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사회는 내부적으로만 성향을 공유하는 몇 개의 세력권으로 나뉘어, 서로를 향한 계몽 성전의 시대에 돌입했다고 생각합니다. '계몽 성전'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것이 마치 과거의 십자군이나 성전에 비견할만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세력권 내 구성원을 고취시키긴 하지만, 시대적 시스템적 한계상 상대의 물리적 말살을 수단으로 쓸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로 사용되는 수단은 미디어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며, 내부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채널들을 개설하고(유튜브, 특정 주제 단톡방, sns상의 연계망 등), 이를 통해 어느 세력권에도 소속감이 약한 중간지대에 속한 사람들과 상대편의 연성 구성원들을 '계몽'시켜 이념적 정신적 승리를 추구하되, 현실적으로 상대편의 강성 지지층까지 모두 계몽시켜 아군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대신 이들의 세력과 행동의 자유를 축소시켜 우리 세력의 자유와 안보를 최대한 신장시키는 것입니다. 상대방 세력과 행동반경의 증대는 곧 우리 그것의 축소를 의미하므로 이 성전에서 명확하게 규정된 목표점, '여기까지만 달성하면 전쟁을 멈춰도 된다'는 지점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 성전은 제로섬 게임의 성격을 띄거나, 혹은 (실제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 구성원들에게는 제로섬 게임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기준으로 이 성전에 참여중인 주요 팩션들은 대강 4개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순서는 대략적인 결성 시기 기준)
1팩션. [60대 중후반 이후의 노년층]
이들은 한국전쟁을 직접 겪었거나 그 여파가 사회적으로 무겁게 남아있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반북 반공 성향이 강하고, 냉전시대의 경험과 교육으로 '제5열'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안고 있습니다. 성향과 의견이 다른 사람이나 자신들이 납득할 수 없는 정책을 펴는 정치인과 정당에 대해서는 북한의 앞잡이 내지는 뭣모르고 북한 돕는 작자들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한민국의 태동기부터 축적되어온 경제적 자산과 많은 인구수를 통한 선거에서의 큰 결정력을 쥐고 있지만, 세력권 내부에 점점이 산재해 있는 이러한 힘이 큰 것과 별개로 실제 현실에서 발현되는 힘은 생각만큼 크진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이 세력권 내부에 거대한 '계급적 균열'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전광훈 집회에 참여하러 올라온 할아버지 1과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거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어느 기업 명예회장 사이에 어느 정도나 동질감이 있을까요? 혹은 동질감이 있더라도, 그것을 어떤 식으로 조화시켜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요?).
2팩션. [40대~60대 사이의 대졸자 위주 집단]
연령대로 치면 1의 조카뻘 내지는 자식세대쯤에 해당할 집단입니다. 1과 달리 연령대로만 지칭하지 않고 굳이 부연설명을 넣은 이유는 세대 전체가 비교적 균질성을 띤 40대와 달리 50대는 대졸자와 비대졸자라는 기준으로 어느정도 내부적 균열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비대졸 50대의 경우 대졸자(소위 말하는 '586')만큼 명확한 정치적 지향성이나 지지성향을 띠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선거에선 (의도치 않게)캐스팅보트의 일원 역할도 종종 해왔습니다.
3팩션. [30대 이하의 젊은 여성]
다시 2의 조카나 자식뻘에 해당할 세대의 여성집단입니다. 주로 성별갈등으로 인해 후술할 4와 세대적 균질성을 이루는 대신 독자적인 팩션이 되었습니다.
유명한 표현으로 100명의 여성이 있으면 100개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애초에 긍정적인 포장을 위해 쓰인 표현이지만 부정적인 함의까지 확장하면 의외로 진실을 함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도 들여다보면 1)남자(이쪽말로는 '냄져')와의 어떤 종류의 개인적 관계형성도 투쟁하는 여성들을 배신한 '흉자'라는 쪽부터 2)성적인 관계만 아니면 상관없는거 아니냐, 3)성적인 관계라도 휘둘리거나 결혼으로 구속되지 않고 주도적으로 즐길 수만 있으면 그만, 4)결혼을 하건 말건 여자의 개인적인 자기결정권 아님? 하는 쪽까지 중간중간에 온갖 자잘한 바리에이션이 있습니다.
이처럼 딱히 구성원간에 합의된 도그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남자들이 꿀빨면서 생색내고 여자를 억압하고 있으며 여자라서 손해보는 것이 많다는데는 대부분 인식이 일치하기 때문에 그럭저럭 집단정체성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4팩션. [30대 이하의 젊은 남성]
역시 2의 조카나 자식뻘에 해당할 세대의 남성집단입니다. 주로 성별갈등으로 인해 3과 세대적 균질성을 이루는 대신 독자적인 팩션이 되었습니다.
