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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12/16 17:16:35
Name Sinister
Subject [일반] [삼국지]하늘은 현인을 가엽게 여기니 -1-
계교전투 부터 서주대학살까지 유비의 행적이 묘연한 부분이 몇 있는데, 그 당시를 상상해보며 쓴 if 삼국지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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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형은 정말이지 많이도 변했소.”

구름 낀 밤이었다. 달빛이 군데군데 갈라진 틈 사이로 빠져 나와 대지를 적셨다. 시대를 닮았다고 유비는 생각했다. 술잔의 찰랑거리는 수면 위로 자신의 큰 귀가 달린 얼굴과 달이 담겼다.

“맹덕 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비는 조조를 맹덕이라고 불렀다. 자(子)는 본래 친밀한 사이에서만 쓰이는 호칭이지만 거리낌없이 그리 불렀다. 조조도 괘의치 않았다. 오히려 유비가 자신을 맹덕이라 불러주는데 고마움을 느꼈다. 크게 알려진 것과 달리 두 사람은 동지였다. 동탁의 포악함이 천하를 두렵게 만들고 만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던 그 때 유비와 조조는 조조의 고향이었던 패현에서 서로 뜻을 합쳐 동지를 모으고 함께했다. 유비가 공손찬 곁으로 떠나기 전까지.

“이 사람에게 부끄러움 따윈 없소. 환관의 손자라는 출신으로 청류에 몸담았고 십상시를 주살했소. 천하의 큰 뜻을 받드는 사람은 언제나 당당한 법이오. 부끄러움은 소인배의 것이지.”

조조도 뒤따라 술을 마셨다. 잔이 비자 유비는 얼른 술주전자를 들었다.

“그런데 유 형 정말 놀랐소. 내가 아는 유 형은 나와 닮은 인물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선비인체 행세하고 있지 않소. 이러다간 세인들이 유형을 겁쟁이라고 놀리지 않을까 걱정이오. 과거에 유 형을 알았던 인사들은 모두 뒹굴 것이오.”

말을 마친 조조는 호탕하게 웃었다. 호수의 수면이 찰랑거렸다.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

“크게 마음에 두지 마시오. 유 형 심중에 달린 일이지. 이 사람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그러나 한 때는 유형을 참으로 원망했다는 것만 알아주오. 다른 사람도 아닌 유형이 내게 칼을 겨눌 줄이야. 상상도 못 한 일이었소.”

유비는 침을 삼켰다. 어떻게든 변명을 구해봤지만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진심을 털어놓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게 두 사람의 사이였고 뒤통수에 달린 사공과 좌장군이라는 직위가 그렇게 만들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유형도 뜻이 있었겠지. 이 사람은 과거의 오해는 모두 씻어 보냈으니. 앞으로 일만 생각하십시다. 그게 우리 창천이 죽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아니겠소.”

조조는 고개를 젖혀 웃었다.

유비는 점점 조조의 웃음이 듣기 괴로웠다. 그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는 시늉을 했다. 그 때였다. 두 호걸의 목소리 밖에 들리지 않은 고요한 정자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갑옷을 입고 서신을 품고 있는 파발로 저 멀리 톳불 옆에서 호위하고 있는 병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검을 쥐고 있는 있었다.

“급보입니다. 공손찬이 역경루에서 원소군의 포위를 견디지 못 해 처자식과 자살하고 성을 제 손으로 불태웠습니다.

공손찬!

이제는 버린 이름이라고 지워버리려고 애쓰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리 마음을 뒤흔드는 건 왜 일까? 역경루 열 겹의 성벽과 산보다 많은 망루.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고 자신하던 그 요새. 사형은 아직도 그 따위 것에 마음을 주고 의지하였나. 세계는 날이 갈수록 색을 달리하고, 사람들은 언어를 매일 새로 하거늘. 난세의 몸을 둔 자는 바깥에서 구해야 함을 잊어버렸나. 공손찬, 과거 하북의 패자였던 이름. 그도 역시 난세의 희생양에 불과했다.

“원소는 공손찬의 수급을 베어 진상품과 함께 이 곳 허도로 보냈습니다.”

그런가, 그도 그렇게 갔는가. 유비는 떨리는 자신의 몸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조조와 동지였듯 공손찬과도 예전에 뜻을 함께한 사이였다. 한 스승 아래에서 같은 학문을 배웠었다.

