었긴 합니다. 타이타닉 보러 가는 것조차 해외 영화 본다고 욕먹기도 했던 거 같네요...
22/11/19 22:13
수정 아이콘
(수정됨) [혼자인 나와는 다르게, 자신의 지갑만 바라보는 세 명의 식구가 어깨 위에 얹힌 채로 받는 스트레스는 어땠을까]

당시 우리 아버지의 이 스트레스를 해소해준건 오직 [박찬호] 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에게도 영웅이 되었지요

저 뿐만 아니라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엔 저 같은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떄는 , 우리는 모두 축구를 야구보다 더 좋아했음에도 , 아침마다 마이크 피하자니 몬데시니 어쩌고 저쩌고 야구얘기를 했었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찬호형은 말이 많아도 됩니다. 그 힘든시절 모든 아버지들의 위로 였으니까요.

언제 제가 찬호형을 직접 볼 수 있으면 , 꼭 큰절 한번 올리고 싶습니다 .
-안군-
22/11/21 11:18
수정 아이콘
박찬호와 박세리가 온 국민의 희망의 빛이 되어주던 시절이었죠..
코인언제올라요?
22/11/20 11:14
수정 아이콘
저도 아이디처럼 아주 시원하게 물려있지만,
(전 재산 + 대출)
지금 이렇게 경험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경험이자 자산이겠죠.
50대에 첫 경험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와이프가 코인 괜찮냐고 맨날 물어보다가 요즘은 묻지도 않더군요.
22/11/21 12:59
수정 아이콘
"그래도 책임질 입이 나 혼자라는 것은 축복이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내 한입은 어떻게 해서든 먹고살 수는 있겠더라고요..
탑클라우드
22/11/21 15:10
수정 아이콘
IMF 때는 아버지 사업이 넘어가며 빚 받을 사람들이 집 마루를 점거한 채 고스돕만 치고 있었고 저는 재수생이었죠.
리먼 때는 글로벌 컨설팅펌의 나름 폼나는 컨설턴트였지만, 퇴직 압박을 받으며 반 강제로 이직을 했었죠.

IMF 위기 이전 평창동 단독 주택에 살던 우리 가족은 의정부의 1층이 슈퍼마켓인 집의 2층에 월세를 살게 되었고, 저는 군대를 갔었습니다.
리먼 때는 그래도 월세는 내고 살고 있었지만 결국 고모 소유의 흑석동 빌라 반지하에 공짜로 기거해야 했습니다. (고모 감사합니다)

그래도 그 두 번의 경험으로, 지난 몇 년간 세상에 눈 먼 돈들이 난무하고, 주위에서 왜 그렇게 사냐고 핀잔을 줄 때
정기예금 유지하고 KT&G같은 종목도 포트폴리오에 포함 시키며 참고 버틸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저는 미래를 예측한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발생하는 현실에 현명하게 대응하는 것이 예측하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일이 없을 것 같은 오늘도 누군가는 치열히 대응하며 내일을 열어가고 있을테고,
누군가는 내일이 없으니 다 X됐다며 오늘도 제끼겠지요.

모두가 힘든 시기이지만, 모두가 이 상황을 현명히 대응하여 내년 이맘 때 즈음에는 게시판에
행복한 글들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685 [역사] 연금술사가 만든 소주?! / 소주의 역사 [19] Fig.112193 23/02/20 12193
3684 연준은 긴축기조를 멈출 수 없고, 그 원인은 미국 정부다. [96] 민트초코우유12995 23/02/16 12995
3683 [일상] 소소한 강원도 캠핑 사진 [24] 천둥16427 23/02/16 16427
3681 (PIC) 기억에 남는 한국 노래가사 TOP 30 이미지로 만들어 봤습니다. [16] 요하네15679 23/02/12 15679
3680 S23 기념, 때리고 싶은 통신사와의 4선 [61] 악질16399 23/02/15 16399
3679 난임지원의 현실. [65] 사업드래군16379 23/02/14 16379
3678 그 나잇대에 소중한 것들 [32] 흰둥15862 23/02/13 15862
3677 미국 고용은 얼마나 충격적인 것일까?(feat. 마이클버리) [61] 민트초코우유15751 23/02/09 15751
3676 WBC 일본 대표팀 분석 - 선발투수 편 1부 [38] 민머리요정13420 23/02/09 13420
3675 백화점이 전자양판점에 먹히는 날 [45] 이그나티우스14140 23/02/07 14140
3674 [역사] 2월 14일,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이유 / 초콜릿의 역사 [7] Fig.112945 23/02/07 12945
3673 (스압) 대한민국 건국후 주요 대형 인명피해 사고 [50] Croove13688 23/02/05 13688
3672 한국 수출은 정말로 박살났을까? [87] 민트초코우유15912 23/02/07 15912
3671 『당신은 사업가입니까』이런데도 정말 사업을 하려고? [28] 라울리스타14402 23/02/05 14402
3670 나는 왜 호텔에서 요리사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가? [120] 육식매니아14817 23/02/05 14817
3669 야간 투시경 [21] 밥과글13802 23/02/04 13802
3668 소녀 A [19] 밥과글13730 23/02/03 13730
3666 전세보증금 반환 소송 후기 [41] Honestly14340 23/02/03 14340
3665 C의 죽음에 대한 것 [6] 범이13176 23/02/02 13176
3664 버거 예찬 [66] 밥과글13369 23/02/02 13369
3661 웹소설의 신 [19] 꿀행성13136 23/02/01 13136
3660 60년대생이 보는 MCU 페이즈 1 감상기 [110] 이르13698 23/01/31 13698
3659 도사 할아버지 [34] 밥과글13989 23/01/31 1398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