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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9/04 14:28:41
Name 룰루랄라
Subject [일반] 갑자기 궁금해지는 "더러움의 트렌드"
  안녕하세요. PGR 유게를 즐겁게 이용하고 있는 유저입니다.
  이런저런 게시글들을 클릭하다가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라 써봅니다.

  유머엔 다양한 유형이 있지요.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 유형들의 비중이 바뀌면서 유머도 트렌드를 형성합니다.
  TV 코미디의 경우 7~80년대에 슬랩스틱 코미디가 유행이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말로 웃기는 스탠딩 코미디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고 요새는 다양한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콘서트 개그와, 설정이 아닌 자연스러운 생활 속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이 대세를 이루고 있죠.
  그런 트렌드의 변화는 메스미디어의 발전과 역사를 함께합니다. 화질도 음질도 안 좋은 흑백TV 한 대 앞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앉아 눈을 휘둥그레 뜨고 TV를 보던 시절엔 과장된 몸짓으로 웃기는 개그가 주류를 이룰 수 밖에 없었지만, 방송기술이 발전하고 문화 컨텐츠의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이제는 수단과 소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코미디 성패 여부의 관건이 되었죠.
  그런데 방송매체 외에도 우리가 유머를 접하는 또다른 중요한 매체는 바로 인터넷입니다. 인터넷 유머도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트렌드를 가지고 있지요. PC통신 시절엔, 잡지 뒷면에나 나오는 썰렁한 텍스트 유머나 최불암시리즈 사오정시리즈와 같은 시리즈물을 공개자료실에 옮겨적는 정도가 다였죠.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고 얼마 안 되어서는 "졸라맨"으로 대표되는 개인이 만든 플래시 유머가 대세를 이루었고, 포토샵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디씨를 중심으로 합성과 패러디라는 요소가 인터넷 유머의 큰 트렌드가 되었었죠. 이후 오늘의유머나 웃긴대학과 같은 일종의 유머포털 사이트가 생기면서 개인의 사연을 이용한 생활유머, 자작 만화, UCC 등 다양한 유머 컨텐츠가 급속하게 증가했습니다. 요새는 그 중에서도 병맛이 일종의 트렌드이구요.
  그런데 지금까지의 그런 유머 트렌드 중에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더러움의 트렌드"인데요.
  90년대 후반, 초고속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에 인터넷 상에서 가장 유행했던 유머 트렌드는 "엽기"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텐데.. 뉴스에서 요새도 간혹 "엽기"라는 단어가 나오고 널리 쓰이지만, 그 전까진 그 단어 자체가 매우 생소한 어휘였죠. 당시엔 뉴스에서도 다룰 정도로 "엽기"가 사회적 충격이었습니다.
  지금의 "엽기"는 매우 끔찍하고 기괴한 것들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그 때의 "엽기"는 거의 "엽기적으로 더러움"과 동의어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야후코리아를 패러디한 "바부코리아"라는 일종의 엽기포탈이 있었는데요. 거기 올라오던 게시물 중 몇 개라도 지금 만약 PGR 유게에 올라온다면 아마 즉각 삭게행을 탈 겁니다. 그 때 대세였던 플래시 유머들도 대부분 더러운 스토리를 담고 있었고, 똥, 오줌, 토사물과 관련된 유머가 게시판을 가득 채웠었죠. 특히 "노란 국물"이라고 불리던 특정 동영상은.. 전 말로만 듣고 아직까지 보진 못했지만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하게 더럽습니다. 지금은 순정만화로 유명한 강풀작가도 웹툰 초반에는 "일쌍다반사"라는 더러운 내용의 만화를 그렸었는데, 아마 그 트렌드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러움에 관련된 유머는 지금도 인터넷 상에 적지않게 올라오지만, 그 당시의 것들은 유머가 아니라 말 그대로 혐오자료였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유머로 사람들에게 다가왔고, 방송과 같은 메이져 매체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인터넷과 잡지 등의 마이너 매체를 상당히 장악할만큼의 파워가 있었던 트렌드였습니다.