조조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소음처럼 느껴졌다.

“왜 그러시오, 유형?”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백규는 저와 동문이었습니다.”

유비의 대답에 조조는 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유형은 너무 유약해서 탈이오. 한 번 이름을 떨친 자는 주위를 돌아 볼 겨를 따위도 없다오. 공손찬은 패망할 연유가 있어 오늘날 이런 흉사를 당한 것이오. 그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이지. 그는 땅을 점거하고도 인덕을 베풀 줄 몰라 뭇 사람들이 그를 떠났고, 도인과 점쟁이를 신뢰하고 선비를 탄압하였으니 뜻있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고, 포악함으로 사람들을 대하니 누가 그를 따르겠소. 비록 용맹하다고는 하나 필부의 용맹으로 제후의 예와 도리가 없었으니 곤경에 처한 그를 도우려는 인사 하나 없었으니 어찌 공손찬이 하늘을 원망할 수 있겠소. 유형은 털어내고 잊으시고, 자 여기 이 사람의 잔을 받으시오.”

조조가 춤을 추듯이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나 맹덕 형, 백규가 비록 불의하였다고 하나 그의 세력은 강대하였습니다. 이제 본초(원소)가 백규의 영토를 점령하고 민의를 얻는다면 이는 형에게 큰 환란이 되지 않겠습니까?”

조조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손에 든 물건들은 전부 내려놓고 난간에 섰다. 조조의 몸은 점점 밤에 잠기고 형태는 흐릿해 졌다. 달 없이 살아갈 사내여.

“비록 원소의 세력은 강력하나, 원소는 외양에만 충실하여 내실을 다질 줄 모르고, 그 아래에 모인 명사라는 무리들은 겸손과 겸양을 몰라 화합하지 못 하고 다툴 뿐이오. 이 사람의 장병은 날래고 강하며 신하들은 충성하니 어찌 본초 따위와 비교하겠소. 그 외 원술이나 유표 같은 무리들은 논할 가치도 없소.”

유비의 등뒤로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다 다를까, 어느새 달이 제 모습을 감췄다. 정자와 풍취를 잃은 화원, 막힌 시야와 희미해진 목소리 사이에서 천하는 이 곳에 있었다. 유비는 침묵을 금으로 사고 싶었지만, 무언가 홀린 듯 성대가 떨렸다.
“그렇다면 천하에 영웅은 맹덕 형뿐입니까?”

“그렇소. 아니 그렇다고 할 수 있소. 인의와 패도를 겸비하며 아래로는 백성을 굽어보고 위로는 천자를 공경하며,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알며, 적당한 낯짝으로 소인배들을 속이고 큰 뜻을 천하에 풀어 놓아, 천지가 나를 알게 하니. 어찌 참새무리가 따위가 흉내 내며 미꾸라지가 용의 자태를 알아보겠소. 천하에 이러한 기개를 가진 이는¨¨.”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웅변을 흥이 따르는 데로 펼쳐 보이던 조조는 갑자기 충격을 받은 듯 말을 멈추었다. 낮게 깔린 구름과 무거운 공기가 유비의 몸에 멈췄다. 흉금 속에 숨겨놓았던 비수 한 자루가 한 조각 불빛 없이 제멋대로 서광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어두웠다. 정자에는 조조의 안광만 있었다. 숨소리가 악곡의 전주 같았다.

“하하, 이제서야 유형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알겠구려. 이 사람 정말로 어리석고. 모자랐소이다. 유형이 어떤 사람인데, 그래 어떤 사람인데 천하의 어지러움 따위가 감히 유형을 터럭만큼이나 바꿔 놓을 수 있겠소? 이 조조 오늘 이 자리에서 축하의 잔을 올리오. 하늘이여, 이 한 잔의 술로 두 영웅이 함께 취하니 난세를 평정할 자 조 맹덕과 유 현덕뿐이니.”

조조는 선언이 끝나자 하늘이 그에 호응하듯 구름이 꿈틀거리고 있던 번개를 토해냈다. 유비는 더 이상 비수를 숨길 수가 없어 손을 떨었다. 세 갈래 찢어진 낙뢰가 지상을 내려쳤다. 푸른 빛이 유비의 반신을 가렸다. 다리가 제멋대로 떨렸다. 도대체 왜 조조에게 공감하는지 유비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대로 하늘이 그들을 이끄는 것인가?

