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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1 12:21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말씀하신 시대의 반작용으로 공감의 시대도 지나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현재 시민연대, NGO에 대한 분위기인데 이제는 공감보다 그에 대한 냉소가 더 활성화되어 있죠. 또한 정치, 사회적으로도 계층화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지금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약자에 대한 공감”보다 “상대에 대한 분노”라고 느낍니다.
21/10/11 15:57
공감하는 범주가 더욱 좁아질 뿐이지 공감 과잉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상대에 대한 분노”는 곧 “나와 비슷한 자에 대한 공감”에서 촉발되고 있고요.
21/10/11 12:26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읽어볼 책이 두 권 늘었네요 ^^;;
공감자체가 문제된다기 보다는 7번의 마지막 문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과잉 공감하는 대상이 자신들의 배타적인 공동체 구성원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선택적 공감이라고 해야할까요? 윗분 댓글의 상대에 대한 분노도 선택적 공감에서 오는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21/10/11 13:05
폴 블룸의 'Against Empathy'은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이 안되어 있는 것같고, 판카지 미슈라의 '분노의 시대'는 몇년전에 번역되어서 우리나라 언론에도 많이 소개되었죠.
보통 우리나라에서 번역하는 기준이 뉴욕타임즈같은 곳에서 추천을 받으면 '닥치고 번역'인데, 판카지 미슈라의 '분노의 시대'는 뉴욕타임즈에서 올해의 책으로 뽑힌 덕분에 쉽게 번역이 된 것같습니다.
21/10/11 13:19
폴 블룸 책은 "공감의 배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더라구요. 오히려 분노의 시대가 절판입니다. 이북만 남아있네요. 개인적으로 이북은 별로라 도서관에서 찾아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
21/10/11 12:44
요즘 인터넷보면 내가 남성중심 사회의 일방적 희생자라는 쪽과 그로인해 역차별 받아 본인이 이등시민이라는 자기연민의 무한한 싸움인 것 같더군요. 서로 원인제공이 상대에게 있다는 강력한 믿음으로 본인 행동에 셀프 면죄부를 주며 행동의 거리낌까지 없고요. 이런 동기가 강력해지니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되면 과잉 공감이 극대화되고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리와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용인되고 있죠.
21/10/11 13:02
내 아이를 향한 연민은 다른 아이를 향한 적의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관심 있으시면 <패거리 심리학>이라는 책을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1/10/11 12:52
3번에서 나온 정치인들이 사람들의 분노를 이용하는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는 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동학대 사건에 대한 우리나라의 현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면서 https://youtu.be/JEpiEZKzu9I 앞으로 시행한다는 아동학대 시 즉시 분리 시행이라는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정작 중요한 "아동"에 대한 고려가 없는 말뿐인 정책이라는 것을 알 수있고 이런 대처가 어디선가 이미 들어본 것과 겹쳐지기도 합니다.
21/10/11 12:55
사회가 파편화되고 기술이 비슷한 편향을 지닌 사람들끼리 빠르고 쉽게 묶어줄 수 있다 보니 더욱 과잉공감 문제가 짙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공감을 요청하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어떤 적(반대편)이 상정되었을 때 자신에게 우호적인 편을 확인하려는 시도죠. 내게 우호적인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안전하니까요. 사실상 공감 자체가 배타성을 내포한 행위인 셈이죠.
21/10/11 13:02
사실 공감의 시대라는게 60년대 인류 전체 역사 상 최고 전성기, 냉전으로 서로에 대한 증오는 쩔었지만 대신에 주적이 명확해 분노를 발산할 대상이 명확하고 어쨌든 모두가 성장하던 낭만주의 시대에나 어울리는 거지, 누가 적인지도 모르겠고 성장의 과도기에 접어들어서 미래가 현재보다 어두울 가능성이 매우 높은 요즘 세대에는 영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적인 낙관주의도 그 시절에 어울리던 거죠. 그냥 다 각자도생하는 수밖에 방법 없는 것 같습니다.
21/10/11 13:10
살아가면서 점점 밸런스의 중요성을 절절히 느낍니다.
일방적으로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한 없이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지속적으로 누군가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지요. 우리에겐 공익인 것이 누군가에겐 생존권 위협일 수 있더라구요. 그 중간의 어느 지점, 서로가 감수할 만한 수준의 불편함을 함께 이해하고 최소한 치명적이지는 않은 지점을 찾는 것이 능력인 듯 합니다.
21/10/11 15:17
공감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말로 '과잉 공감이다!'라고 하는 것도 있지만, 또한 '선택적 공감이다!'라고 하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감능력 운운하면, '그거 선택적 공감능력 아니냐!' 라고 맞받아치는 거죠. 그리고 '연민'의 위험성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선택적 연민 아니냐!'라고 물음으로써, 불공정한 연민에 경계심을 갖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1/10/11 16:39
무리를 짓고, 자기 무리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무리를 적대시하는 감정은 이미 원시시대때부터 인간에게 박힌 본성이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경쟁자들을 꺾고 유일한 현생인류가 된 이유도 그 쪽에 강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요. 자연선택설적으로 해석하면, 무리를 위해 다른 무리를 적대시하지 않는 자들은 배척당하거나 처단당해서 사라졌을것 같아요. 문제는, 과학과 이성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원시시대적인 원리를 배격하고, 좀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가는게 아니라, 정치, 경제, 언론 등의 권력자들이 이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죠. 자기 편을 드는 사람들을 최대한 결집시키고, 반대파들을 배격하게 만들면 자신의 세력이 커지고, 그만큼 이익을 보기 쉬워지니까요. 대표적으로 큐아넌들을 옹호했던 트럼프 같은 인물이 있겠네요. 큐아넌의 주장들은 비과학적, 비논리적이고, 트럼프라고 그걸 몰랐을지 없지만,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큐아넌들의 논리를 트위터 등등을 통해서 은근슬쩍 흘리고, 국회의사당 무력점거 같은 짓거리도 행했잖아요.
21/10/11 22:24
평소 생각하던 것인데 글로 명확하게 써주셔서 공감이 많이 되네요. 현대사회의 근간인 과학기술은 이성의 집합체이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여전히 호모 사피엔스라는 용어가 어울릴만큼 원시적인 본능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21/10/11 19:42
사견으로 , 과잉공감이라는 현상 자체가 개개인의 자기 보호 본능이 집단으로 발현되어 최적화된 결과 아닌가 싶습니다 .
1인 가구의 비율에서 볼 수 있듯 전통적 공동체는 형해화된지 오래입니다. 문명 태동 이후 ,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사람들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던 신앙은 빛이 바랬습니다 . 근대 이후 신앙의 대체재로써 기능한 이데올로기도 이제는 한 물 갔구요 . 과학적 합리에 의탁하자니 과학이 아직 모든 걸 설명해주는 것 같진 않습니다 . 그 특유의 냉정함이 밥맛이기도 하구요 .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가장 든든한 것처럼 보이는 Money 만 쫓자니 그것도 현타오기 일쑤고... 그래서 특정한 기반을 필요로 하는 개개인의 정신들이 뭉쳐 형성된 집단 무의식이 자구책으로써 내놓은 해답이 과잉공감이라 봅니다 . 애달픈 우리끼리라도 서로 빡시게 보듬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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