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08/12 01:46:10
Name Vivims
Subject [일반] [더러움 주의] 그녀에게 했던 멍청한 질문




아주 오랜 기억이다. 나에게 샛노랗게 남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어린 날의 어느 날. 그날 나는 신나게 자전거를 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지에 소변을 지렸다. 집까지 한참 남았을 때였다. 나는 자전거 안장이 더러워지면 엄마한테 더 혼날까 두려워 자전거를 끌며 걷기 시작했다. 아래로 개천이 흐르는 둑길이었는데 누런 노을빛이 세상을 다 노랗게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황 탓인지 모르지만 내 기억엔 그랬다. 아무튼 얼마나 걸었을까, 누가 날 부르기에 돌아보니 유치원 친구가 자전거를 타고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가?” “집에 가.” 그 녀석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근데 왜 자전거 안 타고 걸어가?” 나는 최대한 의연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그냥 걷고 싶은데?”

  착하지만 눈치 없는 친구는 그냥 긍정해버리고 자전거에서 내려 나와 함께 걸어주었다. 그냥 모른 척 가던 길 갔으면 더 좋았겠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그 친구 나름의 격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와 연락은 안 하고 살지만 잘 산다는 얘기는 건너건너 들었다. 복 받을 만하지. 어쨌거나 이것이 내가 남들 앞에서 놓아버린(?) 최초의 기억이다. 다섯 살에서 많아봤자 일곱 살 즈음의 기억 같은데 아직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아마도 이후에 비슷한 실수가 한 번 더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같은 일이 두 번은 일어난다. 세 번만 안 당하면 된다.

  대학생 때였다. 잘 되어가는 후배가 있었다. 문제의 그 날 나는 그녀의 수업이 끝날 때에 맞춰 PC방을 나왔다. 나오는 길에 아랫배가 찌르르 한 느낌을 받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늘은 그냥 잠깐 얼굴 보고 그녀를 버스에 태워 보내기만 하면 되니까. 문제는 그녀가 예상보다 약간 늦게 나오면서 시작됐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골목 구석에서 담배 한 대 태우니까 아까보다 강한 신호가 왔다. 물론 아직 참을 만은 했지만 혹시 몰라 근처 건물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휴지가 따로 없었다. 여기서 나는 결정적인 오판을 하는데, 온 김에 그냥 소변을 보겠다는 결정을 해버린 것이다. 소변기에 서서 힘을 푸는데 앞에서만이 아니라 뒤에서도 뭐가 나오려고 했다. 황급히 힘을 주면 소변도 멈춰버렸다. 나는 그때 왜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남은 소변을 처리하기 위해 힘을 풀자 빼꼼, 몰래온 손님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녀도 등장했다. “오빠 어디야?”

  엉거주춤 나가서 만난 그녀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나는 일단 그녀를 빨리 버스에 태워 집에 보낼 생각에 가까운 버스 정류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버스 저기서 탈래?” 그러자 그녀는 매우 서운한 표정이었다. “왜 보내려고 그래, 오빠 집 근처 정류장에서 탈래.”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지만 힘을 줄 수만 있다면 그녀를 지나가는 202번 버스에 던져 넣고 싶었다.

  대로변으로 나가는 길은 전에 없이 길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고 나는 기계적으로 응, 응 대답할 뿐이었다. 그녀에게 오늘 어떤 큰 일이 있었건 나보다는 아닐 것이다. 오늘 아무 문제없이 그녀를 집에 보낼 수 있다면, 한 10년쯤 지난 뒤에 나도 웃으며 그녀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사실 쌌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충격발언을 했다.

“오늘은 내가 오빠 집에 데려다줄게.”

  나는 정말 당황했다.

“아냐, 괜찮아. 먼저 버스 타고 가.”
“왜? 집에 다른 여자라도 숨겨놨어?”

  그녀의 짓궂은 질문에 나는 중요한 단서를 흘려버렸다.

“아니, 그냥 배가 좀 아파서.”