그 때였다. 감히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정자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유비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은 절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유비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유우였다. 유주자사 유우, 황실의 큰 어른이고 인의로 천하를 보살폈던 군자. 그리고 죽어 황토로 돌아간 망자였다. 조조는 유비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유우는 환영이나 착란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으면서도 마음 속으로 깊게 감사하였다. 원수에게 까지 은의를 베푸시는 대덕이여. 유비는 곧 자신의 젓가락을 떨어트리고 재빨리 엎드렸다.

“성현께서도 천둥, 번개가 몰아치면 낯빛을 달리한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 말이 사실입니다.

자신이 영웅으로 칭했던 사람의 초라하고 낯선 모습 본 조조는 방금까지의 선언을 잊고 폭소를 터뜨렸다.

“유형 같은 용장도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시오? 술안주 거리가 되겠구려.”

조조의 비웃음에 유비는 입술을 깨물며 몇 번이나 되뇌었다.

‘형제여 우리는 대해를 헤엄치는 물고기요. 푸름 구름 위를 날아 오르는 새와 같노라.’


초평 4년의 일이었다. 당시 유비는 공손찬 휘하에서 종군하고 있던 군벌이며 평원상이었다. 황건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우고 현령이 되어 뇌물을 요구하던 독우를 때려잡고, 도망자 신세가 되고, 패현에서 조조를 만나고 활약했다. 관동군이 해체되고 공손찬의 요청에 따라 고향인 하북으로 돌아와 평원국의 지배가 되었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동안 천하를 유랑해도 쌓아 올린 명성이 없었다. 되려 아우인 관우의 이름이 더 널리 퍼졌다. 사수관에서 화웅을 베고 호로관에서 여포를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불타는 낙양 성아래에서 뭇 제후들이 제 영지로 돌아갈 때, 하나같이 관우를 제 휘하에 두고 싶어했지만 관우는 숱한 유혹을 전부 거절하고 유비의 아우로 남았다.

유비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관우는 그야말로 의협의 사내였다. 결의를 맺은 사이니까 관우는 죽을 때까지 유비를 따를 것이다. 그 말은 반대로 유비가 관우의 주인인 이유가 의리 밖에 없다는 말과 같았다. 혹시 재주 많은 아우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붙잡고 있는 건 아닌지 못난 형인 것 같아 그 앞에 설 때마다 작아졌다. 좋지 않았다. 유비는 떳떳해 지고 싶었다. 명성이 필요했다.

“익덕아.”

유비는 넌지시 장비를 불렀다.

“왜 그러시오?”

“이 형은 어떤 사람이냐?”

유비의 시선은 구름을 따라 흘러갔다.

“귀 크고, 수염이 없는 얼굴이지라. 팔 긴 것도 빼놓을 수 없고, 정말 어디서도 못 찾을 상이오.”

“이 녀석아 외모 말고, 이 형의 뜻 말이다. 하늘이 나를 어떻게 굽어 보실까! 그것 말이다.”

장비는 장정 한 사람 만한 술독을 들었다.

“이 익덕은 학식이 짧아 그런 고상한 말은 잘 모르고, 그저 큰 형이 이 놈이 본 놈들 중에 제일이라는 그 것만 믿고 살아가오. 안 그랬다면 유주에서 푸줏간이나 계속하고 있었겠지.”

장비는 별 걸 물어본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 답이 시원치 않으면, 운장 형님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소? 멋드러진 문자는 작은 형의 분야 아니오.”

관우는 연병장에서 병마를 단련하고 있었다.

“잘 모르겠구나. 백규(공손찬)는 어엿한 한 주의 주인이고, 맹덕도 이번에 연주를 점령했다고 하는데, 나는 제자리 걸음이구나.”

“걱정 마시구려, 아직 형님의 진가를 천하가 알아보지 못 한 것뿐이니까.”

유비의 귓가에 장비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어릴 적 추억을 떠올렸다. 탁현 누상촌의 집 앞에는 뽕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모습이 꼭 황제의 마차와 닮아 반드시 황제의 마차를 타고 세상을 누빌 거라고 떠벌렸었다. 숙부는 어린 유비를 보고 집안을 말아먹을 녀석이라고 경을 쳤지만 한편으로는 장하게 여겨 노식 선생님 아래에서 학문을 배우게 했다. 그게 시작이었고, 백규를 만났고, 운장, 익덕을 만나고.

