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태종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글이 나와서 과거에 태종과 자주 비교되던 세조는 대체 얼마나 죽였을까.. 하는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세조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가장 상세히 된 기록은 바로 놀랍게도 300년도 훨씬 지난 정조시대였습니다. 정조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육신사에 제물을 내리는 등 관심을 보였는데, 그러던 중 경기도 유생들이 상소 하나를 올립니다. 그 내용인 즉 세조에 반발한 6명의 왕족 육종영 중 하나인 화의군 이영 역시 사육신과 그 충심이 다르지 않다하여 창절사에 제사를 지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정조는 화답하여 안그래도 자신이 노량진을 지나다가 육신사에 이르자 수레를 멈추고 탄식하며 안타까워 했는데, 사육신의 훌륭함은 말할 것도 없고 화의군뿐 아니라 금성대군등의 종속에 대한 절의 역시 얼마나 대단한가 하며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한다 말합니다. 더불어 종친뿐 아니라 이번에 장릉에 추향할 때 그만큼 절의가 있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을 조사해서 아뢰라고 명하죠.
당연히 모든 대신들은 자신들이 아는 단종에 충의를 바쳤던 신하들을 고하기 시작하고, 이에 누구를 배향하고 누구를 제외할지 정하려고 합니다. 이때 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람, 죽지는 않았지만 유배를 당한 사람, 세조에 실망해 속세를 떠나 은둔한 사람 등등 많은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죽진 않았어도 세조의 부름에도 관직에 나가지 않은 사람도 언급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고 당연히 생육신 6인도 언급됩니다.
그러나 세조시절 죽지 않은 사람들까지 모두 배향하려고 하니 죽은 사람만큼이나 충절을 지킨 사람의 우선순위를 두기가 애매했고, 결국 죽은 사람만 배향하기로 결정할 뒤 유일하게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치룬 엄흥도만 세조에 의해 죽은 사람들과 같이 배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배향할 사람이 정해졌고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안평대군, 김종서, 사육신 등등 총 32명의 명단이 정해집니다. 즉 이 32명은 세조에 의해 확실히 죽은, 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당시 왕족이거나 주요 관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들이었습니다. 32명이면 적은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하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들은 정말 확실한 이름있는 왕족과 대신들로 세조에게 직접적으로 대항하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흔히 태종에 의해 죽은 민씨 일가나 심온, 박포등에 해당하는 인물들이고 그런 사람만 32명이 세조에 의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연좌되거나 세조에 의해 죽었지만 행적이 완전히 증명되지 않은 사람들을 정단 옆 별단에 배향하는데 그들의 숫자만 무려 190명입니다. 이 190명이란 숫자는 그냥 실록에 흔히 등장하는 수십명이 옥사하였다하는 정치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 이름이 정확히 기록된 사람들로 실록에는 정단 32명, 별단 190명의 이름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 놓습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사형은 직접 가담하지 않으면 여인들은 연좌로 쉽게 죽이지 않음에도 여자도 7명 정도 죽게 됩니다.
개인적으로태종과 세조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이 바로 연좌인데, 태종은 문제가 된 신하들을 죽여도 생각보다 연좌를 강하게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2차왕자의 난 때 죽임을 당한 박포와 연관된 자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실제 죽음이 기록된 건 박포와 민원공 뿐이고 다른 이들은 연좌도 아니고 가담자(!)로 구분이 되었음에도 그냥 곤장맞고 유배되고 끝납니다.
그리고 태종과 세조의 결정적인 또 다른 차이가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처우였습니다. 태종의 경우는 박포의 경우 아들들은 관노비로 삼거나 유배를 보내긴 하지만 여자들 경우엔 처벌을 하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그 민무구등의 처자역시 유배를 보내지만 바로 그 다음해에 자유를 주고 외방에서 자유롭게 살게하죠.
하지만 세조의 경우 위에 언급한 것처럼 죽은 사람들의 아버지나 아들들은 대부분이 연좌로 죽임을 당해 비교조차 불가능하고, 어머니나 부인, 딸들은 여인들이었기에 죽음은 면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모두 세조시절 공신들의 노비 신세가 됩니다. 즉, 얼마전까지 주요 대신의 부인이고 딸이었던 신세에서 관노비도 아니고 갑자기 그 정적(?)들의 노비 신세가 된 거죠. 이게 그냥 일반 신하 이정도가 아니라 당시 우의정 정분이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사육신 박팽년 등의 부인들이 정인지나 다른 대신들의 사노비로 전락해 버린 거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더 재미있는(?) 기록은 세조의 경우 계유년에 연좌된 사람들을 방면하는데, 그게 15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방면하고 여기서 웃긴 건 방면된 사람들 중에서 죽은 사람의 아들, 아버지 이런 기록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한 게 직계 남자들은 대부분 사형을 당했으니까요. 그럼 누가 유배를 갔냐 하면 누구의 조카, 누구의 숙부, 누구의 누이만 있을 뿐입니다. 즉 연좌로 여자 직계가족뿐 아니라 사촌들까지 마구잡이로 잡아다 전부다 유배를 보낸 건데 그 유배생활이 그냥 몇 년이 아니라 무려 15년에 이르렀다는 점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왜 15년 뒤에 방면했느냐.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을 방면하고 그 다음날 세조는 병으로 죽습니다. 즉, 세조가 어떤 선의의 마음으로 그들을 풀어준 게 아니라 세조의 아들인 예종이 아버지가 병으로 아프자 중죄인을 제외한 죄인들을 방면하기로 결정하고 그 중에 계유난의 연좌된 사람들이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세조로 인해 조선이 망하게 됐다는 표현까지는 동의하지 않지만, 세조가 본인 왕권에 얼마나 자신이 없었는지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참고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2월 21일 병인 1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추향할 사람을 정하다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2월 21일 병인 2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장릉 배식단에 배향할 사람의 명단
세조실록 5권, 세조 2년 9월 7일 갑술 4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세조실록 47권, 세조 14년 9월 6일 임술 3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계유년의 난신에 연좌된 사람들을 방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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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대체 조조는 얼마나 죽인걸...응?
뜬금없는 소리지만 참 현대에 태어나서 사는 게 감사할 때가 있어요
백성으로 태어났으면 각종 질병에 전쟁에 또 수탈에..
관리로 출세했다가 줄 잘못 서면 바로 목 날아가거나 무서운 형벌을 당하게 되는..
아침으로 밥 한 그릇에 김이랑 스팸이랑 배불리 먹고 와서 회사 와서 피지알 하고 있는 지금이 넘 행복합니다...후훗
그럴수밖에 없던 게 세조가 즉위한 지 2년인가만에 세자가 병으로 죽어버리고 나중에 예종이 되는 둘째가 그 때 겨우 일곱살인가 그랬거든요.
근데 세조 본인은 또 건강체였던 젊었을 때와는 달리 즉위한 이후로는 종기를 비롯해 피부병이 엄청 심해서 자주 열이 오르고 몸살이 났어요.
이렇게 되면 자기가 쫓아낸 단종 생각이 안날수가 없죠. 이러면 적에게는 칼을 휘두르고 내 사람에게는 퍼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덕에 예종은 물론 어린 성종까지도 안정적으로 집권했으니 성공한 건 맞는데 그게 세조의 성공이지 조선의 성공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