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글쓰기이벤트 모음
14회차 - PGR21
13회차 - 여행
12회차 - 의료인
11회차 - 성탄절
10회차 - 추석
9회차 - 휴가
8회차 - 가정
7회차 - 인문사회
6회차 - 이해
5회차 - 추억
4회차 - 감사
3회차 - 지식
2회차 - 키배
1회차 - 자유주제
Date
2011/08/11 14:01:59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남한산성 - 완. 역사는 흐른다
글을 쓰다 보면 느끼는 건 역시 역사는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광해군은 선조가 남긴 것에 시달렸고, 인조는 광해군과 반대로 가기 위해 아무리봐도 본심이 아닌 반청을 부르짖습니다. 그 점에서 병자호란의 패배는 인조에게 나쁘지만은 않았죠. 효종은 그 때문에 정통성에 심각한 위험을 느끼게 되구요. 교과서와는 다르게 왕 하나의 업적을 얘기할 때도 그 양반이 나이를 얼마나 먹고 무슨 일을 겪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이런 걸 해석하는 게 참 힘들죠.
어쩔 수 없는 건, 이런 걸 얘기함에 있어서 현대와 대입하기 위해 이런 저런 해석을 집어 넣는다는 거겠죠. 광해군이 재평가 받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광해군 때 복구하면서 국방을 튼튼히 했는데 인조 때 게을리 하면서 치욕을 겪었고, 효종 때에 다시 국방을 튼튼히 하면서 복수까지 꿈꾸다가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 특히 북한과 싸우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이런 해석은 어쩔 수 없을지도요. 이제까지 글의 결론은 결국 "광해군도 따지고 보면 막장이었고 인조는 말 할 것도 없었고 효종의 북벌도 다 정치적인 계산이었다"인데... 이런 걸 어떻게 가르쳐요. - -;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시대에 대해서 미화가 심하긴 합니다. 특히 자주적인 거랑 엮을 때가 많은데요. 이 때의 사대를 폄하하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자주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효종이 내건 북벌, 이건 그 자신의 복수도 있지만 명에 대한 복수라는 명분이 더 컸죠. 오히려 일찌감치 "칸"이라는 표현을 써 줬던 광해군보다 "오랑캐에게 무릎 끓지 않겠다"는 인조가 자주적인 면은 더 큽니다. 이 때문에 나오는 게 여진이 우리 민족이라느니 하는 말이겠죠.
이후에도 이런 움직임은 계속 됩니다. 숙종은 명에게 제사 지내는 데 적극적이었고, 영조는 한 술 더 떠서 청의 사신이 올 때 "그들에게 먼저 무릎 끓을 수 없다"면서 대보단에 먼저 절 한 후에야 사신을 만납니다. 청을 대국으로 섬기는 동안에도 조선은 쭉 숭명반청이었습니다. 현대에는 이걸 최대한 얘기 하지 않으려 하죠. 사대주의니까요.
조선 이후 완전히 단절된 게 기자 숭배입니다. 주나라의 성인이었다가 조선왕에 봉해졌다는 전설의 인물 기자. 고구려 때부터 그를 숭배하는 사상이 있었다 하고 고려, 조선에 오면서 완전히 정립됩니다. 단군-기자-동명성왕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덕치의 사상적 뿌리였고, 조선이 중국에 비해 역사적으로도(단군) 문화적으로도(기자) 딸리지 않는다는 소중화 사상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전국민에게 상식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 현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대주의니까요.
그나마 다른 왕들은 이런 걸 무시하고도 얘기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명과 청 사이에서 누구를 섬기냐 문제에 봉착했던 당시를 얘기할 떄 이걸 빼 놓을 순 없고, 그렇다고 자주적인 국방을 외치는 데 써 먹어야 될 효종의 북벌을 "명의 복수를 위해"라고 할 수도 없죠. 그런 면에서 실제 광-인-효의 모습과 자주 국방을 강조할 때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라집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이런 반청 흐름이 조선을 지배하는데도 청은 아무런 딴지를 걸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명에 했듯 지극정성으로 사대했고, 조선이 청에 제대로 반기를 든 건 고종 때가 돼서야, 그것도 일본을 등에 업은 후에야(사실은 일본이 등을 찍어누른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물론 실질적인 문제에는 민감하게 반응해서 현종 대에는 피로인 하나가 도망친 걸로 크게 난리를 쳤고, 숙종 대에는 영토 문제로 백두산 정계비를 건립하죠. 화약을 밀무역하는 것에도 크게 반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죠. 거의 200년 가까이 조청관계는 정상적으로 운영됩니다.
이 때 망할 줄 알았던 조선은 200년이나 더 살아 남았고,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영정조 대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망국의 주범이라는 붕당정치가 완전히 파탄나고 세도 정치가 시작되자 급속히 몰락을 맞죠. 천명이라는 게 있는 건지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을 때 서양과 일본의 침략도 본격적이 되었고, 나라가 쓰러지기 직전에 정권을 잡은 무리도 조선시대 최악이라고 봐도 손색 없을 명성황후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세도 정치가들이었습니다.