“형님.”

추억을 깨부순 불청객은 관우였다. 얼굴이 땀 범벅이었다. 자랑인 수염에는 먼지가 말라 붙어 있었다. 오늘도 엄하게 병마를 다룬 것 같았다.
“고생했다. 정말 고생했어.”
유비의 말은 공허했다. 공허해서. 말꼬리를 잇고, 같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형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관우가 옆으로 비켜서자 젖먹이를 안고 있는 유비의 처, 감씨가 나타났다. 젖먹이는 까르륵거리며 어미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허, 예까지 무슨 일이오, 부인.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감부인은 얼마 전에 해산한 참이었다. 아직 몸조리를 신경 써야 할 단계였다. 의원은 안정을 취하고 거친 활동을 삼가도록 유비에게 당부했다. 한 국을 다스리는 벼슬아치의 마님에게는 덧붙일 필요 없는 사족이었겠지만, 감부인은 굳이 자신의 남편을 찾아왔다.”

“몸이 무겁고 답답하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조금만 참으시구려. 이제 어머니가 아니오.”

유비가 철없이 행동한 아내를 나무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인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거 보세요. 우리 아들이 방 안에서는 울상에 떼쟁이였는데, 바깥공기를 들이쉬더니 울음을 그쳤어요. 어쩔 수 없는 대장부를 닮은 아이인가 봐요.”

유비는 아들을 받아 안았다. 포에 쌓인 젖먹이는 아버지를 알아보고 팔을 뻗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유비의 콧잔등을 쓸었다. 굳어 있던 유비가 사르르 녹아 내렸다.

“이 아이도 아버지처럼 큰 일을 하겠죠?
감부인이 상기된 표정을 말했다.

“그럼요, 형수님. 코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게. 장군이 될 상입니다.”
장비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큰 일이라니? 대장부를 닮았다니? 누구를? 설마 나? 이 아이가 나를 닮아서 천하의 큰 인물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유비는 하마터면 아이를 집어 던질 뻔 했다. 미소가 없었더라면 그리 했을 것이다. 이 작은 것이 무슨 죄라고. 누구였더라. 자식은 부모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지. 그런데 그 거울이 사람의 의복을 벗겨 나체를 비추는 지독한 거울이었다. 술을 먹어도 여자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더라도 이 아이의 얼굴을 보면 끊임없이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 보게 된다. 갑자기 두려웠다. 아버지라는 이리도 무거운 것이었나. 기쁨과 초조함. 여러 감정이 쌓이고 섞여 현기증을 났다.

유비는 아들을 부인에게 넘겨주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덥구나.”

장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맑은 날이었다.
“괜찮으세요?”

감부인이 얼른 천을 꺼냈다. 땀방울 정도가 아니라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괜찮소. 그저 요새 고민이 많아 피곤이 쌓인 것뿐이오. 걱정 마시구려. 나보다야 부인이 더 걱정이오. 이만 관사로 돌아가는 게 좋겠구려. 익덕아, 형수를 모시고 돌아가거라.”

그러나 장비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유비가 재촉하니 그제서야 감부인을 데리고 떠났다.

“형님도 쉬시지요. 남은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관우는 장비가 남기고 간 술병을 흔들어 보았다. 이 술고래는 그새 한 병을 비웠다. 관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부인과 익덕의 말 말이야. 운장은 어떻게 보았는가?”

“형님의 자식 아닙니까?”

관우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들을 볼 때마다 내 위치를 하늘 아래에서부터 세기 시작했네. 금상, 원소, 조조, 원술, 유표. 나는 평원상. 군벌이라고 불리는 무리 중에서 가장 아래에서 벌벌 떠는 사람. 조각 만한 평원 땅도 빌린 거처에 불과하고. 운장의 이름마저 내 위에 있지 않은가.
유비의 자조적인 중얼거림에 관우는 고개를 저었다.

“진문공도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유랑했습니다. 시간에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하늘은 성인을 내리기 전에 그를 시험한다고 했습니다.”
이래서야 장비와의 선문답이 되풀이 되는 꼴이 분명했다. 관우와 장비는 유비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말이 정확할지도 모르지만,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장비에게는 진심을 물어보고 관우에게는 진심을 말하는 게 도원의 삼형제였다.

