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8/27 23:21:06
Name 헥스밤
Subject 각개전투


새벽 한시 사십 분. 바에 두어 명의 손님이 앉아 있고 한 테이블에 두 명의 손님이 앉아 있다. 직원에게 마무리 청소를 시키며 손님들에게 이야기한다. '오늘은 한산하고 조용하고 하니 두 시 정도에 정리해 볼까 싶습니다.' 우우, 하는 비난이 잠깐 들려온다. 왜이래 일찍 닫아. 글쎄요. 내가 사장이고 내가 왕인데 내가 닫겠다는데 임마. 두시에 닫는게 꼬우면 지금 쫓아내버린다. 라고 적당히 농을 던지며 담배를 물고 나를 위한 한 잔을 따른다. 뭘 마실까. 뭘 마셔도 피곤한 건 똑같다. 지겨워. 라는 생각이 들면 새로운 술을 들이고는 한다. 덕분에 60병 정도를 들고 시작했던 가게에는 지금 백 병이 넘는 술들이 있다. 쓸쓸히 옥탑방으로 향해가다 집 앞의 피씨방에 들른다. 게임을 하다가, 아침해가 뜨고 나면 집으로 향한다. 외롭구만.

이것이 평범한 하루의 마감이다.

일년 쯤 전에는 조금 달랐다. 대학을 갓 졸업하거나 아직도 졸업하지 않아, 근처에 살고 있던 친구들이 많았으니까. 한 십여년과 마찬가지로, 새벽 두시가 되었건 새벽 네시가 되었건 전화를 해서 끌어낼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야, 술먹자. 술을 먹고 헛소리를 내뱉는 등가 교환을 하며 밤을 새고 쓰러져 자고 일어나면 다시 술을 마실 시간이었다. 그리고 하나 하나 떠나간다. 취직을 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고 결혼을 한다. 친구들은 그렇게 떠나간다. 외롭구만. 바텐더. 내 직업이 문제다. 남들이 퇴근하고 쉴 때 출근해서 일을 한다. 남들이 쉬는 주말에 가장 바쁘게 일을 한다. 낮에 자고 밤에 일하는 나는 밤사나이, 누구와 어울릴 수 없지. 모든 이의 외로움을 벗삼아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나는 외로움의 성자. 아아 성스러운 외로움이여.

는 개소리죠. 수상한 직업을 택한 나 혼자 외로운 게 아니라 결국 모두 마찬가지다.

남들이 일할 때 일하고 남들이 쉴 때 쉬는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자주 홀로 바에 찾아온다. 서베이 회사 직원이건 컨설팅 회사 직원이건 박사과정생이건 러시아에 중고차를 팔아먹는 일을 하는 회사에서 수출용 컨테이너 내구도를 체크하는 일을 하는 노문학을 전공한 사람이건 고등학교 선생을 하건 마찬가지다. 나이를 먹고 자신의 전장이 생기면 사람은 결국 외로워지기 마련이니. 누가 나 대신 내 삶 속에서 싸워줄 수는 없잖은가.

고등학교 때 우리는 모두 친구였고 대학에 가서는 대학의 친구들은 모두 친구였던 것 같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고 아 세상이 너무 남근같아서 내 남근은 쓸 일 없네 하는 헛소리를 씨부려대고 아 헛소리를 씨부릴 때가 아니라 씨를 뿌려야 되는데. 교미교미 얍얍. 수업을 듣고 동아리방에서 자고 술을 마시고 문학과 역사를 탐하고. 언제나 주머니에 돈은 없었지만 시간은 그런대로 만만했다. 빅토르 최의 노래 제목마냥 시간이 없는데 돈도 없다, 는 비극도 때로 찾아오기는 하였으나.