  마음속으로 내 뺨을 몇 번이나 후려쳤다. 머리가 아프다고 했어야지 멍청아! 내 한 마디 때문에 이제 그녀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다. 평소와 다른 나의 태도와 걸음걸이로 미루어 볼 때 누가 봐도 내 집에 여자가 숨어있을 확률보다 팬티에 무언가 묻어있을 확률이 높다. 그녀는 약간의 백치미가 매력인 사람이지만 이 정도 추론은 분명히 할 수 있을 터였다. 냄새라도 나면 그녀는 분명 확신할 것이다. ‘이 새끼 똥 쌌구나!’ 아까 확인했던 똥의 양과 드로즈 팬티의 타이트함 그리고 앞으로 걸어야할 거리를 고려했을 때 분명 냄새가 새어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면 어떡하지? 그냥 아주 지독한 방귀를 뀌었다고 할까? 살을 주고 똥을 취하는 방법이었다. 아니 뼈를 취하는 방법이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걸음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자꾸만 빨라졌다. 나는 급히 멈춰선 뒤 어떤 식당을 가리켰다. “와, 저거 되게 맛있겠다.” 그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 배 아프다면서?” 아차 싶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받아쳤다. “배가 아픈데 배가 고플 수도 있잖아.” “배가 아픈데 어떻게 배가 고파?” 나는 그녀에게 늘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편이다. “배가 고픈 건 위가 비어있는 거고, 배가 아픈 건 장이 비어있지 않다는 거지.” 말하고 나서야 알았다, 위는 모르겠고 머리는 확실히 비었다는 걸. 이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는 노래라면 나는 벌써 간주점프를 몇 번이나 눌렀다.

  걷다보니 어느덧 대로변이었다. 여기서 길을 건너 왼쪽으로 가면 그녀가 버스를 타는 정류장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내 집이 나온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미 나온 똥뿐만이 아니라 뱃속의 남은 놈들도 난리를 치고 있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면 이놈들이 줄지어 괄약근을 건너는 환상이 어른거렸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내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어졌을 때 똥을 싸는 것보다는 지금 싸는 게 낫지 않을까? 만약 지금 이 상황을 같이 이겨낼 수 있다면 이 사람과 평생 가도 되지 않을까?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이상한 용기가 생기는데 보통은 방향이 잘못 됐고 나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정말,

“만약에…”
“응.”

  나는 정말 X신 같은 질문을 해버렸다.

“만약에 오빠가 똥을 싼다면 어떨 것 같아?”

  푸핫, 하고 그녀는 웃으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내 눈을 피하면서 다시 잠깐 웃었다. 처음 웃음과 다음 웃음의 느낌이 많이 달랐다. 나는 그제야 내가 전혀 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음, 하고 짧은 신음소리를 낸 그녀는 신호가 바뀐 것을 확인하고 얼른 횡단보도 위로 올라섰다. 나는 아직 인도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잡은 손이 떨어질 즈음 나를 돌아본 그녀는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나를 살짝 잡아끄는 작은 손길에 조심스런 질문이 담겨있었다.

‘진짜야?’

  나는 어떤 대답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그저 조심스레 걸음을 시작할 뿐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약간 앞서 걸으면서도 손을 놓지는 않았다. 신호등이 깜박거릴 때도 그녀는 더 이상 내 손을 잡아끌지 않았고 나도 서두르지 않았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주 느긋하게 걸었다. 집이 아니라 끝을 향해 가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야무지게 걸었다. 나는 옆에 서있는 차가 갑자기 나를 들이받아 아주 멀리 날려 보내 주었으면 했다. 차에 치여서 저기 멀리까지 날아가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지겠지만 어찌되었든 바지를 갈아입고 씻을 수 있다. 그러면 나는 나중에라도 목발을 짚고 그녀 앞에 나타나 이마를 콩 찧으며 웃는 얼굴로 이야기할 것이다.

“하하, 괜히 더러운 농담을 해서 차에 치여 버렸네, 바보 같이. 하하하.”

  물론 그렇게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다.

  고백하자면 이후에 나는 그녀와 꽤 오래 만났다. 그녀도 좀 애매했을 것이다. 사귀자고 말하는 내 앞에서 “나는 그때 분명 오빠가.… 그랬다고 생각해.”라고 말하면서 나를 걷어찰 수는 없으니까. 심증뿐이었으니까… 는 사실 농담이고 그녀는 (아마도)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는 그녀와 만나는 동안 수시로 장 건강을 관리했지만. 아무튼 똥 때문에 헤어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똥이 아니라 사람이다. 똥은 누구나 쌀 수 있다. 다만 “오빠가 똥 싼다면 어떨 것 같아?”라는 질문을 하면 똥싸개가 된다. 멍청이.

  그냥 며칠 연거푸 술을 마셨더니 먹는 족족 액체로 나오는 오늘, 화장실에 들락거리다가 생각나서 옛날이야기를 적어본다. 이 글을 읽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니까.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아마데
18/08/12 02:25
수정 아이콘
조...좋은 피지알러다..