“자식놈이 장성하여 아버지는 젊은 적에 무엇을 하셨냐고 물을까 그게 걱정이네. 이 애비는 황건적을 무찌르고 동탁을 토벌하는데 힘을 보탰다고 답한들 믿어줄까? 그런데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작나요? 아버지의 이름은 어디에 들리고 있나요 라고 말할게 분명하겠지.”

“형님, 인의와 도는 재물과 허명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형님께서는 인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누구도 폄하할 수 없는 형님의 덕입니다.”

관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비는 관우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그래, 운장은 춘추좌씨전을 독파했지. 그럼 그 운장에게 다시 묻겠네. 춘추에는 옛 사람들을 무엇이라 기록하였는가? 관이오의 직위와 초나라 왕의 땅은 어느 정도였으며, 여상의 명성은 어디까지 퍼졌는가? 춘추는 누구를 기록하였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걸물 중에 부를 거부한 이는 많지만 부가 쏟아지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되었지?”

안 그래도 붉은 관우의 얼굴에 피가 쏠렸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형님의 뜻, 이 운장이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순임금은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범속한 농부였습니다. 안회는 평생 재물에 뜻 없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름이 오늘까지 내려오는 것은 그들이 도를 지키며 마음을 정갈하게 정돈했기 때문입니다.”
유비는 관우의 등 너머에서 끝 없이 펼쳐지는 하늘이 날숨을 불었다고 생각했다. 너 정도는 이것밖에 안 된다며, 차갑고 서늘한 공기가 옷깃을 펄럭였다. 이대로 죽을 때까지 살아 도를 체득한 유비로 남는 것도 좋은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하늘아 네 놈이 불러온 난세다. 그럴 수만 있다면야. 좋은 말과 좋은 글귀를 애써 훼손하면서까지 핏대를 세울 일도 없다.

“그렇다면 이 유현덕은 어떻지. 중상정왕의 후손이며, 황천에 분노하여 의협을 일으킨 유현덕은 과연 도로 만족할 만한 사람이고, 이제까지 그런 길을 걸어 왔는가. 너는 이 형이 안회의 무리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다고 만족할만한 사람이더냐? 대답하게. 우리는 의는 도원결의 그 때부터 한황실의 회복이었다.”

관우는 한참 동안 서있었다. 말도 없이 눈을 감으며. 그 동안 유비를 채웠던 흥분이 가셨다. 떨리는 숨이 멎었다. 바람이 체온을 식혔고 심장이 체온을 내뿜으며 반대로 치닫는 상념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형님, 그렇다면 공손찬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한참은 기다린 대답은 예상 못 한 의외의 물건이었다.

“백규는 왜?”

몸에 힘이 풀린 유비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북평태수는 형님과 오랜 벗이지만, 악당입니다. 당연히 그의 은의를 입고 있는 저희에게까지 그 화가 미칩니다.”
관우가 이 문답으로 무엇을 끌어내고 싶은지 무엇을 시험하고 싶어하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가 백규가 아니면 아무도 우리를 거두어 주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또 아무에게나 무릎 꿇을 수도 없는 일이다.”

“맹덕 공이 있지 않습니까? 근래에 기세가 심상치 않은데, 우리 삼형제와 뜻을 같이 했던 사이이니 분명 환형할겁니다.”

관우가 조조를 좋아하고 있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를 다르게 보고 있었다. 그 시야의 차이는 매울 수 없는 간격이었다.

“이 형은 적어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다고 자부하는데, 맹덕은 안 된다. 그는 너무 뛰어나고 위험하다. 나와는 화합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질의 인간이다. 지금은 모르지만 그가 분출해낼 조조의 본성이 나는 두렵다.”

유비의 칼 같은 거절에 관우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저희 주인은 형님이시니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빈 말은 아닙니다. 제가 형님을 찾은 건 형수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형부에 공손찬의 파발이 감금되어 있습니다.”

유비가 펄쩍 놀라 자리에 튀어 올랐다. 관우는 이런 중대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선문답놀이나 즐겼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관우는 유비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듯이.