애인은 언젠가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의 일상적 발화를 두 가지로 정리했다. 1. 회사 이야기 혹은 애인 이야기 말고는 할 줄 아는 이야기가 없다. 2. 내 윗사람은 모두 유전적으로 개의 자식임에 틀림없으며 내 아랫사람은 약에 쓰려면 없다는 개뿔보다도 하등한 업무능력을 갖춘 멍청한 지진아새끼다. 회사가 되었건 대학원이 되었건 어차피 다 똑같다. 회사 안에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고 그 곳을 나가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어지고 만다. 생각해보면 나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애인은 내게 내 발화의 특징으로 ‘기승전Bar’를 지적했다. ‘허구연에게 기승전돔이 있듯이, 넌 항상 기승전Bar야.’ 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내 Bar가 내 전장이니까.

언젠가부터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모두 점점 줄어든다. UMC의 가사처럼 회사얘기 혼수얘기 망가진 펀드얘기. 라도 함께 하면 재밌으려나. 하지만 나나 친구놈들이나 다들 꼴에 한때 꿈과 미래를 품었답시고 쿨한 척하다 뒈지신 귀신이라도 씌였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피한다. 그러고 나니 어라 할 이야기가 없네. 그러면 뭐 할 수 없지. 외롭구만. 그런데 그래도 친구라도 만날 시간이라도 있으면 그건 또 그런대로 괜찮은 삶 아니겠어. 시간도 없고 지치네. 회사는 사람을 뜯어먹고 대학원은 사람을 갉아먹고 그렇다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백수로 살자니 입에 금수저가 없네요 젠장맞을. 결국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인생은 지쳐가고 아 이게 뭐람.

결혼이라도 하면 나아지지 않겠어. 근데 아무도 결혼을 하지 않는다.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모스크바에 어학연수까지 갔다 와서, 러시아에 중고차를 팔아먹는 회사에 취직해서 컨테이너 유지보수를 총괄하는 업무를 맞고 있는 친구놈 하는 결혼 직전까지 갔었다. 상견례가 끝나고, 여름 휴가를 함께 다녀오고, 거기서 백분토론이 시작되고, 그래서 헤어지기 전까지는. 좋게 포장하자면 헤어진거고 쉽게 표현하자면 그냥 파혼이잖이 이거. 뭐야. 아침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뻔한 이야기들은 사실 너무 뻔해서 현실감이 없었는데, 살아보고 나니 그런 게 바로 현실이었어. 왜 있잖아. 오랜만에 재회한 옛 연인이 사실은 암투병 중이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거나. 결혼 전에 함께 떠난 휴가에서 싸우고 파혼한다거나. 누가 누가 바람피고 누가 누가 사귀고. 몇 년을 사귀고 같이 사는 집의 전세금도 같이 부었는데 싸우고 헤어졌다거나. 부모가 내이름으로 빚을 내서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폭삭 망했다거나. 아니 더 심한 경우엔 대를 이어 비공식 펀드를 운영하는 이상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애비가 어떤 년이랑 눈맞아서 비공식 펀드에 있는 돈뿐 아니라 내 돈까지 들고 튀었어, 같은 경우도 있고. 바텐더를 하다 보면 아침드라마나 막장드라마가 밍밍해진다는 게 슬픈 일이야. 나이를 먹으니 다들 자신의 적과 자신의 전장이 생기기 마련인데. 보통 적도 우습고 전장도 우습고 그 안에 있는 내 꼬라지도 우습게 되거든. 어디가서 말할 수도 없는 이런 이야기. 를. 가지고.

우리 연대하자. 함께 고통을 나누자. 고.

하는 건 너무 허황된 개소리가 되고 만단 말이야. 서른 즈음엔. 아니, 애비가 내 돈 들고 튀어서 애비 죽빵을 날려서 고소당한 녀석이랑 파혼한 러시아어 전공자랑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뭐 있겠습니까. 슬픈 일이지. 이거 외롭구만.