근데 결론은 오래 만났다군요. 역시 다른 조건이 맞으면 똥싸개도 커플이 되는...
18/08/12 19:48
수정 아이콘
눈앞에서 똥을 싸지 않는 이상에야... 크크
주여름
18/08/12 06:00
수정 아이콘
18/08/12 19:48
수정 아이콘
맞습니다.
Maiev Shadowsong
18/08/12 07:25
수정 아이콘
아니 떵싸개도 여자친구가 있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
18/08/12 19:49
수정 아이콘
있었으나 없습니다 유유
18/08/12 08:10
수정 아이콘
'진짜야?' 에선 참지 못하고 XX을 탁 쳤습니다..
18/08/12 19:49
수정 아이콘
귀에 들리는 느낌이었어요.
타키쿤
18/08/12 12:10
수정 아이콘
누구나 똥을 싸죠...
18/08/12 19:49
수정 아이콘
맞아요, 대처가 중요하죠.
yangjyess
18/08/12 19:03
수정 아이콘
음.. 저만 감동했나요.
18/08/12 19:15
수정 아이콘
감동이라니... 역시 피지알러시군요.
지니팅커벨여행
18/08/14 08:11
수정 아이콘
이런 게 감동의 쓰나미로군요.
저도 예전 기억이 아련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7872 [일반] 월급이 올랐다 [34] 신혜진9304 18/08/12 9304 14
77871 [일반] [더러움 주의] 그녀에게 했던 멍청한 질문 [13] Vivims7391 18/08/12 7391 23
77870 [일반] 습관적으로 마지막이 떠오른다. [8] 삭제됨4894 18/08/12 4894 5
77869 [일반] 자영업자의 한숨 [233] 삭제됨17461 18/08/12 17461 63
77868 [일반] [팝송] 제이슨 므라즈 새 앨범 "Know." [4] 김치찌개6349 18/08/11 6349 2
77867 [일반] 껍떼기만 남아라. [19] 더 잔인한 개장수7308 18/08/11 7308 18
77866 [일반]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광역버스 중단 초읽기 [84] 아유17075 18/08/11 17075 1
77865 [일반] [단독]정년은 60세인데 국민연금 내는 건 65세까지? 반발 클 듯 [177] 군디츠마라16568 18/08/11 16568 0
77864 [일반] 아마존 직구제품 교환한 후기. [33] 현직백수13159 18/08/11 13159 2
77863 [일반] 기무사와 관련된 내 인생의 에피소드들.. [11] 마우스질럿8821 18/08/11 8821 0
77862 [일반] [번역]무라카미 하루키의 옴진리교 사형집행 관련 기고문 [26] 及時雨19910 18/08/10 19910 55
77861 [일반] 한국 수입업체의 원산지증명서 위조를 통한 북한 석탄 반입 적발 [34] 말다했죠10894 18/08/10 10894 3
77860 [일반] 김경수 경남도지사 폭행피해 [58] 히야시13476 18/08/10 13476 0
77859 [일반] 우리나라도 개고기 금지로 가네요. [323] 모아17200 18/08/10 17200 6
77858 [일반] 어느 페미니스트의 주옥같은 인터뷰 [123] LunaseA23724 18/08/10 23724 16
77857 [일반] 어느 한 자매들의 rock 커버 유튜브채널 소개 [20] Cazellnu8668 18/08/10 8668 4
77855 [일반] 3개월간 다이어트 중간보고서(feat. 고탄고지, 간헐적 폭식) [17] 펩시콜라7609 18/08/10 7609 1
77853 [일반] 14호 태풍 야기의 한반도 상륙 예상(우리나라 기상청 vs 다른 나라) [78] 아유20279 18/08/09 20279 3
77852 [일반] 외상센터의 효과와 효율 - 권역중증외상센터 갯수 논쟁 [64] 여왕의심복12729 18/08/09 12729 16
77850 [일반] 신입 면접을 보고 왔습니다.(후기) [27] CE50012071 18/08/09 12071 11
77849 [일반] 우리나라의 지루한 대입문제 [151] 삭제됨11584 18/08/09 11584 3
77848 [일반] 자게/스연게 운영위원을 두 분 모셨습니다. [27] OrBef7788 18/08/09 7788 17
77847 [일반] 어린이집 및 초등학교 하교시간 2시간 늘리는 기사를 보고 느끼는점들입니다. [87] 뮤지컬사랑해12977 18/08/09 12977 1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