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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8/12 10:27:42
Name 바나나맛슈터
Subject [일반] 마지막 부산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설 준비를 한다. 오늘은 부산의 마지막 날이다.
바리바리 싸 온 무거운 짐을 들고 집을 나선다. 3일 치의 짐이 꽤 묵직하다. 비가 오려나 보다. 조금씩 머리 위로 안경알 위로 자글자글한 이물질이 닿는 느낌이 든다. 기분이 묘하게 좋다. 위로받는 기분이다. 나는 어제 울지 못했다. 울지 않았다.
1년 반 동안 2주에 한 번씩 부산을 갔다. 인천에서 6개월, 서울에서 1년을 살며 부산을 오갔다. 비용과 피로도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온갖 교통수단을 시도해보았다. 일반 버스, 프리미엄 버스, 무궁화, KTX, 비행기까지.
한 달 만에 그녀를 만났다.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호하고 깔끔하게 매듭을 짓겠다고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연습했다. 연습은 소용이 없었다. 2주가 아닌 한 달 만에 보는 그녀는 그래서 그런지 더욱 아름다웠다. 내가 속으로 했던 연습들은 의미를 완전히 잃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두시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자기'라는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은근히 호칭을 생략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카페에 앉아서 잡담을 나누었다. 평소에는 카페에 오래 앉아있는 게 답답해서 잘 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나를 좋아하느냐고. 나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쑥스러워 대답을 일찍 못했다. 한 달 전에는 그렇게 크게 화를 냈던 내가 지금은 왜 이럴까?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깨달을 수 있었다. 구질구질해진다는 것을.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눈에 새겨두는 거냐고 물어본다. 나는 그냥 본다고 했다. 내 눈이 아련하다고 한다. 손을 달라고 했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그 손을 다시 잡고 싶었다. 그 손을 잡은 채 카페를 나섰다. 나는 그녀와 마지막으로 데이트를 했던 만화카페에 가서 만화를 볼 거라 했다. 나를 데려다준다고 한다. 가기 전 서로를 안아주었다. 그녀는 걸어 나갔다. 나는 만화카페로 갈 수 없었다. 그녀와 반대편으로 걸어 나갔다.
감정은 손님이라고 한다. 언젠가 한 번 큰 손님이 올 때가 있으면 5분만 대접하고 잘 가라고 배웅하자는 뉘앙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문득 생각이 났다. 타이머를 5분으로 맞춰두고 계속해서 반대쪽으로 걸었다. 5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한껏 요란했던 손님을 알람 소리와 함께 바깥으로 배웅하려고 했다. 배웅에는 혼자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좋다. 약속했던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집으로 돌아왔다. 금세 잠이 들었다.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비가 제법 시원하게 온다. 짐이 많아 끔찍이도 싫어했을 비를 긍정한다. 게이트에서 표를 보여주고 보안검색대로 들어간다.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그 누구도 나를 봐주지 않는다. 누군가 그리운 마음으로 내 뒷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해본다. 걸어 나가다 이내 행인 속에 묻히던 그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이제는 잊게 될 뒤돌아본 공항의 풍경을 보았다.
비행기가 출발한다. 신기하게 비가 그쳤다. 창가에 앉아 비 오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나 했는데 안되나 보다. 5분도 안 되나보다. 매일 5분씩, 끼니마다 5분씩 손님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
집으로 돌아가자. 손님을 맞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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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쿤
18/08/12 12:04
수정 아이콘
글에서 아련함이 묻어나네요..

슬픕니다..

근데 이런식으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한번씩 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
18/08/12 17:45
수정 아이콘
허허 저도 울산과 서울을 2주에 한번씩 왕복하며 연애 했었습니다. 덕분에 3년도 안된 차가 8만8천km를 돌파했네요.
반전여친
18/08/12 22:45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8/08/12 23:47
수정 아이콘
뭔가 마음이 아련해집니다. 공감도되고..
아우구스투스
18/08/13 13:27
수정 아이콘
마지막이 좋네요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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