그러니까 내가 먹고 살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우면 대체 혼자 올 만한 누추하고 조용한 바를 운영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을 수가 없지. 언젠가 무언가 나아질 지도 모르겠지만. 경찰과 의사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내 직업도 사라질 리가 없겠지. 어딘가 슬프고 이거 외롭구만. 하지만 어쩌겠나. 살아봐야지. 살다 보면 나아지겠어, 하는 희망같은 건 어디에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은 외롭지만 예전에는 좀 나았던 것 같기도 하니까 언젠가는 좀 나아지기도 하겠지. 그래. 외로운 당신들. 너무 외로워하지 마. 꿋꿋히 버티고 있으면 언젠가 정글러가 기어와서 갱킹이라도 해주겠지. 물론 정글러에게도 정글러 나름의 전장이 있으니까 보채지는 말고. 그래, 니 옆의 친구들 말야. 지금은 우리가 힘들지만 언젠가 우리가 만났듯이 우리는 다시 또 우리의 전장에서 만나게 되겠지. 힘내도록 하자고.

하지만 이거, 외롭구만.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9-13 07:08)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슬러거
12/08/27 23:30
수정 아이콘
마지막 한줄이 뭔가 여러가지 느낌을 주네요
경찰과 의사처럼 바텐더도 없어지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류 역사를 배워온것과 살아온 지금과 앞으로의 미래를 봤을 떄 술 만큼은 없어질일이야 없겠죠.

저랑 술퍼먹기 좋아하는 친구 한놈이 언젠가 멍멍이소리이지만 왠지 그럴듯한 소리를 하더군요.
'술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No.1 베스트셀러'
이상 글 감상은 한줄인데 헛소리는 네줄인 댓글이였습니다 크크
12/08/27 23:30
수정 아이콘
원글자의 의도와는 달리 읽는 제 입장에서는 너무나 훈훈한 글입니다.
12/08/27 23:35
수정 아이콘
선추천 후감상...
12/08/27 23:35
수정 아이콘
..
순간 제 감정을 소설로 표현한 글인 줄 알았습니다.
깜놀했네요.

..
"하지만 이거, 외롭구만."
지니쏠
12/08/27 23:38
수정 아이콘
어두운 날에는 눈을 감고 제 화려한 월광쇄도를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외로운 날에도 눈을 감고 제 이블린의 포옹을 다시한번 떠올려 보아요. 아아, 다음에는 적으로 만나서 헥스밤님의 무한의 구속에 기꺼이 이몸을 [m]
Darwin4078
12/08/27 23:41
수정 아이콘
외롭게 태어난 사람은 뭘 해도 외로워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워도 외롭고, 돈을 벌어도 외롭고, 나름 사회적으로 인정 받아도 외롭고..

원래 외롭게 태어날 운명인데 뭐 어쩌겠어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죠.

그러고보면 카르마를 DNA의 다른 명칭이라고 생각해보면 카르마나 윤회, 업보 이런게 틀린게 아니지 않나 싶어요.
Minkypapa
12/08/28 00:19
수정 아이콘
중고생 대상 (보습)학원강사들을 잡으시면 좋을듯 싶군요. 그들 대부분 오후 3시출근-11시 퇴근에다가 시험기간엔 더 늦게 퇴근할겁니다.
오전엔 대부분 자는 시간이라 놀아줄 사람도 없고...

Darwin4078님 코멘트처럼
짝 만나 결혼하고 애들이 크고 그래도 남자는 궁극적으로 외로운 존재!!! 그래서 남자 혼자 개폼잡아도 다 이해해줘야합니다.
헥스밤
12/08/28 00:29
수정 아이콘
바텐더 하기 전에 제 직업이 바로 학원강사였습니다. 흐흐
人在江湖
12/08/28 00:20
수정 아이콘
우와. 잘 읽었습니다.

(다만 시간나실 때 아래 문장은 고쳐주시면.. ^^;
친구놈 하는 결혼 직전까지 갔었다. -> 친구놈 하나는 결혼 직전까지 갔었다.)
켈로그김
12/08/28 09:39
수정 아이콘
정말 뭘 해도 외롭습니다.
하루에 외롭지 않은 시간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나마 오늘은 태풍이 와줘서 덜 외롭네요.
Absinthe
12/08/28 10:36
수정 아이콘
결혼하신 분이 외롭다니요-
위험한(?) 발언입니다 ...?
Absinthe
12/08/28 10:38
수정 아이콘
헥스밤님 글 스타일을 좋아하는 피쟐러 입니다.
글 자주 투척해 주세요 *-_-*
왼손잡이
12/08/28 10:41
수정 아이콘
직장도 구했고, 정말 하고싶은일이라 즐겁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데.
외롭네요.
여자친구가 있을때도 가끔은 외로웠는데 없으니...이건 뭐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주말엔 미추어버리겠네요.
너무 심심하고 외로워서 누구에게 카톡이라도 보내볼까 뒤적거리는데 마침 보낼 여자가 없을때.
내가 왜 이렇게 살았지? 생각이 들더군요.