  저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이, 그 전까지는 방송, 잡지, PC통신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던 그런 더러움의 문화가 갑자기 순식간에 트렌드가 되었고, 또한 다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런 트렌드가 도대체 어떤 "필요"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 걸까요. 이런 현상을 분석한 기사나 칼럼도 있을 것 같은데.. 검색이 잘 안 되네요. 이에 관해 알고 계신 분이나, 당시 더러움의 문화에 충격을 받으셨던 여러분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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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커피
11/09/04 14:32
수정 아이콘
이 글 보니까 괴짜가족이라는 만화가 생각나네요. 제가 그런 류의 유머가 별로여서 전 아무리

봐도 재미도 하나도 없는데 주위 친구들은 보면서 숨넘어가게 웃더군요.
11/09/04 16:44
수정 아이콘
연도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세기말이란 것엔 분명 무시못할 어떤 힘이 있어서, 90년대 후반 당시는 얼마간의 암울함과 약간의 광기가 팽배한 시대였습니다. 밀레니엄 버그, IMF, 불황, 취업난, 자살증가, 비실용학문의 몰락(전 대학의 몰락 나아가 젊은이들의 몰락이라 봅니다. 사실 이 대부분은 이때 시작해 지금껏 쭉 이어지고 있죠)

문화쪽에도 암울하고 감상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죠. 대중문화상품을 보자면 할리우드엔 재난/멸망영화 붐, 일본엔 온통 폭주/광기/피바다 붐... 우리나라엔 고속 인터넷의 급확산과 함께 온갖 마이너 서브컬처들이 지역 한계를 넘어 그룹화할 토대가 형성되었고요, 사람들은 예전의 획일적인 취향을 넘어서 인터넷으로 소개되는 해외의 다양한 모습에 눈을 뜨게 됩니다. (초기의 '엽기 자료' 대부분은 해외산이죠)

그리고 인간은 기이하고 괴상한 것에 본능적인 호기심이 있는 만큼, 더럽고 끔찍한 사진 및 영상을 무료로, 들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엽기 자료'의 유행은 엄청나게 빠르게 확산됩니다. 디씨, 딴지일보(물론 딴지일보가 표방한 엽기는 뜻이 약간 다르죠. 더럽고 추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제에 거침없고 표현을 쌈마이하게 한다는 쪽에 가까움), 게임라인(비디오 게임잡지 이름인데, 게임 팬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끈 잡지입니다. 이 잡지의 영향 이거 무시 못합니다.) 등 엽기 유행을 부추긴 매체들의 공도 있었고요. 마이너 코드가 위세를 떨치던 세기말의 공기도 엽기라는 하위 문화가 수면 위로 부상하는 데 일조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역시 하위 문화는 하위 문화인 법. 세상의 온갖 똥과 코딱지, 침과 구토, 고문과 살인 장면을 다들 한번씩 보고 난 다음엔 굳이 그 더러운 걸 계속 보고 싶을 리가 없죠. 거기에 창의성, 작품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엽기의 유행은 그렇게 사라진 겁니다. 모두가 인터넷으로 뭘 해 보려 했던 시기, 모두가 뭔가를 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서 유명해 지고 싶던 시기 말초적인 호기심으로 화제를 잠깐 탔던 음지의 하위 문화. 엽기가 잠깐 유행했던 시기는 우리나라의 인터넷 인구가 엽기에 흥미를 느끼고 쭉 보기 시작해서 웬만한 전국민이 그걸 길게든 아주 짧게든 지나쳐 '졸업'한 시기라고 봅니다. 물론 그 후에도 엽기는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인터넷 한 귀퉁이에 남아 있습니다. 이젠 안 봐도 뻔히 아는 거니까, 굳이 더러운 꼴 보고 싶지 않아서 무시될 뿐이지요.
11/09/04 17:18
수정 아이콘
엽기 직전에 '컬트 붐'이 있었고, 컬트 와중에 '엽기'가 양산됐죠. 노란국물이 대표적이고... 고어물? 스너프필름도 있었구요. 그러다가 엽기적인그녀라던가 엽기토끼라던가 엽기란 단어자체가 유행을 타면서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그냥 좀 특이한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말 엽기적인 것들도 가라앉았던 것 같습니다.
Geradeaus
11/09/04 17:29
수정 아이콘
피지알 닉네임 중 인상적이었던 분이
'오줌똥토'님이었는데, 본격 그 분을 소환하는 글이군요.
11/09/04 17:35
수정 아이콘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반복되면 질리게 마련이죠.
트렌드
11/09/04 18:21
수정 아이콘
뻘댓글이지만.... 제목에 제 닉넴이라 순간 놀랬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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