“누가 그런 짓을 했어! 백규의 귀에 들어가면 큰 사단이 날 거다. 당장 풀어주거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관우가 허리를 꼿꼿이 폈다.
“제가 그랬습니다. 깃발과 인장을 지참한 정식 파발이 아니었습니다. 첩자처럼 수상한 거동을 보였습니다. 신고를 받고 제가 체포했고, 오랏줄을 들이밀자 공손찬의 사신이라고 되려 안하무인으로 행동했습니다. 그 자가 증거랍시고 자랑스럽게 내놓은 서신은 참혹하고 끔찍한 내용이었습니다. 도저히 풀어줄 수 없었습니다.”

관우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수염을 쓸었다. 이 상태의 관우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관우의 매력이자 한계점이었다.
“무슨 내용이기에 그러느냐?”

“유주자사 유우 공이 황상께 진상하는 공물을 약탈하라는 밀서였습니다.
관우는 고개를 돌리고 의자를 내려쳤다.

“천하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답니까? 아무리 황실이 약해졌다고 해도 일개 태수가 황상을 능멸하려고 들다니.”

사실 백규가 황제의 진상품에 손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물자이니만큼 살림에 도움이 되며 들키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적의 명분을 파고들 수 있는 전략이었다. 공손찬은 유우를 가식덩어리 선비라고 여겼다. 유우는 이러한 작태에 분노했지만 증좌가 없으니 비난할 수도 없었다. 유비는 직접적으로 참여하거나 찬성한 적도 없지만 공손찬이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걸 들어 알고 있었다.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었지.”

유비는 관우를 달래기 위해 둘러댔다.

“현실이 되었습니다. 형님은 정말로 끝까지 공손찬을 따를 작정이십니까? 이 관우는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인심을 잃은 군주는 반드시 패망합니다. 공손찬은 침몰하는 배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원소에게 밀려나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지 않습니까!”
“평원을 버리고 어디로 간다는 거냐.”

“차라리 유우 공에게 가십시오. 같은 황실의 사람입니다. 또 유우공은 만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는 천하의 의인입니다.”

고민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공손찬의 악행이 쌓일 때마다 유비 역시 그의 곁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유우에게 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유주자사는 싸움이 약하다. 백규가 원소에게 몇 번 패했지만 아직 정예기마대가 남아있다.”

유비의 냉정한 분석에 관우가 몸서리쳤다.

“우리 삼형제가 선봉에 선다면 그깟 공손찬쯤 주머니 속 물건 취하듯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형님, 어찌 인의를 구하기 전에 형세를 먼저 구하십니까!”

“운장과 익덕은 만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용사지만, 유주의 잡병들로는 무리다.”

더욱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유우와 공손찬은 다투면 안 된다. 기주의 원소가 조금씩 북쪽으로 치고 올라오면서 유우의 영토도 줄었다. 둘의 싸움으로 이득을 보는 자는 원소뿐이었다. 한 쪽을 무너뜨리는 동안 소모된 역량으로는 그를 당해낼 수 없다. 지금도 그는 최강이었다. 이미 확실한 세력을 만들었다. 유우와 공손찬 두 거물이 정체하는 동안 세력을 키웠다.

“백규와 유주자사의 힘이 하나가 되면 더 낫겠지.”

유비는 말도 안 되는 말을 읊조렸다. 이상조차 아니었다. 둘이 동맹을 맺는다고 한들 유비에게는 아무 득도 없었다. 그 때였다. 득이라는 글자를 떠올릴 때마다 아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관우야, 유주자사가 백규의 세력을 합친다면 어떻겠냐? 그것도 피해 없이.”

유비는 머리 속에서 유우와 공손찬의 세력 경계를 지웠다.

“우리가 선봉에 설 수는 없지만 후방을 찌를 수는 있을 것 같구나.”

그건 그야말로 서광이었다. 계책 하나가 자연스럽게 조립되어 꽤 쓸만한 죽간이 되었다. 유비는 오른손을 쥐었다 펴면서 미소 지었다.

“무슨 말이십니까?”

“운장아, 네가 압수한 서신이 백규의 글임은 틀림없겠지?”
“네.”