남자분들.. 결혼하기 전까진 여자친구 생겼다고 주변의 여자관계 끊지마세요. (바람피우란 말이 아니고 실낱같이라도 관계를 유지하세요..)
헤어지고나면 가장 큰 후회가 그거에요.
영원한초보
12/08/28 16:55
수정 아이콘
자기 인생 같이 살 사람 찾기는 힘드니까요.
그래도 저는 하는 얘기 한정적이라거에 게임 이야기를 추가하겠습니다. 요새는 롤이 잼있어요.
12/09/13 17:47
수정 아이콘
한참 지나서 다시 읽었는데 오늘 더 맘이 짠하네요.
하지만 이거, 외롭구만.
카톡 상태 메세지 변경~~~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949 [LOL] 잔나 바이블: 서포터 잔나의 道 (4) - 스펠에 대해~와딩에 대해 [7] LenaParkLove3546 12/09/24 3546
1948 [LOL] 잔나 바이블: 서포터 잔나의 道 (3) - 라인전 운영 2~라인전 종료 이후 [12] LenaParkLove3660 12/09/23 3660
1947 [LOL] 잔나 바이블: 서포터 잔나의 道 (2) - 라인전 운영 1 [6] LenaParkLove3795 12/09/23 3795
1946 [LOL] 잔나 바이블: 서포터 잔나의 道 (1) - 잔나의 역할 이해~키 세팅 [47] LenaParkLove6236 12/09/21 6236
1945 [리뷰] 광해, 왕이 된 남자 - 이런 사극을 기다렸다 (스포 있음) [89] Eternity8775 12/09/15 8775
1944 스타크래프트2. 전략의 역사(1), TvsZ [38] 스카이바람5262 12/09/14 5262
1943 [야구] 불멸의 철완 최동원, 세상에 작별을 고하다. [31] 민머리요정8577 12/09/12 8577
1942 통계수치라는 녀석, 그 녀석은 "다중이(Multiple Personality)" (부제: 분모와 표준오차) [18] 곰주6050 12/09/06 6050
1940 상실감에 대하여 [26] Judas Pain9311 12/09/09 9311
1939 LOL the Champions Summer 직관 후기입니다. (사진 있습니다.) [34] 티니6926 12/09/09 6926
1938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 [42] 삭제됨19993 12/09/04 19993
1937 서울, 2006년, 겨울 [7] Neo4814 12/09/01 4814
1936 스타크래프트2 세계 10대 메이져 토너먼트 [31] 어강됴리8030 12/09/01 8030
193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GSL 리그방식 설명 [45] Marionette6514 12/08/31 6514
1933 나란 인간 눈치빠른 인간 [53] 바람모리8634 12/08/31 8634
1932 [영화공간] 우리 시대, 한국의 아름다운 중견배우들 [31] Eternity7314 12/08/30 7314
1931 누가 그들을 벌주는가 [12] happyend5738 12/08/30 5738
1930 경제 민주화에 대해 생각해본다. [24] bachistar4922 12/08/29 4922
1929 [오늘] 8.29 국치일 [9] 눈시BBver.26122 12/08/29 6122
1928 각개전투 [15] 헥스밤7701 12/08/27 7701
1927 [LOL] 정글러와 친해지는 방법. [62] 헥스밤8877 12/08/30 8877
1926 [영화공간] 2012년, 가장 주목해야 할 조연 배우 7인 [44] Eternity8651 12/08/26 8651
1925 [영화공간] 이 시대, 한국 최고의 남자 배우들 [97] Eternity11356 12/08/26 1135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