글쎄요. 어디까지 얘기해야 될까요. 하나를 얘기하면 그 다음이 나오고, 또 그 다음이 나오며, 이들은 계속 이어집니다. 최대한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끊고 주제를 정하는 것이지 실제 역사는 끝이 없으니까요. 계속 쓰고 있지만, 제가 정확히 무얼 말하기 위해 역사에 대한 글을 쓰는지 정하지 못 하겠습니다. 그저 계속 쓰면서 배워갈 뿐이죠. 그러다 보면 확실한 목적이 생기지 않을까요. 시간은 가고, 역사는 흐릅니다. 제가 글을 쓰는 지금도요.
이제 나름 길었던 이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병자호란 편은 정말 어려우면서도 보람 있었습니다. 후삼국시대나 임진왜란의 경우 이전부터 쭉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쓸 지도 정해져 있었지만, 병자호란은 무작정 시작한 거였으니까요. 그 동안 제 생각도 계속 바뀌었습니다. 모르던 것들도 많이 알게 되었구요. 모두 지금까지 봐 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완성도는 이전 글보다 자신 없지만, 앞으로 글을 쓰더라도 정말 잊을 수 없을 시간이 될 것 같네요.
다시 한 번 지금까지 "남한산성"을 보고 격려해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__) 에이 박수 한 번 쳐 주세요 ( ..);
역사에 대한 잡상 (1~7) + 대륙과 반도, 간도, 동해와 일본해, 독도
황산벌 - 평양성으로 보는 삼국시대 말기 삼부작
후삼국 이야기 (0~8)
임진왜란 (0~8)
임진왜란 해전사 (0~7)
정유재란 (0~11)
왜란이 끝나고 - 왜란종결자
임진왜란 못 다한 이야기 - 참전 일본 무장, 김충선
링크를 해 놓으면 계속 깨지니 제 아이디로 검색하는 걸 추천드립니다.
남한산성 예고편. 주요 쟁점 사항
0. 북방의 위협에 대처하는 고려의 자세
1. 누르하치의 등장
2. 심하 전투
3. 고려처럼
4. 인조반정
5. 이괄의 난
6. 정묘호란의 시작
7. 형제의 맹
8. 정묘호란 이후
9. 병자년까지
10. 폭풍전야
11. 병자호란
12. 왕이 남한산성에 있다.
13. 근왕군
14. 쌍령 전투, 강화도 함락
15. 삼전도의 굴욕
남한산성 이후
1. 해가 빛이 없다(日色無光)
2. 돌아오지 못 한 이들
3. 그 때 그 사람들 (임경업, 정명수, 최명길, 김상헌)
4. 이건 내 역사니라
5. 북벌의 깃발
------------------------------------------------------------------------------------
앞으로는 지금처럼 글을 쓰기 어려울 겁니다. 아직 진로가 정해지지 않았고, 복학해야 되니까요. 전쟁에 대해서 더 써 보려 했지만 이제 지겹네요. -_-; 이제는... 좀 다른 얘기를 써 볼까 합니다. 일단 세종대왕 특별편은 어찌 할 지 구상 중이구요. 아마 조선시대 왕실에서 있었던 비극, 혹은 막장 집안 얘기 -_-; 들을 써 보지 않을까 싶네요. 3개를 고르고 싶었는데 여기서 이미 하나 써 버렸으니 두 개 남았네요.
간단한 예고 남깁니다. 언제 쓸 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해 주세요. 너무 복잡하게, 길게 길게만 써 왔으니 다음부턴 좀 짧게 재밌게 써 보겠습니다.
===========================================================
"상제(喪祭)에 곡림할 때 세조께서 애통함이 지성에서 나오니 조신(朝臣)들로 바라보는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용(안평대군)만은 한 번도 참여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세조가 사저(私邸)로 물러나와 자성 왕비(慈聖王妃)와 더불어 서로 대하고 울어서 비통함이 지나쳐 기운이 막히니 약을 먹고 풀기까지 하였다."
(단종 즉위년 5월 18일)
노산군이 세종이 임어하시던 자미당 창가의 난간을 보고 크게 탄식하기를,
“세종께서 살아 계시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
하니, 종자들이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세조도 이 말을 듣고 슬피 울기를 마지 않았으며, 자성 왕비도 슬피 울었다. (단종 2년, 11월 25일)
=================================================
"이어서 협련군(挾輦軍)에게 명하여 전문(殿門)을 4, 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摠管) 등으로 하여금 배열하여 시위(侍衛)하게 하면서 궁의 담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궁성문을 막고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으니, 비록 경재(卿宰)라도 한 사람도 들어온 자가 없었는데, 영의정 신만(申晩)만 홀로 들어왔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扣頭]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다."
(영조 38년 윤 5월 13일)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