“그럼 됐다. 그 서신을 유주자사에게 보내 백규를 치라고 하면 된다. 유주자사가 전쟁에 재능이 없지만 그의 한 마디에 수 만 명의 장정이 모일 것이다. 백규도 쉽게 대적할 수 없는 수다. 오히려 백규는 겁이 많으니 형세가 불리해지면 성문을 닫고 농성을 할게 분명하다. 계성에 숨어 사태를 지켜보려 하겠지.”
유비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당연히 우리에게도 원병을 청할 테니, 때에 맞춰 계성으로 잠입하여 유주자사와 호응한다면 일거에 계성을 점거할 수 있다. 미리 성을 포위한다면 문제 없다. 이 계책이면 하북의 두 세력을 큰 피해 없이 통합할 수 있다. 또 훗날 원소와 대적할 수도 있지.”

그러나 유비의 기대와 다르게 관우의 표정은 어그러졌다.

“형님, 그건 배신입니다. 비겁한 짓입니다.”

“악인을 처벌하는 일이다. 수 천의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 아니냐.”

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악인이라도 그를 상대하기 위해 악을 사용하지 않는 것. 그것이 관우의 의협심임을 잘 알고 있었다. 평생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유비는 그 반대였다. 수 많은 패배를 경험했고 책임은 늘 그의 몫이었다.

“운장아, 이제 이 형은 홀몸이 아니다.”

젖먹이인 조카와 한 아버지가 이 곳에 있었다. 유비는 양 팔을 가슴 안 쪽으로 모였다. 관우의 눈에는 무언가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몇 번이나 눈을 비볐지만, 환상이 현실에 달라붙어 떨어질 기색이 없었다. 그건 강직함으로 살아가는 관우조차도 함부로 비난 할 수 없는 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유비를 부채질 하는 뜨거운 공기인지, 타락시키는 유혹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유비의 한 마디가 관우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불확신이라는 생경한 감정을 인생에서 처음으로 느꼈다. 관우는 주저앉았다. 유비는 관우의 어깨를 잡고 고맙다고 말했다.
다음날 한 관리가 평원성에서 출발했다.  

. 유비의 사자를 맞은 유우는 공손찬의 악행에 분노하였다. 그 동안 주위의 충고에 따라 공손찬을 애써 무시했었다. 그가 이민족을 막는 방패역할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신하 된 몸으로 선을 넘은 그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확신이 되어버린 의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격문을 띄웠고 평소부터 유우를 존경하는 하북의 장정들이 그에 공감했다. 십 만이었다. 유비가 예상했던 군중의 수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대군이 유우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유비는 유우의 거병과 그의 밑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를 듣고 쾌재를 불렀다. 일찍이 하북의 전역에서 동원된 적 없는 대병이었다. 유비의 계략대로 공손찬은 이 숫자에 겁먹어 성에 숨어들게 분명했다. 유비는 몰래 무기를 보냈다. 유우는 유비의 지원에 고맙다고 화답했다.

열이 넘는 밀사들이 평원성을 오갔다. 전쟁의 소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 파견한 밀사였다. 계성에서 공손찬의 사신이 출발했다는 속보를 들었다. 유비는 콧노래를 불렀다. 당연히 원병을 보내라는 서신이었다. 관우와 장비를 불러 군사를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관우는 여전히 불만에 차있었지만 일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장비는 기뻐 보였다.

험상궂은 얼굴의 척후가 돌아와 유우가 계성을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공손찬의 사신이 도착했다. 미소로 사신을 맞은 유비는 그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병사들에게 유 씨의 깃발을 높이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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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6 19:02
수정 아이콘
유비에게서 인과 의는 보이지만 충이 보이지 않는 것이 부자연스럽군요. 유우에 대한 능멸에 분노하는 것은 관우이며 유비가 아닌 이유가 무엇인지요.

다른 군벌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는 것이나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비정해지려는 유비는 흡사 이기적으로도 느껴집니다. 이것은 조조가 근본적으로 악인임을 경고하는 것과는 역설적입니다. 만약 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유비가 공손찬에 대한 배신을 꾀하는 이유가 타 군벌과 같이 자신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더라면, 혹은 그것이 아닌 단순히 유우가 의인이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유비가 일찍부터 황실재건의 꿈은 한낯 이상이며, 한나라의 소생은 실질적으로 불가하였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반동탁 연합이 실패로 끝났어도 유비가 그렇게 일찍 황실재건의 꿈을 포기했을 것인지에 대한의문이 남습니다.
꺄르르뭥미
19/12/16 23:28
수정 아이콘
현인은 신라의 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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