사실 성별갈등의 잠재된 긴장관계는 거의 2000년대의 '된장녀' 밈, 루저의 난 등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볼 수 있는 나름 유서깊은 것이었지만, 시간 남는 인터넷 한량들의 기싸움을 넘어 구성원 전반을 하나의 공통된 인식으로 묶을 정도의 단계로 돌입한 것은 디씨녀들이 메르스 갤러리를 거쳐 메갈리아를 결성하고 이것이 사회적 이슈가 된 이후였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것은 어느정도 공통된 정체성이나 인식을 가지고 집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집단들 위주로 크게 묶은 것일 뿐 한국의 모든 구성원을 이상의 4분류 속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30대 후반인 사람은 사안에 따라 2와 인식을 같이할 수도 있고 3이나 4와 인식을 같이할 수도 있습니다. 60대 초반인 사람도 경우에 따라 1에 가까운 모습을 보일때도 있고 2에 가까운 모습을 보일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세대 어느 집단에나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도가 비교적 낮은 구성원들이 항상 있습니다. 대충 십자군 한다고 '데우스 불트!' 외친다고 농사짓고 장사하던 사람들까지 전부 다 눈 뒤집혀서 달려가는 건 아닌 것처럼 생각해 주십시오.
아무튼 이상의 4대 팩션을 몇 가지 기준에 따라 순위를 매겨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1. 투표 동원력
1>=2>>4>=3
1팩션과 2팩션 사이의 투표 동원력 영끌대결이 사실상 저번 대선이었다고 보는데 여기선 아슬아슬하지만 1이 이겼습니다.
다만 >가 아니라 >=가 된 이유는 저번 대선에서 분위기 끌어가기 싸움에서 2쪽이 좀 말린 감이 있어서...100% 컨디션을 낸것 같지는 또 않아서 여지를 뒀습니다. 사실 시간 지나면 2가 그냥 절대적인 강력함을 발휘하게 될 공산이 높습니다.
4랑 3은 사실 굳이 구분할만한 어떤 격차가 난다고 보지는 않는데 그래도 인구상 4가 좀 더 커서 >=로 했습니다.
2. 사회적 실무능력
2>1=4>3
표현이 좀 애매한데 산업체와 각종 조직체, 실무현장을 지탱하는 업무능력에 관한 얘기입니다.
...사실 나는 2에서도 꽤 강성에 속하는 지인들이 있는데, 2000년대 어드매에 이분들과 술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들을 일이 있었습니다. '보수가 부패하지만 유능하네 뭐네 하는데 그거 다 헛소리야 헛소리! 사실 일도 보면 우리가 더 잘한다고! (중략) 늙다리 부장이랑 이사xx 알지도 못하면서 증말...'
나는 거기서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 말을 부정했습니다. 이제 막 중간관리자로 올라갈까 하는 참인 그들이 그동안 핵심 실무를 담당하고 조직을 관리해온 이들보다 정말로 유능할(사실 이 표현 자체도 세부적으로 나눠보면 수많은 기준이 있겠지만) 공산은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습니다. 이제 2는 사회적으로 다수의 크고작은 부서 책임자이자 핵심 실무자이며, 대부분의 왕성하게 활동하는 학자와 연구자들이 속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돌아, 이제는 그 말이 맞습니다.
또한 이것은 뒤집어보면 젊은 남초에서 흔히 얘기되는 '무능한 586' 등의 담론이 얼마나 공허한지도 말해줍니다. 그들이 지금 윗세대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시점이 아마 오기는 올 것입니다. 최소 15년이나 20년은 더 지나서? 지금은 아니고.
3. 조직화된 자금 조달력
2>=1>>3>4
사실 자금력에서 1이 2에 완전히 밀리는건 아닐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그 자금을 유효하게 조직화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거 아닌가 싶읍니다...지지자들의 경제력을 정치적 사회적 기금으로 조달하는 시스템이 너무...투 올드함...체계화되어있지 않음...가끔 보면 교회랑 유튜버들이 영주처럼 중간에서 다 빨아먹는 봉건왕국을 보는 느낌마저 들 정도...
4는 정말로...이분야에선 압도적 로우레벨 아닌가 싶읍니다...그나마 이쪽에 지출하는 돈도 대부분 유튜버한테 가는거같음...
4. 광역 어그로 끄는 정도
4>3>2>1
4는 인터넷 다수의 커뮤니티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 이는 이들을 끌어들이면 여론전에서 유리하다는 말이 되지만, 동시에 커뮤니티가 끌게 되는 어그로=이들의 어그로가 되는 경향성이 있음도 의미합니다.
근자 가장 큰 사례로는 아마도 코로나 백신 관련 음모론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딱히 백신 음모론에 부화뇌동하지 않았지만 도매금으로 취급받게 된 청년들은 아마 속 좀 쓰릴것입니다.
5. 여론전 주도력
4>3>2>1
대체로 위와 동일한데 부정적 효과와 긍정적 효과로 구분되었다고 생각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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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전에 클로저스 사건 때 갤러리에 있어봤는데 내부에서는 확실히 그런 기조가 있습니다 크크크. 막 상대의 수준이 낮아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둡다느니 하고 개탄하던데 정작 이쪽에서도 나오는 건 예스컷 운동이었죠. 메갈리아가 싫다는 이유로 흡사 메갈리아가 할 법한 메갈리아가 싫어하는 남성향 동인지 작가들까지 심의기관에 신고해서 콩밥을 먹이려고 드는 아이러니한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