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치여 바쁜 하루를 보낸 A는 샤워를 마치고 바로 컴퓨터를 켠다. 몇 번의 클릭 후 A는 수백, 수천, 혹은 수만의 사람들과 함께 방송인의 게임플레이를 지켜본다. 방송을 시청하며 A는 자신의 감상을 그 누구도 읽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차올라가는 채팅창에 던진다. 찰나가 지나간 후 A의 것과 비슷한 내용의 수많은 채팅들이 스크롤을 채운다.
이 '소통의 장'에서, A는 이름도, 얼굴도 없다. 만약 어떤 유능한 프로그래머가 채팅이 빠르게 올라가는 타이밍에 올라오는 채팅을 복사하여 입력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A와 봇은 그 어떤 차이도 없을 것이다. '자 보아라, 중국어 방이 이와 다르지 않지 않느냐' 하고 그 프로그래머는 자랑스레 선언할 일일 지도 모른다.
이 곳에서 A는 과연 누구일까?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좋다. 이 인터넷 방송의 세계에서 A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이상은? 이렇게도 유아론적인 환경에서 A는 어떻게 자신을 소통할 수 있을까? A는 자신이 잘 짜여진 인공지능 이상의 무언가임을 주장할 수 있는가? "난 A다, 난 A다" 라고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쳐도, 주변의 모든 이가 "난 A다, 난 A다" 라는 말을 같이 외친다면 그것이 통할 리가 없다. 그야말로 실존의 위기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A는 주변인들이 자신을 무시할 수 없도록 인격을 가장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날카롭고, 혐오스럽고, 불쾌한 이가 되어 주위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있어 절충안은 없다. 시끄러운 군중 사이에서 응애가 으악이 될 때까지 아이는 목놓아 울부짖는다. 조금이라도 타협하는 순간 아이의 울음은 군중의 웅성거림에 묻혀버릴 것이리라는것을 아이는 본능으로서 느끼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바로 같은 그 본능으로서 A는 타협 없는 악랄함으로 주위에 충격을 일으킨다. 이로서 A는 자신을 관철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A는 그런 악당이 되는 대신에 그 악당을 가장 첨예하게 단죄하는 백기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도 타협은 없다. 정의의 시합에서는 악당을 가장 능숙하게 처단하는 이가 우승자가 되기 때문이다. 마녀를 단죄하는 이단심문관의 열정으로, A는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해 이단을 색출해내고 처단함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소통의 장'에서 A는 단수이다. 그 누구도 A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A는 자신을 줄 수 없다. 하릴없이 악당으로 분장하여 일부러 혼란을 일으키거나, 허상 뿐인 악당을 색출해내어 정의를 위해 단죄하거나의 두 고독한 방법으로서만 A는 자신을 관철할 수 있는 것이다.
https://pgr21.net/humor/397197 를 보고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