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좌 불와
명사
불교 용어
결코 눕지 아니하고 꼿꼿이 앉은 채로만 수행하는 방법
#
방금 전 엄마와의 통화에서
아버지가 오늘치 재활치료를 마쳤다고 한다.
아이고 느그 아부지
왼쪽에 힘이 안 들어가서 혼자 앉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다가
이제는 잠깐씩은 엉거주춤하게라도
의자 쓸 수 있게 됐다,
너무 걱정 마라.
#
1996년 가을 어느 날 밤이었다.
아빠가 몇 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극도의 분노 상태로 집에 들어오셨다.
(사실 내 기억은 아니다.
20여 년이 지나서 말씀해주신
모친의 기억이다)
모 금융 기업의 계열사에서
기업 대출 심사 일을 하던 아빠,
지방의 A사에게 돈을 빌려줘도 되는지 알아보러
임원 한 분 모시고 출장을 갔더랬다.
알고 보니 심사는 그냥 요식행위일 뿐
이미 그 임원과 A사 사장은 짝짜꿍(?)이 끝난 상태였다.
A사의 현황 자료라고 던져주길래 받아봤더니
보자마자 한숨이 나오는 회사였다.
아빠는 최선을 다해 임원을 설득했으나
그 임원에게 출장은 접대받으러 온 것일 뿐 답정너였는데
부하 직원이 아무리 애써봐야 씨알이 먹힐 리가 있나,
아빠는 결국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를 받게 되었고
심지어 그 심사 결과를 회사에 보고하는 서류에는
본인의 서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
#
그 이후,
안 그래도 좁은 우리 집 안방에
책상이 하나 들어왔다.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들어갈 만한
거대한 검은 책상.
그리고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네 살 터울 동생은
그 즈음부터 주말에 집에서 놀지 못하게 되었다.
나도 친구들처럼 토요일, 일요일에
삼국지 3, 충무공전, 재즈 잭 래빗 하고 싶었고
레고랑 프라모델 조립도 하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주말마다 빠짐없이
나와 동생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아빠는 같이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혼자 집에 있었다.
#
박물관, 극장, 영화관, 유적지,
남산, 관악산, 아차산, 수락산, 불암산,
태릉, 정릉,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덕수궁,
서울 시내 대학 캠퍼스들,
그리고 정말 지겹도록, 지겹도록 갔었던
북한산 도선사 가는 길의 계곡.
떨어진 단풍잎으로 울긋불긋하던 계곡물이
눈과 함께 하얗게 얼어붙었다가
어느새 녹아내리고 초록빛이 일렁일 때까지,
북한산 계곡의 사계절을
[어린 시절] 내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던 건
지금 생각하면 행복한 추억이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집 밖으로 뺑뺑이를 돌고서
엄마도 나도 동생도 집에 와서 널부러져도
아빠는 한 번도 우리를 반겨 주시지 않고
늘 그 까만 책상 앞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주말만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평일에 퇴근하시고 나서도
좋아하시던 야구 중계방송도 안 보시고
아빠는 저녁밥 드신 후 항상
책상 앞에만 앉아 있으셨다.
1997년 태풍이 온 여름날 한밤중에
천둥 번개 소리가 너무 크고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안방 문을 열었던 그때도
아빠는 누워서 주무시던 게 아니라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보고 있으셨다.
#
가끔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친구네 집 누구 아저씨는
주말이면 근처 운동장에서
공도 차고 고무 동력 비행기도 날리면서
같이 노는데
왜 우리 아빠는 저렇게 안방 책상 앞에서
나오시지를 않나.
울 아빠는
나랑 동생이랑 엄마를 싫어하나?
지금 생각하면 다행스럽게도
아버지께 직접 여쭤본 적은 한 번도 없다.
#
이렇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말에 아빠는 집에서 책을 보고
우리는 놀러나가던 우리 집 식구들의 일상은
97년 11월 중순이 넘어서 멈추게 되었다.
이 글 쓰면서 생각하니
엄마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고생이셨다.
평일에는 당신도 출근하셔서 일을 하셨는데......
그리고 98년 3월 초,
웬일로 아빠가 토요일에 식구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것도 아~주 기분 좋은 표정으로.
웬열?
그때 간 곳이
모 대학교 언덕 꼭대기에 있는 건물이었다.
여기가 이제부터 아빠가 다닐 학교라고 하셨다.
무슨 소리야? 아빠 옛날에 대학교 졸업했잖아?
한 번 더 다닌다고 하셨다.
당신의 [어린 시절] 꼭 배우고 싶었고 하고 싶었던 일인데
그때 집에서 등록금을 대 줄 방법이 없어서 포기했던
그걸 이제서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럼 회사는?
이번 달까지만 다닌다고 하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식구들은
패밀리 레스토랑 스카이락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고소하고도 달콤했던 콘크림 스프를
아빠랑 엄마는 둘이서 하나,
나랑 동생은 각자 하나씩 앞에 두고
아빠가 갑자기
고맙다고 하셨다.
주말에 집에 있지도 못하고
엄마랑 같이 나가느라 힘들었지, 라고.
나가서 잘 놀고 다녔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몰랐지만
주말에 게임을 못 한 건 확실히 힘들긴 했었다.
그렇게 아빠는
98학번 대학교 신입생이 되었고
나는 주말에도 집 컴퓨터 앞에 앉아
스타크래프트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숭례문에서 걸어갈 거리에 있던
아버지의 회사는
오래 가지 못하고 곧 망해서 없어졌다.
#
나의 부친은
1996년 가을부터 1997년 겨울 수능 날까지
안방 책상 앞에서 장좌 불와를 해내셨다.
모친 왈
졸리면 책상에 엎드려서 쪽잠을 주무셨을 뿐
등을 대고 주무신 적이 없다 하셨다.
주말에 나와 동생을 데리고 나간 건
아버지의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당신의 나이 마흔 시절
1년 넘게 하루도 눕지 않으시고 책만 보셔서
결국 본인과 가족의 운명을 바꾼 분이
정말 희한하게도 그놈의 유전자가
제 역할을 100% 다한 나머지
할아버지 뇌 혈관이 사고를 쳤던
딱 그 연세 그대로
아버지도 똑같은 연세에 뇌 혈관 사고가 나서
이제는 누워 계실 수밖에 없게 되셨다.
지난 4월 26일에 쓰러지셨으니
오늘로 일주일 째
용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에 계신다.
평소에는 가챠할 때나 SSR을 달라고 부르짖던
하느님, 하나님, 부처님,
이럴 때만 진심으로 찾아서 죄송합니다.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 두 분,
나의 아버지와 인연이 닿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부탁드립니다.
다시금 당신이 [어린 시절] 하고 싶었던 일을
건강하게 계속하실 수 있도록
저의 아버지가 하루빨리 일어나시기를 기도해주세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